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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허수아비

    • 박상철(박출) 저
    • 넥센미디어
    • 2026년 05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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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품 규격 정보
    상품상세정보
    ISBN ISBN-13 : 9791193796818
    쪽수17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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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품구성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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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차

    제1부 - 허수아비

    간이역 …………… 14
    콩 …………… 16
    배꼽 해바라기 …………… 17
    바람부는 날에는 …………… 18
    미세먼지 …………… 20
    인생이란 …………… 21
    촌로 …………… 23
    젓가락 …………… 24
    빈대 …………… 25
    모모씨 …………… 26
    허수아비 …………… 28
    이름도 없는 계곡을 마구 걷는다 …………… 30
    가심 …………… 32
    가을바람 …………… 33
    감나무 아래 …………… 34
    강풀 하나 …………… 35
    개망초 …………… 36
    거기 …………… 37
    걱정과 팔자 …………… 38
    겨울 끝 …………… 40
    겨울 …………… 41
    고향의 봄 …………… 42
    그대 사랑한 죄 …………… 44
    그림자 탄 너 …………… 46
    그리움 …………… 48
    그대 어디 …………… 49
    긍정과 평화 사이 …………… 50

    제2부 - 기다림의 씁쓸함

    기다림의 쓸쓸함 …………… 52
    기차여행 …………… 54
    길은 그리움 …………… 56
    꽃구경 가요 …………… 57
    꽃 달래 …………… 58
    꽃 시절 …………… 59
    꽃은 꽃 …………… 60
    꽃 피기 전 …………… 61
    꽃 …………… 62
    꽃 화단 …………… 63
    꿈 속엔 비 …………… 64
    꿈을 그리다 …………… 66
    꿈을 써요 …………… 67
    꿈 …………… 68
    꿈 무지개 …………… 69
    나는 길을 만든다 …………… 70
    나라서 …………… 71
    나비 …………… 72
    나의 스타 …………… 73
    나의 태양은 모두의 것 …………… 75
    나이 …………… 76
    내 맘 …………… 77
    머리를 말려 주세요 1 …………… 78
    너라서 …………… 79
    눈시울 …………… 80
    눈물 한 상석 …………… 81

    제3부 - 물끄러미 아침

    능소화 …………… 84
    당신 가고 나면 …………… 85
    동짓날 …………… 86
    드림 …………… 87
    들고 나는 것에 대하여 …………… 88
    마음마저 설핏 …………… 89
    만추 …………… 90
    말 …………… 91
    머리를 말려 주세요 2 …………… 92
    먼지 …………… 93
    모기와 향 …………… 94
    모래시계 …………… 95
    모르는 게 많아서 …………… 97
    물고기 꿈 …………… 99
    물끄러미 아침 …………… 101
    물소리 …………… 102
    미래로 문 열고 …………… 103
    바람 지나간 자리 …………… 104
    반성문 …………… 105
    밤 …………… 107
    변명 …………… 108
    봄에 핀 꽃 …………… 109
    비야 …………… 110
    울음이 지나간 자리 …………… 111
    사람 냄새 …………… 113
    사랑과 눈치 사이 …………… 114

    제4부 - 인생아 고마워

    사랑은 연필로 …………… 116
    사랑은 …………… 117
    사실 …………… 118
    살평상 위 누운 여름 …………… 119
    살면서 가끔 …………… 121
    슬픈 둥지 …………… 122
    여름은 노래다 …………… 123
    옛날 강 …………… 124
    금값 …………… 125
    오늘이 좋은 날 …………… 126
    유아독존 …………… 128
    익은 열매 …………… 130
    인생아 고마워 …………… 132
    청소 중 …………… 133
    한고비 …………… 134
    화상주의 …………… 135
    안식년 …………… 137
    아침마당 …………… 139
    임자 나랑 같이 가요 …………… 141
    가장 젊은 날 …………… 143
    중년 일기장 …………… 145
    새벽짓는 농부 …………… 147
    치매 …………… 148
    좋은 이유 …………… 150
    빈 지게 …………… 151
    휴대폰 배터리 …………… 152
    평설(정유지, 문학평론가) …………… 153

    추천사

    나태주 (시인)
    일찍이 박상철 가수님을 만난 일이 있습니다. 인간적으로 매우 선량하고 서글서글한 분이었습니다. 노래에 대해서는 제가 잘 알지 못하지만, 사람의 마음을 후련하게 하는 목소리가 지치고 피곤한 인간의 마음을 새롭게 부추겨 주는 데 충분하다는 느낌이었습니다. 그 사람에 그 노래라고나 할까요!
    그런데 이번에 박 가수님이 시집을 내겠다고, 원고를 보내왔습니다. 듣기로는 박상철 가수님은 2025년 「오륙도신문」의 신춘문예에 당선된 시인이라고 그럽니다. 당선작은「허수아비」, 놀랍습니다. 노래만 잘 부르는 줄 알았는데 시까지 잘 쓰셔서 신춘문예에 당선되셨다니!
    실상 가수분들이 부르는 노래 가사가 본래는 시였습니다. 그것도 좋은 시였습니다. 그런 좋은 시를 노래로 부르다 보니 저절로 시가 써지고 시인으로도 등단하셨나 봅니다. 매우 좋은 일이고 놀라운 일입니다. 그렇지요. 보내주신 원고를 읽어보았습니다.
    우선은 말법이 활달하고 여유롭고 습윤濕潤했습니다. 습기가 있고 또 윤기가 있다는 말입니다. 시라는 예술은 언어로 표현되는 예술인데 말법이 이렇게 습윤하다는 것은 그 자신 시인으로서 풍부한 자질과 능력을 가졌다는 것을 의미하며 또 멀리까지 나아갈 수 있는 에너지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부디 멀리까지 가시어 인생의 아름답고 곡진曲盡한 내력들을 많이 살피시고 좋은 시로서 우리에게 돌려주시기 바랍니다. 이제 박상철 가수님은 ‘가수’이면서도 ‘시인’인 ‘음유시인’입니다. 그런 음유시인을 일러 나는 ‘가인歌人’이라고 부릅니다. ‘가수+시인’이란 뜻입니다.
    박상철 가인님! 첫시집 축하드립니다. 더욱 좋은 글로 이 시대 어두운 심장들을 잘 적셔주고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문정희 (시인)
    고난과 상처를 헤쳐오면서도 끝내 간직한 시심이 놀랍다.
    밤 울음이 모여 흐느끼고 있는 그의 시어는 천 갈래, 바람에 찢긴 누더기 그 끝자락마다 언어들이 매달려 한 편의 시가 되어 빛을 발한다.
    롤러 코스트 같은 삶을 ‘노래’와 ‘시’로 지켜 낸 시간의 시작과 끝에 대해 아프게 묻고 대답하고 있다. 그의 꿈과 상상력이 이 한 권의 시집 속에서 등대처럼 환하게 불을 켜고 있다.

    출판사 서평

    <평설>
    “치열한 자유를 갈망하는 존재적 결정체, 황금들녘을 돌보다”
    - 가인 박출 시집 <허수아비>의 시세계 -
    정유지(문학평론가, 경남정보대 교수)

    1. 인생의 정점에서 존재의 미적 거리를 완성하다.
    - 허수아비, 치열한 자유의 형식

    가수이자 시인인 박출(박상철)의 첫 시집 <허수아비>는 단순한 장르의 확장이 아니다. 그것은 노래에서 시로 건너오는 감각의 이동이며, 대중적 정서가 어떻게 절제된 언어로 정련되는지를 보여주는 한 사례다. <무조건>, <황진이>로 대표되는 그의 음악적 성취는 이 시집에서 보다 낮고 단단한 문장으로 재구성된다. 이때 핵심은 ‘확장’이 아니라 ‘환원’이다. 더 크게 말하기보다 더 낮게 내려앉는 선택, 바로 그 지점에서 ‘허수아비의 미학’이 형성된다.
    이 시집의 중심에는 결핍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놓여 있다. 허수아비는 비어 있음의 상징이지만, 여기서의 공백은 결핍이 아니라 다른 형식의 충만이다. 눈물의 부재는 감정의 결여가 아니라 감정의 과정에 머물게 하는 방식이다. 울음을 드러내지 않는 대신, 내면에서 오래 견디는 구조. 이 시적 주체는 감정을 소비하지 않고 축적한다. 허수아비는 서 있는 존재가 아니라, 시간을 견디는 존재로 읽힌다. 이러한 인식은 개별 작품들 속에서 차분하게 확장된다. ‘금값’에서 금은 더 이상 사치의 기호가 아니라 삶의 의례를 구성하는 필수 조건으로 제시된다. 물질은 곧 존재의 문제로 이어진다. ‘꿈’ 역시 결핍을 메우는 환상이 아니라, 삶을 지속시키는 내면의 자원으로 기능한다. ‘안식년’은 이 시집의 중요한 전환점이다. 여기서 휴식은 멈춤이 아니라 배우는 시간이다. 삶의 문장을 익히는 과정이며, 말하지 않음으로써 더 깊이 말하는 방식이다. 시인은 이 시간을 통해 언어의 밀도를 다시 조율한다. 또한 ‘아침마당’은 익숙한 대중적 공간을 새로운 시선으로 환기한다. 중요한 것은 대상의 크기가 아니라 바라보는 방향이다. 그는 거창한 이야기를 피하고, 가장 낮은 자리에서 가장 깊은 울림을 끌어낸다. 이는 대중 속에서 형성된 그의 감각이 문학 속에서 다시 정리되는 지점이기도 하다.
    ‘중년의 일기장’은 삶을 기록이 아니라 편집의 과정으로 바라보게 한다. 기억은 그대로 남지 않고 선택되고 배열된다. 시는 결과가 아니라 그 과정에 가깝다. ‘가장 젊은 날’에서는 시간의 감각이 전환된다. 젊음은 지나간 시절이 아니라 현재 속에서 다시 정의되는 감각이다. 결국 <허수아비>는 부재를 회피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부재를 통과하며 새로운 감각에 도달한다. 허수아비로 서 있는 시간, 그 견딤의 순간이 시인에게는 결핍을 넘어서는 계기가 된다. 부재는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그 시작에서 시인은 하나의 상태에 도달한다.
    치열한 자유, 그 자유는 소란스럽지 않다. 다만 오래 견디며, 조용히 자신의 자리를 지킨다. 그리고 <허수아비>는 바로 그 자리에서 완성된다.

    눈물이 없다고 가슴까지 메마른 건 아니다
    바람에 흔들리지만 마음은 굳건하다
    때때로 혼자 뭉게구름을 타고 올라
    온 들녘을 다녀도 발자국을 남기지 않는다

    바람에 찢긴 누더기
    외로움에 부러진 가지를 놓지 못하고
    너덜너덜해진 팔
    새들은 제 세상인 양 집을 짓는다

    우거진 수풀 사이
    내 겨드랑이는 종달새 집
    바람에 기울어진 몸이
    몇몇 새를 쫓지 못하고 동거를 허락한다

    오래된 들녘에 덩그러니 나는 버려져 있어
    빈 방을 안고 몰래 나간 새들을 기다린다

    커튼을 올려도 소식 없는 아이들처럼
    나는 독거노인이 되어 저물녘 소멸을 노래한다

    아무도 찾지 않는 바람 부는 들녘에
    철탑 하나 나 하나
    서로가 말로 쓰다듬고 다독여 줄뿐
    - 「허수아비」전문

    「허수아비」는 눈물의 부재를 결핍으로 오해하지 말라는 인식에서 출발한다. 이 시에서 감정은 직접 표출되지 않는다. 대신 들녘에 세워진 하나의 사물, 그러나 감정을 내면에 간직한 존재로서의 허수아비를 통해 우회적으로 드러난다. 울지 않는 대신, 울음을 견디는 방식으로 세계와 마주하는 존재. 시적 화자는 그 자리에서 인간을 넘어선다. 이 시의 특징은 감정을 말하지 않으면서도, 감정의 깊이에 도달한다는 데 있다. ‘바람에 흔들리지만 마음은 굳건하다’라는 구절은 이 시가 선택한 태도를 분명히 보여준다. 흔들림과 견딤이 동시에 존재하는 상태, 그것은 감정의 과잉이 아니라 절제된 감각의 결과다. 시인은 울음을 삭제하고, 대신 흔들리는 몸과 남지 않는 발자국으로 존재의 무게를 드러낸다. 특히 눈에 띄는 지점은 파손된 신체의 이미지가 새로운 의미로 전환되는 순간이다. 찢기고 부러진 몸은 결핍의 표식이지만, 동시에 새들이 머무는 공간이 된다. 결핍이 곧 타자의 자리가 되는 역설. 이때 허수아비는 더 이상 쓸모없는 존재가 아니라, 타자의 삶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으로 확장된다. 고독은 여기서 단절이 아니라 느슨한 연대의 방식으로 바뀐다. 그러나 시의 정조는 마지막에 이르러 다시 낮아진다. ‘독거노인’이라는 비유는 자연의 이미지를 사회적 현실로 끌어내리며, 허수아비를 인간 세계의 소외된 존재와 겹쳐 놓는다. 돌아오지 않는 새들은 관계의 단절을 환기하고, 기다림은 희망이 아니라 반복된 습관에 가까워진다. 끝내 남는 것은 ‘철탑 하나 나 하나’라는 병치다. 두 존재는 서로를 말로 쓰다듬는다. 이 조용한 위로는 이 시가 지향하는 최소한의 윤리이기도 하다. 아무도 찾지 않는 자리에서 서로를 부르는 일, 그것이 사라지지 않기 위한 마지막 방식처럼 제시된다. 이 시는 격렬한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다. 대신 바람, 들녘, 새와 같은 미세한 요소를 통해 내면을 천천히 드러낸다. 그리고 그 느린 과정 속에서, 울지 않는 존재가 끝내 무너지지 않는 방식을 보여준다. 이러한 태도는 「금값」에서도 이어진다. 시인은 불안을 극복하기보다, 그것을 견디는 방식으로 하나의 신념을 형상화하고 있다.

    떨어질 줄 모르네, 돌 반지 반 돈 샀지
    거덜 난 주머니라 어쩔 수가 없었지
    못나서 원망해 봐도
    남은 건 드난살이

    명주실 꺼내어 오래오래 살라고
    목에 감아 주셨던 내 증조할머니
    통째로 말아먹은 생
    비루하게 연명한다

    한 달 치 생활비를 다 털어 넣고 보니
    한 달 어찌 버틸까, 폐휴지 주워야 하나
    오늘은 경사스러운 날
    무릎이 시큰거린다
    - 「금값」전문

    「금값」은 이른바 ‘금값 신드롬’을 외부에서 설명하는 데 머물지 않고, 그것이 개인의 삶 속으로 어떻게 스며드는지를 보여주는 시다. 금은 단순한 경제적 가치가 아니라, 불안한 시대를 견디기 위한 심리적 안전장치이자 타자의 시선과 결합된 상징으로 작동한다. ‘돌 반지 반 돈’이라는 장면은 사소한 소비가 아니다. 그것은 금이 이미 일상의 깊숙한 곳까지 침투해 있음을 드러내는 징후다. ‘거덜 난 주머니’에도 불구하고 금을 사야 하는 상황은, 금이 더 이상 사치품이 아니라 포기할 수 없는 필수 조건으로 변했음을 말해준다. 이때 선택은 개인의 의지라기보다 구조에 의해 유도된 결과에 가깝다.‘못나서 원망해 봐도’라는 자기 비하는 이러한 구조적 압력을 개인의 책임으로 오인하는 내면의 흔적이다. 시는 여기서 개인의 감정이 어떻게 사회적 논리에 의해 길들여지는지를 조용히 드러낸다. 증조할머니의 기억은 중요한 대비를 이룬다. ‘명주실’을 목에 감아주던 행위는 삶의 안녕을 기원하던 비물질적 보호의 방식이었다. 그러나 현재에 이르러 그 자리는 금이라는 물질적 가치로 대체된다. 과거의 기원과 현재의 신념 사이의 간극은, ‘통째로 말아먹은 생’이라는 표현 속에서 더욱 선명해진다. ‘한 달 치 생활비를 다 털어 넣고’라는 선택은 경제적으로는 위태롭지만, 사회적 질서 속에서는 오히려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진다. 금값이 상승할수록 이러한 선택은 더욱 정당화된다. 그러나 곧이어 ‘폐휴지 주워야 하나’라는 생존의 위기가 드러나면서, 그 이면의 균열이 생긴다. 그럼에도 ‘오늘은 경사스러운 날’이라는 선언이 유지되는 점은 인상적이다. 이는 금값 신드롬이 단순한 경제 현상을 넘어, 감정과 언어의 층위까지 깊이 작동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마지막의 ‘무릎이 시큰거린다’는 감각은, 추상적 가치가 결국 개인의 육체적 고통으로 귀결됨을 상징한다. 결국 이 시는 금값의 상승을 비판하기보다, 금값이 인간의 삶을 이해하는 방식 자체를 어떻게 바꾸어 놓는지를 드러낸다. 여기에는 단순한 궁핍이 아니라, 가치의 기준이 뒤바뀐 시대에 대한 감각이 담겨 있다. 금은 축적의 대상이 아니라, 불안을 견디기 위한 마지막 신념으로 자리한다. 이러한 시선은 「꿈을 그리다」로 이어진다. 시인은 현실의 결핍을 단순히 드러내는 데 그치지 않고, 상상력을 통해 그것을 다시 그려낸다. 꿈은 도피가 아니라, 삶을 지속하게 하는 또 하나의 방식으로 제시된다.

    슬퍼질 땐 꿈을 써요, 웃음이 나오는 꿈을
    풍성한 상상력이 행복을 키워주죠
    눈 감고 사유의 길 걷다
    제멋대로 안착해요

    바다를 상상해요, 하늘을 날아가요
    보트를 옮겨타고 발리섬을 여행해요
    한 달에 한 번 볼 수 있는
    북광 축제 열려요

    북극 가고 남극 가고 사막도 가봅니다
    행복을 노래하는 심상의 꿈을 써요
    젊음을 반죽해 봅니다
    맵고 맛난 단꿈을
    - 「꿈을 그리다」전문

    「꿈을 그리다」는 상상력을 가볍게 유희하는 시처럼 보이지만, 그 이면에는 현실의 결핍을 견디기 위한 내면의 전략이 정교하게 놓여 있다. 이 시에서 꿈은 단순한 도피가 아니라, 현실을 지탱하는 또 하나의 형식으로 기능한다. ‘슬퍼질 땐 꿈을 써요’라는 문장은 감정을 스스로 조절하려는 태도를 드러낸다. 여기서 꿈은 저절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쓰는’ 것이다. 웃음을 만들어내기 위해 의도적으로 구성되는 감정. 이는 감정조차 자연이 아니라 선택과 조율의 결과임을 보여준다. 이때 상상력은 단순한 재능이 아니라, 결핍을 보완하는 내면의 자원으로 작동한다. 아울러 상상이 공간을 넘어 확장된다. 바다와 하늘, 발리섬으로 이어지는 이동은 자유를 표방하지만, 그 자유는 심상 속에서만 가능하다. ‘보트를 옮겨타고’라는 구체적 장면은 상상을 현실처럼 생생하게 만들면서도, 동시에 그것이 현실이 아님을 드러낸다. ‘한 달에 한 번 볼 수 있는’ 축제라는 설정은, 꿈마저도 일정한 질서와 리듬 속에서 구성된다는 점을 보여준다. 상상은 무한한 방종이 아니라 절제된 구성의 산물이다. 더 나아가 상상은 더욱 확장된다. 북극과 남극, 사막까지 이어지는 공간의 병치는 외부 세계의 이동이라기보다 내면 세계의 확장을 의미한다. ‘행복을 노래하는 심상의 꿈’은 감정이 결과가 아니라 생산되는 과정임을 드러낸다. 특히 ‘젊음을 반죽해 본다’는 표현은 젊음을 주어진 시간이 아니라 다시 만들어낼 수 있는 감각으로 전환한다. 이어지는 ‘맵고 맛난 단꿈’은 달콤함과 매움을 함께 품으며, 삶의 기쁨과 고통이 분리되지 않은 채 공존함을 보여준다. 이 시의 특징은 상상력을 낭만적으로 미화하지 않는 데 있다. 오히려 상상력이 현실의 결핍을 보완하면서도, 동시에 그것을 가리는 방식까지 함께 드러낸다. 꿈은 도피가 아니라 현실과 끊임없이 교섭하는 과정이다. 결국 이 작품은 하나의 질문에 도달한다. 우리는 꿈을 통해 현실을 벗어나는가, 아니면 현실을 견디는 또 다른 방식을 만들어내는가. 이 질문은 자연스럽게 「안식년」으로 이어진다. 시인은 그곳에서 삶의 문법을 다시 배우며, 존재를 견디는 또 하나의 방식을 모색한다.

    가는 것에 대한
    붙잡을 수 있는 것과 없는 것

    오래된 추억 한 자리
    그것은 타이머를 돌려놓듯 슬프고도 아픈 현실

    멈추지 않고 가는 시간
    남아있는 시간은 또 얼마쯤일까

    책을 읽으며 꽃을 본다
    경쟁하듯 살아왔어도 남아있는 온기가 뜨거웠는데
    끊임없이 오르다 멈춰 선 지점
    춥다

    무의식과도 같은 두려움이 고지를 향해 간다
    경험하지 못한 세계 속으로

    밝음과 어둠이 교차하는 곳으로

    내 살아온 지난날이 알 수 있을까
    또 다른 도전을 위해 달렸고
    이제 내려놓을 때

    방 모서리에서 지나온 길을 바라본다
    정리되지 않은 생각이 차곡차곡 쌓인다

    어디로 가야 할지
    롤러코스터를 타는 가슴
    휴식일까 안식일까
    은퇴 후 삶이 시작점일까 끝점일까

    난 오늘 서툰 핸들을 잡고 인생 학원에 등록한다

    천 갈래 길을 보며
    - 「안식년」전문

    「안식년」은 생의 한 시기를 단순한 ‘멈춤’으로 보지 않는다. 이 시에서 안식은 휴식이 아니라, 삶을 다시 배우는 시간이다. 익숙했던 일상에서 한 발 물러나, 지금까지의 삶을 돌아보고 앞으로를 새롭게 구성하려는 사유의 과정이기도 하다. ‘가는 것’과 ‘붙잡을 수 없는 것’ 사이의 긴장을 통해 시간의 되돌릴 수 없음에 주목한다. ‘타이머를 돌려놓듯’이라는 표현은 과거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을 드러내지만, 그것이 결국 ‘슬프고도 아픈 현실’로 이어진다는 점에서 기억은 위안이 아니라 반복되는 상처로 남는다. 멈추지 않는 시간 앞에서 화자는 자신의 남은 시간을 가늠하려 하지만, 그 물음은 답을 얻기보다 시간의 불가해함을 더욱 또렷하게 만든다. 또한 삶의 열기와 식어감이 대비된다. ‘경쟁하듯 살아왔어도 남아있는 온기가 뜨거웠다’는 회상은 과거가 단순한 소모가 아니라 의미와 열정을 지닌 시간이었다는 점을 보여준다. 그러나 ‘오르다 멈춰 선 지점 / 춥다’라는 전환은 더 이상 상승의 논리가 유효하지 않은 순간을 포착한다. 여기서 ‘고지’는 성취의 자리이면서 동시에 고립의 공간이며, 그곳의 ‘추위’는 역할 이후에 남겨진 공백을 상징한다. 이 시의 핵심은 ‘인생 학원’이라는 비유에 있다. ‘서툰 핸들을 잡고’ 그곳에 ‘등록’한다는 표현은, 삶이 익숙한 반복이 아니라 다시 배워야 할 과정으로 전환되었음을 뜻한다. 인생은 완성된 결과가 아니라 계속 수정되고 다시 쓰이는 과정으로 드러난다. ‘학원’이라는 공간은 배움의 장소이자 동시에 결핍을 전제하는 자리다. 따라서 ‘인생 학원’은 은퇴 이후의 삶이 끝이 아니라, 또 다른 가능성과 불안을 함께 품고 있는 상태임을 보여준다. ‘천 갈래 길’ 앞에 선 화자의 모습은 선택의 자유가 곧 불안이 될 수 있음을 말해준다. 이전의 삶이 목표와 경쟁 속에서 비교적 단선적으로 이어졌다면, 이제의 삶은 방향이 너무 많아 오히려 길을 정하기 어려운 상태다. ‘롤러코스터를 타는 가슴’이라는 표현은 이러한 감정의 흔들림을 생생하게 드러낸다. 안식년은 고요한 정지가 아니라, 새로운 균형을 찾아가는 과정이다. 결국 「안식년」은 은퇴 이후의 삶을 ‘끝’이 아니라 ‘다른 시작’으로 바라보게 한다. 삶은 어느 한 시점에서 완성되지 않으며, 우리는 끝까지 배우는 존재로 남는다. 이러한 인식은 「아침마당」으로 이어진다. 시인은 그곳에서 다시 삶의 흔적을 더듬으며, 인간적인 온기와 일상의 의미를 천천히 복원해 나간다.

    비가 오는데
    질펀 질펀 걸어간다

    따라오는 건
    발자국

    잘 살았던
    못 살았던
    발자국은 남아

    몇번 쯤 울어도 보고
    몇번은 웃어도 보고
    저기 저 발자국 좀봐

    또각 또각
    질펀 질펀

    무척이나 내딛기 어려웠던
    수많은 순간들
    한발 떼기가 그렇게 힘이 든다

    비가 온다
    겨울비

    그리고
    아침마당엔 훈훈한 정이 있다
    - 「아침마당」전문

    「아침마당」은 비 내리는 풍경 속에서 삶의 흔적을 더듬어 가다가, 끝내 인간적 온기의 자리로 나아가는 구조를 지닌다. 이 시는 고단한 생의 시간을 감각적으로 불러내면서도, 그 흔적들이 서로를 향해 이어질 수 있는 가능성을 조용히 제시한다. ‘발자국’의 서사가 ‘정’의 서사로 옮겨가는 순간, 시의 의미는 비로소 또렷해진다. ‘질펀 질펀 걸어간다’는 표현은 단순한 움직임이 아니라 삶의 무게를 짊어진 존재의 상태를 드러낸다. 비에 젖은 길 위를 걷는 장면은 순탄하지 않았던 삶의 조건을 자연스럽게 환기한다. 이어지는 ‘발자국’은 살아온 시간의 흔적이자 지워지지 않는 존재의 증거로 자리한다. ‘잘 살았던 / 못 살았던’이라는 구분은 의미를 잃고, 결국 남는 것은 ‘지나온 시간’ 그 자체다. 그리고 감정이 간결하게 정리된다. ‘몇 번 울고, 몇 번 웃는다’는 반복은 삶이 기쁨과 슬픔의 교차 속에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담담하게 보여준다. 그러나 시선은 곧 자신으로부터 한 걸음 물러난다. ‘저 발자국 좀 보라’는 말은 삶을 일정한 거리에서 바라보려는 태도다. ‘또각 또각 / 질펀 질펀’이라는 소리의 대비는 삶의 리듬이 단일하지 않음을 자연스럽게 드러낸다. ‘한 발 떼기가 힘들다’는 고백이 중심에 놓인다. 삶은 이어지는 시간이 아니라, 매 순간 선택을 요구하는 과정이며, 그 선택은 언제나 부담을 동반한다. ‘겨울비’는 그 부담을 더욱 선명하게 만드는 감각적 장치다. 그러나 이 시는 고단함에 머물지 않는다. 마지막의 ‘아침마당엔 훈훈한 정이 있다’는 문장은 앞선 흐름을 새롭게 묶는다. ‘아침마당’은 특정 공간이라기보다, 사람들이 서로의 삶을 나누는 관계의 자리다. 개인의 발자국이 결국 이곳으로 이어질 때, 삶은 비로소 견딜 수 있는 의미를 갖는다. 여기서 ‘정’은 감상적 위안이 아니라, 시간을 통과한 이후에 형성되는 관계의 온기다. 「아침마당」은 삶의 무게를 덜어주는 시가 아니라, 그 무게를 견디게 하는 조건을 보여준다. 각자의 발자국은 고단하게 이어지지만, 그것들이 서로를 향해 닿을 때 삶은 지속될 수 있다. 이 소박한 인식이 이 시의 깊이를 만든다. 한편, 이러한 시선은 더 넓은 존재의 문제로 확장된다. 세상이 우리의 의지대로 완결되는가라는 질문 앞에서, 인간은 각기 다른 도량 속에서 서로 다른 결실에 이른다. 박출 시인의 시세계는 이 조건을 회피하지 않는다. 그는 어둠의 시간을 통과하며, 그 끝에서 서정을 길어 올린다.

    그의 시는 성취의 순간보다 존재 자체에 주목한다. 충만 속에서도 여백을 인식하고, 완결 대신 균열을 받아들인다. 이른바 ‘존재의 미학’은 결핍을 보완하는 데 있지 않고, 그것을 하나의 형식으로 받아들이는 태도에서 비롯된다. 그리하여 그의 시는 성취의 언어가 아니라 견딤의 언어로 완성된다. 그리고 바로 그 지점에서, 삶은 비로소 깊이를 획득한다.

    2. 띠뜻한 서정을 직조하고 노래하는 절대 가인의 탄생

    상처를 통과해 타인의 고통을 어루만질 수 있는 자만이, 감동을 생성하는 별이 된다. 시는 치유의 결과가 아니라, 치유를 향한 긴 통과의 흔적이다. 그 흔적이 언어로 굳어질 때, 우리는 비로소 한 존재의 내면이 발광하는 순간과 마주한다.
    박출의 시편들, 특히 ‘휴대폰 배터리’는 사물의 자기 고백이라는 익숙한 형식을 빌리되, 그것을 단순한 의인화의 차원에 머물게 하지 않는다. 사물은 인간을 대신해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인간이 어떻게 존재하는지를 비추는 거울로 기능한다. 배터리의 소진은 삶의 고갈이며, 충전은 회복이 아니라 다시 살아내야 하는 필연의 명령이다. 이때 사물은 대상이 아니라, 존재의 은유적 장치로 전환된다. ‘새벽 짓는 농부’와 ‘빈 지게’에 이르면 그의 시선은 자연과 기억의 심층으로 스며든다. 그러나 자연은 더 이상 외부의 풍경으로 머물지 않는다. 그것은 인간의 시간과 뒤섞이며 하나의 리듬으로 호흡한다. 특히 ‘빈 지게’는 비어 있음의 역설을 극대화하는 이미지다. 아무것도 담지 않은 형식 속에, 오히려 기억과 감각의 잔여가 응축되어 있다. 시는 바로 그 잔여에서 발생한다. 남겨진 것, 지워지지 않는 것, 그 미세한 흔적들이 언어의 근원이 된다.
    <허수아비>의 미학은 ‘비어 있음의 충만’이라는 역설로 귀결된다. 그는 말하지 않음으로써 더 깊이 발화하고, 소유하지 않음으로써 존재를 증명한다. 허수아비는 무위의 상징이 아니라, 가장 오래 견디며 서 있는 존재다. 시인은 그 견딤의 시간을 언어로 번역하는 자다. 이 시집은 화려한 수사를 의도적으로 거부한다. 대신 낮고 느린 목소리로, 오래 지속되는 울림을 구축한다. 대중가요에서 익숙했던 그의 음성은 시 속에서 전혀 다른 깊이를 획득한다. 노래가 감정을 순간적으로 폭발시킨다면, 시는 그것을 가라앉히고 침전시킨다. 그 침전의 바닥에서 우리는 비로소 한 인간의 고독과 조우한다. 그리하여 <허수아비>는 어떤 선언도 하지 않는다. 다만 서 있다. 그리고 그 서 있음 자체가 하나의 미학으로 완결된다.

    “하나를 알면, 무리하지 않는다. 그 하나가 사랑이다”

    성경의 고린도전서 13장 13절은 말한다. 믿음과 소망과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이되, 그중 가장 큰 것은 사랑이라고. 사랑은 단순한 감정의 발현이 아니라, 존재를 타자에게 내어주는 방식이다. 가족애와 동료애를 넘어, 아무런 대가 없이 베푸는 박애와 인류애에 이르러 그것은 감정을 초월한 윤리적 실천이 된다. 메마른 세계를 적시는 것은 거창한 이념이 아니라, 부드러움과 따뜻함이다. 얼어붙은 감정의 표면을 녹이는 것은 언제나 낮은 온도의 온기다. 서정성 또한 그 지점에서 출발한다. 그리고 박출의 시는 그러한 온기를 내면 깊숙이 간직하고 있다. 그의 시적 태도는 단순한 감상의 차원을 넘어, 존재를 끌어안는 작가정신으로 확장된다. 그리하여 그의 서정은 감정을 넘어, 하나의 윤리로서 우리 앞에 선다. 「임자 나랑 가요」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여보
    나는 임자가 왜이리 좋은지 몰겠네
    말도 몬 해 입술이 다 불어 텃어라

    투덜투덜대는 솥뚜껑 닫으려니
    김이 모락모락 거침 업구마이라
    허, 거참 나도 몰것소 임자가 좋네 잉

    그류 뭐 있어 인생 뭐 있냐 말여
    울도 인자 마이 살았응게 토닥 토닥 토닥여요

    그냥 저냥 가는 세월마저도 저리 제멋대로 가는디
    우도 목줄 풀고 자유롭게 살아야 안 허겄소

    임자 갈때는 절대 혼자 가지 말더라고
    꼭 나 델고 가랑께

    임자는 참말로 내 전부여
    참말이랑께 믿어줘

    임자 먼저 가고 나혼자 가믄 힘없어
    나 너무 무서버

    혹여 며칠 상간 먼저 가거들랑
    쩌거 만치서 나 좀 기다려줘
    - 「임자 나랑 가요」전문

    「임자 나랑 가요」는 방언의 소박한 리듬 위에, 삶의 말기에 이르러 더욱 선명해지는 부부애를 담담하게 새긴 작품이다. 이 시는 사랑을 꾸미거나 설명하지 않는다. 대신 함께 살아온 시간 속에서 자연스럽게 형성된 감정, 곧 ‘생활로서의 사랑’이 어떤 깊이에 이르는지를 보여준다. 첫 구절의 ‘나는 임자가 왜 이리 좋은지 모르겠네’라는 고백은 이유 없는 사랑의 상태를 드러낸다. 여기서 ‘왜’라는 질문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사랑은 설명이 아니라 축적된 시간 속에서 자명해진 감정이기 때문이다. ‘입술이 다 불어 텃어라’라는 표현은 삶의 고단함을 보여주면서도, 그 고단함이 오히려 정을 깊게 만든 배경이었음을 암시한다. 작품 속에 등장하는 ‘솥뚜껑’, ‘김이 모락모락’과 같은 일상의 이미지들은 이들의 삶이 특별한 사건이 아니라 반복되는 생활의 리듬 속에서 이루어졌음을 말해준다. 이 작품의 사랑은 극적인 서사 대신, 투박한 말투와 사소한 몸짓 속에서 드러난다. ‘토닥 토닥 토닥여요’라는 구절은 위로가 특별한 행위가 아니라 일상의 자연스러운 일부가 되었음을 보여준다. 후반부에 이르면 사랑의 의미는 더욱 깊어진다. ‘임자 갈 때는 혼자 가지 말고 나를 데려가라’는 말은 단순한 애정 표현을 넘어, 죽음마저 함께 견디고자 하는 의지를 담고 있다. ‘나 혼자 가면 무섭다’는 고백은 인간의 근원적 두려움을 드러내면서도, 그 두려움을 덜어주는 유일한 조건이 ‘함께 있음’임을 분명히 한다. 마지막의 ‘조금 먼저 가면 나를 기다려 달라’는 부탁은 이 시의 정서를 압축한다. 죽음 이후까지 이어지는 관계의 상상은, 부부애가 단순한 동반을 넘어 존재의 깊은 유대로 확장되었음을 보여준다. 여기서 사랑은 감정이 아니라 지속하려는 의지이며, 그 의지는 시간의 끝에서도 사라지지 않는다. 「임자 나랑 가요」는 사랑을 거창하게 말하지 않는다. 밥을 짓고, 투덜대고, 서로를 토닥이며 살아온 시간 속에서 가장 낮은 자리의 언어로 가장 깊은 울림을 만들어낸다. 이 시는 부부애를 하나의 삶의 태도이자 존재의 방식으로 다시 정의한다. 이러한 감정의 깊이는 「중년의 일기장」으로 이어진다. 시인은 그곳에서 삶을 돌아보며, 감정을 더욱 차분히 가라앉히고 내면의 밀도로 축적해 나간다.

    찌는듯한 더위에도 옆구리 시리다고
    제 가슴을 치고 넋두리 풀어낼 때
    다 그런 거라고
    한 번쯤 스쳐 지나간 세월에
    몇 번의 훌쩍거림
    가슴 뚫려 높새바람이 지나가고

    지긋지긋했던 여름날의 농장에서
    비처럼 쏟아지던 땀방울
    그렇게 시간이 강물처럼 지나갔지
    매미가 그리도 울어대다가
    칠 년 칠일 간의 사연을 뒤로한 채
    거무죽죽한 시간 저편으로 사라진 것처럼

    몽상을 벗었던, 나무를 기어오르던,
    노래를 불렀던, 혹은 아름다웠던, 슬펐던,
    그칠 줄 모르는 지난 얘기들이

    늘그막 장독대 위에 그물을 치고
    독을 닫고 돌을 올린다

    아픈 상처 털어내고 숙성된 항아리처럼
    중년의 일기장을 한 장씩 넘긴다
    오해가 슬픔을 부르는 이 밤결 자락에
    - 「중년의 일기장」전문

    「중년의 일기장」은 시간이 쌓이면서 감정이 가라앉고, 그 침전 속에서 새로운 의미가 만들어지는 순간을 포착한 시다. 이 작품에서 중년은 단순한 생애의 한 구간이 아니라, 지나온 시간들이 서로를 다시 읽으며 재구성되는 내면의 과정으로 제시된다. 다시 말해, 중년은 쇠퇴가 아니라 삶을 스스로 이해해가는 단계다. 이에, ‘찌는 더위에도 옆구리가 시리다’는 감각에서 출발한다. 외부의 조건과 무관하게 내부에서 생겨나는 공허를 드러내는 이 표현은, 중년의 정서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넋두리’를 풀어내는 장면은 기억이 반복적으로 호출되는 과정을 암시하지만, 곧 ‘다 그런 것’이라는 말로 정리된다. 이때의 말은 위로이면서 동시에 체념이며, 중년의 언어가 지닌 이중성을 보여준다. 이어지는 ‘여름날 농장’과 ‘쏟아지던 땀방울’은 노동의 기억을 환기한다. 삶은 그렇게 몸을 통과하며 축적되어 왔다. ‘시간이 강물처럼 흘렀다’는 인식은 익숙하지만, 매미의 이미지가 그것을 새롭게 만든다. 오랜 시간을 견디다 짧게 울고 사라지는 매미는, 축적과 소멸이 동시에 이루어지는 삶의 아이러니를 상징한다. 기억은 더 이상 하나의 이야기로 정리되지 않는다. ‘몽상’과 ‘노래’ 같은 장면들이 흩어지듯 떠오르며, 삶은 파편적인 시간들의 겹침으로 남는다. 이때 중요한 전환은 ‘장독대’의 이미지에서 이루어진다. 독을 닫고 돌을 올리는 행위는 시간을 보관하는 일이 아니라, 그것을 숙성시키는 과정이다. ‘숙성된 항아리’라는 표현은 상처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시간이 지나며 다른 의미로 변해간다는 인식을 보여준다. 마지막의 ‘오해가 슬픔을 부르는 밤’은 중년의 상태를 잘 드러낸다. 여전히 오해는 남고, 슬픔도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은 더 이상 파괴적인 감정이 아니라, 삶의 일부로 받아들여진다. 이 시는 시간을 견디는 방식에 대한 사유로 읽힌다. 삶은 단순히 기억되는 것이 아니라, 숙성되는 과정 속에서 다시 의미를 얻는다. 고통과 기쁨은 분리되지 않고 하나의 깊이로 통합된다. 중년이란 바로 그 깊이를 감당할 수 있게 되는 시간이다. 그리고 「중년의 일기장」은 그 도달의 순간을 조용하고도 단단하게 보여준다. 이러한 시선은 「기장 젊은 날」로 이어진다. 시인은 그곳에서 여전히 삶을 새롭게 바라보며, 봄날 같은 감각을 다시 불러낸다.

    바람 한 줄기 가슴 어루만지고
    가을 향기 스민다

    입김 불어 흩날린 그리움
    하늘 끝 닿아

    가을은 단풍 되어 그림 속에 머물고
    햇살 따라 물든
    강가에 내 마음 젓는다

    지나간 계절은 낙엽처럼 눕고
    덮힌 외투속엔 남은 온기 하나

    누군가 빗자루 들어
    세월 쓸어내려도
    추억의 먼지는
    빚으로 남는다


    이제 없는 청춘은
    가버린 것이 아니라
    오늘에 나를 비추는 별 되어

    가장 젊은 이 순간을
    봄처럼 사랑하려 한다
    - 「가장 젊은 날」전문

    「가장 젊은 날」은 젊음을 과거의 시간으로 돌려놓지 않는다. 이 시에서 젊음은 현재의 감각 속에서 다시 정의되는 하나의 상태다. 시간의 흐름이 아니라, 지금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살아내는가의 문제로 옮겨진다.
    시의 시작은 가을의 분위기 속에 놓여 있다. 바람과 향기는 계절의 변화를 전하면서, 동시에 내면의 감정을 흔든다. ‘흩날린 그리움’은 이미 지나간 시간에 대한 인식을 드러내지만, 그것이 곧 상실로만 이어지지는 않는다. 화자는 여전히 자신의 마음을 움직이며, 현재 속에서 감정을 살아 있게 유지한다. 아울러 시간이 보다 분명한 형상을 갖는다. ‘낙엽처럼 눕는 계절’은 지나간 시간을 고요하게 놓아두지만, ‘남아 있는 온기’는 그 시간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음을 말해준다. 특히 ‘추억이 빚으로 남는다’는 인식은, 기억이 단순한 회상이 아니라 현재를 구성하는 하나의 책임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과거는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지금의 삶을 지탱하는 조건으로 남는다. 시인의 시선은 전환된다. 젊음은 더 이상 잃어버린 것이 아니다. ‘오늘을 비추는 별’로 다시 자리하며, 현재를 해석하는 기준이 된다. 과거와 현재는 단절되지 않고, 서로를 비추는 관계로 이어진다. ‘가장 젊은 이 순간을 / 봄처럼 사랑하려 한다’라는 구절은 이 시의 결론이다. 봄은 지나간 계절이 아니라, 지금 선택할 수 있는 태도다. 젊음 역시 과거의 소유물이 아니라, 현재를 어떻게 감각하고 사랑할 것인가에 달려 있다. 마침내 이 시는 젊음을 회상하는 대상에서 실천하는 태도로 바꾼다. 지금 이 순간을 살아내는 방식이 곧 젊음이라는 인식, 그 조용한 전환이 이 작품의 깊이를 만든다. 이러한 시선은 「휴대폰 배터리」로 이어진다. 시인은 삶을 소모가 아니라 충전의 연속으로 바라보며, 존재를 지속시키는 또 하나의 방식을 제시한다.

    번역기이자 집배원
    비서이자 대변인
    밤길의 손전등
    풍경의 카메라
    글을 담는 종이
    길의 길잡이
    주인이 외로울 때 친구가 된다
    때로 방치된다
    배터리는 소모된다
    바닥 난 배터리엔 기다림이 필요하다
    충전할 수 있을 때 충전한다
    나는 휴대폰이고 배터리다
    길 잃은 이를 인도한다
    필요할 때 소리를 낸다
    놓치지 않는다
    배고픔은 남는다’
    - 「휴대폰 배터리」전문

    「휴대폰 배터리」는 사물의 자기 고백이라는 익숙한 형식을 취하지만, 그것을 단순한 의인화의 차원에 머물게 하지 않는다. 이 시는 사물의 언어를 빌려 인간의 시간성과 존재 조건을 드러내는 데까지 나아간다.
    시의 구성은 병렬적 나열이다. ‘번역기, 집배원, 비서, 대변인’으로 이어지는 기능의 목록은 휴대폰의 다기능성을 보여주는 동시에, 현대인의 분절된 역할들을 압축한다. 그러나 이 기능의 증식은 충만이 아니라 소모를 예비한다. ‘배터리는 소모된다’라는 단정은 그 모든 역할의 이면에 놓인 필연적 고갈을 드러낸다. 기능은 많아질수록, 존재는 더 빨리 닳아간다. ‘바닥 난 배터리엔 기다림이 필요하다’는 구절에서 이 시의 핵심이 드러난다. 여기서 기다림은 자발적 휴식이 아니다. 소진 이후에야 허락되는 강제된 정지다. 회복은 선택이 아니라 조건이며, 이때 존재는 스스로를 멈출 수 없는 상태에 놓인다. 이 아이러니가 이 시의 긴장을 형성한다.
    ‘나는 휴대폰이고 배터리다’라는 진술은 기능과 기반, 역할과 에너지의 경계를 지운다. 이는 곧 인간이 수행하는 존재이면서 동시에 소모되는 자원이라는 사실을 암시한다. 우리는 무엇을 하는 존재이기 이전에,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연료로서 이미 닳아가고 있다. 더구나 ‘배고픔은 남는다’는 문장은 이 시의 잔여다. 모든 기능이 멈추고 다시 충전된다 해도, 결핍은 사라지지 않는다. 이 배고픔은 충족될 수 없는 욕망이며, 동시에 다시 작동하게 만드는 힘이다. 이 시는 일상적 사물을 통해 현대인의 존재 조건을 드러낸다. 끊임없이 호출되고, 소모되며, 잠시 회복되지만 결코 완결되지 않는 상태. 중요한 것은 이 모든 것이 설명이 아니라 절제된 진술과 배열로 제시된다는 점이다. 감정은 배제되고, 구조만 남는다. 그 구조의 냉정함 속에서, 오히려 더 선명한 인간의 형상이 나타난다. 이러한 태도는 「새벽 짓는 농부」로 이어진다. 시인은 감정을 앞세우지 않고, 세계를 견디는 방식으로 존재를 드러낸다.


    새벽 짓는 농부
    일어났다
    논밭이 어스름하다
    네 발 구루마를 끈다
    달그락 소리
    발에 묻은 황토
    이랑마다 새싹
    여름을 지나 가을을 준비한다
    모를 심는다
    물이 들어온다
    기쁨은 조용히 쌓인다
    할 일은 단단하다
    - 「새벽 짓는 농부」전문

    「새벽 짓는 농부」는 노동을 서정적으로 과장하지 않는다. 대신 반복되는 행위 속에 축적되는 시간의 윤리를, 거의 무표정에 가까운 언어로 드러낸다. 이 시에서 중요한 것은 감정이 아니라 지속이다. ‘논밭이 어스름하다’라는 시적 진술은 사건 이전의 상태를 제시한다. 이 어스름은 단순한 시간의 배경이 아니라, 아직 분명해지지 않은 세계와 그 안에서 움직이기 시작하는 존재의 조건이다. 시는 이 경계 위에서 농부의 행위를 하나씩 호출한다. ‘네 발 구루마를 끈다 / 달그락 소리’에서 들리는 것은 소리 자체가 아니라 반복의 리듬이다. 이 리듬은 의미를 만들기 이전에 이미 삶을 유지하는 형식으로 작동한다. 노동은 설명되지 않고, 다만 이어진다. ‘발에 묻은 황토 / 이랑마다 새싹’이라는 장면에서 자연과 인간은 대립하지 않는다. 서로를 드러내는 흔적으로 겹쳐진다. 이 시는 자연을 대상화하지 않고, 그 안에 스며든 인간의 시간을 보여준다. 그래서 ‘여름을 지나 가을을 준비한다’는 말은 단순한 계절의 순환이 아니라, 미래를 현재 속에 미리 심어두는 행위가 된다.
    ‘기쁨은 조용히 쌓인다’는 구절에서 이 시의 태도가 분명해진다. 기쁨은 드러나는 감정이 아니라, 축적되는 결과다. 거의 감지되지 않는 방식으로 쌓인다. 그리고 ‘할 일은 단단하다’라는 마지막 진술에서, 감정보다 행위가, 표현보다 지속이 더 근본적인 것임이 확인된다. 이 작품은 농부라는 구체적 인물을 통해 삶의 형식을 제시한다. 거창한 의미도, 극적인 전환도 없다. 다만 반복되는 노동과 그 속에서 서서히 쌓이는 시간의 밀도만이 남는다. 이에 따라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묻지 않는다. 이미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 존재의 방식을, 있는 그대로 놓아둘 뿐이다. 그리고 그 무심한 제시 속에서, 오히려 더 깊은 설득력이 발생한다. 이러한 시선은 「빈 지게」로 이어진다. 시인은 남겨진 흔적과 비어 있음 속에서, 또 다른 내면의 풍경을 호출한다.

    비가 내렸을지 모른다
    밤새 빗줄기는 계곡을 파냈다
    굽이와 굽신거림
    젖은 세상과의 단절
    눈을 감았다
    보이지 않는 꿈을 헤맸다
    향수를 붙들고 새벽을 견뎠다
    언젠가 흘러갔다
    개울가 버드나무가 누웠고
    밤의 가시가 굴렀다
    지나온 것은 한바탕 꿈
    마른 숨의 계곡
    누가 있었는지
    이미 지난 넋두리
    붉던 계곡은 투명해졌다
    오랜 정화의 시간
    몇 가지를 주워도 또 흘러갈 것 이다
    비는 왔던가
    낙엽이 다시 쌓인다 - 「빈 지게」전문

    「빈 지게」는 사건을 말하지 않는다. 대신 사건이 지나간 자리, 곧 남겨진 흔적만을 더듬는다. 이 시의 관심은 ‘무엇이 있었는가’가 아니라 ‘무엇이 남아 있는가’에 있다. 존재의 시간은 여기서 기억의 잔여를 통해 거꾸로 추적된다. 첫 문장 ‘비가 내렸을지 모른다’는 불확실성의 선언이다. 사건은 이미 확정될 수 없는 상태로 밀려나 있다. 그러나 곧이어 ‘빗줄기가 계곡을 파냈다’는 진술이 등장하면서, 그 불확실한 사건은 흔적을 통해 역설적으로 현실을 획득한다. 이 시에서 중요한 것은 사실이 아니라, 감각으로 남은 흔적이다. 계곡은 자연이 아니라, 시간이 지나간 자리다. 외부 세계는 점차 소거된다. ‘젖은 세상과의 단절’ 이후, 화자는 ‘눈을 감고’ 내면으로 들어간다. 그러나 그것은 공백이 아니라 오히려 과잉이다. 보이지 않는 꿈을 헤매는 동안, 외부의 결핍은 내부의 밀도로 전환된다. 이 시는 바깥을 지움으로써 안을 채운다. ‘향수를 붙들고 새벽을 견딘다’는 구절에서 과거는 단순한 회상이 아니다. 그것은 견딤을 가능하게 하는 힘이지만, 동시에 오래 지속될 수 없는 것이다. ‘흘러간다’는 진술은 붙잡음의 한계를 분명히 한다. 모든 기억은 결국 유실된다. ‘한바탕 꿈’으로 지나간 시간은 ‘마른 숨의 계곡’으로 남는다. 물이 사라진 자리, 감정이 빠져나간 자리에서 계곡은 비로소 투명해진다. 이 투명함은 정화라기보다, 모든 것이 씻겨나간 이후의 상태에 가깝다. ‘몇 가지를 주워도 또 흘러간다’는 인식은 반복된다. 붙잡으려는 시도와 유실의 결과가 끝없이 교차한다. 마지막의 ‘비는 왔던가’라는 물음은 처음으로 돌아가지만, 끝내 답은 주어지지 않는다. 남는 것은 낙엽처럼 쌓이는 시간뿐이다. 이 시는 기억을 해명하지 않는다. 대신 그것이 사라지는 방식을 끝까지 따라간다. 존재를 이루는 것은 실재가 아니라, 그 실재가 어떻게 소실되는가의 형식이라는 인식하고 있다. 「빈 지게」는 바로 그 소실의 구조를, 가장 낮은 목소리로 끝까지 밀어붙인다.

    삶의 보람은 결국 타자를 향해 자신을 내어주는 데 있다. 이 오래된 명제는 하나의 도덕적 권유가 아니라, 삶의 형식에 대한 진술에 가깝다. 조지 버나드 쇼의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는 말 역시, 의지를 찬양하는 문장이 아니라 지속의 구조를 드러내는 언어다. 가난과 좌절, 병마를 통과하면서도 창작을 멈추지 않았던 그의 생애는, 삶이 어떻게 하나의 문장으로 응결되는지를 보여준다.

    박출의 시적 이행 또한 이 연장선에서 읽힌다. 그는 대중가요에서 획득한 감정의 밀도를, 시라는 더 낮고 더 느린 형식으로 재배치한다. 중요한 것은 성취의 확장이 아니라 감각의 환원이다. 바깥으로 향하던 감정은 안으로 침잠하고, 그 침전 속에서 비로소 다른 깊이를 얻는다.

    이때 박출 시인의 시선은 현실의 재현에 머물지 않는다. 그는 현실을 통과해 존재를 자각하는 지점에 도달한다. 그 결과로 형성되는 서정은 과장되지 않는다. 오히려 절제된 언어 속에서 타인의 상처에 조용히 닿는다. 감동은 여기서 ‘생산’되는 것이 아니라 ‘발생’한다.

    <허수아비>는 이러한 시적 태도의 집약이다. 이 시집은 인간과 자연, 감정과 시간 사이의 경계를 완만하게 흐리면서, 사랑이라는 감각을 통해 세계를 다시 연결한다. 그러나 그것은 방향을 제시하는 이념이라기보다, 오래 남는 온기에 가깝다.

    이 시집은 말하지 않는다. 다만 스며든다.

    그리고 그 스며듦의 깊이에서, 우리는 비로소 한 존재가 어떻게 타자에게 건너가는지를 목격하게 된다. 

    저자 소개
    저자 : 박상철(박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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