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연의 두번째 소설집 『부서진 세월의 흔적』은 ‘부서진’ 세월에도 잔존하던 ‘빛’을 기억하기 위한, ‘문학적 구원’의 서사라 할 수 있다. 이 이야기들은 부서짐 속에 소생하는 빛을 좇던 적막한 시절의 기도이자 부서진 시간의 마디마다 존재하던 빛을 향한 순정한 고백이기도 하다.
한 편의 연작처럼 읽히는 「숲의 노래」와 「다음 발자국」은 어둠 속에서도 빛의 방향으로, 삶의 걸음을 ‘다음’으로 옮겨 갔던 ‘발자국’들에 대한 기록이라 할 수 있다. 두 소설에서 작가는 세계의 당위성을 전복시킴으로써 ‘규정된 나’에서 해방되어 ‘생명 그 자체로서의 나’로 자유로웠던 순간을 기억하고 고백하고자 한다. 「숲의 노래」의 화자인 ‘채희’와 「다음 발자국」의 화자인 ‘나’는 신혼 초에 교회 목사로 부임한 남편을 따라 해남읍에서 십 리나 떨어진 백야리의 작은 예배당에 오게 된 인물로, 교회 사모님으로서의 책무와 자신을 둘러싼 오해의 시선에 힘겨워한다. 무엇보다 자신에게 요구되는 목사 ‘사모님’의 정체성—살림도 척척, 성경도 줄줄, 누굴 만나도 방긋, 모든 걸 잘 해내는 만능 박사—을 버거워하며 스스로를 ‘이방인’으로 느끼기까지 한다.
「숲의 노래」는 부부 갈등으로 이혼을 하러 읍내에 나갔던 채희와 그녀의 남편이 떡볶이 파는 할머니의 고단한 삶을 목격한 뒤 할머니의 일숫돈 이자를 대신 내는 데 암묵적으로 동의하며 ‘함께’ 돌아오는 장면으로 끝난다. 달빛이 비추는 밤길, 어느새 마음이 닮아 같은 방향을 바라보게 된 두 사람의 모습은 ‘동반자’라는 단어가 품고 있는 깊고 아름다운 함의를 되새기게 한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화자의 내적 균열과 갈등이 쉽게 봉합되기는 힘든 법, 「다음 발자국」은 시간이 지나 아이를 낳고 그 아이가 세 살이 되기까지 여전히 밤마다 악몽에 시달리는 ‘나’의 내면을 조명한다. 마음을 위로하던 숲의 ‘노래’가 악령의 ‘아우성’처럼 공포스럽게 느껴지는 날들을 견디며 ‘나’는 ‘사막의 운둔자’ ‘숲속의 고행자’로 살아간다. 대학 시절 단짝 친구 S의 방문 역시 누구보다 자유로운 영혼을 소유했던 ‘위태한 방랑자’이자 ‘아웃사이더’로서 나의 정체성을 일깨우는 계기가 된다. 이는 ‘나’로 하여금 거짓 웃음을 연습해야 하는 ‘광대’의 ‘가면’을 벗고, 회피하고 두려워하기만 했던 ‘밤’의 실체와 정면으로 마주하게 한다. 그리하여 남편이 부재한 날 밤의 악령—세찬 바람 소리, 창호지에 어른거리는 나무 이파리의 그림자, 밤벌레들이 만들어내는 파열음, 정체를 알 수 없는 희미한 불빛과 낯선 발걸음 등—에 둘러싸인 공포의 밤을 지내고 난 후, ‘나’는 새벽 종소리와 함께 환희와 기쁨의 순간을 맞이하는 경험을 하기에 이른다. 마침내 그동안 자신을 괴롭히던 숲의 악령이 실체 없는 것이었음을, 자신이 짊어지고 만들어낸 억압과 공포와 부자연스러움이 스스로를 고립시켜왔음을 깨닫게 된 것이다.
앞의 두 소설이 방황과 방랑의 ‘발자국’을 따라가야 하는 이야기였다면, 「섬」과 「부서진 세월의 흔적」은 고였다 흐르고, 닫혔다 열리는 마음의 ‘물자국’을 따라 읽어야 한다. 중년에 접어든 화자를 내세우는 두 소설은 외부 환경에 취약할 수밖에 없는 나약한 인간의 위기의식을 전경화(前景化)하는 한편, 고독과 불안이 어떻게 인간의 실존적 조건이 되는지를 심문한다.
「섬」에서 화자의 실존적 위기는 남편의 외도로 인해 유발된다. 결혼 삼 년 만에 다른 여자에게 몸과 마음을 내줘버린 무책임한 남편으로 인해 새아의 마음은 어디에도 안착하지 못한 채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다. 새아는 “채울 수 없는 허기”에 둘러싸여 “허깨비 같은 것이 속에 들어 있는 것 같”은 상태로 집과 직장, 거실과 방 사이를 의미 없이 오가고, 때로는 집 밖으로 나와 길 위를 무작정 떠돌고 헤맨다. 이방인처럼 혜화동 거리와 헤이리 서점과 목포의 바다로 목적 없는 걸음을 옮겨 다니는 새아의 외출은 ‘방랑’에 가깝다. 그러다 새아는 통영 바다에서 “홀로 떠 있는 작은 섬”들이 “서로 젖은 얼굴을” 위로하며 “가슴속 깊은 말”을 바람에 실어 다른 섬에게 전하면서, 파도의 거센 물결을 타고 어딘가를 향하는 모습에서 자신의 그것을 발견한다. 인간의 삶이 정초한 자리가 본래 이렇게 홀로 떠내려가는 섬과 같은 것이라면, 인간의 실존적 형태 역시 ‘머묾’이 아니라 ‘흐름’을 원형으로 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침잠하거나 머물러 있지 않고 자신을 결박하는 것들을 풀어내 스스로 ‘움직이는 섬’이 되는 것, 멈추지 않고 계속 움직이며 조금씩이라도 흘러가는 것, 그것만이 살아 있음과 꿈꿀 수 있음을 증명하는 방법일 것이다. “이젠 내가 사는 것이 중요해”라는 새아의 고백은 결국 그녀 스스로의 결단과 의지만이 자신을 옭아매고 있던 상처의 기억으로부터 자신을 자유롭게 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코로나 시절을 배경으로 하는 「부서진 세월의 흔적」의 화자 구정아는 출판사 편집자 출신의 프리랜서로, 경제력이 없다는 이유로 이혼 삼 개월 만에 시댁에 아이를 빼앗기고 반지하방에 홀로 남겨진 상태다. 우울증과 강박증과 공황장애가 심신을 갉아먹는 중에도 다시 아이를 데려오겠다는 희망만이 그녀를 버티게 한다. 황량한 정아의 삶에 유일한 위안이 되는 것은 시민회관 희곡반에서 만난 임신우와의 정신적인 교류다. 은퇴한 대학교수인 임신우는 젊은 날의 방황으로 인한 상처(喪妻)의 슬픔과 죄의식 속에서 살아가는 인물인데, 정아는 지하의 습기 같은 고독이 둘러싸고 있는 그에게서 싱그러운 바람 같은 맑은 기운을 느끼곤 한다. 강의가 끝난 밤 달빛 비추는 관악산 아래 밤나무 길을 걸어 돌아오며 나누는 여운 긴 대화와 짧은 말들, 고요한 침묵. 그리고 그 사이사이 건네지는 연민과 위로, 각자의 상처와 고독에 갇혀 있던 여자와 남자는 그렇게 상대방의 삶에 낀 얼룩과 눅눅한 습기를 감지할 뿐 아니라, 상처받은 영혼에도 여전히 남아 있는 생기와 아름다움을 발견한다.
「코로나19의 시절 너머」와 「나는 너를 찾아」에서는 개인의 상처가 타자의 고통을 돌보는 윤리적 역량으로 발휘되는 장면을 포착할 수 있다. 타인과 세상을 향한 담백한 응시와 절제된 포용력, 두 소설의 화자가 지닌 이 같은 실존적 태도는 삶의 매 순간을 치열하게 통과해온 자만이 가질 수 있는 것이리라.
「코로나19의 시절 너머」는 유학을 떠났던 화자의 남편이 한국에 돌아와 한 대학의 교수로 정년 퇴임을 한 후의 시간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숲의 노래」, 「다음 발자국」의 이야기와 서사적 연속성을 지닌다. 코로나가 한창이던 겨울, 초현실적인 ‘자가격리 시대’ “전 우주적이고 지구적이며 종말론적인” 코로나 블루 시대에 ‘나’ 역시 고독과 불안과 폐허와 허무와 같은 감정과 싸우면서 우울증을 앓는 중이다. 그러나 그런 와중에도 ‘나’는 “두 개로 나뉜 자아 분열” 상태를 두려워하고 경계하며 자신의 내면을 관찰하고 성찰하려는 태도를 견지해간다. 이를 위해 ‘나’가 택한 삶의 방식은 중단 없는 ‘일상’을 유지하는 것이다. 하루가 멀다 하고 죽은 자들의 소식이 들려오고, 죽음의 기운이 공기 중에 떠도는 잿빛 풍경 가운데도 ‘나’는 남편과 산책하고 저녁을 먹으러 나가는 소박하고 평범한 하루하루를 보내려고 애쓴다. 난방이 안 되고 온수가 끊긴 상황에서도 베란다에 비춰드는 햇빛 한 줌에 감사하고, 반려견이 무지개 다리를 건너고 친구 K의 사망 소식을 듣는 가운데도, 신의 존재와 예술을 향한 열정을 잊지 않고자 한다. 달려드는 죽음의 기세에 생생한 삶의 감각으로 대응하고 있는 것이다. 이 소설을 고통과 절망과 우울의 기록이 아니라, ‘살아 있음’의 찬가로 읽을 수 있다면 이런 이유에서일 것이다.
‘어둠’이 깊은 순간에 찾아낸 ‘빛’에 관한 이야기라는 점에서 「나는 너를 찾아」 역시 같은 결을 지닌 소설이라 할 수 있다. 재활병원에 입원 중인 한 ‘여자’의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지만, 정작 이 중편소설의 관심사는 화자인 ‘여자’가 아니라 여자의 시선에 포착된 타인들의 사연에 있어 보인다. 악성 종양으로 무릎 수술을 받고 재활 요양병원에 입원한 여자는 자신의 병실 건너편 603호 집중치료실에서 들려오는 젊은 남자의 비명을 듣게 된다. 그 환자는 오래전 장애인 생활 시설에서 만났던 청년 ‘구요나’였다. 고통 속에서 비명을 지르는 요나에게서 여자는 악령에 시달리다 죽은 남동생의 모습을 떠올린다. 여자는 요나가 자신에게 해주었듯, 어둠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는 요나를 밝은 빛의 세계로 이끌어 가겠다는 의지를 불태우며 재활 운동에 전념한다. 그러므로 여자가 재활 운동을 하는 병실 벽에 비친 ‘햇살’과 비상하는 ‘새’의 이미지는 구원의 메타포인 셈. 어쩌면 여자는 성경 속 요나의 생명을 살린 것이 바로 이같이 순정한 감사의 기도였음을 어렴풋이 깨닫게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희망과 믿음의 본질은 생명의 대가나 결과가 아니라 원인이자 이유여야 한다는 것도. 이제 그녀의 시선은 요나를 경유해 재활 요양병원에서 근무하는 청소부, 재활치료사, 간병인 등에게로 확대된다. 이들은 모두 자신만의 어둠을 감당하며 살아가는 인물들이다. 소설의 제목처럼 이 세상 모든 ‘나’들은 각자의 어둠에 갇힌 채 빛을 염원하는 존재들일 터, 그런 ‘나’들이 찾아 헤매는 ‘너’는 그 빛이 되어줄 대상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