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 차]
감사의 글 9
한국어판 저자 서문 12
한국어판 역자 서문 14
주요 단체 약어표 16
들어가는 이야기 - 도우즈 중위가 살았던 평행 세계 21
서론 - 호주복음주의 연구의 이슈, 정의 및 주요 주제들 33
첫 번째 이야기
: 사회 전체를 바꾸는 실험 1740-1835 65
1장 - 개인의 신앙에서 모두를 위한 신앙으로, 1740-1788 67
2장 - 성공회 군목과 죄인의 땅에 세워진 새예루살렘, 1788-1822 95
3장 - 남태평양, 자유정착민, 호주원주민, 빈민선교, 1792-1822 129
4장 - 유형제와 기성 체제에서 벗어나기 시작하다, 1823-1835 161
5장 - 복음주의계 교단의 발전과 다문화선교, 1823-1835 195
두 번째 이야기
: 기독교와 함께한 문명과 상업의 발전 1836-1870 225
6장 - 국가건설의 기반을 다지다, 1836-1850 227
7장 - 발전의 기반을 넓히다, 1836-1850 253
8장 - 교단 강화와 다원화된 기독교, 1836-1850 289
9장 - 두 세상을 대상으로 한 하나님의 사업, 1851-1870 315
10장 - 놀라운 성장 : 개신교단들의 발전, 1851-1870 351
11장 - 영적각성과 다문화선교의 폭발적 확대, 1851-1870 381
세 번째 이야기
: 정점에 서 있던 두 제국 1870-1914 409
12장 - 기독교가 주도한 여권 신장과 사회적 의로움, 1871-1889 411
13장 - 방어기제의 해부학 : 신앙에 대한 도전과 반응, 1871-1889 439
14장 - 교회 성장과 국내외의 타문화선교, 1871-1889 467
15장 - 교회사의 황금기 : 영적각성, 선교, 성결운동, 1871–1889 491
16장 - 기독교 연방에 세워진 노동자의 낙원, 1890-1914 517
17장 - 진리수호 : 자유주의 신학과 고교회파의 도전, 1890-1914 553
18장 - 하나님의 손길이 임하신 날들 : 선교와 영적각성, 1890-1914 587
19장 - 호주 안팎의 다문화선교, 1890-1914 615
결론 - 기독교 제국이 탄생시킨 기독교 국가 645
문헌 자료 659
[본 문]
이 책의 핵심 질문은 복음주의가 호주 역사에 미친 영향이 무엇인가다. 식민지 진출과 점령, 유형지가 자유민공동체로, 통제국가가 인도적이고 참여적인 자본주의 경제로, 통치의 대상이기만 했다가 자치 연방으로 바뀌는 역사와 주요 사건 속에서 복음주의가 미친 영향은 무엇이었을까? 가족생활, 여성, 어린이, 노동자, 호주와 태평양의 원주민과 비영어권 주민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사회복지, 교육, 문화, 국가 정체성에 어떤 기여를 했을까? 이러한 질문에 대한 답은 이 책의 핵심 논리를 뒷받침할 것이다. (53)
역사가들은 18세기 후반 식민지 진출을 낳은 여러 요소 속에 뜨거운 복음주의가 포함되어 있다는 것에는 상당히 긍정적이다. 사료들을 통해 현대 역사학자들은 호주에서 감옥 그 이상을 꿈꾸던 이상주의적이며 인도주의적인 영향을 인정하는 데 어려움이 없다: 그것은 ‘도둑들 사이에 세워진 제2의 로마’(문명의 상징)였다… 물론 다른 대중 역사가들과 독자들 사이에서도 호주진출 자체를 부정적으로 보는 경향이 있고, 따라서 선한 의도로 식민지 개척에 나섰다는 계몽주의와 복음주의의 주장은 양의 탈을 쓴 늑대의 논리로 받아들여진다. 그러나 좋은 의도는 부정하기 힘든 사실이었고, 이를 통해 지옥 옆으로 약간의 천국이 세워졌고, 제2의 로마와 함께 제2의 예루살렘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87-88)
로버트 휴즈는 ‘영국에서 범죄자로 쫓겨 다닌 사람들보다, 더 많은 이들이 호주에서 이런 속박에서 벗어나 생계를 위해 일하고 법을 준수하며 재수감되지 않았다는 점에서는 갱생을 했다’라고 인정했다. 휴즈의 반쪽짜리 인정은 찰스 다윈이 한 세기 반 전에 도달한 결론과 다르지 않다: ‘전체적으로 형벌의 장소로서 감옥은 거의 얻을 것이 없지만, 인간을 겉으로라도 정직하게 만드는 수단으로, 지구 한쪽에서 가장 쓸모없이 방황하는 이들을 지구 다른 한쪽으로 보내, 시민으로 전환시켜 새롭고 훌륭한 나라, 광대한 문명의 중심지를 만들고 있다는 점에서 역사에 유례없는 성공’이었다. 복음주의자들은 이런 성공을 위해 가장 헌신적으로 노력한 이들에 속했다. (122)
이런 류의 자발적 단체들은 평신도, 특히 여성들에게 일할 기회를 주었을 뿐 아니라, 개인들의 신앙에 건강한 보호막을 제공했다. 이를 통해 복음주의자 대부분이 소속된 교단의 통제를 벗어난 자선/전도 사역을 해 나갈 수 있었고, 이를 통해 그리스도의 모범과 명령에 순종하며 사회로 진출할 수 있었다. 이러한 초교파 조직들은 술과 도박에 빠져 벗어날 길이 잘 보이지 않았던 당시 현실에서 ‘시대를 구속’하는 역할을 맡았다. 이들은 주로 복음주의자들에 의해 설립되고 운영되었지만, 보통 시민들의 후원을 기대했고, 실제로 그렇게 도움을 받았다. 호주라는 새로운 땅에서 복음주의자들이 나서서 새로운 사회를 건설해야 한다는 당위, 또는 새로운 국가를 건설할 때 기독교가 토대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에 시비를 거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154-155)
다윈이 선교에 대해 내렸던 의외의 긍정적인 평가는, 실패의 증거가 많을 때 업적을 놓치기 쉬운 역사가들이 꼭 참조해야 할 내용이다. 이 시기 복음주의 운동의 내부 역사에는 여러 문제들이 있었다: 기성 체제에 발목이 잡혀 있던 성공회 복음주의자들; 급속한 세계적 확장에 비해 부진했던 식민지에서, 성공의 열망에 발목이 잡혀 있던 감리교인들; 독단적인 소수에 끌려 다니며 내부 갈등에 쉽게 갈팡질팡했던 침례교와 회중교회 진영; 그리고 토착 문화에 대한 이해 부족으로 인해 감당하기 벅찬 상황에 놓였던 선교사들까지… 이런 내용들로 부정적인 그림을 그리기는 어렵지 않다. 그러나 열악한 환경에도 불구하고 주목할 만한 성공 사례 역시 있지 않은가? 당시 복음주의가 꾸준히 모범적인 사역자와 선교사를 배출했다는 사실을 놓쳐서는 안 된다. (219-220)
복음주의자들은 정치적으로 분열되어 있었지만, 저변에 흐르는 가치는 같았고, 이를 통해 정치적, 경제적 자유주의 운동에 도덕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즉, 책임을 동반하는 자유를 강조했던 것이다. 이것은 도덕적 에너지로 변환 되어 호주에서 유형수제 폐지를 가져왔고, 50년 후 연방 설립에도 영향을 미쳤다. 도서관, 저축 은행, 기술학교, 생명보장협회, 사회클럽 같은 자기 개발 조직들이 과하다 싶을 정도로 많이 세워졌다. 많은 수의 신문과 출판의 자유를 활용해 신앙을 공격하기보다 전파하는 데 사용했다. 국가의 발전을 위해 돕는 쪽에 서서, 공공 정책에 대한 논란이 벌어지면 양쪽 모두에게 충분한 지지를 보내주었다. 지금까지 언급된 내용들은, 복음주의가 당시 역사의 방향과 같이 가고 있음을 보여 주는 증거였다. 이런 방식으로 신앙은 국가의 탄생을 도와주었다. (248)
아이러니하게도 교리와 교회정치에 대한 교회 간의 의견 차이와, 성공회 가톨릭 운동에 관한 교회 내 갈등 때문에, 도리어 교회보다 국가가 연합운동에 더 쉽게 접근할 수 있었다. 교단주의의 파괴적인 영향은 호주 역사에서 쉽게 발견되지만, 그로부터 오는 혜택에 대해서는 별로 다뤄진 적이 없었다. 그러나 거룩하고 경쟁적인 모방은 교파주의적 경쟁보다 호주에 더 도움이 되었다. 가톨릭과 복음주의자 모두, 호주를 사랑했고, 기독교 국가를 건설하기 위해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보다 더 많은 일을 했다는 점은 똑같았다. 이를 통해 호주의 가장 뚜렷한 기독교 사회기반 시설이 세워졌고, 이는 모든 지역사회에서 볼 수 있는 여러 교회건물들을 통해 확인된다. 거룩한 경쟁적 모방은 배타적 경쟁을 성화된 경쟁으로 격상시켰다. 식민지 경제가 자본주의 내부의 치열한 경쟁 때문에 득을 본 것처럼, 영적 제국도 경쟁으로부터 혜택을 입었다. (310-311)
교단 난립은 호주인들이 ‘하나의 신앙’을 가진 이들이었음을 이해하는데 큰 위협이 되지 않는다. 이들은 국가적인 통일성과 문화적인 차이점을 같이 인정하며, 다양성을 격려했고, 이를 통해 서로가 융합했기 때문에 따로 통합이 필요하지는 않았다. 호주 식민지 안에서는 주류파들이 점점 더 힘을 얻으면서, 자신들이 중요한 역할을 차지하는 지역사회를 하나로 만들었다. 교회는 의회나 정부보다 일반인들에게 더 밀착해서 좀 더 통합적인 사회적 가치를 세워갔다. 호주사회는 ‘기독교 국가로서 한 신앙’을 함께 대표하는 적어도 네 개의 교단들을 가지고 움직였다는 뜻이다. (375)
빅토리아 여왕 시대 후반, 복음주의 운동은 영향력의 정점을 찍었다. 이 운동은 산발적이고 좁은 몇몇 영역에서 만의 ‘정점’이 아니었고, 상업, 교육, 정치 등에 큰 상호 작용을 일으켰다. 이를 통해 여성들은 교육을 받고 봉사할 수 있었을 뿐 아니라, 여러 활동을 이끌고 참여하는 새로운 기회를 제공했던 널찍한 훈련장 역할을 해냈다. 이들 활동은 복음주의 교회들의 공통된 신앙고백을 따른다는 점에서 초교파적이었고, 여성의 발전을 위한 길을 열었다는 점에서 초기 여권운동이었고, 자선 활동에 있어서는 영혼의 구원과 육체의 필요를 언제나 엄격히 구분하지 않았다. (434)
활기차고 정치적으로 기민한 개혁가였던 보이스 목사는 ‘정치의 세계’에 빠져 들었고, 많은 일을 해냈다. 그의 방대한 저서인 『호주의 음주 문제 또는 알코올의 재앙과 해결책』은 1893년 영국 금주연맹에 의해 출판되어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다… 그는 빈민가 철거운동도 벌였다: ‘빈민가에서 복음을 전하는 것도 주님의 일이지만, 빈민가를 철거하여 그분의 자녀들이 깨끗하고 건강하며 품위있는 환경에서 살 수 있도록 하는 것도 똑같이 주님의 일입니다.’ 그는 사회적 대의를 위해 정부에 압력을 가하는 수천 통의 편지를 매년마다 썼고, 언론에도 열심히 호소했다… 또한 노령연금 도입을 위한 운동도 성공적으로 이끌어냈다. 그는 교구 안에서 집에서 쫓겨나 갈 곳이 없는 무능력한 노인들의 절박한 처지를 많이 목격했다.그는 유럽의 사례들을 조사하고, 신문에 기고하고, 정치인들에게 로비를 하고, 65세 이상 노인을 위한 국가지원 연금운동을 위한 연맹 설립을 주재했다. (534-535)
호주 식민지의 복음주의자들은 새로운 사회적 정치적 가치에 기초를 둔, 번영하는 지역 공동체를 세우려고 노력한 이들 중에서도 가장 앞선 사람들이었다. 이 중 좀 더 보수적인 그룹, 특히 성공회에 속한 사람들은 대지주와 교구장으로 대표되는 기성 체제를 그대로 옮겨놓으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러한 시도가 실패로 돌아가는 것을 보고 좋아했고, 참여적이고 민주적이며 자주적인 자본주의 경제체제를 향해 가는 길에 함께 힘을 모았다. 중요한 점은 복음주의자들이 이 새로운 식민지에 영국이 가졌던 옛 최선의 가치들을 재현하려고 애썼다는 것이다. 그들이 무엇이 최선인지에 대해 모두 동의한 것은 아니었지만, 이들은 보수적인 내용과 혁신적인 내용을 함께 추진하는데 탁월했다. 식민지가 소수 엘리트로부터 대중 기반의 정부로 바뀌면서, 복음주의자들은 윤활유 역할을 하려고 애썼다. 그들의 신앙이 ‘구식의 길을 버리고 새로운 것을 창조하고, 새로운 사회를 만들기 위한 자유’를 허락했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6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