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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SBN | ISBN-13 : 9791176061131 |
|---|---|
| 쪽수 | 268쪽 |
| 크기 | 규격 외(152mm X 225mm, 신국판) |
| 제품구성 | 반양장 |
- 인문/역사 > 한국역사/지리
일본 관동(關東)대지진 시 학살당한 조선인과 그 유족의 슬픔
1923년 9월 일본의 관동대지진 때에 학살당한 조선인들은 어떤 마음으로 이 세상을 떠났을까. 본서에서 자세히 서술하겠지만, 1923년 9월 6일 사이타마(埼玉)현 오사토(大里)군 요리이(寄居)정에 위치한 요리이 경찰분서(分署)에서 자경단에게 학살당한 구학영(具學永)은 숨을 거두기 직전에 자기 피로 ‘일본인 죄 없는 자를 벌함’이라고 썼다. 얼마나 억울했으면 그랬을까.
그들 피학살자들의 유족도 억울함과 슬픔이 깊었다. 관동대지진 조선인학살사건의 3개월 뒤에 발행된 『추가이(中外)일보』(발간지: 쿄토京都) 1923년 11월 22일 자는 학살을 당하고 유해조차 찾을 수 없는 상황에 처한 유족들의 슬픔과 분노를 다음과 같이 전했다.
그들 조선인 유족이 통절하게 느끼는 것은, 학살을 당했다는 것은 불운하기 짝이 없고 한스럽지만 참고 있다. 다만 한 가지 포기하기 어려운 것은 적어도 유골만이라도 찾아서 정성스럽게 묻어주고 싶은데, 그것조차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많은 유족 중에는 돌을 쪼개서라도 찾아내서, 최소한 정성스럽게 해주고 싶다고 애태우는 마음으로 있는 사람들이 있다. 그 대부분은 누명의 영향이 미칠지 두렵지만 포기는 할 수 없기에, 발을 구르며 비분의 눈물을 흘리고 있다.
많은 유족들이 ‘누명’의 영향을 걱정하는 이유는, 유족들이 경찰서에 가서 피학살 조선인의 유해를 숨기고 인도를 거부하는 것을 강하게 비판하며 유해 인도를 요구하면, ‘불온조선인’이라는 취급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러한 조선인 유족의 고뇌는 당시 상하이(上海)의 대한민국임시정부 기관지 『독립신문』 1923년 12월 5일 자에 게재된 ‘조선인학살사건 조사보고서’(일본에서 11월 28일자로 독립신문사사장 김승학(金承學) 앞으로 우송됨)에서도 읽을 수 있다. 그 ‘조사보고서’에는 학살된 조선인 수를 6,661명이라고 기재하고 있는데, 그중에서 3,240명에 대해서는 ‘이상은 시체조차 찾을 수 없었던 동포’라고 기술하고 있다. 즉 조선인들이 학살당했다는 사실을 명기하는 한편, 일본 경찰이 은폐하였기 때문에 확인조차 할 수 없었던 인원도 명기했던 것이다. 그를 통해 피해 조사에 임했던 조선인들의 고뇌와 분노가 전해진다.
1984년 여름, 필자는 치치후(秩父)시(사이타마埼玉현)에서 귀가하는 도중에 구마가이(熊谷)시 오하라(大原)묘지를 들렀는데, 목적은 관동대지진 당시 구마가이에서 학살당한 조선인들을 추도하는 ‘공양(供養)탑’을 조사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그 ‘공양탑’의 위치를 찾고자 돌아다니던 중, 우연히 유코쿠(熊谷)사의 주지인 우루마 게이와(漆間景和: 당시 81세)스님을 만나서 ‘공양탑’으로 안내받았다. 거기에서 우루마 스님은 공양탑이 건립되는 과정에서 있었던 놀랄만한 이야기를 해주었다. 1938년 7월에 건립된 그 탑 앞면에 새겨진 ‘공양탑’이라는 글은 예비역 육군중장 에바시 에이지로(江橋英次郞)가 쓴 것이고, 뒷면에 있는 비문은 당시의 구마가이 시장 아라이 료사쿠(新井良作)가 작성했다. 그런데 사실은 그런 명망가들의 배후에서 무명의 세탁업자가 큰 역할을 했다는 말을 꺼낸 것이다. 그 말에 나는 강한 흥미를 느껴서 그 세탁업자란 어떤 사람이냐고 물었더니, 주지 스님은 곧 염불을 올릴 시간이므로 다음 기회에 하자고 했다.
그로부터 4년 후, 1988년 7월 3일에 근무하던 대학의 학생들과 함께 유코쿠사 주지 스님을 다시 방문했다. 그리고 일전에 언급한 ‘세탁업자’가 누구인지 물었더니, 그는 당시 50세쯤 되는 ‘한’씨라는 조선인이고 구마가이시의 츠쿠바(筑波)정 부근에 살고 있었다고 했다. 필자는 그 말을 듣고 더 놀랐다. 그 공양탑 건립 시에 협력했던 ‘세탁업자’가 있었다고 처음 들었을 때에는 그 사람이 일본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또한 오하라묘지의 ‘공양탑’에 적힌 비문을 다시 읽어보니 3가지 역사 사실을 숨기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첫 번째는 「이 재해(관동대지진)로 인해 희생된 많은 생령(生靈)에 대해 참으로 통한애석의 정을 금할 수 없다」 및 「우리 시에서 조난된 생령은」이라고 되어 있으며, 비의 명칭을 ‘공양탑’이라고 하고 있으므로, 살해당한 사람들이 조선인이라는 사실을 숨기고 있다는 것이었다. 두 번째는 「희생」이라든지 「조난」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어서, 피해자가 지진 재해로 사망한 것인지 학살로 인해 사망한 것인지가 분간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세 번째로는, 비문에는 원래 유코쿠사와 엔코(圓光)사 2군데에 나누어서 매장되어 있던 유해를 불편함을 해소하고 황폐화하는 것을 막고자 「이번에 시내의 뜻있는 자가 잘 도와줘서 두 묘지의 유골을 한 곳에 모아서 여기 유코쿠사 묘지에 안장하고 공양탑을 세워 생령의 명복을 빌고자 한다」고 되어 있다. 하지만 그 「시내의 뜻있는 자」가 조선인 한씨라는 사실을 숨기고 있다.
본서 제4장 제3절에서 언급하겠지만, 일본거주조선인들은 조선인학살사건 이후 매년 9월경에 학살사건을 항의하거나 추도하는 집회를 개최하였다. 그러나 그에 대한 일본 경찰의 탄압은 비정상적일 정도로 심했다. 일본정부의 내무성 경보국(警保局) 자료에 의하면 1938년에는 조선인이 개최한 추도 집회를 더 이상 볼 수 없다고 하였다. 즉 앞에서 언급했던 구마가이시 ‘공양탑’이 건립된 것은 조선인 추도집회를 개최할 수 없었던 시기의 일이었다. 따라서 사망자가 조선인이라는 것, 일본인 자경단에게 학살당한 경우라는 것, 지역거주 조선인의 노력으로 설립된 ‘공양탑’이라는 것 등의 중요한 사실들을 모두 숨겼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 지역의 경찰은 건립을 허용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한 현실을 ‘공양탑’ 건립을 위해 노력했던 조선인 한씨는 한심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1998년 11월 3일, 나는 조선인 피학살자의 유족을 직접 만난 적이 있다. 그날 나는 조선인강제동원 피해자 증언집 『백만 명의 신세타령(百万人の身世打鈴)』의 제작위원회가 주최한 토쿄도(東京都) 및 지바(千葉)현 소재 관동대지진 시 조선인 피학살자의 묘지와 추도비를 견학하는 모임을 안내하고 있었다. 일정을 마치고 토쿄로 돌아가는 중에 박재희(朴載熙: 토쿄도 오타大田구 거주)라는 사람으로부터 “혹시 우리 아버지 박덕수(朴德守)씨가 사망한 장소를 알면 알려주세요”라는 요청을 받았다. 그의 부친 박덕수 씨는 관동대지진 당시에 군마(群馬)현에서 토목공사 청부업을 하고 있었는데, 회사 공금을 가지고 도망간 사람을 추적하여 토쿄로 갔다가 행방불명이 되었다고 한다. 아마 토쿄로 가는 도중에 학살당했다고 추측되는데, 유해도 찾지 못한 유족들은 결국 1974년에 고향인 경상남도 양산군에 박덕수 씨의 위령탑만 세웠다고 한다. 그리고 그 박재희 씨는 부친이 사망한 장소도 알지 못한 채 2003년 3월 1일에 향년 80세로 타계했다.
한반도의 각지에는 관동대지진 시에 행방불명이 된 조선인들의 빈 무덤들이 존재하고 있을 것이다. 목포시에 사는 김대원(金大元)씨의 큰아버지 김광진(金光振)씨도 관동대지진 시에 일본의 현지에 있었지만, 그 유해를 받지 못해서 고향의 묘지는 빈 무덤으로 남아 있다.
관동대지진이 일어난 직후, 일본 관헌은 위로는 정부 내무성의 경보국장에서부터 아래는 각 경찰서 산하의 경찰관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조선인이 방화, 폭동”, “조선인이 폭탄을 던졌다”라는 허위 정보를 확산시켰다. 일본 민중은 그것을 믿고 조선인학살사건에 가담했다. 조선인에 관한 유언비어가 거짓인 것이 밝혀진 이후에도, 일본 관헌은 폭동이 사실이라고 날조하였으며, 학살의 실태를 감추기 위해 피학살 조선인의 유해를 은폐하거나 인도를 거부했다. 또한 일본거주조선인들이 개최한 학살사건 추도집회를 탄압하고, 자기들의 책임을 은폐하면서 그 죄를 더욱 누적시켰다. 그로 인해 조선인들은 슬픔과 고뇌에 빠졌다.
한편, 일본의 민중은 어떠했는가. 츠지무라 나오(村直)의 사례를 보자. 그는 관동대지진 직후에 자기 집의 석벽을 수리하러 온 조선인이 “어제 나의 어머니로부터 편지가 와서 즉시 돌아오라고 했지만 모지(門司)항까지 기차도 없고 배로 간다면 도중에 살해당할 수도 있다”고 말하는 것을 듣고 “아들을 생각하는 부모의 마음과 인정은 모두 같다”고 느꼈으며, 그 조선인이 “고향을 떠나 일본에 올 때에 3백 명이 왔으나 살아 남은 자는 19명”뿐이라며 울었다는 것을 『아라라기(アララギ)』 대지진호(震災, 1923년 11월)에 게재했다. 조선인에 대한 차별이 극심했던 당시의 일본인 중에는 츠지무라처럼 부모의 정이라든지, 동포의 학살을 슬퍼하는 조선인에 대해 공감하는 사람이 있긴 했다.
그러나, 그런 사례는 극소수에 불과했다. 대부분의 일본인은 그러한 조선인의 슬픔과 고뇌를 알지 못했으며, 일본거주조선인의 항의라든지 추도 행위에도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따라서 자국의 정부에게 제대로 조선인학살사건에 대한 책임을 물은 적도 없이 오늘날까지 왔다. 일본인 중에서 그러한 사상 상황을 극복한 소수파의 운동이 나오기까지는 긴 세월에 걸친 노력이 필요했다.
필자는 본서에서, 1923년 관동대지진 시 조선인학살사건이 일어났을 때부터 패전 이후 오늘날까지 우여곡절로 가득한 일본인의 사상과 운동의 역사를 묘사함으로써, 일본 민중이 해결하지 못하고 오늘날까지 끌어안고 있는 숙제의 역사적 의미를 밝히고자 한다.
[목 차]
머리말
제1장 일본거주조선인 사회운동의 발전, 일본인 사회운동과
연대 지향에 대한 경시청의 탄압
머리말 - 난바 다이스케(難波大助)가 본 관동대지진 조선인학살사건 직전의 토쿄(東京) 노동절
제1절 일본거주조선인 노동자계급의 형성
1. 한국병합조약 이전의 일본거주조선인 노동자
2. 제1차 세계대전 후, 일본거주조선인 인구 증가의 배경
3. 일본거주조선인노동자의 노동조건
4. 제1차 세계대전 후의 경제 불황과 일본인노동자의 조선인노동자에 대한 반감
제2절 일본거주조선인 사회운동의 발전과 일본인 사회운동과의 연대 시도
1. 3.1 독립운동 이후, 일본 내 조선인운동의 발전
2. 일본거주조선인의 사회운동 시작, 일본인 사회운동과 연대 지향
3. 1922년 9월 시나노(神農)강 조선인노동자 학살사건 조사보고회
4. 『아카하타(赤旗)』 1923년 4월호 앙케이트 「무산계급이 본 조선해방 문제」의 회신
제3절 관동대지진 조선인학살 사건의 전야 – 1923년 토쿄 노동절에서
경시청이 조선인 및 일본인 사회운동가에 가한 격심한 탄압 -
1. 1923년 제4회 토쿄 노동절 준비위원회에 의한 ‘식민지 해방’ 구호
2. 제4회 토쿄 노동절 행사에서 경시청이 가한 대탄압
제4절 친일파 조선인의 등장과 일본 관헌의 지원 -‘내선융화’ 운동의 탄생-
1. 조선인 동화론자 홍의표(洪矣杓)의 등장
2. 친일단체 상애회(相愛)의 설립
제2장 관동대지진 시의 조선인학살 사건과 일본 정부
제1절 일본 정부가 유포한 ‘조선인폭동’ 유언비어와 조선인학살사건
1. 1923년 9월 1일 저녁부터 경찰관이 유언비어를 유포했다는 증거
2. 1923년 9월 2일에 경찰관 또는 경찰서가 유언비어를 유포했다는 증거
3. 1923년 9월 2일내무성 경보국장이 ‘조선인폭동’이란 허위 전보 발신
4. 1923년 9월 3일 가나가와(神奈川)현 미우라(三浦)군 군수가 정촌(町村)장에게 보낸 ‘불온조선인(不逞鮮人)’관련 지령
5. 일본 관헌이 유포한 ‘조선인폭동’의 유언비어와 민중의 인식
6. “조선인은 죽여도 된다”는 경찰관 발언이 민중에 미친 영향
7. 민중의 조선인학살을 한층 조장한 계엄령 포고와 군대 출동
8. 조선인학살사건이 일어난 기간
제2절 ‘조선인 폭동’이라는 헛소문을 날조한 일본 관헌
1. ‘조선인폭동’의 소문에 대해 군대와 관헌에서 나온 의혹
2. 정책 전환을 모색한 일본정부
3. 일본정부 사법성이 날조한 ‘조선인폭동’
4. 사법성 발표에 대한 일본인의 반응
제3절 형식적인 재판으로 조선인학살사건의 책임을 회피한 일본정부
1. 조선인을 학살한 자경단원 재판의 정치적 의미
2. 조선인을 학살한 자경단원 검거
3. 조선인학살사건 관련 재판의 문제점
제4절 피학살 조선인 시체를 숨긴 일본 경찰, 재일본 관동지방이재조선동포위문반의 고뇌
1. 피학살 조선인에 대한 실태조사와 경찰의 방해
2. 경찰에 의한 조선인 유해 인도거부와 은폐
3. 재일본 관동지방이재동포위문반의 중간보고와 최종보고서
4. 쿠도 미요코(工藤美代子)저 『東大震災ー「朝鮮人虐殺」の』에 대한 비판
제5절 일본 관헌에 의한 유언비어살포 책임 은폐와 역사서 편찬
1. ‘조선인폭동’ 유언비어 유포에 대한 국가책임을 숨긴 관료
2. 일본정부의 책임을 숨긴 관헌 편찬의 역사서
제3장 일본 민중과 진보파의 관동대지진 조선인학살에 대한 태도
머리말 - 일본인이 조선인을 학살했거나 보호했던 행동의 분기점
관동대지진 당시 일본 진보파의 사회적 위치
강덕상의 ‘3대 테러 사건’론에 대한 비판
제1절 자경단(自警)의 성립
1. 성립 과정에서 본 자경단의 4가지 유형
2. 자경단을 구성한 사람들
3. 자경단의 수
4. 자경단의 민족차별 인식과 ‘불온조선인’상
5. 자경단에 참가한 일본 민중의 내셔널리즘
6. 조선인학살사건과 마을공동체 의식
7. 조선인을 잔혹하게 학살한 자경단
8. 관동(關東)자경동맹의 등장과 그 운동
제2절 관동대지진 시에 일본 사회운동가가 강요당한 정치사회적 제약
1. 일본 관헌에 의한 사회주의자 탄압
2. 순(純)노동조합과 난카츠(南葛)노동회 구성원 간의 상이한 대응
제3절 일상에서 조선인과 교류가 있었던 일본 민중의 행동
1. 조선인 2명을 구한 치바(千葉)현 히가시카츠시카(東葛飾)군 호텐무라(法典村)의 농민들
2. 조선인노동자를 지켜준 혼조(本庄)의 제사공장 사장
3. 조선인과 교류가 있었던 일본인과 그렇지 않은 일본인의 차이 –요리이(寄居)학살의 사례-
4. 맺으며
제4절 일본 민중에게 ‘국가주의’에서 해방되라고 호소한 지식인
–아키타 우자쿠(秋田雨雀)를 중심으로-
1. 일본 민중이 가진 국가주의를 비판한 지식인
2. 조선인에 대한 억압자였다고 자신을 객관시한 아키타 우자쿠(秋田雨雀)
3. ‘국가주의’에서 해방됨을 제기한 아키타 우자쿠
4. 아키타 우자쿠의 대표적 명작 〈해골의 무도(舞蹈)〉
5. 일본거주조선인의 민족해방운동에 대해 공감한 아키타 우자쿠
6. 민족차별에 기인한 이판능 살상사건에 대한 아키타 우자쿠의 동찰
7. 관동대지진 시기에 아키타 우자쿠가 취한 행동
제5절 일본 민중에게 관동대지진 조선인학살사건이 주는 역사적 의미
1. 1920년대에 싹튼 일본 민중의 국가주의 이탈
2. ‘정신작흥(情神作興)의 조칙(詔勅)’과 1924년 토쿄 노동절로 본 일본노동운동
제4장 1945년 이전, 일본거주조선인 및 일본인이 행한
조선인 학살희생자 추도 운동 그리고 일본 정부
들어가며
제1절 조선인학살사건 이후, 일본거주조선인 및 일본인에 의한 추도 및 항의 운동
1. 항의를 담은 일본거주조선인의 추도 집회
2. 항의집회 참가, 추도집회 개최를 금지당한 일본 사회운동가
3. 일본거주조선인과 연계한 일본 노동자의 항의추도 집회
4. 일본인 기독교 신자에 의한 조선인 및 중국인 희생자 추도회
5. 조선인학살사건에 관한 요시노 사쿠조(吉野作造)의 사상과 행동
6. 사이타마(埼玉)현의 추도회
7. 군마(群馬)현에서 일본인이 건립한 조선인학살사건피해자의 묘비 및 추도비
8. 치바(千葉)현에서 개최된 추도회와 건립된 추도비
9. 카나가와(神奈川)현에서 개최된 추도 행위
10. 1945년 이전에 건립된 피학살자 묘비와 추도비의 특징
제2절 ‘내선융화(內鮮融和)’ 목적으로 개최된 추도회
1. ‘내선융화’와 조선인학살에 대한 항의가 충돌한 추도회
2. ‘내선융화’ 노선이 관철된 추도회 개최
3. 지역거주조선인에 의한 학살희생자 추도를 ‘내선융화’ 노선으로 포섭한 요코하마(浜)의 사례
제3절 해방전 일본거주조선인의 항의 차원 추도회와 일본 관헌의 탄압
1. 조선인학살사건 이후, 조선인에 의해 개최된 항의 및 추도 집회
2. 일본거주조선인의 진보계 사회운동단체 및 종교단체 등이 전개한 추도 및 항의 운동
3. 민족주의계 기독교 단체와 융화주의 단체가 개최한 추도회
제5장 관동대지진 시 조선인학살에 대한
오늘날 일본의 국가책임과 민중책임
제1절 관동대지진 시 조선인학살에 대한 1945년 이전의 일본정부책임 추궁
1. 1924년 8월 말, 『아사히(朝日)신문』과 『호치(報知)신문』의 일본정부 비판
2. 1923년 12월, 아마모토 콘노효에이(山本兵衛) 수상의 속임수 답변
제2절 1945년 이후 일본인이 추진한 관동대지진 시 조선인희생자의 추도 및 조사
1. 1963년 ‘40주년’에 이루어진 추도와 조사
2. 1973년 ‘50주년’의 추도와 조사
3. 1983년 ‘60주년’의 추도와 조사
4. 1993년 ‘70주년’의 추도와 조사
제3절 1945년 8월 이후, 관동대지진 시 조선인학살사건의 일본정부 책임을 추궁한 재일조선인
1. 재일본조선인연맹에 의한 관동대지진 시 조선인희생자 추도회
2. 일본정부에게 관동대지진시 조선인학살에 대한 사죄를 요구한 재일조선인의 운동
3. 일본변호사연합회가 일본 수상에게 제출한 사죄권고서와 그 파문
제4절 1945년 이후 건립된 관동대지진 시 조선인희생자의 묘비, 추도비를 통해 본 일본인의 사상 상황
1. 패전 이후 일본인이 세운 조선인희생자 추도비와 일본인의 사상 상황
2. 패전 이후 일본인이 재일조선인과 함께 건립한 조선인희생자추도비
제5절 일본인에 의해 시작된 관동대지진 시 조선인학살의 국가책임 추궁
1. 일본인에 의한 관동대지진 시 조선인학살 국가책임 제기
2. 일본인, 재일조선인, 한국인에 의한 3자 제휴의 추도운동 전개
3. ‘관동대지진 조선인학살의 국가책임을 묻는 모임’의 창립
역자 후기

야마다 쇼지
(山田昭次)
1930年生. 근현대 일본민중사, 한일관계사 전공.
(일본) 立教大学 名誉教授. 「関東大震災朝鮮人虐殺の国家責任を問う会」 공동대표.
〈단독저서〉
『金子文子ー自己·天皇制国家·朝鮮人』(影書房, 1996);『植民地支配·戦争·戦後の責任: 朝鮮·中国への視点の模索』(創史社, 2005); 『関東大震災時の朝鮮人虐殺とその後:虐殺の国家責任と民衆責任』(創史社, 2011); 『全国戦没者追悼式批判―軍事大国化への布石と遺族の苦悩』(影書房, 2014); 『関東大震災時の朝鮮人迫害: 全国各地での流言と朝鮮人虐待』(創史社, 2014).
〈공저〉
『近現代史のなかの日本と朝鮮』(東京書籍, 1991); 『朝鮮人戦時労働動員』(岩波書店, 2005); 『隣国からの告発:強制連行の企業責任 2』(創史社, 1996).
〈편저〉
『近代民衆の記録 6 満州移民』(新人物往来社, 1978); 『朝鮮人虐殺関連新聞報道史料1~4(関東大震災朝鮮人虐殺問題関係史料5)』(緑陰書房, 2004); 『関東大震災朝鮮人虐殺裁判資料(在日朝鮮人資料叢書10)』(緑陰書房, 2014).
김광열
1958년생. 근현대 한일관계사, 일본거주 조선인사 전공.
광운대학교 국제학부 명예교수.
〈단독저서〉
『일본거주 조선인의 차별저항사–920~30년대 노동운동을 중심으로』(박문사, 2025); 『한인의 일본이주사 연구–910~1940년대』(논형, 2018) .
〈공저〉
『근현대 한일관계와 재일동포』(서울대 출판부, 1998); 『世界史としての関東大震災』(日本経済評論社, 2004); 『歴史としての在日』(藤原書店, 2005); 『帝国日本の再編と二つの在日』(明石書店, 2010); 『일본시민의 역사반성 운동–평화적인 한일관계를 위한 제언』(선인, 2013).
〈역저〉
『여운형평전 1』(역사비평사, 2007); 『여운형평전 2』(선인,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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