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 차]
들어가며
1. 혀를 사로잡는 매운맛의 비밀
맛일까? 고통일까?
악! 스코빌 지수 300만이라고?
매운맛은 혀가 아니라 뇌를 사로잡는다
매운맛 챌린지로 센 척하기
매운맛에 중독되는 사람들
매운맛 덕후들의 세계
매운맛이 없으면 심심해지는 세상
2. 향신료 전쟁, 매운맛의 제국
신에 바치는 선물, 향신료
파라오 왕의 콧속, 후추 한 알
로마를 미치게 한 작은 알갱이
흑사병과 싸운 향신료
세상을 뒤흔든 5mm 검은 보석, 후추
향신료로 뒤덮인 귀족들의 식탁
빈부에 따라 매운맛도 달랐다
후추가 열어젖힌 세계의 바닷길
피로 물든 향신료 섬
세계를 정복한 매운맛
세종대왕은 빨간 김치를 드셨을까?
3. 세계를 달군 매운맛 지도
혀가 아니라 기후가 매운맛을 부른다
매운맛을 넘어 얼얼한 쓰촨 요리
조화로운 인도의 매운맛
동남아의 매운맛은 생존 기술
고추가 만든 세계 맛 지도
한국의 빨간 맛이 세계를 점령하다
인간의 선택이 만든 매운맛 세계사
참고문헌
[본 문]
처음에는 한 숟갈도 버거웠던 사람이 어느 날부터는 “어? 생각보다 괜찮은데?” 하다가 어느 순간에는 “오늘은 좀 더 매운 거 없나?”로 바뀐다. 매운맛에도 단계가 있다. 떡볶이 보통 맛에서 시작해 매운맛, 엽떡 1단계, 엽떡 2단계, 불닭, 마라, 그다음 더 센 메뉴로 갈아탄다. 사람마다 다르지만 저마다 자신만의 ‘매운맛 지도’를 갖고 있다.
p.15
고추뿐 아니라 마늘도 자르거나 으깨면 알린이 알리신으로 변하며 독한 냄새와 자극을 뿜어낸다. 이 역시 천적을 쫓는 방어 장치다. 인간은 이 강한 신호를 ‘피해야 할 경고’가 아니라 ‘맛과 효능’으로 해석해 식탁에 올렸다. 이렇게 매운맛은 원래 식물이 살아남기 위해 만든 경고였다. 단군이 곰에게 마늘을 먹으라고 한 건, 어쩌면 ‘이 정도 자극도 못 견디면 아직 사람이 될 자격이 없다’ 하는 테스트였는지도 모른다. 쑥과 마늘을 100일 동안 버틴 곰은, 독한 맛을 견딘 대가로 결국 사람 자격증을 받았으니 말이다.
p.25
매운맛도 같은 원리다. 고추를 먹으면 입과 몸은 고통 신호를 보내지만, 그 고통을 견디는 동안 뇌에서는 엔도르핀이 분비된다. 실제로 달리지 않아도, 매운맛만으로 러너스 하이와 비슷한 상태를 경험하는 셈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힘든데 묘하게 시원하다”, “고생했는데 기분은 좋다” 같은 말을 하게 된다. 엔도르핀이나 도파민은 원래 힘든 일을 해냈을 때, 긴장을 풀어줄 때, 성취감을 느낄 때 몸 안에서 나오는 호르몬 물질이다. 운동을 끝냈을 때 기분이 묘하게 좋아지는 느낌도 이들 호르몬이 분비되기 때문이다. 매운 음식을 먹고 나서 사람들이 괜히 텐션이 올라가고, 말이 많아지고, 웃음이 많아지는 것도 이 때문이다.
p.27
재미있는 건, 이 챌린지가 한국에서만 유행하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해외에서도 ‘K-spicy challenge’라는 이름으로 한국 매운 음식에 도전하는 영상이 엄청나게 올라온다. 외국 유튜버들이 불닭볶음면을 먹다가 울고, 소리 지르고, 바닥에 주저앉는 영상은 이미 하나의 장르가 되었다. 얼굴은 빨개지고, 눈물 콧물 범벅이 되면서도 마지막에는 꼭 이렇게 말한다. “It’s crazy…… but it’s good.” 미쳤는데 맛있다는 말이다. 매운맛은 국경을 넘는 놀이가 되었다.
p.34~35
연구자들은 미라의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엑스레이 검사를 진행했다. 예정된 점검 과정이었다. 그런데 화면을 들여다보던 연구자들의 움직임이 멈췄다. 콧속 어딘가에 둥근 물체가 여러 개 보였기 때문이다. 정밀 분석 결과, 그 정체는 놀랍게도 후추 열매였다. 그것도 한 알이 아니라, 여러 알이 코 안쪽 깊숙이 들어 있었다. 조사를 이어가자, 미라를 방부 처리하는 과정에서 의도적으로 파라오의 콧속에 후추 열매를 넣은 사실이 드러났다. 후추 알이 빠져나오지 않도록 정체를 알 수 없는 수지성 물질로 코를 막아 둔 흔적도 확인되었다.
p.73~74
로마의 유명한 미식가 아피키우스가 4~5세기에 남긴 요리책을 보면, 전체 레시피의 70퍼센트 이상에 후추가 등장한다. 이 기록만 보아도 로마 사회에서 후추가 얼마나 널리 사용되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로마인들은 인도의 향신료, 그중에서도 특히 후추의 매운 향과 자극에 깊이 매료되어, 거액을 들여 대량으로 사들였다. 오늘날로 치면 모든 음식 위에 최고급 트러플을 듬뿍 뿌려 먹는 것과 비슷한 모습이었다. 후추는 혀보다 시선을 만족시키는 재료였다. 손님 앞에서 후추를 얼마나 아낌없이 쓰느냐가, 그 집의 부와 지위를 드러내는 기준이었기 때문이다.
p.81
세계 지도를 펼쳐놓고 매운 음식을 떠올려보자. 인도, 태국, 멕시코, 중국 쓰촨…… 뭔가 보이지 않는가? 더운 나라일수록 음식이 유난히 맵다. 반대로 북유럽이나 서유럽같이 시원한 지역에서는 매운 음식을 거의 먹지 않는다. 왜 그럴까? 그냥 입맛 차이? 천만에, 매운맛의 비밀은 사람들의 혀가 아니라 기후에 숨어 있다. 더운 나라에서는 음식이 금방 상한다. 냉장고가 없던 시절을 상상해 보자. 고기도, 생선도, 밥도 하루만 놔두면 냄새가 나기 시작한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여기서 향신료가 등장한다. 고추, 마늘, 생강, 후추 같은 것들 말이다. 향신료에는 세균을 막는 힘이 있다.
p.149
한반도의 매운맛은 처음부터 강하지 않았다. 고추가 들어오기 전까지 우리 음식의 중심은 매운맛이 아니라 짠맛과 발효의 맛이었다. 장과 젓갈, 소금이 음식의 근간을 이루었다. 김치도 지금처럼 붉지 않았고, 국과 찌개 역시 자극보다는 깊은 맛에 가까웠다. 변화는 고추가 들어오면서 시작됐다. 고추는 조선 후기에 한반도에 본격적으로 퍼졌고, 놀라울 만큼 빠르게 식탁의 중심으로 파고들었다. 이유는 분명했다. 고추는 재배가 쉬웠고, 소량으로도 강한 맛을 냈으며, 무엇보다 발효 음식과 궁합이 뛰어났다.
p.17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