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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픔을 직시하는 힘이 아픔을 넘는다 - 존엄을 지키며 함께 살아가는 삶에 대하여

    • 김용목 저
    • 에코미디어
    • 2026년 07월 0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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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품 규격 정보
    상품상세정보
    ISBN ISBN-13 : 9788997482856
    쪽수320쪽
    크기규격 외(152mm X 225mm, 신국판)
    제품구성단행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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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 소개

    이 책은 한 사람의 기록이면서, 한 공동체의 시간입니다. 무엇보다 이 땅을 살아가는 장애인의 삶에 대한 고백입니다. 1991년부터 2002년까지 실로암사람들 소식지에 실린 글을 모아 책으로 엮은 적이 있습니다. 그 뒤의 이야기를 언젠가는 다시 정리하고 싶다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감사하게도, 실로암사람들 50주년을 맞는 해에 이렇게 또 한 권의 책으로 묶게 되었습니다.

    이 책에는 2002년 말부터 2026년까지, 25년의 시간이 담겨 있습니다. 실로암사람들 소식지에 실린 글과 일부는 실로암에서 발행한 책과 리플릿에 실린 글을 함께 모았습니다. 그 안에는 장애인으로 살아가기 위해 몸으로 부딪쳤던 순간들과 함께 살아가는 길을 고민했던 시간이었습니다.

    또한 이 책은 신앙의 고백이기도 합니다. 연약함은 결핍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 안에서 이해되어야 할 삶의 조건이며, 그 자리에서 우리는 서로를 필요로 하는 존재임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특별히 장애인은 상처 입은 세상의 치유자라는 믿음 위에 서 있습니다. 그래서 이 글들은 언제나 사람을 향해 나아가고 있습니다. 

    목차

    [목 차]

    책머리에 • 6

    축하의글 / 임은정, 김양수, 김봉진, 장경화 • 8

     

    루카스를 기억하며 • 26

    자신감을 갖고 도전하자 • 28

    송명희와 레나 마리아 • 30

    중이 제 머리를 못 깎는다는 참뜻 • 32

    이제 성깔있는 장애인이 되자 • 34

    수화야 놀자 • 36

    정민이 구출작전 • 38

    하나님께 기대는 삶 • 40

    비전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다 • 42

    오늘이 장애인의 날인가 • 44

    장애인, 은혜의 통로 • 46

    권리와 행복을 유보할 수 없다 • 48

    주님은 ‘나 자신’을 원하신다 • 51

    다양한 몸들의 평등한 삶을 위해 • 53

    꽃피는집으로의 초대 • 55

    마음에 힘이되는 편지 • 57

    사무실 이야기 1 60

    사무실 이야기 2 62

    꼴등 광주, 빈곤 시민 • 64

    골목길 청소와 골목길 음악회 • 66

    광주는 장애인에게 야만의 도시인가 • 68

    부모의 마음과 부모의 힘으로 • 70

    사위, 죽음하라 • 72

    차카게 살자 • 74

    홀더, 홀로 서서 더불어 살아가기 • 76

    하나님 안에서 • 79

    봉쥬르 라이프 • 82

    장애인 그룹홈을 확충하라 • 85

    나 자신에게 고함 • 89

    모든 차별에 저항하라 • 90

    회원의 이름으로 • 93

    신나는 IT공부방 • 95

    반갑다, 장애인차별금지법 시행 • 97

    고생하씨요 잉 • 99

    장애인을 전쟁터에 내몰지 마라 • 102

    오방센터의 가치와 정체성 • 105

    봉사에서 권리로 • 107

    꽃보다 인권 • 109

    광주시 인권기본조례 제정을 위하여 • 111

    중증장애인의 보편적 권리 • 114

    장애인연금을 도입하라 • 116

    시민복지운동을 기대한다 • 118

    27년 만의 꿈 • 120

    조례는 선언이 아니라 삶이다 • 122

    5월을 보내며 • 125

    그분이 하셨어요 • 127

    세상을 향한 두드림 • 129

    광주는 인권도시여야 한다 • 131

    복지국가의 현주소 • 133

    사랑, 세상을 변화시키는 힘 • 135

    실로암에 대한 자문자답 1 137

    실로암을 후원하시는 분들께 • 140

    사람 꽃(인화학교) 아이들에게 • 142

    장애인 선교 네트워크를 구축하자 • 145

    고맙습니다 • 147

    도가니 이후 도가니 • 149

    삭발 • 151

    삶을 쓴다는 것 • 153

    사회복지사업법 개정 이후의 과제 • 156

    자립생활은 권리이자 삶이다 • 158

    자립주택은 탈시설 자립생활의 징검다리다 • 160

    약한자를 얻기 위하여 • 162

    장애인을 환대합니다 • 164

    사회적협동조합 홀더를 기대하며 • 166

    참꽃, 사람을 기억하는 방식 • 168

    ‘장애인 북카페 들’을 시작하며 • 170

    영웅 아니면 불쌍한 존재 • 173

    착한 커피를 아십니까 • 175

    나는 장애인이다 • 177

    장애체험 교육에 대하여 • 179

    장익선을 응원한다 • 181

    실로암은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 • 183

    실로암밴드로 소통하자 • 185

    기억하고, 다시 나아간다 • 188

    그래도, 희망과 기적의 언어 • 190

    우리를 지키기 위한 싸움 • 192

    장애인과 연약한 사람들의 벗, 곽정숙 • 194

    실로암에 대한 자문자답 2 198

    40, 변하지 않는 것들 • 202

    실로암센터를 건립하자 • 205

    누구도 소외되지 않는 세상을 위하여 • 207

    장애등급제 폐지에서 장애인권리보장법 제정으로 • 210

    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해야 하니까’ • 212

    세 사람을 위한 기도 • 214

    기쁨의 발견 • 217

    자립은 함께 만드는 것이다 • 219

    슬픔에 대한 예의 • 221

    ‘그 137명’에 대하여 • 223

    수어에 도전하라 • 225

    나의 특별한 영화 • 228

    종대 형 • 231

    오직 주님만 의지합니다 • 232

    나는 이 사람을 압니다 • 234

    하나님의 일하심을 우리에게 보여주셨다 • 236

    님아, 그 나이를 넘지 마오 • 238

    실로암사람들이 좋다 • 240

    동일노동, 동일임금이라는 약속 • 242

    희망은 언제나 절망을 통해 드러난다 • 245

    내가 아는 한 사람 • 247

    진실하라 온유하라 두려워 말라 • 248

    600원과 불편한 마음을 맞바꾸다 • 250

    한여름 낮의 꿈이 이루어지다 • 252

    성산포가 마음에 들어왔다 • 255

    순천장애인보호작업장은 실로암의 자랑이다 • 257

    서로에게 선물이 되는 공동체 • 259

    광주민중항쟁은 끝나지 않았다 • 261

    일곱 개의 새로운 언어 만들기 • 263

    아직도 못 탔어요 • 265

    당당하게, 당연하게, 예외 없이 • 267

    강신석 목사님 부부 그림을 걸다 • 268

    근육장애인의 평범한 삶을 보장하라 • 272

    아픔을 직시하는 힘이 아픔을 넘는다 • 274

    장애시민의 투쟁은 만인의 투쟁이다 • 277

    자립에서 연립으로 • 280

    고마워요, 당당한 경희씨 • 282

    부서지기 쉬운 삶, 그래서 • 285

    당신의 교회에 문턱은 있습니까 • 287

    새빛콜, 멈출 수 없는 삶을 위해 • 289

    자립은 나의 장르다 • 292

    섬김과 나눔의 사람, 구순옥 • 295

    장애인을 환대하는 교회를 꿈꾸며 • 298

    살아서는 존엄을, 죽어서는 기억을 • 300

    천국에는 계단이 없다 • 303

    아프지 말고 몸 건강 • 306

    정의와 평화와 기쁨의 희년공동체 • 309

    장애인의 삶은 선택이 아니라 권리다 • 311

     

     

    색인 • 314

     

     

    책은 김용목 글모음(1991-2002)에 이은 두 번째 기록이다.

    [본 문]

    루카스를 기억하며

     

    헨리 나우웬의 책을 읽다가 라르쉬 공동체에 살던 한 장애인 부부의 이야기를 접했다. 그들은 오랜 기다림 끝에 아이를 갖게 되었지만 그 과정은 결코 쉽지 않았다. 두 번의 유산을 겪고 난 뒤 찾아온 세 번째 임신이었다. 그러나 병원에서 들은 이야기는 냉정했다. 아이에게 심각한 장애가 있고, 태어나더라도 오래 살기 어렵다는 것이었다. 지금이라도 임신을 중단하는 것이 더 나은 선택일 수 있다는 설명이었다.

    그 말은 틀린 이야기가 아니었다. 누구라도 이해할 수 있는 현실적인 판단이었다. 그러나 그 부부는 다른 선택을 했다. 아이를 가능성으로 따지지 않고, 이미 주어진 생명으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그 아이에게 ‘루카스’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그날 이후로 부부는 보이지 않는 아이의 이름을 부르며 기도했고, 찬양을 들려주었다. 아직 만나지 못한 아이였지만, 이미 함께 살아가고 있었다. 이 이야기를 떠올리면, 사랑은 눈에 보일 때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확실하지 않은 미래 속에서도 이미 관계는 시작될 수 있다는 것이다.

    아이는 결국 세상에 태어났다. 의사의 말처럼 매우 연약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분명히 살아 있는 생명이었다. 부모는 아이를 품에 안았다. 짧을지 모르는 시간을 붙잡으려 하기보다, 주어진 시간 그대로를 받아들이며 함께 있었다. 오래 살지 못할 것이라던 아이는 예상보다 더 오래 머물렀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온 부모는 아이와 함께 시간을 보냈다. 그 시간은 길지 않았지만, 가볍지도 않았다. 부모는 루카스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하나씩 해 나갔다. 특별한 것이 아니라, 함께 있고, 바라보고, 안아주는 일이었다. 그리고 17일째 되는 날, 루카스는 조용히 생을 마쳤다.

    우리는 이런 이야기를 들을 때,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 이유를 묻게 된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질문의 방향을 조금 바꾸게 한다. 무엇이 일어났는가를 묻게 한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한 생명을 통해 가족이 서로를 더 깊이 만나게 되었고, 사랑이 말이 아니라 실제가 되었다. 장례식에서 아버지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루카스로 인해 아버지가 되었습니다.” 이 말은 특별한 표현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고백일 것이다. 아이를 키운 것이 아니라, 아이를 통해 자신이 변화되었다는 이야기다. 루카스는 오래 살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분명히 한 사람의 삶을 완성했다. 그리고 그 삶은 누군가의 삶을 바꾸기에 충분했다.

    루카스 이야기를 통해 다시 생각하게 된다. 생명은 길이로 판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그리고 하나님은 때로 짧은 시간을 통해서도 사람을 깊이 변화시키신다는 것이다. 루카스는 짧게 살았지만, 분명히 남았다. 그리고 그 만남은 사라지지 않는다.

    (2002.12)

     

     

    자신감을 갖고 도전하자

     

    ‘밥 잘 먹고 힘센 여자를 찾습니다’는 이색적인 제목에 끌렸으나 “전신마비 장애를 딛고 뉴욕 최연소 부장검사에 오른 정범진 에세이”라는 부제에 슬며시 내려놓고 말았다. 흔히 말해서 성공한 장애인의 그렇고 그런 얘기일 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 서점에 들를 때마다 들었다 놓았다는 반복하다가 어느새 책을 읽기 시작했다.

    정범진은 1967년 서울에서 태어나 초등학교 3학년 때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건너갔다. 조지워싱턴대학 법과대학원에 다니던 1991, 직접 운전하던 차로 불의의 교통사고를 당했다. 어깨 아래부터 온몸을 쓰지 못하는 전신마비 장애인의 몸으로 걷기는커녕 용변조차 혼자 처리하지 못하게 되자, 실의에 빠져 자살을 꿈꾼 적도 있었다. 하지만 뉴욕의 한 공동묘지에서 삶에 대한 새로운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 ‘한 평도 안 되는 관속에 영원히 누워 있는 것보다는 휠체어를 타고라도 넓은 세상을 돌아다니는 게 훨씬 재미있지 않을까’라는 것이었다. 결국 다시 공부를 시작해 미국 변호사 시험에 합격한 후 뉴욕시 부루클린 검찰청의 검사로 임용되었다. 이후 스물네 번의 재판에서 모두 승소하며 최연소 부장검사에 올랐다.

    정범진의 글을 읽으며 그가 이룬 사회적 성취보다 장애인으로서 자신의 삶을 세워가는 과정이 더 깊이 다가왔다. 예전에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한 사소한 일들을 자신의 힘으로 해내기 위해 필사의 노력을 기울여야 했다. 컵에 담긴 물 한 잔을 마시는 일부터 식사, 용변, 컴퓨터 자판 두드리는 일에 이르기까지, 아주 사소해 보이는 일이라도 혼자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이 많아질수록 그만큼 더 자유로워졌기 때문이다.

    세상사의 이치는 참으로 묘해서 힘이 들면 그만큼 기쁨도 커진다. 장애인들의 주변에는 도전을 기다리는 것들이 널려있다. 마음만 먹으면 집 안에서도 얼마든지 새로운 도전의 기쁨을 경험할 수 있다. 장애인에게는 보통 사람들 앞에 놓인 수많은 기회 가운데 상당 부분이 사라진다. 그러나 그 반대편에서는 반드시 그에 버금가거나 그 이상이 될 수도 있는 새로운 기회가 열린다. 그것이 바로 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이 있고, 낮은 곳이 있으면 높은 곳이 있다는 세상의 이치다. 잃은 것만 아깝게 여기고 새로 얻은 것의 소중함을 보지 못한다면, 그것만큼 손해 보는 일도 없을 것이다.

    정범진 검사는 장애 때문에 육신의 자유를 잃었지만, 새로운 자유를 얻었다. 몸이 성했을 때 해보지 못한 일들에 대한 아쉬움은 있지만, 지금의 몸으로도 아직 해내지 못한 일이 많기에 그 아쉬움을 느낄 여유가 없다고 했다. 앞으로 그의 삶에 더욱 기대를 거는 것은 실패에 대한 두려움보다는 도전할 용기와 자신감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그는 물론 이 땅의 모든 장애인의 건투를 빈다.

    (2003.02)

     

     

    송명희와 레나 마리아

     

    송명희와 레나 마리아. 매년 하나된소리 공연을 준비하면서 꼭 한 번은 초대하고 싶은 사람들이다. 송명희 시인은 이미 한 차례 출연한 적이 있는데, 그때의 감동은 지금도 생생하다. 숨 막히는 긴장 속에서 선포하던 “하나님은 공평하시다”는 고백은 그 어떤 설교보다도 강한 영적 울림을 지니고 있었다.

    레나 마리아 역시 오래전부터 초청을 시도했지만 여의치 않아 기회를 다음으로 미루어야 했다. 레나 마리아를 처음 알게 된 것은 그녀의 책 [발로 쓴 내 인생의 악보]를 통해서였다. 이후 방송과 음반을 통해 더 많은 것을 접할 수 있었지만, 아직 공연 현장에서 직접 만나지는 못했다. 대신 인터넷으로 접한 공연만으로도 깊은 감동을 받았다. 그녀의 찬송은 단순한 노래가 아니었다.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감동이 삶 전체로 흘러나오는 고백이었다.

    많은 사람들은 팔이 없고 한 다리가 불편한 그녀가 감사로 찬양하는 모습에서 감동을 받는다. 나 역시 믿음으로 삶을 받아들이고 하나님께 감사하는 그녀의 모습에 깊이 마음이 움직였다. 그러나 내가 진정으로 감동하며 부러워했던 것은 그녀의 인간적인 성취나 극복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그것은 그녀를 둘러싼 삶의 환경들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삶을 가능하게 했던 조건들을 이야기했다. 사랑하는 조국 스웨덴, 긍정적인 사고방식, 부모님의 사랑,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를 말할 때 정말 부러웠다. 긍정적 사고가 자연스럽게 형성될 수 있는 사회적 환경과, 장애인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복지 시스템은 우리의 현실에서 쉽게 찾아보기 어렵다. 레나 마리아는 어린 시절 자신이 장애인이라는 사실을 특별하게 인식하지 못했다고 한다. 다른 사람은 손을 쓰고, 자신은 발을 쓸 뿐이었다. 학교에서도, 가정에서도, 사회에서도 다른 아이들과 동등하게 대우받았고 차별을 경험하지 않았다. 필요한 지원은 적절한 시기에 국가로부터 제공되었다.

    이에 비해 우리의 현실은 여전히 열악하다. 장애 아동들은 신체적 장애보다 그로 인해 발생하는 차별과 편견으로 더 깊은 상처를 경험한다. 이것은 단순한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 구조의 문제다. 자기 삶을 스스로 꾸려가기 어려운 사람들에 대한 최소한의 배려조차 충분히 작동하지 않는 사회, 경제적 이유로 인간다운 삶을 누리지 못하는 이들을 외면하는 사회, 우리는 여전히 그런 현실 속에 살고 있다. 이러한 상황이 단순히 불가피한 구조적 한계라고 해도, 그리스도인으로서 이 현실 앞에서 부끄러움을 느낀다. 작은 동정과 일시적인 도움으로 우리의 책임을 다했다고 여기는 사이, 정작 사람들을 더 깊은 고통으로 밀어 넣는 사회 구조에는 무관심해 온 것은 아닌지 돌아보게 된다.

    레나 마리아의 공연을 떠올릴 때마다, 나는 한 사람의 삶에 대한 감동을 넘어 그 삶을 가능하게 한 사회를 함께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그 속에서 부러움과 동시에 깊은 부끄러움을 느낀다.

    (2003.04)

     

     

    중이 제 머리를 못 깎는다는 참뜻

     

    우리 속담에 “중이 제 머리를 못 깎는다”는 말이 있다. 이는 제 일이라도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는 것이 있다는 뜻일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몸과 관련된 일은 스스로 해결하도록 지음 받았다. 대소변 처리, 손톱과 발톱을 자르는 일, 양치질 등 흔히 일상생활능력이라 불리는 것들이다. 그러나 꼭 필요하지만 스스로 할 수 없는 일이 하나 있는데, 그것이 바로 머리를 깎는 일이다.

    아무리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라도 머리 깎는 일만큼은 누군가의 손을 빌려야 한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드실 때 그런 부분을 남겨 두셨다는 것은 큰 은총이다. 혼자서는 완전할 수 없고 서로의 필요를 채워야 한다는 사실은, 인간이 본래 더불어 살며 서로에게 의탁된 존재임을 보여준다.

    이런 이유 때문인지 이미용 봉사만큼 보편화된 봉사활동도 드물다. 자원봉사단체나 사회복지기관에서 널리 시행되고 있다. 실로암사람들에서도 한 달에 한 번 정기적으로 이미용 봉사를 진행해 오고 있다. 다만 방식은 조금 다르다. 한곳에 모이게 하는 대신, 장애인이 살고 있는 집으로 직접 찾아가는 방식이다. 이동이 어려운 장애인들이야말로 이미용 서비스가 더 절실하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이 방식은 효율만 따지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봉사자 한 사람이 하루에 서너 명 정도밖에 머리를 깎지 못한다. 이동도 대부분 자가용에 의존해야 한다. 횟수나 실적만 놓고 보면 비효율적인 방식이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이전과는 다른 고민이 생겼다. 이미용 봉사를 받은 장애인들의 반응이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경우가 있었다. 헤어스타일이 마음에 들지 않기 때문이었다. 때로는 보기에도 어색하게 잘린 머리도 있었다. 아마 이제 막 기술을 배우는 실습생이 맡았던 경우였을 것이다. 그때 느낀 당혹감은 컸다. 봉사라는 이름으로 장애인을 대상으로 실습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이 쉽게 납득되지 않았다.

    이런 경험이 반복되면 장애인들은 점점 이미용 봉사를 꺼리게 된다. 나 스스로도 확신을 가지고 권할 수 없다면, 그것은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닐까. 자신의 가족들도 맡기기 어려운 수준이라면 그것은 봉사라고 할 수 없지 않은가. 그래서 방향을 바꾸었다. 기술적으로 충분히 준비된 봉사자들과 함께, 실제로 도움이 필요한 장애인들을 찾아 나섰다. 헤어스타일은 단순한 외형의 문제가 아니다. 한 사람의 이미지와 자존감에 영향을 미친다. 장애인에게도 자신의 선택에 따라 자신만의 모습을 만들어 갈 권리가 있다. 비록 몸은 집 안에 머물러 있을지라도, 자신만의 헤어스타일을 포기할 이유는 없다. 그 작은 변화가 삶을 조금 더 당당하게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2003.06)

     

     

    이제 성깔있는 장애인이 되자

     

    장애인으로 살아가는 삶이 팍팍하다는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현실이 어렵다 보니 요구는 늘어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 목소리는 번번이 단발성 외침으로 끝나기 일쑤였고, 최근의 지속적인 요구조차 정당함에도 불구하고 귀찮은 일로 여겨지는 분위기가 여전히 남아 있다.

    재작년 한국갤럽 조사에 따르면 비장애인이 갖고 있는 장애인의 이미지는 ‘순수하다’(85.5%), ‘자존심이 강하다’(76.3%), ‘예의가 바르다’(73.7%) 순으로 나타났다. 이른바 장애인에게 덧씌워진 ‘순수 이데올로기’다. 장애인은 순수하게 보일 뿐 아니라 실제로도 순수해야 한다는 기대가 깔려 있다. 언론 속 장애인의 모습 역시 늘 착한 천사로 그려진다. 그런 이미지 속에서 장애인은 모든 것을 참고 견뎌야 하는 존재가 된다. 불편해도, 억울해도, 손해를 봐도 감내해야 한다. 그래야 ‘좋은 장애인’으로 인정받는다. 그러나 장애인은 천사가 아니다. 순수한 존재로만 남아 있을 수도 없다. 현실 속에서 생존을 고민하며 살아가는 한 사람의 시민일 뿐이다.

    한국의 경제성장은 수많은 사람들의 희생 위에 이루어졌다. 노동자뿐 아니라 사회적 약자들도 자신의 권리를 유보한 채 살아왔다. 정권은 바뀔 때마다 조금만 더 참으면 나아질 것이라 말했지만,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크게 달라진 것은 없다. 여전히 장애인들은 생존을 위해 고통 속에서 버티고 있다. 대통령의 한마디에는 크게 반응하던 사회가, 장애인들의 절박한 외침에는 쉽게 침묵한다. 이동 중 사고로 목숨을 잃어도, 먹고 살 수 없어 절망 속에서 외치는 목소리도 쉽게 사라진다. 우리의 현실은 여전히 같은 자리에 머물러 있다.

    그러나 이제 상황은 점점 달라지고 있다. 오랫동안 침묵하던 장애인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늘 순응하도록 길들여졌던 사람들이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것이다. 장애인 운동의 중심도 변하고 있다. 일부 명망가나 큰 단체가 아니라, 장애 당사자들의 목소리가 전면에 등장하고 있다. 그 변화의 중심에는 이동권이 있다. 그동안 장애인의 이동 문제를 ‘권리’로 말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전문가도, 현장 종사자도, 심지어 당사자조차도 그것을 권리로 주장하는 데 익숙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 장애인들은 원하는 때에 원하는 곳으로 안전하게 이동할 권리가 있다고 외친다. 이동권이 보장되지 않는 한 복지, 의료, 교육, 노동, 문화는 모두 공허한 말에 불과하다. 그래서 이동권은 단순한 편의의 문제가 아니라 생존의 문제다.

    우리는 특혜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차별받지 않기를 바라는 것이다. 이 사회의 시민으로서 자유롭게 이동하고 살아가기를 바랄 뿐이다. 지하철을 타고 일터에 가고, 버스를 타고 학교에 가고, 휠체어를 타고 교회에 가고, 엘리베이터를 이용해 쇼핑을 하는 일이 왜 특별한 일이어야 하는가. 지금까지 우리는 그것을 운명처럼 받아들이며 살아왔다. 그러나 이제는 다르다. 굴종과 체념의 사슬을 끊어야 한다. 이제는 성깔 있는 장애인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 당연한 권리를 당연하게 만들어 가야 한다. (2003.08)

     

     

    수화야 놀자

     

    내가 수화를 처음 만난 것도 어느덧 20년이 되어 간다. 장애인 전국체전에 탁구 선수로 참여하면서였다. 당시 봉선동에 있던 전남농학교에서 탁구 연습을 했는데, 그때 처음 수어를 접했다. 하지만 첫 만남이라는 사실 외에는 별다른 의미가 없었다. 탁구 연습을 하는 데는 말이 필요 없었기 때문이다.

    그 시절을 떠올리면 지금도 웃음이 난다. 체전 기간 중 광주선수단 임원과 농학교 선생님 사이에 다툼이 있었던 모양이다. 농학교 선생님이 농학생들을 불러 수어로 이야기하자 선수단 내에서 한동안 험악한 분위기가 이어졌다. 구경하던 나는 선생님이 무슨 말을 하는지 전혀 알 수 없어 답답했다. 또 농인 선수들과 숙소를 함께 썼는데, TV를 보거나 생활할 때 조용하다는 이유로 한 지체장애인이 농인들을 ‘점잖은 사람들’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그 후 초등학교 동창의 권유로 농인 봉사동아리에서 운영하는 수화교실에 간 적이 있었다. 친구에게 이끌려 억지로 한 번 참석했을 뿐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 조금이라도 배워 두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그렇게 한동안 나는 수화를 잊고 지냈다.

    그러다 실로암에서 일하게 되면서 다시 수화와 만나게 되었다. 그러나 나는 수화와 거리가 멀었다. 손가락도 굳어 있었고 마음도 닫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거의 10년의 시간이 흘렀다. 그 사이 몇 번이나 다짐을 했지만 번번이 포기해야 했다. 수화는 내게 너무 큰 산처럼 느껴졌고, 쉽게 다가설 수 없는 영역으로 남아 있었다.

    그러던 중 한 농인 친구와의 만남이 전환점이 되었다. 그 친구를 만날 때마다 미안한 마음이 쌓여 갔다. 오랜 시간이 지나도록 인사 한마디 제대로 하지 못하는 내 모습이 부끄럽게 느껴졌다. 결국 마음을 다잡고, 수능을 준비하는 수험생처럼 수화와 씨름하기 시작했다. 계절이 두어 번 바뀌고 나서야 비로소 수화의 길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그때의 기쁨은 쉽게 잊히지 않는다.

    수화의 배움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때로는 기쁨으로, 때로는 무력함으로 이어지는 과정이다. 끝이 보이지 않는 배움의 길 위 어딘가에 나는 여전히 서 있다. 그러나 이제 수화와 나는 떨어질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 나는 수화를 통해 소리 없이 마음으로 이어지는 세상을 알게 되었다. 다가갈수록 더 많은 기쁨을 주는 세계였다. 요즘은 광주여대에서 장애인복지론을 강의하며 수화를 함께 사용하고 있다. 이보다 더 즐거운 일이 있을까. 수화야, 놀자. (2003.10)

     

     

    정민이 구출작전

     

    정민(가명)은 올해 스물다섯 살로, 지적장애와 지체장애를 함께 가지고 있다. 10여 년 전 한 장애인 생활시설에서 살던 때부터 알고 지낸 사이다. 그동안 시설을 나와 서울로 올라가 행상을 하기도 했고, 미신고 시설에서 생활하기도 했다. 오랜만에 만난 정민이의 얼굴은 좋지 않았다. 건강도 많이 나빠져 조금만 걸어도 숨이 차고 가슴이 울렁거린다고 했다.

    최근에는 예전에 같은 시설에서 지내던 형들과 함께 행상을 하며 살고 있었다. 그러나 형편은 좋지 않았다. 국가에서 지원받는 생계비와 장애수당을 합쳐 한 달에 약 30만 원 정도가 전부였다. 정민이는 휴대전화 요금이 너무 많이 나온다며 통장을 보여주었다. 실제로 통장 잔액은 늘 바닥이었다. 하지만 생계비가 모두 휴대전화 요금으로 빠져나간 것은 아니었다.

    정민이의 휴대전화는 형들이 받을 수 있도록 설정되어 있었고, 비밀번호는 알려주지 않은 상태였다. 기본요금만 빠져나갈 뿐이었다. 통장에 연결된 현금카드 역시 형들이 가지고 있었고, 돈은 수시로 인출되고 있었다. 그러나 정민이는 한 번도 카드를 사용한 적이 없다고 했다. 돈의 흐름에 대한 개념도 제대로 알지 못했다. 행상을 하며 모았다는 농협 통장 역시 잔고가 남아 있지 않았다. 이 돈 또한 형들에 의해 인출되고 있었다.

    정민이는 더 이상 그들과 함께 살고 싶지 않다고 했다. 짐을 챙겨 나오기 위해 형들을 찾아갔다. 이사 이야기를 꺼내자마자 상황은 험악해졌다. 형들은 소리를 지르며 전화기와 주변 물건들을 집어 던졌고, 갑자기 돈 이야기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급기야 한 사람이 자신이 사용하던 목발을 내리쳐 부러뜨렸다. 부러진 목발은 순식간에 흉기가 되었다. 날카로운 단면으로 벽을 찍어대며 위협적인 분위기를 만들었다.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자물쇠를 손가락 사이에 끼운 채 바닥을 내려치며 더욱 긴장감을 고조시켰다. 자칫하면 크게 다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간이 흐르자 이번에는 노골적으로 시비를 걸어왔다. 맞서지 않고 버티는 일은 생각보다 큰 인내를 요구했다. 그 과정에서 ‘작은 형’이라 불리던 사람이 내 왼쪽 손목을 물었다. 두꺼운 옷을 입고 있었기에 대수롭지 않게 여겼지만, 곧 피멍이 들고 부어오르기 시작했다. 당황스러웠다. 오랫동안 알고 지낸 사람이었지만 전혀 다른 얼굴을 보게 된 순간이었다.

    정민이가 어떻게 이런 환경에서 지내왔을지 생각하니 마음이 답답해졌다.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그곳에서 데려고 나와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결국 상황을 겨우 수습하고, 마치 탈출하듯 그 집을 빠져나왔다. 정민이는 이후 자신이 원하던 곳으로 옮겨 갔다. 예전에 지내던 미신고 시설이었다. 그리고 내 손목에는 그날의 흔적이 아직도 남아 있다. (2003.12)


    - 본문 중에서

     

    저자 소개
    저자 : 김용목

    1963년 전남 벌교에서 태어났다. 35년 동안 장애인과 함께 살아오며 인권운동과 자립생활운동, 그리고 교회와 시민사회의 경계를 오갔다. 장애를 통해 세상을 읽고, 사람을 통해 희망을 배웠다. 김용목에게 글쓰기는 기록이 아니라 사람을 기억하는 일이다. 투쟁의 현장에서 만난 사람들, 장애를 안고 살아가는 이웃들, 신앙 안에서 길을 찾아온 시간들을 오래도록 받아 적어 왔다. 현재 (사)실로암사람들에서 활동하며, 오늘도 사람들의 삶을 받아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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