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 차]
달마의 「불식不識」과 《모노노케 히메》
「군간쌍안색 불어사무수君看雙眼色 不語似無愁」와 《게드 전기》
「대사일번 절후재소大死一番 絶後再蘇」와 《마녀 배달부 키키》
「일기일회一期一會」와 《바람이 분다》
「당처즉연화국当処即蓮華国」과 《반딧불이의 묘》
「지재차산중 운심부지처只在此山中 雲深不知處」와 《이웃집 토토로》
「일일시호일日日是好日」과 《이웃집 야마다 군》
「수자망망화자홍水自茫茫花自紅」과 《레드 터틀 어느 섬의 이야기》
「응무소주 이생기심應無所住 而生其心」과 《가구야 공주 이야기》
「수처작주 입처개진隨處作主 立處皆眞」과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명암쌍쌍明暗雙雙」과 《바람 계곡의 나우시카》
「천리동풍千里同風」
「청기본무請基本務」와 《귀를 기울이면》
「여천하인작음량與天下人作陰凉」과 《천공의 성 라퓨타》
대담 엔가쿠지 관장 요코타 난레이 노스님 × 호소카와 신스케
맺음말
[본 문]
P24~25
영화 《게드 전기》에서도 ‘사람은 혼자 마음대로 살 수 없다’ 라는 미야자키 고로 감독의 생각이 「테루의 노래」를 통해 우리에게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토록 강하고 늠름하며 고고한 외톨이 매조차도 홀로 살 수 없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자기 인생의 골인 지점까지 어떻게든 혼자 달려 보려고 합니다. 도중에 지칠 때도 있고 우울해져 달리기를 포기할 때도 있습니다. 그런 사고방식을 바꿀 수 있다면 틀림없이 사물을 보는 관점도 달라질 겁니다. 인생은 역전 마라톤과 같습니다. 혼자 달리는 마라톤이 아닙니다. 내게 주어진 구간을, 내가 받은 바통을 꼭 움켜쥐고 달리면 그만입니다. 내가 부여받은 구간이 끝나면 반드시 누군가가 그 바통을 받아줍니다. 나쓰메 소세키의 뜻을 잇는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처럼.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면 어깨의 힘이 빠져 자연스럽게 달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바통이라는 것은, 말로는 전할 수 없는 것이며 두 눈 깊은 곳에 있답니다.
선어도 목적이 아닙니다. 하나의 수단에 불과합니다.
영화 대사도, 시도, 노래도 다 언어입니다. 언어 속에서 무엇을 느끼고 그 느낀 바를 어떻게 다음 사람에 전할까. 언어를 초월해 한 걸음 나아간 끝에 ‘전하고 싶은’ 마음이 있기에 우리의 마음이 흔들리는 거랍니다. __「군간쌍안색 불어사무수君看雙眼色 不語似無愁」와 《게드 전기》 중에서
P42~43
「일기일회」는 어떤 삶의 방식일까요? 저는 《바람이 분다》의 지로와 나오코의 삶에서 그것을 봅니다.
지로의 여동생 카요는 병원을 빠져나와 지로와 결혼한 나오코를 보고 “이대로는 병든 나오코가 너무 불쌍해” 라고 말합니다. 그때 지로는 “우리는 지금, 하루하루를 아주 소중하게 살고 있어” 라고 대답합니다.
한정된 두 사람의 시간을 충실하게 채우고 싶다면 왜 일을 그만두고 함께 지내지 않는가. 또 환자 옆에서 담배를 피우다니 무슨 생각이냐고 여동생은 물은 거죠. 그러나 나오코는 담배를 피우는 잠깐의 시간도 가장 사랑하는 사람의 손을 잡고 있기를 바랍니다. 지로가 비행기 설계에 몰두한 모습을 옆에서 보고 싶어 합니다. 지로도 나오코의 기대에 부응하려고 자는 시간도 아끼며 일에 열중합니다.__「일기일회一期一會」」와 《바람이 분다》 중에서
P67~68
토토로라는 존재는 우리가 평생 찾아 헤매는 자신의 ‘진정한 마음’일지 모릅니다. 아이 때는 매일이 발견의 연속이라 고집하는 견해도 없습니다. 늘 눈앞의 마음을 발견할 수 있었죠.
그러나 인간으로 성장함에 따라 학교에 다니고 일하고 사랑하고 교우 관계를 쌓으면서 사는 데 필요한 지식과 경험을 축적합니다. 자신을 지키며 살려고 갑옷을 입어 상처받지 않고 살 준비를 합니다. 물론 쾌적하게 살려면 필요한 준비입니다. 그러나 ‘마음’을 깨달으려 할 때는 오히려 방해물이 됩니다. 너무 심하게 몸에 갑옷을 두르면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듯. 앞을 가린 구름은 점점 짙고 두꺼워져 마침내 우리 시야를 빼앗아 우리는 진정한 마음을 잃고 맙니다.
미야자키 감독의 기획서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이어져 있습니다.
잊고 있었던 것
알아차리지 못한 것
없어졌다고 착각했던 것
그러나 그것이 지금도 있다고 믿고 《이웃집 토토로》를 제안합니다.
깊은 산으로 ‘토토로’를 찾으러 가도 어쩌면 못 찾을지 모릅니다. 그래도 ‘토토로’가 없는 건 아닙니다. 병원에서 어머니가 문득 두 딸의 존재를 알아차렸듯, 우리가 태어나면서 지닌 ‘순수한 마음’을 되찾을 수 있다면 틀림없이 바로 옆에 있을 겁니다. 그것이 우리가 찾는 진정한 마음이고 도솔 스님의 질문이자 ‘토토로’입니다.
왜냐하면, 이 이상한 생물체는 여전히 일본에 있으니까요.__「지재차산중 운심부지처只在此山中 雲深不知處」와 《이웃집 토토로》 중에서
P100~101
인간이 산다는 것은 수많은 일과 만난다는 이야기와 같습니다. 우리는 희로애락이라는 감정만으로는 너무나 부족할 만큼 다양한 일에 마음을 빼앗기고 맙니다. 그야말로 일희일비, 만족했다가 상처를 입고 웃다 울며 하루하루를 보냅니다. 그런 일들에 마음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하려면 감정을 봉인하고 ‘보지도 듣지도, 말하지도 않기’로 정하는 게 최선이라고 생각하겠지요. 사람과 만나지 않으면 관계로 고민할 일이 없습니다. 반려동물을 기르지 않으면 사별해 슬플 일도 없겠죠. 그러나 과연 그러면 다 될까요? 가구야 공주는 알려줍니다. “고귀한 공주도 땀을 흘리고 때로는 깔깔대고 웃고 싶을 때도 있다고! 눈물이 멈추지 않을 때도, 화내고 싶을 때도 있어.” 그러지 않는 게 고귀한 공주라면 고귀한 공주는 인간이 아니라고.
보고, 듣고, 말하면서 우리를 상처받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에 한없이 마음을 두지 않으면 되죠. 이러한 「응무소주 이생기심」의 삶을 내 것으로 만드는 일이 ‘선의 깨달음’입니다.
딱 한 번, 황제에게 안긴 가구야 공주의 마음은 ‘더는 이곳에 있고 싶지 않아’ 라고 멈추고 맙니다. 천 개의 손을 가진 천수관음은 하나의 손에 정신을 빼앗기면 나머지 999개의 손을 쓸 수 없게 된다고 합니다. 무슨 일에나 자유자재로 마음을 쓰던 가구야 공주도 하나의 감정에 사로잡혀 꼼짝 못 하게 된 겁니다.__「응무소주 이생기심應無所住 而生其心」과 《가구야 공주 이야기》 중에서
P108~109
“온 건 어쩔 수 없어. 맞아야지.”
치히로가 처음으로 목욕탕 당번을 하는데 오물의 신 오쿠사레사마가 목욕탕을 찾아왔을 때 유바바가 한 대사입니다. 원치 않은 손님은 우리 인생에도 있기 마련입니다. 생각지도 못한 자연재해를 만나거나 직장에서 갑자기 인사이동이 생겨 바라지 않은 업무가 할당되기도 합니다. 이때 느끼는 괴로움이나 슬픔에서 어떻게 도망칠지에 마음을 빼앗기기보다, 주위 탓으로 돌리고 부루퉁하기보다도, 허심탄회하게 맞이한다. 이게 바로 큰 어려움을 피하는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그리고 유바바의 말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된 이상, 빨리 돌아가게 하는 수밖에 없어.”
어려움을 어려움으로 그냥 받아들이지만, 그것을 한없이 마음에 두지 않는다. 이것이야말로 주위 환경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는 방법입니다. __「수처작주 입처개진隨處作主 立處皆眞」과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중에서
P140~141
101세에 세상을 떠나기 직전까지 강의하고 책상에서 원고지와 마주했던 조부는 말년, 항상 ‘살아낸다’ 라는 단어를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그냥 사는 게 아니라 살아낸다는 단어로 정말 열심히 사는 모습을 표현한 아주 멋진 말입니다. 예를 들어 ‘달리다’와 ‘달려내다’라는 것에는 결의와 의욕이 전혀 다르잖아요?
이 ‘살아낸다’라는 게 바로 ‘그 기본’이 아닐까요. 이전 저의 수준 낮은 대답을 단숨에 녹여버리고 눈앞이 탁 트이는 느낌이었습니다. 저는 ‘좌선만 제대로 하면 된다’ 라는, 나무로 치면 나뭇가지에 집착해 ‘기본’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 기본’이란 승려가 좌선하는 것도, 자기가 맡은 일과 역할을 잘 해내는 것도 아닙니다. 그저 ‘열심히 사는 것’입니다.
자고 먹고 놀고 일하는 모든 게 우리가 힘써야 하는 소중한 것입니다. 그저 하는 게 아니라 열심히 해야 함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즉 하루하루를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시간으로 소중하게, 매사를 소중히 여기며 살아간다. 그게 바로 무소 대사가 ‘바라건대, 그 기본에 힘써라’ 라는 선어에 담은 메시지입니다.
무소 대사의 유언에는 다음이 있습니다. ‘자칫 잘못해 잎을 붙잡고 나뭇가지를 찾는 일은 없어야 한다’ 라는 겁니다. 지엽적인 문제에 매달려서는 안 된다고 엄격하게 제시하고 있죠.
소설 속 미야모토 무사시도 깨달음으로 이끌어준 선승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려고 뒤를 쫓다가 ‘이것도 지엽적인 일……’이라고 생각하고 멈춥니다. 감사의 말을 전하기보다 제시한 길을 스스로 걷는 게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__「청기본무請基本務」와 《귀를 기울이면》 중에서
P171~172
호소카와 “최선을 다해 제가 해왔고 하려 했던 일이 불요불급한 일이라고 판정된 처음에는 낙담했습니다. 낙담한 채 의뢰받은 원고를 쓰고 청소하고 정원의 나무를 다듬고 절 일부를 밭으로 가꾸고… 그런 일을 하면서 제게 불요불급하지 않은, 꼭 필요한 일을 해 나가는 게 당면 목표였습니다. 의식주만 있으면 우리는 살 수 있다는 생각과 함께 실은 우리 인생에 깊이를 주는 게 불요불급이라 얘기되지 않는 게 아닐까. 멀리 돌아 그 부분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렇게 생각한 뒤로는 청소, 정원 가꾸기, 밭농사가 더 생생하게 다가왔습니다. 지금은 중지 중인 좌선 모임을 재개할 수 있게 된다면 그때는 또 다른 마음으로 임하겠죠. ‘언제든 놓아 버릴 수 있는 소중한 것’이랄까요, 그런 마음으로 해 나갈 것 같습니다.”
요코타 “‘언제든 놓아 버릴 수 있는 소중한 것’이라는 말은 깊은 울림이 있네요. 소중하나 언제든 놓을 수 있을 만큼만 쥐고 있겠다는 뜻이겠죠.”
호소카와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좌선은 모두의 몸과 마음이 건강해지려고 하는 일입니다. 건강을 최고로 생각한다면 용기를 내어 중지한다. 당시는 정말 고민이 많았는데 중지된 지금은 할 일을 모색하고 있습니다. ‘이런 선승으로 있고 싶다’, ‘아버지 시절 그대로 절을 잇고 싶다’라고 제 목표를 고집하면 좌선 모임에서 유통성이 사라집니다. 그러면 모두의 마음을 지킬 수 없고 잘못하면 엉뚱한 데로 가겠죠. 그러므로 꽉 움켜쥐지 않고 늘 흔쾌히 넘겨줄 정도로 해 나갈 생각입니다.”__대담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