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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치자꽃과 함께(시인동네 시인선 284)

    • 안혜경 저
    • 시인동네
    • 2026년 09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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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품 규격 정보
    상품상세정보
    ISBN ISBN-13 : 9791158968021
    쪽수120쪽
    크기기타 규격
    제품구성단행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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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 소개
    시, 라는 아름다운 표면 

    1982년 《시문학》으로 등단한 안혜경 시인의 아홉 번째 시집 『치자꽃과 함께』가 시인동네 시인선 284로 출간되었다. 우리의 기원은 생각처럼 ‘순수’하지 않다. 우리 자신의 출발점이라 할 수 있는 것들, 가령 육체는 제 기능이 다 하는 순간이 오면 예고 없이 멈춰 서버린다. 우리를 에워싼 사물들은 한순간도 자기 역할을 쉰 적이 없지만 그게 다 나를 위해서는 아니었다. 내가 사라지는 날 아침에도 여전히 지하철은 오고 간다. 마지막으로 내 것이라 믿었던 언어마저 타인의 인칭에 의해 새로운 관계로 구성, 조직화 된다. 나는 원하지 않았지만, 타인에 의해 ‘그것(It)’이란 무인칭으로 바뀌어 불린다. 안혜경의 작품들은 대체로 ‘언캐니(Uncanny)’의 특성을 보인다. 소위 ‘개성화’라는 미명으로 억압되었던 ‘자기화(Selfness)’의 음성에 가깝지만 낯선 사물들의 질감을 통해 배어 나온다.
    목차

    [목 차]

    제1부
    사소한 잎사귀ㆍ13/목요일이 오기도 전에ㆍ14/눈물을 베고 누워ㆍ16/눈밭에 누울까ㆍ18/비의 틈새ㆍ20/나의 온실ㆍ21/슬픔의 보고서ㆍ22/치자꽃과 함께ㆍ24/천변에 갇혀서ㆍ26/눈과 짧은 생각ㆍ27/벚꽃은 흩날리는데ㆍ28/어둠이 걸음을 내디딜 때ㆍ30/어둠이 던져놓은 질문ㆍ32/나무도 꿈을 꾸나요ㆍ34

    제2부
    적막은 푸른빛ㆍ37/무례한 질문ㆍ38/새들의 장례식ㆍ40/자주광대나물ㆍ42/상수리나무들ㆍ43/저녁이 나를 좀먹고 있다ㆍ44/꽃잎, 꽃잎ㆍ46/가을 산ㆍ48/꽃은 어둠ㆍ50/밤ㆍ51/슬픔의 단추를 풀어놓고ㆍ52/불면을 걸어가다ㆍ54/미치광이풀ㆍ56/초록이 방문한다면ㆍ58

    제3부
    희망과 절망에게ㆍ61/흐린 날 흐린 방ㆍ62/왜가리와 왜가리를 보는 나와ㆍ64/저녁의 기분ㆍ66/적막이 곁에서 놀고 있다ㆍ68/적막 한 줌ㆍ69/세 가지 방 안의 정적ㆍ70/어디에도 없는 집ㆍ72/아직도 적막은ㆍ74/오래된 편지ㆍ76/연둣빛 잎새ㆍ77/내일은 흐림ㆍ78/빗속에 갇혀서ㆍ80/우리는 갇혀 있는 거야ㆍ82

    제4부
    냇가를 걸었다ㆍ85/나뭇잎에 쌓이는 날들ㆍ86/다시 읽는 편지ㆍ88/비명은 비명을 낳고ㆍ90/매화가 핀 날ㆍ91/단풍나무 잎 사이사이ㆍ92/달개비ㆍ94/쐐기풀ㆍ95/그 여름ㆍ96/그믐ㆍ98/가을이 온다기에ㆍ99/섬돌 위에 나뭇잎ㆍ100/무슨 새인지는 모르겠어ㆍ102/노루의 일만은 아닌ㆍ104

    해설 백인덕(시인)ㆍ105

    [본 문]

    잎사귀 하나가 떨어졌어
    화분에서 참나무 가지에서 꿈의 발치에서
    잎사귀 하나를 주워 들었어
    불안한 숨소리가 들렸어 불길한 얼굴이었어
    잎사귀가 나를 읽고 있었어
    나는 잎사귀를 읽을 수 없었어
    읽으려는 나는 허둥거렸고
    허둥거리는 나를 잎사귀는 지켜보았어
    줄기를 붙잡고 있었는데
    길을 걸어갈 수도 다리를 건너갈 수도 없었어
    진흙 구덩이에서 기진맥진했어
    잎사귀의 불안한 숨소리를 뒤쫓기만 했어
    나뭇가지를 뛰어넘는 잎사귀의 발자국만 붙잡았어
    발자국도 진흙투성이였고
    숨소리도 진흙투성이였어
    잎사귀도 나도 모두 진흙투성이였어
    숲속 길은 길게 뻗어 있었어
    - 「사소한 잎사귀」 전문


    목요일이 오기도 전에 월요일이 오고
    오후가 오기도 전에 새벽이 온다
    잠에서 깨기도 전에 안개는 찾아왔고
    잠에서 깨니 안개는 현관문을 맴돌고 있다
    산기슭을 타고 내려온 안개가 창문을 뒤덮고 있다
    창문을 열지도 못하고
    창문을 닫지도 못하고
    창문은 나의 부재 때문에 심란한 듯
    엊저녁에 이르기까지 부르르 떨고 있다
    목요일이 오기도 전에 출발했는데
    목요일이 오지 않아서
    바닥에 드러누워 수요일의 시점으로 창문을 보니
    수요일의 바닥은 천장에 붙었는지
    아니면 작은 단추의 구멍으로 달아나 버렸는지
    그래도 나를 가장 아껴주는 것은 중력이지
    안개 때문에 집을 잃어버리고
    날씨 때문에 마룻바닥에 누워 있어도
    뒤엉킨 먼지와 잃어버린 핀 하나 제 마음대로
    길을 떠나버렸어도
    나를 가장 사랑하는 것은 중력이지
    의자에서 바닥으로 허우적대다 중력에서 멀리 떨어졌으니
    목요일이 알면 유쾌하게 여길까
    오기도 전에 당황해할까
    바닥에 누우니 천장은 드넓고
    전등 사이로 좁은 길들이 반짝거린다
    목요일은 오지 않았지만
    월요일에 할 일을 마무리한 것이다
    - 「목요일이 오기도 전에」 전문


    저물어가는 푸른빛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내부로 가는 계단은 어디에 있을까
    신발은 계단을 찾다가 길을 잃었을까
    내부는 푸른빛으로 가득하고
    꽃잎은 흩날리고
    잠 속으로 첨벙거리며 달려오는 먼 우주의 소식
    별똥별은 새하얗게 달려오고
    내부로 가는 계단은 바닥 어디에 있을까
    적막으로 유리창을 끼운 뒤
    안방에도 식탁에도 적막은 넘쳐나고
    온몸이 적막으로 물든다
    속삭이는 소리도 적막으로 넘치고 넘쳐
    손가락 사이로 적막이 흘러넘쳐
    나는 결국 적막으로 이사를 온 것일까
    다 저문 푸른빛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 「적막은 푸른빛」 전문


    잠을 설친 날에는 새벽에 집을 나서지
    냇물 흐르는 소리를 들으려고
    왜가리는 물속에 부리를 담그기만 하지
    소리 지르기를 기다리지만 말이 없어
    밤새도록 잠을 자지 못했어
    왜가리 우는 소리에 귀를 기울여
    눈을 뜨면 창문을 마주하지만
    내내 새가 울기를 기다려
    잠을 못 자고 있어
    열 번째 침대를 옮기고 있어
    새가 울기를 기다리다가
    왜가리는 왜 울지 않을까
    왜 울부짖지 않을까
    열한 번째 침대를 옮기며
    왜가리는 울어야 해
    물속에서 가재만 잡을 게 아니라
    열두 번째 침대를 옮기다가 밖으로 나왔어
    잠에서 깨지 않은 나무들의 숨소리를 듣고 있어
    냇물 소리를 듣고 있어
    물무늬가 밀려와 발등을 어루만졌어
    왜가리가 부리를 쳐들며 왝! 소리를 질렀어
    하늘은 아직 어두웠지만
    물가에는 왜가리뿐이었어
    구름조차 보이지 않았어
    왜가리와 왜가리를 보는 나와 하늘을 보고 있어
    물무늬가 밀려와 파도를 이루었어
    파란 하늘을 찾아 열세 번째 침대를 옮겼어
    - 「왜가리와 왜가리를 보는 나와」 전문


    바짓가랑이에 구절초가 끼어 있다
    아니 피어 있다
    어둠 속에 갇힌 채
    단지 구절초의 일만은 아니라고
    요양원 불빛 또한 희망이라고 생각하면서
    불빛을 주섬주섬 주머니에 넣으며
    산길을 넘어갈 때
    불빛 속에 허둥대던 노루 한 마리
    노루의 일만은 아니라고 생각하면서
    두껍게 깔린 낙엽에
    손을 휘저으면
    끝을 알 수 없는 어둠
    밤하늘에 실개천이 흐르고
    나는 별수 없이 찬물에 발을 담그고
    반짝이는 별빛을 꼭 움켜쥔다
    - 「노루의 일만은 아닌」 전문

    추천사

    작가의 말

    희망 속에 절망이 이미 자리를 잡고 있다.

    2026년 9월
    안혜경

    출판사 서평

    [해설 엿보기]

    안혜경 시인은 이번 시집, ‘시인의 말’에서 “희망 속에 절망이 이미 자리를 잡고 있다.”라고 선언했다. 우리는 그런 존재다. ‘행복’을 정의하라고 하면 가장 근사치가 ‘불행의 휴지 상태’, 즉 안 불행한 게 행복이라고 해야 한다. 희망 속에 자리 잡은 절망은 아무리 쉽게 생각해도 희망을 키우면 절망도 커진다. 즉 낙관적 삶이란 결국 그것이 깨어지는 참담한 오늘의 준비에 지나지 않는 것 아닌가. 시인이란 존재는 대체로 이 논리에 수긍하면서 자신만의 응전 방식을 만들어낸다. 가령 보들레르의 “자기는 자기의 사형수이면서 동시에 사형 집행인이다.”라는 인식은 우리 기원이 그 자체로 오염되어 있었다는 가장 큰 증거일 것이다. 나는 ‘자기’를 불안 어딘가(어둠이나 방, 진흙탕)에 묶어둠으로써 나 이외의 세계의 밝음을 역설적으로 보증한다. 나는 끊임없이 어디론가 향하지만 사실 닿을 그 어디는 아예 상정되지도 않았다. 행위에 있지 목적지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나의 발걸음은 ‘숲’, ‘천변’, ‘해변’ 혹은 ‘별빛’이 있다는 것을 지시할 뿐, 거기에 꼭 닿거나 거기로 가야 한다는 당위에 함몰하지 않는다. 나는 알고 있지만 거기서 멈춘다.

    너의 머리카락 속에서 잠든 때도 있었는데
    바람은 밤의 창문에 파도를 쏟아놓고
    해변으로 달려가고 있다
    밤을 달려가는 것은 즐거운 일일까
    밤을 달리려면 신발 끈을 고쳐 매야 할까
    밤의 층계참에 앉아 기억의 편견들을 읽는다
    너의 눈 속에 들어가 잠든 때도 있었는데
    의자에 새겨져 있는 손자국들을
    전리품처럼 자루에 담아둔다
    쉽게 잠들 수도 없고
    나무 아래 앉아 쉴 수도 없고
    산책길도 편안하지 않을 때
    어디로든 발걸음이 내딛어지지 않을 때
    새벽 네 시는 현관문을 두드린다
    조간신문이라도 집어 들려고 문을 여니
    새벽 달빛이 소란스러운 평화를 흘리고 있다
    복도와 계단을 넘나드는 정령들일까
    어스름과 뒤섞여 떠다니고 있다니
    나는 결국 치자꽃 손을 잡고
    어둠을 향해 달려가야 하는 것이다
    - 「치자꽃과 함께」 전문

    여름의 꽃, 치자꽃은 짙은 파란 잎과 대비되는 흰 꽃잎으로 청량감을 선사하지만, 실제 꽃향기는 그다지 독특하다고 할 수 없다. 인용 작품에서 ‘치자꽃’은 ‘밤’의 지배에도 불구하고 유일하게 지배당하지 않는 존재이다. 흰빛, 즉 ‘새벽 달빛’의 지상 버전이라 할 수 있다. 시인은 달의 정령보다 시선의 높이가 얼추 비슷한 치자꽃에서 “기억의 편견들”을 함께 읽을 흰빛의 정령들을 보고 더 신뢰한다. “나는 결국 치자꽃 손을 잡고/어둠을 향해 달려가야 하는 것이다”라는 선언적 명제는 그대로 시인의 시세계를 비추는 등불이 된다. 어둠을 밝히면 무엇이 드러나나, 빛의 영역이 넓어졌다는 것 말고는 없다. 원래 어둠의 영역이 줄었다는 것은 빛과 어둠의 대비라는 사유에 어떤 영향도 미치지 못한다. 희망을 키우면 절망도 함께 자라듯, 빛을 키우면 어둠은 영역이 줄어도 더 짙고 깊은 농도로 삶에 함축된다.
    - 백인덕(시인)

    [시인의 산문]

    나무들의 정적(靜寂)은 특별하다. 서로를 부르는 소리도 없다. 지극히 평범한 정적이다. 평범함은 춥다. 그 추운 숲속에서 나무의 방을 들여다본다. 불 꺼진 방이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그래도 들여다본다. 가끔 나무들이 소란스러워질 때가 있다. 그 소란을 받아적으려고 나무들의 창(窓)으로 뛰어들 때가 있다. 그건 정적을 깨뜨리는 일. 나무들의 죽음은 언제 찾아올까. 정적의 죽음은 언제 찾아올까. 그걸 지켜보는 일이 최근의 내가 새롭게 정의 내린 생(生)의 자세다.

    저자 소개
    저자 : 안혜경

    서울에서 태어나 상명대 대학원 국문학과 석·박사 과정을 졸업했다. 문학박사. 1982년 《시문학》 등단. 시집 『강물과 섞여 꿈꿀 수 있다면』 『춘천 가는 길』 『숲의 얼굴』 『밤의 푸르름』 『바다 위의 의자』 『여기 아닌 어딘가에』 『비는 살아있다』 『왼편에 대한 탐구』, 산문집 『새벽 다섯 시』 『아프리카 아프리카』 『꿈꾸는 배낭』이 있다. 제40회 〈시문학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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