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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SBN | ISBN-13 : 9791124613016 |
|---|---|
| 쪽수 | 418쪽 |
| 크기 | 기타 규격 |
| 제품구성 | 단행본 |
- 예술 > 연극/영화 > 연극영화기타
영화인들과의 만남을 연기, 선의, 마흔, 행복, 사랑, 사회 등 스무 개의 키워드로 엮은 인터뷰집이다. 쓰마부키 사토시, 사카모토 류이치, 구로사와 기요시, 유키사다 이사오부터 자신만의 영화 세계를 만들어 가는 감독과 배우, 제작자까지, 서로 다른 자리에서 창작을 이어 온 이들의 목소리를 담았다. 작품의 한 장면에서 시작한 대화는 연기와 연출의 비밀, 삶의 상처와 정체성, 타인과 함께 살아가는 어려움으로 이어진다. 저자가 직접 보고 만난 현장의 풍경과 작품을 세밀하게 읽어내는 질문이 어우러져, 스크린 속 이미지 뒤에서 고민하고 선택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얼굴을 보여 준다.
대화는 마지막 답변에서 끝나지 않는다. 한 감독의 말이 다른 배우의 경험을 비추고, 오래전에 나눈 이야기가 시간이 흐른 뒤 새로운 의미로 돌아온다. 개성이 없다는 평가를 자신의 가능성으로 받아들인 배우, 가족의 침묵 속에서 자신의 뿌리를 찾아 나선 감독, 상처 입은 사람에게 살아갈 용기를 건네려는 창작자들의 이야기는 영화를 바라보는 눈과 삶을 대하는 태도를 함께 바꾼다. 저자는 익숙한 작품을 다시 보고 낯선 영화에 다가갈 실마리를 건네면서도, 그 의미를 하나의 정답으로 닫지 않는다. 좋아했던 영화를 더 깊이 이해하고 싶은 관객부터 자기만의 일을 오래 이어 가고 싶은 사람까지, 스무 번의 대화를 따라가며 영화와 사람이 서로에게 남기는 온기를 만날 수 있다.
[목 차]
들어가며
ACTING | 연기
연기의 장인을 꿈꾸며: 코우리 유카
BREAKAWAY | 파격
장르의 경계를 허물다: 가타시마 잇키
COSMOPOLITAN | 세계인
뿌리를 찾아 나선 카메라: 하야시 류타
ENCOUNTER | 조우
사람을 만나 이야기가 시작되다: 유키사다 이사오
FAVOR | 선의
세상을 품는 다정함: 미시마 유키코
40 | 마흔
영화와 함께 나이 든다는 것: 쓰마부키 사토시
GENESIS | 창세기
음악으로 세계를 사유하다: 사카모토 류이치
HAPPINESS | 행복
행복은 어디에서 오는가: 아오야마 신지
IMAGINATION | 상상력
현실을 넘는 상상력의 힘: 호야 세이요
JAZZ | 재즈
재즈가 사람을 이어 주는 방식: 호시노 데쓰야 × 카메야마 치히로
LOVE | 사랑
사랑과 가족, 그리고 고독: 후카다 고지
ME | 나
경계에서 ‘나’를 말하다: 한영혜
NOVELTY | 새로움
익숙함을 넘어 새로운 이야기로: 이토 치히로
OTT | OVER THE TOP
스크린의 경계를 넘다: 사토 신스케
PLACE | 장소
공간이 기억을 품는 순간: 야마모토 타츠야
REALITY | 리얼리티
현실보다 더 현실 같은 액션: 〈원 퍼센터〉 팀
SOCIETY | 사회
시대를 읽는 눈: 구로사와 기요시
THINKING | 사고
생각하는 힘을 지키다: 사사키 오모이
VOICE | 목소리
청춘으로 사회를 말하다: 구사노 쇼고
WATCH | 주시
이미지로 세계를 빚다: 데즈카 마코토
[본 문]
“‘상생’은 〈꽃의 집〉의 중요한 주제 가운데 하나입니다. 지금 일본에는 재일 한국인이나 재일 화교뿐 아니라 베트남, 필리핀, 브라질 등 다양한 배경을 지닌 사람들이 유학, 취업, 결혼, 난민 등 여러 이유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주민 문제는 이제 특정 국가만의 문제가 아니라 세계가 함께 마주한 과제가 됐고요. 이주 1세대에게는 ‘모국’이라는 개념이 분명하지만, 2세, 3세로 넘어가면 그 의미는 점점 옅어집니다. 결국 조부모의 고향 정도로 남게 되죠. 제게도 중국은 그런 존재입니다. 친척들이 살고는 있지만, 솔직히 말하면 외국에 가깝습니다. 그래서 “네 나라로 돌아가라”는 말에는 동의할 수 없습니다. 제가 태어나고 자란 곳은 일본이니까요. 누구도 자신이 태어날 나라를 선택할 수는 없잖아요. 물론 살아가면서 여러 이유로 다른 나라나 지역으로 옮겨갈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이동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려면 사회 역시 이주민을 포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개인의 호불호와는 별개로 사회의 다양성은 이미 되돌릴 수 없는 흐름이기도 하고요. 조금 선언적으로 들릴 수도 있겠지만, 결국 우리는 모두 같은 지구에서 살아가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국적이나 민족을 넘어 말입니다.”
ㅡ p.68-69, 하야시 류타
“여성 캐릭터를 그릴 때는 아름다움과 추함이 함께 존재하는 입체성을 표현하는 게 중요합니다. 아름다움만 보여주는 건 어렵지 않습니다. 매력적인 배우를 캐스팅하고 아름답게 촬영하면 되니까요. 하지만 추함을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는 훨씬 어려운 문제입니다. 영화 속 여성은 미소 한 번으로 누군가를 안심시키기도 하지만, 살아남기 위해 누군가를 배신하기도 합니다. 인간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습니다. 아름다움만으로는 인간을 설명할 수 없죠. 범위를 인간 전체로 넓혀 보면 더 분명해집니다. 사랑이 아닌 걸 사랑이라 부르고, 그것을 정의로 포장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역설적이지만 그런 모습들 역시 제게는 하나의 아름다움, 다시 말해 인간을 이해하기 위한 중요한 소재입니다.”
ㅡ p.81-82, 유키사다 이사오
“코로나19로 일상의 속도가 느려지면서 그동안 보이지 않던 것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최근 늘어나고 있는 여성들의 극단적 선택도 그중 하나였죠. 그러면서 이런 의문이 들었어요. 과연 그 원인이 바이러스 때문만일까 하고요. 제가 떠올린 건 우리 사회의 낮은 젠더 감수성과 폐쇄성입니다. ‘타인에게 폐를 끼쳐선 안 된다’는 생각이 어느새 도덕적 규범을 넘어 서로를 감시하는 논리로 작동하고 있거든요. 그런 분위기가 결국 인간의 존엄마저 흔들고 있는 건 아닐까 생각합니다. 물론 “지금 있는 자리에서 작은 행복을 찾아라”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말을 들을 때마다 “결국 참으라는 이야기 아닌가. 정말 그것만으로 충분한가”라는 의문이 듭니다. 이제는 개인의 삶과 사회의 관계를 다시 생각해야 할 때라고 봅니다. 모든 걸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적응하는 것만이 답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ㅡ p.122, 미시마 유키코
“지금도 쓰나미에 잠겼던 피아노로 작업하거나, 피해 지역 학교의 악기를 수리하며 아이들과 음악으로 소통하고 있습니다. 이런 활동을 계속하는 이유는 그 참사가 잊히지 않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저 역시 매일 자연과 인간문명의 관계를 생각하며 살아가고 있고요. 원전은 인간이 만든 문명이지만, 기술적으로도 과학적으로도 매우 취약한 시스템입니다. 무엇보다 한 번 사고가 나면 감당하기 어려운 재앙을 남기죠. 브레이크 없는 자동차가 도로를 달린다고 생각해 보세요. 누구도 그런 상황을 받아들이지 않을 겁니다. 저는 원전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더 큰 문제는 정상적으로 가동되는 동안에도 처리할 수 없는 폐기물이 계속 나온다는 점입니다. 그런 시설을 만들고 운영하는 건 무책임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가끔은 피아노를 만들 듯 원전 같은 반자연적인 구조물을 세워 놓고 기뻐하는 인간을 보며, 참 기이한 존재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ㅡ p.149-150, 사카모토 류이치
“저는 극장 자체가 하나의 매체라고 생각합니다. 상영관 밖까지 웃음소리가 들려오는 영화, 그런 영화야말로 가장 훌륭한 작품이라고 믿습니다. 그런 영화들이 극장을 다시 활기로 채우고, 그 힘이 또 다른 창작자들에게 용기를 주는 선순환이 이어졌으면 합니다. 그런데 요즘 극장이 점점 한산해지는 모습을 보면 안타까운 마음이 큽니다. 영화 앞에서는 국경도 사라집니다. 저는 늘 한국 영화와 드라마에 깊은 애정을 갖고 있습니다. 작은 바람이 있다면 한국 관객 여러분도 일본 영화를 사랑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또 특유의 높은 안목으로 다양한 의견을 들려주시길 바랍니다. 이제 제 나이도 적지 않다 보니 시간이 아주 많이 남아 있지는 않을 겁니다. 그래서 더 좋은 작품을 만들어 다시 여러분을 만나고 싶습니다.”
ㅡ p.216-217, 카메야마 치히로
“장뤼크 고다르는 1960년대 한 인터뷰에서 영화와 TV 드라마의 차이를 묻는 질문에 “둘 다 영상과 소리다”라고 답했습니다. 그 말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아, 저는 둘이 본질적으로 크게 다르지 않다고 봐 왔습니다. 다만 저는 이미지를 만드는 일에 강한 애착이 있습니다. 멀티카메라 시스템에서는 카메라와 조명이 제가 의도한 방향과 다르게 움직이는 경우가 많아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았어요. 저는 기본적으로 카메라 한 대로 한 컷씩 이미지를 만들어 가는 과정이 영화의 본질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요즘 OTT 시리즈는 과거의 TV 드라마와는 다릅니다. 영화와 같은 방식으로 만들 수 있으니까요. 〈아리스 인 보더랜드〉 역시 모든 에피소드를 제가 직접 맡아 영화처럼 연출했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애초에 다른 방식은 생각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ㅡ p.292, 사토 신스케
그 영화가 달라진 걸까, 내가 달라진 걸까
시간이 흐른 뒤에야 들려오는 말들, 스무 번의 만남이 하나의 대화가 되기까지
분명 전에 본 영화인데 전혀 다른 장면에서 마음이 멈춘다. 처음에는 이해하지 못했던 인물의 선택이 어느 날 자신의 이야기처럼 느껴진다. 좋은 영화는 그렇게 관객의 삶 속에서 여러 번 시작된다. 『영화의 체온』은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과의 대화에서도 같은 일이 일어난다는 발견에서 출발한다. 저자 홍상현은 책을 만들기 위해 오래된 인터뷰 원고를 펼쳤다가 예상하지 못한 경험을 한다. 한 배우의 이야기를 읽으며 다른 감독을 떠올리고, 서로 다른 시기에 쓴 글의 마지막 문장들이 이어지는 듯한 감각을 느낀 것이다. 독립된 기록으로 여겼던 만남들이 시간이 흐르며 서로를 비추기 시작했다.
책의 구성을 결정한 것은 인물의 명성이나 작품의 발표 순서가 아니라, 그 만남들에서 오래 남은 질문이었다. 연기와 파격, 세계인과 조우, 선의와 마흔에서 사랑, 장소, 사회, 목소리까지 스무 개의 키워드는 영화를 만드는 일과 살아가는 일이 만나는 지점들이다. 쓰마부키 사토시의 연기 이야기는 자신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라는 질문으로, 하야시 류타의 다큐멘터리는 가족과 자신의 뿌리를 이해하는 문제로, 사카모토 류이치의 음악은 우리가 어떤 세계를 다음 세대에 물려줄 것인가라는 고민으로 이어진다. 각 장은 독립적으로 읽히면서도 다른 장의 말과 경험을 통해 의미가 깊어진다.
인물과 작품을 소개하고 만남의 배경을 들려준 뒤 문답으로 들어가는 구성은 독자를 자연스럽게 대화의 자리로 이끈다. 영화제 리셉션에서 배우를 소개받은 순간, 병원 면회실에서 감독과 마주 앉은 시간, 팬데믹으로 무산된 만남과 다시 이어진 연락까지 인터뷰의 앞뒤에는 관계의 시간이 놓여 있다. 저자는 배우가 잠시 말을 고르는 모습과 인터뷰 뒤에 남은 자기 생각도 함께 기록한다. 그 덕분에 독자는 작품에 관한 정보를 얻는 동시에,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과정을 따라가게 된다. 영화의 의미를 다시 묻는 일은 언제나 그것을 만들고 보는 사람을 다시 만나는 일이기도 하다.
“개성이 없다”는 말이 어떻게 배우의 무기가 되었을까
쓰마부키 사토시와 코우리 유카, 자기 얼굴로 다른 사람의 삶을 사는 기술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과 〈워터보이즈〉의 청춘으로 기억되는 쓰마부키 사토시는 젊은 시절 “개성이 없다”는 말을 자주 들었다고 털어놓는다. 한때 그를 고민하게 했던 평가는 시간이 흐르며 다른 가능성으로 바뀌었다. 어떤 색이든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 다양한 인물이 자신의 안에 들어올 자리를 내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강렬한 검은색보다 다른 색과 어우러지는 흰색에 자신을 비유한다. 마흔이라는 키워드 아래 놓인 이 대화는 배우의 성숙을 익숙한 이미지를 벗어나는 과정이자, 자신에게 부족하다고 여겼던 부분을 새롭게 이해하는 시간으로 보여 준다.
그에게 연기의 핵심은 인물로 존재하는 데 있다. 촬영 전부터 배역과 같은 직업을 경험하고 비슷한 공간에서 먹고 자며 생활하려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우행록: 어리석은 자의 기록〉을 준비하면서 취재용 녹음기의 방향까지 미리 확인했다는 이야기는 화면에 드러나지 않는 준비의 밀도를 전한다. 〈레드〉에서는 대사로 인물을 설명하기보다 상대의 감정을 받아들이고 표정과 눈빛, 두 사람 사이에 만들어지는 공기와 온도를 놓치지 않으려 했다고 말한다. 관객이 한 인물의 삶을 믿게 되는 순간 뒤에는 이처럼 구체적인 관찰과 시간이 쌓여 있다.
〈1923년 9월〉의 배우 코우리 유카는 자신이 되고 싶은 배우를 그릇에 비유한다. 대량 생산된 그릇보다 도예가가 혼을 담아 빚은 그릇 같은 배우, 곧 연기의 장인이 되고 싶다는 것이다. 이 말은 쓰마부키 사토시의 흰색과 서로 다른 방향에서 같은 질문을 건드린다. 작품마다 다른 사람을 연기하면서도 자신만의 태도를 어떻게 지킬 것인가. 한영혜 역시 미리 정한 동작보다 현장의 분위기와 상대 배우의 말을 받아들이는 일을 중요하게 여긴다. 이 책은 배우들의 작업 방식을 나란히 놓음으로써 연기에 하나의 공식이 없다는 사실과, 그럼에도 타인의 삶을 이해하려는 준비와 집중이 필요하다는 공통점을 함께 드러낸다. 이는 자기 일에서 개성과 숙련을 어떻게 쌓을지 고민하는 독자에게도 남을 법한 이야기다.
아버지의 침묵 속에 내가 몰랐던 내가 있었다
하야시 류타와 한영혜, 국적과 이름 사이에서 자신의 자리를 찾는 사람들
외국인이나 혼혈인은 일본에서 살기 힘들 것 같다고 말한 중학생에게 어머니가 되묻는다. “넌 어때?” 아버지가 화교라는 사실을 그때 처음 알게 된 하야시 류타의 기억이다. 중국어를 쓰는 모습을 한 번도 본 적 없는 아버지, 명절마다 먹던 음식, 남들과 다르지 않다고 여겼던 집안의 풍경이 갑자기 낯설어진다. 〈꽃의 집〉을 둘러싼 대화는 이 짧은 문답에서 시작해 재일 화교 공동체의 역사로 들어간다. 자신을 일본인이라고 느끼지 않았던 할머니와 출신을 말하지 않았던 아버지, 미디어가 만들어 낸 편견을 자기 안에 품고 있었던 아들의 시간이 냉전기 동아시아의 갈등과 겹친다.
하야시는 가족의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면서 관객과의 거리를 고민했다. 자신의 사연에 몰입한 나머지 객관성을 잃지 않도록 편집을 다른 사람에게 맡겼고, 역사적 설명이 인물을 가리지 않도록 정보의 양과 호흡을 조절했다. 이 과정에서 다큐멘터리는 자신을 확인하는 기록인 동시에 자신과 다른 사람에게 말을 거는 형식이 된다. 〈아무도 모른다〉로 익숙한 배우 한영혜의 대화에서는 같은 질문이 국적과 활동명, 작품 선택의 문제로 이어진다. 한국인 아버지와 일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그는 어느 한쪽에 온전히 기대기보다 두 배경을 가진 자신을 받아들이고 싶었다고 말한다. 외부에서 붙이는 이름과 평가 속에서도 자신이 누구인지 결정할 자리를 지키려는 태도다.
두 사람의 경험은 이 책에 반복해서 등장하는 한·일 영화 교류의 장면들을 더 깊이 읽게 한다. 코우리 유카가 한국인 친구와 이야기하고 싶어 한국어를 배우기 시작한 일, 쓰마부키 사토시가 부산에서 자신을 기다리던 팬들을 만나 아시아에서 활동하고 싶다는 마음을 키운 일, 미시마 유키코가 전주국제영화제를 자신을 지지해 준 장소로 기억하는 일은 모두 구체적인 사람 사이에서 생겨난 변화다. 여기서 국경을 넘는다는 것은 시장의 크기를 넓히는 일만은 아니다. 자신이 알고 있던 세계 밖의 사람을 만나고, 그 만남을 통해 스스로를 다르게 이해하는 경험이다. 책은 영화가 만들어 낸 교류를 창작자와 관객이 서로의 다음 걸음을 가능하게 한 시간으로 기록한다.
사랑하는데도, 우리는 왜 서로를 다 알 수 없을까
고독을 지우지 않는 사랑, 상처를 외면하지 않는 영화의 다정함
후카다 고지의 〈러브 라이프〉는 한 곡의 노래에서 시작됐다. 처음에는 남녀의 사랑처럼 들리던 노래를 거듭 듣다가 아이를 잃은 부모의 마음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이르렀고, 영화의 핵심과 마지막 장면이 함께 떠올랐다고 한다. 그를 사로잡은 것은 사랑으로도 끝내 없앨 수 없는 사람 사이의 거리였다. 가족이 함께 있어도 고독은 사라지지 않으며, 같은 상실을 겪었다고 해서 슬픔까지 같아지지는 않는다. 저자는 전작과 연결되는 인물과 장면, 언어를 공유하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 사이의 간극을 물으며 이 영화가 사랑과 가족의 익숙한 이미지 아래 무엇을 드러내는지 짚는다.
흥미로운 것은 감독이 모든 장면의 뜻을 확정해 주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러브 라이프〉에서 타에코가 혼자 춤추는 장면에 대해 그는 인물을 커다란 여백으로 남기고 싶었다고 답한다. 외로움과 해방감, 설명하기 어려운 감정 가운데 무엇을 느낄지는 관객에게 달려 있다. 이 대화는 감독의 설명을 통해 영화를 더 깊이 읽으면서도 해석의 자리를 관객에게 남긴다. 가까운 사람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은 여기서 관계의 실패를 뜻하기보다, 우리가 타인의 마음을 너무 쉽게 안다고 여겨서는 안 되는 이유가 된다.
미시마 유키코와 아오야마 신지의 이야기는 그 거리를 인정하면서도 사람에게 다가가는 영화의 힘을 보여 준다. 미시마는 어린 시절의 상처 속에서 영화가 자신에게 세상은 살아볼 가치가 있다고 말해 주었다고 회고한다. 이후 재난 현장을 취재하며 음식과 공간, 슬픔과 기쁨을 함께 나누는 사람들을 만났고, 그 경험을 〈해피 해피 브레드〉의 나눔이라는 주제로 가져왔다. 아오야마는 〈구름 위에 살다〉를 통해 불안한 시대에도 자신을 잃지 않고 내일의 삶을 이어 갈 가능성을 이야기한다. 이 책에서 영화의 다정함은 고통이 사라질 것이라는 손쉬운 약속과 거리가 있다. 상처와 고독이 있는 삶을 외면하지 않고, 그 안에서 다른 사람과 함께 살아갈 가능성을 찾는 태도에 가깝다.
가장 무서운 것은 괴물이 아니라 생각을 멈춘 사람들
사카모토 류이치부터 구로사와 기요시까지, 예술가의 질문이 사회를 향할 때
영화와 삶에 관한 대화는 자연스럽게 우리가 속한 사회로 나아간다. 사사키 오모이의 〈스즈키 씨〉에는 결혼하거나 입대하지 않으면 쫓겨날 위기에 처한 여성이 등장한다. 그를 둘러싼 세계에는 애국심을 특정한 가족 형태와 결부하는 정치인, 유언비어를 퍼뜨리는 언론, ‘비국민’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사람들이 있다. 기괴한 설정을 따라가다 보면 과거의 어두운 풍경과 현실의 익숙한 말들이 겹쳐진다. 감독이 분노하는 대상에는 약자를 짓밟는 권력뿐 아니라 이를 외면하는 사람들도 포함된다. 이 영화가 겨누는 것은 스스로 생각하기를 그만두고 집단의 방향에 몸을 맡기는 태도다.
구로사와 기요시는 〈스파이의 아내〉에서 전쟁을 향해 가는 사회와 그 안에서 선택하는 개인을 이야기한다. 저자의 질문은 스릴러와 멜로드라마가 맞물리는 방식, 배우에 대한 신뢰, 제자들과의 각본 작업을 거쳐 인간과 사회의 관계에 도달한다. 사회 밖으로 나아간 사람, 사회에 집어삼켜진 사람, 그 안에 머물면서 자신을 지킨 사람 가운데 누가 옳았고 누가 행복했는지는 쉽게 단정할 수 없다. 감독은 무거운 시대를 다루면서도 관객이 오락영화로 즐기기를 바란다고 말한다. 긴장감과 재미 속에서 인물의 선택을 따라가는 일이 시대를 생각하는 경험과 함께 갈 수 있음을 보여 주는 대목이다.
사카모토 류이치와의 대화는 음악에서 자연과 문명, 평화와 민주주의, 다음 세대의 문제로 뻗어 간다. 쓰나미에 잠겼던 피아노와 피해 지역 아이들의 악기를 이야기하던 그는 문화가 오랜 시간 수많은 사람이 함께 만든 유산이라는 생각을 들려준다. 동시에 음악과 사상은 같지 않으며 자신의 음악이 정치적 도구로 쓰이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고 분명히 말한다. 이 구분은 예술과 사회에 관한 대화를 더욱 풍부하게 만든다. 부정의에 분노하고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시민의 태도와 예술의 고유한 언어를 함께 지키려는 고민이기 때문이다. 구사노 쇼고가 〈그녀가 좋아하는 것은〉을 통해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을 왜 숨기게 됐는지 묻는 대목까지, 이 책은 서로 다른 형식의 영화가 우리가 지나쳐 온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하는 과정을 보여 준다.
카메라는 꺼져도, 영화는 사람 곁에 남는다
작은 재즈 카페에서 OTT까지, 다음 장면을 가능하게 하는 시간과 관계
영화를 만드는 사람의 생각은 결국 촬영과 편집, 소리와 공간을 선택하는 일로 나아간다. 『영화의 체온』은 이 구체적인 작업 과정에도 충분한 자리를 내준다. 가타시마 잇키는 영화 중반까지 음악을 아껴 두어 소리가 등장하는 순간의 효과를 키운다고 설명하고, 호야 세이요는 실사로 구현하기 어려웠던 폭격 장면을 직접 그린 애니메이션으로 바꾼 사연을 들려준다. 데즈카 마코토가 말하는 한낮에도 어둠이 스며 있는 화면, 이토 치히로가 주목하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것들의 시각적 표현은 줄거리만으로 영화를 이해할 때 놓치는 세계를 열어 준다. 한 장면이 완성되는 데에는 취향과 사유뿐 아니라 예산과 촬영 조건, 동료들과의 협업도 작용한다.
사토 신스케는 〈아리스 인 보더랜드〉를 통해 OTT가 장편영화에 담기 어려운 이야기를 더 자유롭게 펼칠 가능성을 말한다. 반면 〈재즈 카페 베이시〉의 출발점에는 한 공간을 오랫동안 지켜 온 사람의 삶과 목소리를 기록하고 싶다는 마음이 있다. 야마모토 타츠야의 〈노사리: 순간의 영원〉은 쇠락한 상점가와 그곳의 주민들, 대학의 교원과 학생들이 함께했기에 가능했던 영화다. 새로운 플랫폼과 작은 카페, 사라져 가는 마을이라는 서로 다른 조건 속에서도 창작자들은 자신이 담고 싶은 세계에 어울리는 제작 방식과 관객에게 닿을 길을 찾는다. 책은 그 성취와 함께 오랜 준비, 제작의 어려움, 다음 작품을 향한 망설임도 들려준다.
영화를 사랑하는 독자에게 이 책은 익숙한 작품으로 돌아가는 길과 아직 만나지 못한 작품으로 향하는 길을 동시에 열어 준다. 창작을 꿈꾸는 독자에게는 자신의 감각을 믿되 타인의 말을 듣고, 여건이 달라져도 작업을 이어 가는 여러 방식을 보여 준다. 무엇보다 이 대화들은 읽는 사람의 경험에 따라 다시 의미를 얻을 여지를 품고 있다. 처음에는 배우의 작업 방식에 눈길이 갔다가, 어느 날에는 가족을 이해하지 못했던 감독의 말이나 자신을 지키며 살아가자는 이야기에 오래 머물 수도 있다. 저자가 서문에 남긴 문장처럼, 시간은 작품을 바꾸지 않는다. 바뀌는 것은 그 작품을 읽는 사람이다.

영화평론가, 영화 프로듀서, 미디어 기획자.
한양대학교에서 정치외교학을, 중앙대학교에서 영화·멀티미디어를 공부했으며, 도쿄대학교 대학원에서 국제관계와 미디어 보도의 상호작용을 연구했다.
광고회사 근무를 거쳐 <조선일보>에서 방송 및 디지털 콘텐츠 기획을 담당했으며, 이후 방송제작사에서 다큐멘터리와 교양 프로그램의 기획·제작을 맡았다. KBS, MBC, EBS 등 다양한 방송사의 다큐멘터리와 교양 프로그램 제작에 참여했으며, 일본 현지 취재를 비롯해 역사·환경·문화 분야의 콘텐츠를 꾸준히 기획·제작했다.
현재 일본 <마이니치신문> 영화평론가로 활동하고 있으며, 마이니치 필름 어워드 심사위원, 다카사키영화제 시니어 프로듀서, 일본국제교류기금 JFF+ 선정 영화평론가를 역임했다. 전주국제영화제와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프로그램 어드바이저를 맡았으며, 실사와 애니메이션을 넘나드는 국제 공동제작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등 영화와 미디어를 통해 한국과 일본, 그리고 미국을 넘나드는 기록과 대화를 이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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