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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판본 유리알 유희 - 1943년 오리지널 초판본 표지디자인(더스토리 초판본 시리즈)
- 헤르만 헤세 저
- 홍진호 역
- 더스토리
- 2026년 09월 0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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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SBN | ISBN-13 : 9791194591443 |
|---|---|
| 쪽수 | 772쪽 |
| 크기 | B6(127mm X 188mm, 사륙판) |
| 제품구성 | 양장 |
- 소설/에세이/시 > 문고/전집
개인과 사회의 대립을 ‘명랑하게 초월해보려는’
헤르만 헤세 필생의 역작, 1946년 노벨문학상 수상작 《유리알 유희》
‘유리알 유희’의 전설적 명인 요제프 크네히트는
왜 이상사회 ‘카스탈리엔’을 떠나기로 결심했을까?
인류가 끝내 동경해야 할 가치를 찾아가는 여정을 그린 소설
《유리알 유희》는 개인(자유)과 사회(위계질서)의 불화를 고민하고 조화를 모색해온 독일문학의 거장 헤르만 헤세가, 특히 1930년대 독일에서 전체주의(국가)의 폭력이 더욱 본격화되자 충격을 받고 구상하기 시작해서 12년 만에 집필을 완성한 소설이다. 《데미안》, 《수레바퀴 아래서》 등에서 꾸준히 이어져온 헤세의 문제의식과 철학이 한 단계 심화된 대작으로, 발표한 지 3년 만인 1946년에 노벨문학상을 수상하였다. 선과 악, 삶과 죽음, 신과 인간, 행복과 의무, 정신과 자연 등 대립하는 수많은 난제들을 미래의 유토피아 카스탈리엔과 가상의 학문 ‘유리알 유희’라는 설정에서 풀어내는 것이 흥미롭고, 특히 주인공 크네히트가 두 세계를 끌어안기 위해 시도한 마지막 선택이 깊은 충격과 여운을 남긴다.
미래 어느 시점의 한 전기 작가가 ‘요제프 크네히트’라는 수백 년 전 위인의 삶을 추적해서 써내려간 일대기라는 독특한 설정의 소설이다. 요제프 크네히트는 십대 초반에 영재학생으로 뽑혀 카스탈리엔 계열의 학교로 진학하고, 거기서도 뛰어난 학생들만 가서 유리알 유희에 매진한다는 ‘발트첼’로 배정되어 학업을 이어간다. 그런데 그곳에 ‘현실 세상’에서 잠시 청강생으로 와 있으면서 ‘생활력 없는 카스탈리엔’을 비난하는 플리니오 데시뇨리가 있었고, 둘은 각자의 세계를 대표해서 치열한 논쟁을 벌이며 서로 가까워졌는데, 이와 동시에 분명한 한계 또한 절감해서 결국엔 결별하고 각자의 세계로 돌아간다. 하지만 크네히트는 유리알 유희에 매진하면서도 이때의 괴리감을 기억해서 늘 조화와 통합의 방법을 모색하며 남모를 고민을 이어간다. 그렇게 수십 년이 흐른 후, 크네히트는 우연히 데시뇨리와 조우했고 이때 머릿속에서만 맴돌던 구상을 실천하기로 마음먹고 전대미문의 돌발적인 기행을 저지르는데…….
음악과 수학이 조화되는 가상의 학문 '유리알유희'처럼
정신이 야만을 이긴 유토피아 '카스탈리엔'처럼
현실의 개인(정신)과 사회(위계질서)도 조화로울 수 있을까?
소설 《유리알 유희》는, 개인의 이름을 앞세우는 공명심은 지우고 ‘공공의 역할’로서의 흔적만 남기게 된 미래 사회의 어느 시점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상의 예술이자 철학인 ‘유리알 유희’의 명인으로 이름이 전해져 내려오는 전설적 인물 ‘요제프 크네히트’에게 사적 호기심과 공적 사명감을 동시에 느낀 어느 전기 작가가, 수백 년에 걸친 자료와 구술들을 힘겹게 추적해 정리해낸 일대기를 소개하고 있다.
서문에서 유리알 유희라는 독특한 예술(혹은 학문)이 어떠한 인류사적 배경 속에서 탄생했는지 자세히 설명된다. 다음에 ‘마지스터 루디(유희 명인)’ 요제프 크네히트의 일대기가 12세 무렵부터 죽음의 순간까지 평전의 형식으로 그려지고, 이후에 크네히트가 학창 시절에 습작했다고 알려진 다수의 시와 3편의 산문(이력서 형식)이 첨부되어 있는데. 소년 요제프가 제 삶의 행로를 결정했던 생각들이 투명하게 담겨진 소중한 자료라고 판단했기에 긴 분량이지만 그대로 다 실렸다.
종교(가톨릭)에 반발해 분리된 이성이, 극도로 분화되자 오히려 신격화되고 급기야 두 차례의 세계대전으로 치달았기에, 파멸 이후에 찾은 해결책이 유리알 유희였는데, 수학부터 명상까지 모든 것을 끌어안는 유리알 유희로서도 여전히 불거지는 대립과 파괴의 요소들 앞에서 위태롭기에 ‘유리알 유희의 최고 명장’을 새롭게 조명해보자는 것이 이 긴 글의 출발점이다. 따라서 내용이 관념적이고 방대해서 이해하기가 다소 난해한데, 구성의 큰 흐름을 알고 차분히 읽어가다 보면 현재 세계의 문제까지 정확하게 짚어내는 혜안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목 차]
서문_ 유리알 유희 : 유리알 유희 역사의 대중적 개관 시도
#1. 마지스터 루디 요제프 크네히트의 전기
소명│발트첼│자유연구 시절│두 개의 교단│사명│마지스터 루디│재직 기간│두 개의 극(極)│대화│준비│회람 문서│전설│
#2. 요제프 크네히트의 유고
학생 시절과 연구생 시절의 시
세 편의 전기_ 비를 부르는 사람│고해 신부│인도의 삶
작품 해설
헤르만 헤세 연보
[본 문]
존재를 증명할 수도 없고 존재할 것 같지도 않은 어떤 것들은 말로 표현하는 것이 무엇보다 어렵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을 사람들의 눈앞에 제시하는 일이 반드시 필요하다. 경건하고 양심적인 사람들이 그런 것들을 어느 정도는 존재하는 것으로 다룸으로써 그것들이 실제로 탄생하고 존재할 가능성이 조금 더 커진다. _‘서문’에서
유희의 기호와 문법은 일종의 고도로 발달된 비밀언어이다. 거기엔 여러 학문과 예술들, 특히 수학과 음악(경우에 따라선 음악학)이 관련되어 있으며, 그 비밀언어는 거의 모든 학문의 내용과 결과를 표현할 수 있고 서로 연결시킬 수 있다. 유리알 유희란 따라서 우리 문화의 모든 내용과 가치를 가지고 즐기는 유희이다. 마치 예술의 전성기에 화가가 팔레트 위의 색깔들로 유희했듯이 유리알 유희는 문화의 모든 내용과 가치로 유희하는 것이다. 인류가 지식, 고귀한 사상, 예술작품의 영역에서 창조적인 시대에 이룩해 놓은 것들, 그 이후 학문적 관찰의 시기에 개념화하고 지적인 소유물로 만든 것들, 이 모든 어마어마한 정신적 가치의 자산들을 유리알 유희자는 오르간 연주자가 오르간을 연주하듯 연주한다. _‘서문’에서
나쁜 상태가 목격되었다. 기억의 달인들이 다른 미덕 없이도 탁월하고 눈부신 유희를 할 수 있었으며, 참가자들은 수많은 상상들을 빠르게 연달아 제시함으로써 사람들을 놀라게 하고 혼란스럽게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제 그러한 화려한 기술은 점차 엄격하게 금지되었고, 명상이 유희의 매우 중요한 구성요소가 되었다. 그렇다, 명상이 모든 유희의 관객과 청중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되었다. 종교적인 것으로의 전환이었다. _‘서문’에서
교회의 감독을 완전히 극복하고 국가의 감독을 부분적으로 극복함으로써 문예란 시대 후기에는 정신이 실제로 전대미문의, 정신 자신도 더 이상 감당할 수 없을 만큼의 ‘자유’를 누리게 되었다. 그러나 스스로 만들고 스스로 존중하는 진정한 법, 새롭고 진정한 권위와 정당성은 여전히 발견하지 못한 상태였다. (…) 그들의 교양놀이는 단순히 사랑스럽고 의미 없는 유치한 짓거리가 아니라, 풀리지 않는 문제들과 두려움으로 가득한 몰락의 예감 앞에서 두 눈을 질끈 감고 가능한 한 무해한 환상세계로 도망치려는 깊은 욕구에 상응하는 행위였다. (…) 사람들은 작품을 읽어본 적도 없고 읽을 생각도 해본 적 없는 작가들에 대한 강연을 들었으며, 그것으로도 모자라 환등기로 사진들을 보기까지 했다. 그들은 신문 문예란에서와 마찬가지로 단절되고, 원래의 의미를 상실한 교양의 가치들과 단편적 지식의 홍수를 헤쳐나갔다. _‘서문’에서
카스탈리엔 외부 사람들이 자유직업에 대해 얘기할 때는 아마도 그 단어가 아주 진지하고 심지어는 격정적으로 들리는 모양이야. (…) 자유는 존재한다고 하지만, 그건 직업 선택이라는 단 하나의 행위에 국한되는 거야. 그 다음엔 자유도 끝이야. 대학에서 공부할 때 이미 의사와 법률가와 기술자는 아주 경직된 교육 과정을 강요받는다네. 그 교육 과정은 일련의 시험들로 마무리되는데, 그 시험에 합격하면 그 사람은 면허장을 받고 이제, 다시 허울뿐인 자유 속에서, 자신의 직업을 따라가게 되는 거야. 그렇지만 그 사람은 저급한 힘의 노예가 된다네. 성공, 돈, 야심, 자신의 명예욕에, 그리고 사람들이 그에 대해 가질 수도 있고 가지지 않을 수도 있는 호감에 종속되는 거야. _‘소명’에서
궁극적인 질서란, 알고 있는 오류를 모두 치워버리는 일이란 가능하지 않았다! 우리는 계속해서 다시 똑같은 실수와 싸워야 하고, 똑같은 잡초를 뽑아내야만 했다! 성격이 뒷받침되지 않는 재능, 위계질서가 없는 예술적 기술. 예전 문예란 시대에 음악적 삶을 지배했던 것들이, 음악의 부흥기에 근절되고 떨어져 나갔던 것들이 벌써 다시 살아나 싹을 틔우고 있었다. _‘소명’에서
변화한 음악의 형상을 그려보았다. 선 하나를 그렸다. 그리고 그 선으로부터 비스듬하게 빠른 속도로 멀어지며 주기적인 간격을 두고 옆선을 그었다. 그것은 대략 나뭇가지에 규칙적으로 매달려 있는 나뭇잎들을 연상시켰다. 그렇게 생겨난 그림은 그를 만족시키지 못했다. 그러나 크네히트는 한번 더, 또 한번 더 그려보고 싶은 욕망을 느꼈다. 마지막으로 그는 유희의 과정에서 선을 원이 되도록 둥글게 그렸고, 그 선에서 옆으로 뻗어나가는 선들을 그렸다. 화환의 원에서 꽃들이 뻗어나가는 것과 비슷한 모양이었다 _‘소명’에서
“아, 모든 것을 다 알 수만 있다면 좋겠어요! 신뢰할 수 있는 가르침 같은 것이 있으면 좋겠어요! 모든 것이 서로 모순을 불러일으키고, 모든 것이 서로 만나지 않고 비껴지나가고, 그 어디에도 확실한 것이 없어요. 모든 것이 이렇게도 해석 가능하고, 또 반대로도 해석이 가능해요. 우리는 전체 세계 역사를 발전이나 진보로 해석할 수도 있고, 그와 똑같이 그 안에서 몰락과 무의미를 볼 수도 있어요. 진실이란 도대체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요? 진정하고도 절대적으로 유효한 가르침은 없는 것일까요?” (…) “친애하는 요제프, 진실은 있단다! 그렇지만 네가 갈망하는 ‘가르침’은 없어. 절대적이고 완전하고, 그것 하나로 우리가 모든 것을 알 수 있는 그런 가르침은 존재하지 않는단다. 절대로 완전한 가르침을 바라서는 안 된다네, 친구. 자기 자신이 완전해지길 바라야지. 신성(神性)은 개념이나 책들 속이 아니라 자네 안에 존재하네. 진실은 배우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는 것일세. 투쟁을 각오하게, 요제프 크네히트. 내가 보니, 그 투쟁은 이미 시작되었어.” _‘소명’에서
우리 ‘카스탈리엔 사람들은 인공적으로 양육된 관상용 새의 삶을 살고 있다’는 거지요. 스스로 먹을 빵을 벌지도 못하고, 삶의 고충과 투쟁을 알지도 못하며, 노동과 곤궁을 통해 우리가 살아가는 호사스러운 삶의 토대를 제공해주는 일부 사람들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_‘발트첼’에서
너는 정신 육성의 편에, 나는 자연적인 삶의 편에 서 있어. 우리의 싸움에서 너는 자연적 삶의 위험을 알아내고 그것을 겨냥하는 법을 배웠지. 너의 책무는 정신적인 육성 없는 소박하고 자연적인 삶이 어떻게 늪이 될 수 있는지, 어떻게 동물적인 것으로, 또 그것보다 더 뒤로 물러설 수밖에 없는지를 알려주는 일이야. 그리고 나는 순수하게 정신 위에 세워진 삶이 얼마나 대담하고 위험하며, 결국에는 비생산적인 것인지를 끊임없이 상기시켜야만 하지. 좋아, 각자 우위에 있다고 믿는 것을 방어하는 거야. 너에겐 그게 정신이고, 나에겐 자연이지. _‘발트첼’에서
우리 눈앞에서 너무나 복잡하고, 오래되고, 존경할 만한, 수 세대에 걸쳐 천천히 쌓아 올려진 유기체가 꽃을 피우고, 그 꽃 속에 이미 몰락의 씨앗이 담기고, 그리고 의미 있게 구성된 그 구조물 전체가 가라앉고, 퇴화하고, 몰락을 향해 비틀거리며 나아가기 시작했어. (…)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어의 몰락과 죽음이 무(無)로 이끌려간 건 아니라는 것, 언어의 젊음과 전성기와 몰락이 기억 속에, 그것에 관한 우리의 지식과 역사 속에 보존되고 있다는 것, 또 그 언어가 학문의 기호와 공식 속에, 또한 유리알 유희의 비밀스러운 표현들 속에 계속 살아 있고 언제든 다시 구성될 수 있다는 생각이 스쳐지나간 거야. (…) 소나타에서 이뤄지는 모든 장조에서 단조로의 전환이, 신화나 제식의 모든 변화가, 모든 고전적인 예술의 표현이 진정한 명상적 관찰 속에서 보면 바로 세계 비밀의 내면으로 이어지는 직접적인 길이라는 것을 나는 그 순간 번쩍 깨달은 거야. 그 내면 속 들숨과 날숨 사이의, 하늘과 땅 사이의, 음과 양 사이의 밀고 당김 속에서 신성한 일이 완수되는 거야. _‘자유연구 시절’에서
크네히트는 플리니오와 보낸 시간 동안에 그 빛나는 대표로서의 자리가 얼마나 많은 책임과 노력과 내적인 부담을 대가로 하는 것인지를 맛보았었다. 사람들에 대한 권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 다른 사람들 앞에서 번뜩이며 눈에 띈다는 것은 좋은 일이며 또 무언가 매혹적인 것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동시에 마력이자 위험이기도 했다. 한없이 작은 예외를 제외하고는 모두 훌륭하게 시작했지만 끔찍한 종말을 맞았던 지배자와 지도자와 실력자와 사령관들이 세계 역사를 빈틈없이 채우고 있지 않은가. 그들 모두는 최소한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좋은 목적을 위해 권력을 쟁취하고자 노력했지만, 후에는 권력에 사로잡히고 마취되어 자기 자신을 위해 권력을 사랑하게 되었다. 자연이 그에게 부여한 힘을 위계질서에 봉사하도록 만듦으로써 그 힘을 성스럽게 하고 유익하게 만들어야만 한다. 이것은 그에게 항상 자명했다. 그러나 그의 힘들이 가장 잘 봉사하고 가장 훌륭한 결실을 가져다줄 수 있는 곳은 어디인가? _‘자유연구 시절’에서
누가 오는 것이고 누가 가는 것인지, 누가 이끌고 누가 따라가는지, 그것이 노인인지 아니면 소년인지 알 수가 없게 되었다. 어떤 때는 소년이 노인에게, 권위 있고 품위 있는 자에게 자신의 존경과 순종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또 어떤 때는 살짝 앞서가는 소년이, 시작을 뜻하는 명랑한 소년이, 노인을 봉사하고 숭배하는 후계자로 만드는 것 같았다. (…) 그가 둘 모두인 순간이, 명인이며 동시에 작은 학생인 순간이 찾아왔다. 그는 둘 모두라기보다는 둘 위에 있었으며, 이 순환을, 노인과 젊은이가 아무런 결론 없이 서로 쫓고 쫓기는 경주를 만든 사람이자, 고안해낸 사람이었고, 동시에 관찰자이기도 했다. (…) 의미심장하면서도 동시에 아무 의미가 없는 명인과 학생의 순환, 즉 현명함은 젊음을 얻고자 하고 젊음은 현명함을 얻고자 하는 이 끝없이 달아오르는 유희는 카스탈리엔의 상징이었다. 그렇다. 그것은 늙음과 젊음으로, 낮과 밤으로, 양과 음으로 조각나 끝없이 흐르는 삶의 유희 자체였다. _‘마지스터 루디’에서
유리알 유희 또한 자신의 악마를 내면에 숨기고 있습니다. 유리알 유희는 공허한 기술적 완전함, 예술적 허영심에서 나온 자기만족, 야망에 가득한 행위들로 다른 사람들에 대한 권력을 얻고, 그 권력을 악용하는 것으로 이어질 수 있어요. 그러므로 우리는 지식 교육 외에 다른 교육을 필요로 하고, 우리 자신을 교단의 도덕에 맡깁니다. 이는 정신적으로 능동적인 우리의 삶을 식물 같은 영혼의 꿈을 꾸는 삶으로 주저앉히기 위한 것이 아니라, 정반대로 정신적으로 최고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는 활동적인 삶으로부터 명상적인 삶으로 도피해서는 안 되고, 그 반대도 안 됩니다. 둘 모두에 자리를 잡아야 하며, 둘 모두와 함께해야 합니다. _‘재직 기간’에서
평생 동안 자기가 다스리는 사람들에 대한 불행한 사랑으로 괴로워하던 군주들이 있었어. 군주들의 마음은농부들과 양치기들, 수공업자들, 학교 선생님들과 학생들에게 가 있었지만, 그 군주들은 그런 사람들을 볼 기회가 거의 없었어. 군주들은 항상 장관들이나 장교들에게 둘러싸여 있었고, 그 사람들이 마치 벽처럼 군주들과 민중들 사이에 서 있었던 거야. 마지스터도 그래. 마지스터는 사람들에게 다가가길 바라지만, 동료들만을 보지. 학생들과 어린이들에게 다가가고자 하지만 연구생들과 엘리트들만을 볼 뿐이야. _‘재직 기간’에서
‘피곤해보이는구나, 요제프.’ 나지막한, 너도 알고 있는, 예의 그 감동적인 친절함과 배려심 가득한 목소리였어. 그것이 다였어. ‘피곤해보이는구나, 요제프.’ (…) 그 순간 그분의 명랑한 침묵, 그분의 인내와 침착함으로부터 무언가가 내 안으로 넘어왔어. 갑자기 나는 그 노인분을, 그분의 존재를 가져가버린 변화를, 사람으로부터 고요함으로, 말로부터 음악으로, 사고로부터 통일로의 변화를 이해할 수 있었어. 나는 그때 나를 기꺼이 만나주신 그분을 이해했어. 나는 그제서야 비로소 미소와 광채를 이해했어. 그분은 성인이자 완성된 자셨던 거야. 내게 기꺼이 1시간을 내어 광채 속에서 함께해주신 거였어. 그런 분께 이 무딘 내가 대화를 나누고자, 질문을 하고자, 대화로 유혹을 해보고자 했던 거지. _‘재직 기간’에서
테굴라리우스는 대부분의 외로운 천재들처럼, 징후였다. 그는 실제로 아직까진 오지 않았지만 내일이면 올 수도 있는 그런 카스탈리엔에 살고 있었다. 세계를 향해 완전히 닫힌 채, 나이가 들고 명상적인 교단의 윤리가 해이해져서 타락한 카스탈리엔, 여전히 최고의 정신적 날개와 더 높은 가치에 몰두하며 헌신하는 것이 가능하긴 하지만, 고도로 발달한 자유로이 유희하는 정신성이 고도로 훈련받은 능력의 자기만족 외에 다른 목적을 가지지 못한 그런 세계 말이다. 테굴라리우스는 크네히트에게 카스탈리엔 최고 능력의 화신이자 카스탈리엔의 비도덕화와 몰락을 경고하는 전조였다. _‘두 개의 극’에서
이 두 개의 기본 경향, 혹은 삶의 두 극, 그의 음과 양은 한편으로는 ‘보존’하려는 경향, 신의를 지키고 위계질서에 헌신적으로 봉사하려는 경향이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각성’의 경향, 전진하려 하고, 현실을 붙들고 이해하려는 경향이었다. _‘두 개의 극’에서
문제가 있다는 것을 크네히트는 오래전부터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이 유리알 유희 명인으로서 유희자마을에서, 오로지 카스탈리엔 사람들과 전문가들과만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이 걱정거리였다. 그래서 그는 점점 더 초보자 과정에 헌신하고자 노력했고, 가능한 한 젊은 학생들을 받아들이고자 희망했다. 학생들이 더 젊을수록 아직 세상 및 삶 전체와 더 연결되어 있었고, 덜 길들여지고 덜 전문화되어 있었다. 크네히트는 자주 세상에 대한, 인간에 대한, 단순한 삶에 대한 불타는 욕망을 느꼈다. 그러한 것들이 아직 저 바깥 모르는 곳에 존재한다면 말이다. 이러한 동경과 공허한 느낌, 삶이 너무나 희박해져버린 공기는 우리들도 때때로 느꼈다. _‘두 개의 극’에서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 어쩌면 그렇게 나쁜 건 아닐지도 몰라. 분명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두 민족은 같은 나라에 속하고 같은 언어를 쓰는 사람들처럼 그렇게 서로를 잘 이해한다거나 친밀하게 자기를 표현할 수는 없을 거야. 그러나 그것이 서로간의 이해와 대화를 포기할 이유는 되지 못해. 같은 민족인 사람들과 같은 언어를 쓰는 사람들 사이에도 상호간의 완전한 이해와 완전한 대화를 방해하는 장애물들이 있잖아. 교양, 교육, 재능, 개성의 장애들 말이야. (…) 선한 의지만 가지고 있다면 우리는 서로 많은 것을 이야기할 수 있고, 또 정확하게 이야기하는 것을 넘어서서 아주 많은 것을 서로에게서 짐작하고, 또 예감할 수 있을 거야. 어쨌든 그것을 시도해보자고. _‘대화’에서
자네가 ‘한탄’이라 부르는 것을 내가 올바로 판단하지 못한다고, 오늘도 그러는 것 같다고 했지. 내가 그 한탄에 미소로 대답했기 때문에 말이야. 내겐 그렇게 들렸어. 그런데 여기에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무언가가 있어. 왜 한탄을 명랑하게 들으면 안 되지? 왜 한탄은 웃음이 아닌 슬픔으로 대답되어야만 하나? (…) 우리가 어떤 인간을 더 행복하게, 더 명랑하게 만들 수 있다면, 우리는 그가 부탁하든 부탁하지 않든 그렇게 해야만 해. _‘대화’에서
시인들은 슬픈 외톨이일 것이고, 음악가는 우울한 몽상가일 거야. 그렇더라도 그들의 작품은 신들과 별들의 명랑함을 함께 가지고 있어. 그들이 우리에게 주는 것은 더 이상 그들의 어두움, 고통이나 걱정이 아니야. 순수한 빛의, 영원한 명랑함의 한 방울이지. 모든 민족과 언어가 신화에서, 천지개벽설에서, 종교에서 세계의 근원을 찾으려고 해도, 그들이 도달할 수 있는 최종적인 것이자 가장 높은 것은 이 명랑함이야. _‘대화’에서
이제 그의 길은 원형이나 타원형, 혹은 나선형이나 또 다른 그 무엇이 되었지만, 결코 직선은 아니었다. 직선적인 것은 명백히 기하학에나 속하는 것이지 자연이나 삶에 속하는 것은 아니었다. (…) ‘각성’에서 중요한 것은 진실과 인식이 아니라 사실과 그것의 체험, 그리고 존재인 것 같았다. 각성 속에서 우리는 어떤 것의 핵심과 진실에 접근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우리의 자아를 사물의 순간적인 상황에 맞추는 것을 이해하고, 실행하거나, 견뎌낸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법칙이 아니라 결정을 발견하며, 세계의 중심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중심으로 접어들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그때 경험하는 것들이 그렇게 전달하기 어렵고, 기이하게도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것이다. _‘전설’에서

헤르만 헤세 (지은이)
(Hermann Hesse. 1877~1962)
1877년 7월 2일 독일 남서부의 소도시 칼프에서 태어났다. 독실한 가정 환경에서 자라 규율이 엄격한 수도원 기숙학교에 입학했는데, “시인이 되지 않으면 아무것도 되지 않겠다”고 말할 정도로 창의적이었던 헤세는 적응하지 못해서 학교를 도망친다. 이후 자살 기도, 전학, 자퇴, 시계 부품 공장 수습공을 거쳐 서점에서 일하게 되는데, 그곳에서 쓴 시집 《낭만적인 노래들》이 릴케의 인정을 받는다. 결혼 후 여행을 자주 다니는데, 특히 부모님이 선교 활동을 했던 인도에 갔다가 큰 충격을 받는다(《싯다르타》). 이후 스위스로 이주해서 《데미안》, 《클링조어의 마지막 여름》, 《황야의 이리》,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등을 썼고, 우울증과 신경쇠약 치료를 위해 시작했던 그림 그리기와 정원 가꾸기를 평생 즐겼다. 1946년 《유리알 유희》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홍진호 (옮긴이)
서울대학교 독어독문학과 교수. 서울대학교 독어독문학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하고 베를린 훔볼트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자연주의와 세기전환기 독일문학, 독일 희곡과 공연예술, 환상문학을 연구하고 가르친다.
학창 시절 처음 헤세의 작품을 읽고 감동한 이후 줄곧 문학을 공부해온 학자로서 독일문학이 지닌 다채로운 매력을 국내에 소개하는 일에 힘쓰고 있다. 지은 책으로는 《욕망하는 인간의 탄생》, 《낮은 인문학》(공저) 등이 있으며, 옮긴 책으로는 《유리알 유희》, 《라이겐》, 《독일 전설 1, 2》(공역), 《다른 한편》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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