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 차]
신헌실기(愼軒實記) 해제 / 10
愼軒先生實紀重刊序 신헌선생실기중간서 / 12
愼軒實紀序 신헌실기서 / 14
愼軒實紀卷之一目錄 신헌실기권1목록 / 17
詩 시 / 20
賜回榜宴志感 회방연의 느낌을 적어 주다 / 21
謹次族兄之昇風詠韻 삼가 족형 지승(之昇)의 풍영(風詠) 시를 차운하다 / 21
謹次從兄錫胤韻 삼가 종형 석윤(錫胤)의 시를 차운하다 / 22
次從叔世輝韻 종숙 세휘(世輝)의 시를 차운하다 / 22
寄示舍弟副護軍錫祐 동생 부호군 석우(錫祐)에게 보내 주다 / 22
和縣監柳沃所示韻 현감 류옥(柳沃)이 보여준 시의 운에 화답하다 / 23
贈曺挺厚 조정후(曺挺厚)에게 주다 / 23
賀進士任相舟 진사 임상주(任相舟)를 축하하다 / 23
贈蔡禹碩 채우석(蔡禹碩)에게 주다 / 24
寄武科廉昌吾 무과 염창오(廉昌吾)에게 부치다 / 24
和鄭文成歎世韻 정문성(鄭文成)의 세상을 탄식한 시에 화답하다 / 24
次族弟錫祚韻 족제 석조(錫祚)의 시운을 차운하다 / 24
酬族弟之炅 족제 지경(之炅)과 시를 주고받다 / 25
奉呈族叔胤先 족숙 윤선(胤先)에게 드리다 / 25
次三從弟錫范韻 삼종제 석범(錫范)의 시를 차운하다 / 25
和宋文徵韻 송문징(宋文徵) 시운에 화답하다 / 26
和武科林邦顯所示韻 무과 임방현(林邦顯)이 보여준 시에 화답하다 / 26
和呈朴尙元 박상원(朴尙元)에게 화답하여 드리다 / 26
憶金華景 김화경(金華景)을 생각하다 / 26
序 서 / 27
南陽宋氏族譜序 남양송씨족보 서 / 28
雜著 잡저 / 30
七戒 칠계 / 31
六愼 육신 / 35
題風詠同酬錄 음풍영월(吟風詠月)하여 함께 주고받은 것을 기록하다 / 45
書示再從弟錫五 재종제 석오(錫五)에게 써 보이다 / 47
一門徽蹟 우리 가문의 훌륭한 행적 / 48
附錄 부록 / 51
尤菴先生書牘 우암 선생(1607∼1689) 편지 / 52
回榜慶宴唱酬錄 회방(回榜) 경연(慶宴)에 창수(唱酬)한 것을 기록함 / 54
墓表 묘표 / 64
行錄 행록 / 67
墓誌銘 묘지명 / 71
神道碑銘 신도비명 / 74
墓碣銘 묘갈명 / 80
家乘 가승 / 83
譜牒 보첩 / 86
三綱錄 삼강록 / 87
邑誌 읍지 / 88
淵源錄 연원록 / 89
號譜 호보 / 90
通文 통문 / 91
禮助錄 예조록 / 106
愼軒實記 木活字本 / 110
[본 문]
『신헌실기(愼軒實記)』 해제
『신헌실기』는 송석규(宋錫奎)의 문집이다. 송석규의 자는 성경(星卿)이고, 호는 신헌(愼軒)이며, 본관은 남양(南陽)이다. 호조참판을 지낸 부친 송시(宋蒔)와 함안조씨(咸安趙氏) 시준(時俊)의 딸 사이에서 전남 고흥군 범호리에서 태어났다.
송석규는 타고난 모습이 온화하였고, 행동거지는 장대하였으며, 경사(經史)를 두루 섭렵하였다. 또한 한때 송시열(宋時烈)의 문하에 들어가 성리학에 침잠한 때도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무예를 익히기까지 하였으며, 대장부가 행할 바는 오직 ‘충(忠)’과 ‘효(孝)’일 뿐이라고 하였다. 28세에 무과에 급제하여 훈련첨정(訓鍊僉正)에까지 올랐는데, 평소 갈고 닦은 무예 실력을 인정받은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세상의 이치와 도리가 땅에 떨어지고 의리가 나뉘어져 뜻을 펼 수가 없어서 결연히 용퇴(勇退)하고 입산하여 통곡하면서 시를 지어 자신의 뜻을 내보이기도 하였다. 그리고 고향인 범호리에 당을 짓고서 ‘신헌(愼軒)’이라고 편액을 하고, <육신(六愼)>과 <칠계(七戒)>의 글을 지어 자경문(自警文)으로써 자손들에게 남겨주었는가 하면, 형제 친척들과 시를 주고받으며 즐겼다.
그 후 80세에 이르러서는 통정호군(通政護軍)에 올랐으며, 88세 때에 과거시험에 급제한 지 60년 후에 여는 회방연(回榜宴)이라는 잔치를 나라에서 열어주었고, 90세 때에는 가선대부동지중추부사(嘉善大夫同知中樞府事)의 직에까지 올라 노익장을 과시하였다. 1756년(영조 32)에 생을 마감하니 향년 108세였다.
『신헌실기』는 목활자본 1권 1책으로 구성되었다. 전체 체제를 보면, 19제 20수 시문과 함께 서문인 <남양송씨족보서(南陽宋氏族譜序)>가 있고, 잡저로서 <육신>, <칠계>, <제풍영동수록(題風詠同酬錄)>, <서시재종제석오(書示再從弟錫五)>, <일문휘적(一門徽蹟)> 등이 있다. 그리고 부록으로서 2편의 <우암송선생서독(尤菴宋先生書牘)>과 <회방경연창수록(回榜慶宴唱酬錄)>, 묘표, 행록 등의 글들이 모여 있다.
이후 1971년 송윤회(宋允會)가 신연활자본(新鉛活字本)으로 『신헌실기』 중간본을 발간하였다. 초간본과 비교하여 전체적으로 내용이 일치하는데, 맨 앞부분에 <신헌선생실기중간본서(愼軒先生實紀重刊序)>가 덧붙여졌으며, 맨 뒷 부분에 통문(通文)과 예조록(禮助錄)을 추가하였다. 이런 까닭에 번역문 뒷 부분에 원문을 덧붙이면서, 기본적으로는 초간본 원문을 그대로 실었고, 이후 추가된 <신헌선생실기중간본서>, <통문>, <예조록> 등은 중간본 원문을 실었다.
시문의 경우, 주로 일가친척들의 시에 차운하거나 수창한 작품들이 주를 이루고 있다. 잡저인 <육신>, <칠계>는 모두 자손들에게 경계를 권고하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제풍영동수록」은 18인이 수창한 것에 쓴 글로 송석규의 시관(詩觀)까지도 엿볼 수 있다. 문집의 서문은 송증헌(宋曾憲)이, 발문은 송낙헌(宋洛憲)이 썼다.
『신헌실기』는 17~18세기 호남의 한 문인이 송시열의 학맥을 이어가는 단서를 알려주는 자료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특히 회방연에 관한 기록은 상당히 주목된다. 회방은 과거 급제 후 60주년을 말하는 데, 이때에 과거 급제 동년자끼리 모여서 회방연을 열었다. 회방연은 간혹 문, 무과 급제자들이 치르기도 하였지만, 대개는 20대에 합격할 수 있는 사마시(司馬試) 동방(同榜)들이 누릴 수 있는 영광이었다. 가까운 사례로, 면앙(俛仰) 송순(宋純, 1493~1582)이 87세(1579년) 때 과거에 급제한 지 60년이 되어 면앙정에서 회방연을 열었다. 회방연은 젊은 시절에 과거에 급제해야 할 뿐만 아니라 이후 한 갑자를 더 살아야 하기 때문에 흔치 않은 의례에 해당한다. 송석규는 108세까지 생존하였는데, 회방연 이후에도 20년 넘게 건강을 유지한 데에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
愼軒先生實紀重刊序
嗚呼 我族祖愼軒先生諱錫圭實紀之重刊也 先生以尤翁門徒常自言曰爲人之道惟忠與孝而已 入而盡孝出而登仕宦之崇品將大有爲矣 遽然滄海橫流大義掃地師門遘禍入山痛哭仍作六愼七戒之文先生可謂有志未就矣 何爲重刊秉彛好德人心所同而無古今之殊亦無遠近之不同也 先生之道學出乎倫拔乎萃人人仰慕有本鄕及全光羅南等各通文而欲崇奉之此天理之自然亦人心之所發也 其所謂通文日久年湥恐爲滄桑遺珠故附錄登梓此先生脚下不可無之書也 昔歐陽公有言曰爲善無不報而遲速有時 先生之尙不登醊享之位者或待時而然歟 先生後事允會嗣孫權會無不周旋而今來請文者仁澤聖湜也 先生之詩文曰韶曰武前賢之舒述備矣盡矣不敢復述云
歲辛亥蜡月上浣族孫衡柱謹述
신헌실기 중간 서
아, 우리 족조(族祖) 신헌선생 휘 석규의 실기(實紀)를 중간(重刊)하노라. 선생은 우암 송시열의 문도로 항상 스스로 말하기를 “사람됨의 도리는 오직 충(忠)과 효(孝)일 따름이다. 집에 들어가면 효를 다하고, 나와서는 벼슬에 올라서 관직이 숭품(崇品, 종1품)에 올라 장차 크게 이루는 일이 있을 것이다.”라고 했다. 갑자기 창해(滄海)가 횡류(橫流)하고 대의(大義)가 소지(掃地)하여 사문(師門)이 화를 입자 산에 들어가 통곡하고 이에 「육신(六愼)」과 「칠계(七戒)」의 글을 지었다. 선생께서는 뜻은 있으나 이루지 못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어찌하여 중간(重刊)을 하는가. 천성[秉彝]이 덕을 좋아하는 것은 사람의 마음이 같은 바이니, 고금의 다름이 없고 또한 원근에 같지 않음이 없다. 선생의 도학은 여러 사람 중에서 두드러지고 무리 중에서 우뚝하였으니 사람들이 앙모(仰慕)하여 본향(本鄕)과 전주・광주・나주・남원 등의 각 통문(通文)이 이르렀고, 받들어 숭상하고자 하였으니, 이는 천리가 자연히 이르고 또한 인심이 발현한 것이다.
그 이른바 통문은 날이 오래되고 해가 지나서 상전벽해를 이루도록 알려지지 않을까 두려웠기 때문에, 부록하고 판목에 올리니 이는 선생에게 없어서는 안될 책이다. 옛날에 구양수(歐陽修)가 말하기를 “선을 행하면 보답되지 않은 것이 없다. 다만 더디고 빠른 차이가 있을 뿐이다.”라고 했다. 선생이 아직 배향하는 신위에 오르지 못한 것은 혹 때를 기다려서 그러한 것입니까. 선생의 후손 윤회(允會)와 사손(嗣孫) 권회(權會)가 모두 주선하였고 이제 와서 글을 청하는 자는 인택(仁澤)과 성식(聖湜)이다. 선생의 시문은 소무(韶武)라 할 수 있으니, 예전 현인들의 서술한 것을 다 갖추었으니 감히 다시 쓰지 않겠는가?
신해년(1971) 3월 상순
족손 형주(衡柱) 삼가 씀
愼軒實紀序
竊嘗聞天下之善美未有無淵源者今於愼軒宋公錫圭益驗之矣 公出入我先子尤庵先生之門得聞行己之要訓在家奉親竭力登仕愛君盡誠及見孝廟賓天師門遘禍春秋大義掃地無餘忍痛含寃抱經入山自懸弧以至沒世一百八年之間所事者只忠孝而已 公之七世孫台會以公詩文及附錄編爲一冊者來示余曰吾先祖遺稿酷被欝攸寥寥若是而刊行有年矣 顧舊本校讐不精且有遺漏者諸子孫方合謀重刊幸加考閱而仍賜一言以弁諸卷余擎受而讀之公平居不以事物經心其遇佳山美水良辰令節治酌命儔極其淸歡必發於吟詠而絶無珂馬春陌之氣像嘗作六愼七戒垂裕後昆眞一經之敎也 視世之工聲病鬪華靡悅人耳目者不啻虫鵠矣 嗚呼孟子曰誦其詩讀其書不知其人可乎 然則知其人者亦豈可不誦讀其詩書也耶 覽是編者可得公之始終大畧而自不勝其感發欽歎矣 顧余拙陋更無可以揄揚者何足爲序旣與台會事契彌篤難孤勤意畧述其淵源之所自云爾 時旃蒙赤奮若孟夏日恩津宋曾憲序
신헌실기 서
삼가 일찍이 듣건대, 천하의 선하고 아름다운 것은 연원이 없지 않다고 했는데, 이제 신헌 송공 석규에게는 더욱 그것이 증험 됩니다. 공은 우리 선조 우암선생의 문하에 출입해서 몸가짐의 요훈(要訓)을 얻어서, 집에 있을 때에는 어버이를 봉양함에 힘을 다하고, 관직에 나가서는 임금을 사랑하는데 정성을 다하였습니다. 효종께서 돌아가셨을 때에 선생의 문하가 재앙을 만나 춘추의 대의가 다 쓸어낸 듯 완전히 없어져, 아픔을 참고 원통함을 머금고 경서를 가지고 산에 들어갔으니, 어려서부터 세상을 떠나기까지 108년간 받든 바는 단지 충효일 따름이었습니다. 공의 7세손 태회(台會)는 공의 시문(詩文)과 부록으로 한 책을 엮어서 가져와 나에게 보여주며 말하기를 “우리 선조의 유고가 매우 심히 피해를 입어 답답함과 쓸쓸함이 이와 같으니, 간행한 지 여러 해가 지났습니다. 돌아보건대 구본(舊本)을 교정하니 정밀하지 않고 또 빠진 것이 있어 여러 자손들이 두루 모아 중간을 도모하여 다행히 고열(考閱)하였으니, 이에 한마디 말을 남겨 여러 권을 갖추도록 해주십시오.”라 하였습니다. 저는 공경히 받아 들고 읽었습니다.
공께서는 평소에 외물로서 마음을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경치 좋은 산수와 좋은 명절이나 계절을 만나면 술을 마련하고 벗을 불러서 한껏 즐기되, 반드시 시를 읊조렸습니다. 그렇지만 사치스러운 굴레로 치장한 말을 타고 봄 거리를 달리는 호사스러운 기상은 전혀 없었습니다.
일찍이 <육신(六愼)>과 <칠계(七戒)>의 글을 지어 후손들에게 덕행을 남겨주었으니, 참으로 하나의 경서(經書)를 전해 주는 가르침이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교묘한 소리와 성률(聲律)에 맞지 않는 시부(詩賦)로 아름다움을 다투며 사람의 이목을 기쁘게 하는 것을 보면 벌레나 고니[虫鵠]와 같을 따름입니다.
아, 맹자께서 말하기를 “옛 사람의 시를 낭송하고 그의 글을 읽으면서도 그의 사람됨을 알지 못한다면 말이 되겠는가?”라고 하였으니, 그런즉 그 사람을 알려면 어찌 그 시서를 낭송하고 읽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 편을 열람하면 가히 공의 시종과 대략을 알게 되고, 스스로 그 감동하여 아름다움을 흠탄하고 감탄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돌아보건대 저는 졸루(拙陋)하여 다시 가히 칭찬할 만한 것이 없는 자인데 어찌 서문을 쓸 자격이 있겠습니까. 이미 태회(台會)와 교분을 맺어 더욱 독실하였는데, 은근한 뜻을 저버리기 어려워 약술하니 그 연원은 유래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을축년(1925) 4월 일에 은진(恩津) 송증헌(宋曾憲) 서(序)