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 칠 테면 쳐라! 나는 타석을 향해 공을 던진다. 바위같이 무겁게만 여겨졌던 공이 내 손을 떠났지만, 전혀 홀가분하지 않다. 내가 뿌린 공이 스트라이크 존을 통과해 포수의 글러브에 쏙 들어갈지, 대포 방망이에 맞아 허공으로 솟구쳐 높고 긴 궤적을 그을지, 내 앞으로 데굴데굴 굴러올지 공만이 안다. 내 손을 떠난 공은 내 것이 아니다. 이런 상상을 하니 내가 정말 투수가 된 것 같다. 끊임없이 타자와 수싸움을 해야 하는 투수는 몇 갈래의 길에서 갈팡거리는 우리네의 모습과 많이 닮았다. 포커페이스에 능하지 못한 우리는 견제구를 날리거나 로진 가루를 손에 묻히면서 불안함을 애써 감춘다. 내가 만든 페이크 구간에 내가 빠지곤 한다. 투수 입장에 서 보니 세상을 대처하는 데 유인구와 직구만으로 힘들다는 걸 깨달았다. ―「투수」 부분
인도의 한 청년이 왜 자신을 낳았느냐며 부모를 고발했다고 한다. 자신은 태어나기를 원하지 않았는데 부모가 그를 낳았다는 거다. 청년은 학업과 취업을 위해 경쟁해야 하는, 그야말로 삶은 고해(苦海)인데 부모는 즐거움을 위해서 자식을 낳았으니 자식한테 평생 생활비를 지불해야 한다며 소송을 제기했다. 청년의 엄마는 변호사답게 ‘네가 태어나기 전에 엄마 아빠가 어떻게 너에게 사전 동의를 구할 수 있었을지 합리적 설명을 제시한다면 내 실수를 인정하마’라고 맞받았다. 누구도 청년의 변호사로 나서지 않아 소송은 지지부진했다. 변호사들도 청년의 부모가 청년을 낳아 주어 세상 구경시켜 준 것만으로 고마워해야 할 텐데 웬 시비인가 싶었을 거다. 인도의 저 청년만이 아니라 누구나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세상에 내던져졌다. 저런 식으로 부모에게 소송을 제기하면 법원은 주민 센터처럼 동네 곳곳에 있어야 할 것이다. 그보다 웬만한 사람들은 아이를 낳지 않을 것이다. 태어나는 순간 인생이 불공평하다는 걸 알았다면 태어나고 싶은 이가 몇이나 될까. ―「아모르 파티」 부분
비닐이나 수저 같은 일회용을 쓸 때마다 죄책감이 이는 것은 나뿐만이 아닐 거다. 나는 웬만한 것은 일회용품을 거의 쓰지 않지만, 종이컵은 쓰고 있다. 믹스커피만큼은 사기나 유리잔 따위보다 종이컵에 타 마시는 게 맛있다. 내가 자판기 커피를 마시는 것도 종이컵에 커피가 나오기 때문이다. 공원이나 휴게소에 커피 자판기가 보이면 믹스커피 한 잔부터 뽑고 본다. 아무리 더워도 커피는 따뜻해야 제맛이다. 요즘처럼 쌀쌀한 날씨라면 말해 무엇하랴. ‘종이컵 믹스커피가 폐에서 생기는 일’ 따위의 글은 안 읽는다. 그런 글을 일일이 읽는다면 세상에 맛있게 먹을 만한 게 없다. 이슬만 먹고 살아야 한다. 믹스커피 자판기가 병원 로비에 턱 버티고 있는 것만으로 일단 안심한다. 나는 교회 아줌마가 타 준 커피 맛을 다시 음미하려고 믹스커피를 한 잔 탔다. 믹스커피 봉지 대신 찻숟가락으로 저었다. 팔팔 끓은 물을 종이컵에 붓자, 컵은 금세 흐물흐물해졌다. 뜨겁지만 잡을 만했다. 액체의 온기에 따라 찌그러지는 모양새가 달라지는 것은 종이컵의 특징이다. 종이컵은 물기가 닿으면 축축해지고 형태를 다소 잃어 종이의 물성을 드러낸다. ―「종이컵」 부분
집 부근이나 도로에 떨어진 신발 한 짝도 누군가 자신의 앞날을 결정하기 위해 던진 것일까? 선택과 집중이 어려울수록 우연에 결정을 맡기는 이가 많다고 한다. 현재 다니고 있는 곳을 뛰쳐나올지 말지 수없이 고민했지만, 결정하지 못해 신발을 던져 결정했을 수도 있다. 물 좋고 정자 좋은 곳 없으니 그냥 그대로 눌러앉으라는 부모의 충고를 따르자니 직장 내의 스트레스를 견뎌 내기가 너무 힘들다. 요즘처럼 비정규직이 흔한 때에 정규직인 것만으로 만족하라는 지인들의 충고도 있었다. 그러나 정규직이면서 좋은 대우를 받고 다니는 친구도 많다. 옮긴 직장이 마음에 안 들면 또 그만두면 된다. 그는 허공 높이 신발을 던졌다. 신발은 그 앞이 아닌 어느 빌딩 골목이나 남의 집 옥상에 떨어졌다. 그는 나머지 한 짝 신발을 던지려고 하다가 관두었다. ―「신발 한 짝」 부분
나는 책상이 놓였던 방을 열고 문 앞에서 한참 서 있었다. 그 자리에 햇살만 가득 들어차 있었다. 짙은 밤색의 반질반질한 책상 상판과 대리석 기둥처럼 단단한 책상 다리, 손만 닿으면 미끄러지듯 스르륵 열리던 책상 서랍들이 삼삼했다. 엄마와 함께 가구 백화점에 갔다가 책상을 고르고 나온 뒤 장유를 거쳐 그 언저리를 드라이빙하고 쌈밥집에서 늦은 점심을 먹던 것도 생각났다. 내 데뷔작인 단편소설 「끌」에 ‘가구는 용적이 아니라 관계의 몸통’이라고 썼다. 언젠가는 빌 그 자리를 먹먹함으로 바라볼 자신이 없다면 공간이 있다고 함부로 가구를 들여서는 안 된다는 투의 서술도 덧붙였다. 오늘따라 책상이 있던 자리에 햇살이 더 푸지게 들어와 있다. ―「책상이 있던 자리」 부분
매일 장미 한 송이를 사 가는 여고생도 잊을 수 없다. 여고생은 투명 셀로판지에 싸인 장미를 코에 대며 걸어갔다. 장미 한 송이를 사려고 꽂집에 들어가기 좀 멋쩍었는데 길에서 파니까 마음 편하게 살 수 있다는 여고생 말을 나는 얼마든지 이해했다. 나 또한 다발도 아닌, 한 송이를 사기 위해 꽃집 문을 밀고 들어가지 못했다. 여고생처럼 한 송이씩 사 가는 손님을 위해 나는 아예 장미를 한 송이씩 투명 셀로판지에 싸 놓곤 했다. 누구나 쉽게 다가설 수 있는 곳이 난전의 매력 아니던가. 난전에서 꽃 장사를 하던 그때를 생각하면 나는 밥 굶을 걱정은 하지 않는다. 뭔들 못하랴 싶다. 난전 바람을 쐬며 꽃을 매만지던 그때가 지금까지의 내 삶에서 가장 평온했다. 내일은 오랜만에 꽃집에 들러 소국 한 단 사다 꽂아야겠다. ―「꽃과 더불어」 부분
권투 선수에게만이 아니라 우리에게도 인생 자체가 도전과 방어의 연속이다. 오기와 실패를 샌드백 삼아 다진 주먹이었다. 잽과 훅으로 상대를 가늠했지만, 순식간에 상대의 인파이터나 어퍼컷이 돌진해 오는 바람에 비장의 아웃복서는 구사해 보지도 못한 채 결딴나 버렸다. ‘나비처럼 날아서 벌처럼 쏘’는 것까지는 아니더라도 한 번쯤 치고 빠지는 날렵함을 구사하고 싶었고, 소나기 같은 스트레이트로 파장까지 몰아가고 싶었다. 그러나 힘만 뺐지 유효타는 얼마 없었고 상대의 한 방이 끝내 카운터펀치가 되고 말았다. 가드도 올리지 못하고 한 방에 나자빠질 때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발딱 일어나지 않으면 그대로 끝이다. 카운터를 세는 심판의 목소리에 겨우 일어나 로프에 기대 보지만 운신조차 쉽지 않았다. 짭짤한 피 맛만이 현실감을 줄 뿐, 방금까지 링 위에서 벌어진 것은 꿈같기만 했다. 구구한 변명들이 입안에서 맴돌았지만 한 마디도 꺼내지 못했다. 방패라 믿었던 마우스피스는 결국 재갈인 셈이었다. 패자는 말이 없어야 했다. 승자의 삶도 언제나 불안하다. 챔피언 벨트를 허리에 둘렀더라도 언제 새 도전자에게 벨트를 빼앗길지 모른다. 도전과 방어만이 복서의 길이기에 승리의 기쁨은 궂은날에 반짝 비치는 햇살 이상은 아니었다. 방어하지 않으면 나가떨어지는 현실이 어찌 링과 다르지 않으랴. 아이 엠 복서. ―「아이 엠 복서」 부분
접사를 빼고 한시에 가장 많이 나오는 글자는 ‘明’자였다. 다 알다시피 ‘명’은 밝다는 뜻이지만 이태백의 저 유명한 시 「산중대작(山中對酌)」에 나오는 마지막 구절인 ‘명조유의포금래(明朝有意抱琴來)’에서의 ‘明’은 ‘다음 날 이른 새벽’으로 해석된다. 술에 취해 잠자리에 들러 가는 화자가 대작하던 친구에게 내일 아침 일찍 마음이 있으면 거문고를 안고 자신을 찾아오라고 이르는 구절이다. 보나 마나 다음 날도 둘은 거문고를 뜯거니 듣거니 하면서 술을 마시겠지. 다음 날 이른 새벽이라는 뜻인 ‘明朝’만이 아니라 미래의 시간을 말할 때는 거의 ‘명’이 쓰였다. 내년을 말할 때 ‘來年’이라 하지 않고 ‘明年’이라고 한다. 다음 날을 ‘明日’이라고 한다. 미래의 시간에 ‘明’자를 넣었으니 옛사람들은 미래를 아예 밝다고 못을 박았다. 옛사람들의 세계관이 긍정적이었다는 걸 단박에 알 수 있다. ―「명(明)」부분
저자 소개
저자 : 이병순
부산에서 태어나서 부산에서 살고 있고 앞으로도 계속 부산에서 살 거다. 2012년 《부산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끌」이 당선되어 등단했다. 소설집으로 『끌』이 있으며 장편소설 『죽림 한풍을 찾아서』와 『태안선』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