AD광고
AD광고5만원 이상 결제 시 (*배송비 제외)
정가제FREE(상품/사은품) 금액이 2,000원 이상이면 2,000원 추가적립
10만원 이상 결제 시 (*배송비 제외)
정가제FREE(상품/사은품) 금액이 2,000원 이상이면 2,000원 추가적립
정가제FREE(상품/사은품) 금액이 5,000원 이상이면 5,000원 추가적립
신용카드 무이자할부 안내
결제사 혜택 안내



배송안내
- 배송지역 선택
- 주소 검색
[네이버페이]
| ISBN | ISBN-13 : 9788936433413 |
|---|---|
| 쪽수 | 262쪽 |
| 크기 | A5(148mm X 210mm, 국판) |
| 제품구성 | 단행본 |
- 소설/에세이/시 > 국내소설
구매(배송/수령완료) 후 리뷰를 작성하시면 적립금 300원을 드려요!

- guest
- 2001.10.25
황석영의 "손님"은 이 땅에 언제인가 '손님'으로 찾아와 지금껏 '주인'의 행세를 하고 있는 미국이란 나라, 그리고 그들 아래에서 주인의 주체성을 잃어버리고 '손님'의 눈치를 보기에 여념이 없는 우리네 슬픈 현실이 먼저 떠올려지는 소설이다. 물론 저자는 본서에서 "손님"을 이 땅에 찾아온 기독교와 맑시즘이라는 두 가지 거대 이데올로기를 지칭하고 있다. 그렇기에 이 땅의 '주인' 이데올로기라 할 수 있는 무교(巫敎)의 최대 종교제의인 '굿'의 형태를 빌어 소설을 풀어나가고 있는 것이리라. 이데올로기의 꼭두각시가 되어 형제와 이웃간에 서로 정죄하고 이념의 차이로 인간의 한계를 벗어난 행태를 저질렀던 해방이후 우리네 민족의 아픈 과거를 두 '손님'인 이데올로기의 맹점으로 본다. 또한 우리네 주체적 종교행위인 굿의 하나인 황해도 '진지노귀굿'의 12마당을 소설의 기본 틀로 삼고 산자와 죽은자 서로간의 화해를 향해 작가는 하나하나 풀어간다. 여기에서 저자는 각각의 등장인물의 경중을 떠나 그들 각각의 시각에서 풀어나감으로써 '손님'의 희생자들이 되었지만 결국 작품에서는 각자 '주인'의 역할을 하게 하는 재미난 문학적 기법을 사용하고 있음이 눈에 띈다. 굿의 진정한 목표는 이 땅의 조화와 우주의 화해에 있다. 산자와 산자간, 산자와 죽은자간, 죽은자와 죽은자간의 한을 풀고 진정한 화해를 이루는 것이 바로 굿이 지향하는 궁극점이다. 이런 면에서 작가는 각기 '손님'의 희생자들인 등장인물들의 화해를 향해 글을 풀어간다. 굿이 산자와 죽은자 서로간의 화해를 지향하고 있기에, 그의 작품 역시 죽은자와 산자의 자유로운 연출을 통해 이들의 화해를 향해 나아간다. 하지만 굿에서 화해의 가장 커다란 도구인 카타르시스가 작품 중에는 적게 등장하는 것이 아쉬운 점이기도 하다. 아마도 문제에 대한 통찰력을 독자들에게 주고자 함에 저자가 중점을 두고 있기 때문이리라. 또한 카타르시스가 약한 이유는 아직 우리사회가 그런 카타르시스를 통한 화해를 산출하기에는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음을 작가가 반영한 것일 수도... 저자가 가장 말하고 싶어하는 것은 바로 '손님'에게 주체성을 빼앗겨 버린 '주인'의 잘못을 꼬집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또한 여기에서 더욱 발전시켜 현실 속의 우리네 삶에서 우리네가 '손님'에게 '주인'자리를 내주고 있음을 돌아보게 하고자 함이 아닐까? 특히, '손님'인 미국이 오히려 우리의 '주인'이 된 현실에야... 본서는 또한 인간이 어디까지 몰락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며, 서로간의 복수의 끝이 결국 어디인지를 떠올려준다. 지금의 현실에선 더욱 그런 반성을 하게 한다. 끔찍한 테러와 그의 보복이란 명목으로 또 다른 형태로 아니 더욱 무자비한 형태로 가해지고 있는 미국의 공격, 이러한 폭력 앞에 과감히 반대하기보다는 오히려 우리의 영원한 '손님'인 미국의 눈치를 보며, 전쟁에 동조를 공언한 전년도 노벨 평화상 수상자, 또한 세상의 '주인'을 자처하는 우리네 '손님'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고 전쟁을 외치는 우리네 백성들, 그리고 자신들의 대립구도에 종교라는 허울을 이용하는 정치인들, 그리고 그 종교의 맹목성에 함몰되어 통찰력을 상실한 많은 종교인들. 이러한 모든 것이 결국은 나를 '손님(어떤 손님이던 간에)'에게 내주고 나 자신을 상실한 수많은 '주인'들 때문에 생긴 것이 아닐는지..... 지금 벌어지고 있는 슬픈 현실이 단순히 테러가 그 시발점이 아니라, 테러를 일으킨 그 생존현실에 있음을 우리는 알아야 할 것이다. 이러한 통찰력을 상실하고 그저 눈에 보이는 데로 판단하고 행동하는 것은 결국 우리가 '손님'에 나를 맡겨버리는 것이 아닐까? 결국 저자는 우리네 삶에서 우리들이 '손님'에 나를 빼앗기지 않고 진정한 '주인'을 찾아가기를 바라고 있는 것이 아닐까?

- guest
- 2001.08.29
이 책을 읽게 된 동기는 조금 특별하다고 할 수 있다. 내가 감명깊게 읽은 책 [장길산]을 쓴 황석영에 글과 책을 찾던중 엄마가 권해주신 책이다. 마침 국어독후감 방학숙제도 있고 해서 이 책을 읽게 되었다. 이 책은 작가가 베를린에 체류하던 시절에 사실상 세계적인 냉전체제 손님의 주배경이 되는 황해도의 신천은 작가의 원래 원적이고, 친구의 모친에게서 전쟁당시의 황해도 사정을 자세히 들을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손님>은 정말 흥미진진하지 않을 수 없다. 책 안에 주인공들의 이북말투는 뇌와 눈과 손을 한꺼번에 묶어버리는 매력이 있다. 그 신비로움에 끌리게 된다. 이 책은 내가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해리포터 시리즈>를 볼 때 끌리던 매력보다 더한 것 같은 느낌을 준다. 또 한장 한장을 넘길 때마다 추리소설이나 공포소설에서나 느껴지는 한쪽에 실린 기대감과 긴장감은 언제 어느때나 지루하지 않다. 사실 처음 부분은 조금 재미가 없는 것이 사실이다. 처음에는 인물소개나 청소년들이 싫어하는 문장들이 많은것 같다. 또 너무 복잡하다. 무슨 내용인지 이해가 안가서인것 같다. 하지만 내 관점으로 봤을 때 이 처음부분은 인내를 가지고 어느 책이나 그렇듯 계속 읽을수록 점점 이해할 수 있게 된다. * 손님의 특별한 면 * <손님>은 다른책들이 가질 수 없는 특별한 장점이 있다. 그것은 어느 누군가의 관점이나 일인칭, 삼인칭으로 고정되는 것이 아니라 등장인물 각자의 여러 가지 시점을 서로 교차하여 그려서 소설을 완성시켰다. 다른 소설에서는 주인공만의 시점 아니면 어느 특정한 인물의 입장, 시점만으로 고정시켜놓아 소설을 전개한 것이 대부분이지만 이 책은 그렇지 않다. 분명히 이런 점에서 이 책은 나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 할 수 있게 해주었다. 약간 변형된 이런 장르에 책들도 많이 봐야 겠다는 생각을 했고, 앞으로 내가 살아가면서 글을 쓸 때 많이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중간중간이나 끝부분에서는 사람을 잔인하게 죽이는 장면이 많이 나온다. 역사를 바탕으로 하는 소설이기 때문이다. 인민군이나 산속에 숨어살던 양민을 창고에 가두고 기름을 붓고 불을 던지거나 수류탄을 마구 던져 죽인다. 그리고 아이들은 창고에 가두어 물 한 방울 안주고 굶어 죽여 버린다. 양심이 있어 먹을것을 준다고 해도 시궁창의 물 한 바가지나 퍼준다. 또 간부나 높은 신분에 있는 사람들은 빨개 벗겨서 총살시키거나 코에 철사를 꽂고서 빨개 벗겨 끌고 돌아다닌다. 그리고는 처참하게 생매장 시켜버린다. 내 말만 듣고서는 정말 잔인스러운 소설이 되 버리지만 이 책 내용전개상 이런것들을 안 보고 넘어갈수가 없다. 북한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지라 무척 잔인한 것은 사실이지만 숨은 교훈들이 많아 좋다. 조금 잔인하기는 하지만 나름대로 북한의 생활상이나 전쟁 당시 상황을 알고 싶은 친구들에게 권할 만한 책이다.

- guest
- 2002.04.16
강제적으로 허리가 반으로 잘린 국토에서 반세기를 살고 있는 민족. 한쪽에선 한강의 기적을 이루며 자본주의 역사에 화려하게 편승했고, 다른 한쪽에선 끊임없는 투쟁과 자아비판을 통해 아무도 무너뜨릴 수 없는 강대한 성을 쌓아올린 나라. 대한민국. 그 비극에 대해서 우리 세대는 어쩌면 의도적으로 망각하며 살아온 걸지도 모르겠다. 지난 80년대 이산가족의 눈물겨운 만남을 보며 그것이 이데올로기가 빚어낸 아픔임을 생각하며 흘린 눈물보다는, 오랜 기간동안 헤어져있던 친지를 만난다는 감정으로부터 흘려야 했던 눈물이 더 많은 세대.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 노래 부르면서도 막상 통일에 대해 물으면 아무말도 하지 못할 우리. 그 희미해짐 만큼이나 부인할 수 없는 현실, 우리는 그 안에서 어쩌면 지금 이 순간에도 갈등을 겪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끝나지 않을 전쟁, 자본주의의 승리를 이야기하면서도 끊임없이 유지해야 되는 긴장, 강력한 군대. 그런 우리에게 처음부터 이데올로기의 논쟁이 살아숨쉬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런 우리 세계에 처음부터 절대적 ‘선’이라 이야기할 수 있는 것도 없었다. 그들은 우리 사회에 주인 아닌, 한낱 손님에 불과했다. 원치 않게 열린 대문을 보고, 덥썩 자기 집 안마당이라도 되는 마냥 들어온 그대들. 그대들이 우릴 울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 울음소리는 여전하고, 그 아픔으로 얼룩진 상처는 아마도 아마도 지울 수 없을 것이다. 이러한 아픔이 그대로 베어나오는 글이다. 억지로 고개저어 부인치 아니하고, 황금빛 미래를 약속치 아니하는 진실됨, 그의 글이 빛날 수 있는 이유는 바로 그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지배계층에 편승해 절대적 선으로 여겨지던 기독교와 자본주의, 그리고 체제 경쟁 속에서 남한사회에선 도태를 넘어선 거부 만이 가능했던 맑시즘. 그 두 손님을 대접하기 위해 우린 허리가 휘어지도록 일했나보다. 그 안에서 우린, 우리가 주인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던 것 같다. 북한에서 만난 핏줄에 어떠한 의미가 있을까. 은근슬쩍 상대방을 떠보며, 자신의 체제가 잘났음을, 나의 행위가 정당했음을 이야기하는 그 대화는 서로 벽을 바라보고 있음을 확인하기 위함일지도 모르겠다. 육신없이 고향땅을 밟아 영원히 죄사함을 얻을 수 있을까. 이유없이 그저, 자신과는 다를 것이라는 생각하에 너무도 쉽게 사람 목숨을 끊어놓았던 공산당과 기독교청년회. 내가 쏜 총에 맞고 죽어가는 사람 앞에서 총을 한번 더 쏘는 것과 기도를 하는 것, 그 두 행위의 차이는 무엇일까. 그 두 행위중, 어떤 것이 사함이고 어떤 것이 성스러움일까. 내겐 하지만 작가가 설정한 그 두 손님은 왠지 모르게 주가 아닌 듯 하다. 아니, 이 이야기에 제대로된 주인, 제대로된 손님은 아마 없을지도 모른다. 방북을 한 이나, 북녘땅에 살고 있는 이, 그들 모두 자신의 삶의 주인이라 이야기할 순 없을 것이다. 반가움 보다 앞서는 이데올로기의 지배, 끊임없이 출몰하는 넋, 그 혼들의 싸움… 그 어느 누구도 주인일 수 없고, 그 어느 누구도 손님일 수 없는 세상. 우리는 그 주체부재의 사회에서 살고 있는 것이리라. 그 이중성 속에서 나는 갈등한다. 일방적으로 드리워진 절대적 진리의 굴욕을 뛰어넘어, 내게 손님이고자 하는 기독교와 맑시즘, 나의 밥상 머리에 손님이 둘 앉았다. 나는 그 두 손님에 대해 제대로 대접해 돌려보내고픈 주인이고 싶다. 손님은 언젠가 돌아가기 마련이니, 너무 정들 필요도, 너무 미워할 필요도 없는데, 우린 그 어느 누구도 제대로 된 주인일 수 없는 그런 존재이니…
| 반품/교환방법 |
|
|---|---|
| 반품/교환 가능기간 |
|
| 반품/교환비용 |
|
| 반품/교환 불가 사유 |
|
| 상품 품절 |
|
| 소비자 피해보상 환불지연에 따른 배상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