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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SBN | ISBN-13 : 9791194270003 |
|---|---|
| 쪽수 | 656쪽 |
| 크기 | 규격 외(152mm X 225mm, 신국판) |
| 제품구성 | 단행본 |
- 소설/에세이/시 > 대하/역사/무협소설 > 대하/역사소설
이 책은 임진란을 당해 갖가지 기구한 인연으로 곽재우 의병장 둘레에 뭉쳐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낸 백성들의 피눈물 어린 삶을 그린 실화 소설이다.
임진왜란은 조선 백성들이 스스로 감당하여 치른 전쟁이었다. 백성들은 자신들의 피눈물 애환으로 범벅된 꿈과 희망이 전쟁 승리와 더불어 여물어 가는 것을 깨달았으며 그래서 전승의 영웅담을 기록하는데 목숨을 내놓는 것도 두려워 하지 않았다.
김우진 작가는 임진년 전쟁의 역사에서 이러한 백성들의 자각을 짚어내어, 진정으로 영웅을 알아보고 충성으로 기릴 줄 아는 백성들과 그 백성들의 꿈과 한이 자아내는 힘을 믿을 줄 아는 영웅이 서로 의지하며 엮어내는 피눈물 어린 사연을 서사 소설로 드러내었다.
문학 기록은 참으로 역사 기록보다 훨씬 풍부하게 역사를 깨우치게 한다. 붉은 민들레는 바로 이 사실을 새삼 느끼게 해 주는 책이다.
■ 추천사 3
제 1 부 몰려오는 먹구름, 달려드는 거머리
1 당쟁으로 시작된 궁중 암투 10
2 당쟁으로 인한 ‘기축옥사’의 전말 19
3 당쟁으로 인한 조선 정사의 문란함 29
4 당쟁을 넘어선 율곡의 선견지명 39
5 출정 준비를 마친 히데요시 49
6 곽재우와 구붕골 행수 돌이 59
7 구붕골 사람들 68
8 왜란으로 ‘참화’가 시작되다 80
9 부산 첨사, 흑의 장군 정발 94
10 동래 부사, 충렬공 송상현 99
11 관민이 함께한 동래성 전투 ① 111
12 관민이 함께한 동래성 전투 ② 121
13 패전이 낳은 비극 ① 132
14 패전이 낳은 비극 ② 142
15 의병을 일으킬 결심을 하다 152
16 거사를 위하여 162
17 출전 준비를 마친 의병대 172
18 ‘토적보국’의 깃발을 들고 181
19 승전보의 메아리 190
20 감화의 힘 200
제 2 부 들불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21 기습전으로 확보한 의병 중심지 212
22 의령 고을, 의병대로 향하다 215
23 뱃사공 백고운의 살신성인 231
24 몰염치한 관리들 240
25 김수를 문죄 하다 250
26 손나루 전투의 의의 256
27 순국의 길을 걷는 정인보 270
28 신상 필벌로 의병대의 기강을 잡다 281
29 전쟁 초기 정세와 일화 ① 292
30 전쟁 초기 정세와 일화 ② 301
31 의병대를 찾아온 신여복 310
32 풍운아 신여복의 사연 319
33 오작교가 된 의병대 328
34 넘지 못 할 신분의 차이 338
35 곽재우의 신묘한 계책 347
36 풍운아 신여복, 곽재우를 구하다 352
37 출정을 앞두고 366
38 현풍성을 탈환하다 380
39 산옥의 출신 배경 389
40 벼랑 끝에서 소생하는 사랑 400
41 영치 이고의 인생 역경 410
42 백성을 수탈해온 토호들을 단죄하다 424
제 3 부 무능한 조정에 단비는 내렸으나…
43 창녕, 화왕 산성 전투 436
44 좌절 된 왜군의 ‘수륙 병진책’ 446
45 거룩한 전투, ‘한산대첩’ 456
46 단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466
47 색마의 검은 흉계 ① 474
48 색마의 검은 흉계 ② 484
49 계사년, 새 아침이 밝았다 492
50 제 2차 진주성 대첩 ① 504
51 제 2차 진주성 대첩 ② 513
52 홍의 장군 곽재우, 익호 장군 김덕령 ① 523
53 홍의 장군 곽재우, 익호 장군 김덕령 ② 532
54 역적의 누명을 쓰고 542
55 추국이 시작되고 553
56 당쟁이 낳은 억울한 죽음 563
57 정유재란과 명량해전 573
58 곽재우의 담대한 기지 ① 583
59 곽재우의 담대한 기지 ② 592
60 승군장, 효명스님 ① 601
61 승군장, 효명스님 ② 610
제 4 부 마침내 끝나는 전쟁
62 마침내 끝나는 칠년 전쟁 ① 620
63 마침내 끝나는 칠년 전쟁 ② 629
64 마침내 끝나는 칠년 전쟁 ③ 638
65 글을 마치며 647
[본 문]
ㅍ곽재우와 구붕골 행수 돌이
곽재우는 남들이 천시하는 무과에 응시하여 장원 급제에 올랐다가 억울하게 탈락 된 후 입신양명 보다는 향촌에 묻혀 산수를 벗삼고 강호에서 낚시를 하면서 지냈다. 그러다 보니 양반의 관행을 벗어나 상사람들과도 어느정도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재우는 의협심이 매우 강하여 악행을 보고는 참지 못하였고 도리에 어긋나는 것은 추호의 타협도 없었다. 그래서 백성들의 피를 빨아먹는 탐관오리들을 끝없이 미워했다.
의령 현감 오웅창의 비행을 규탄하여 그자가 제멋대로 백성을 핍박하지 못하게 하였고 못된 심보를 가진 고을 원들과 아전 따위들이 문서 농간질로 백성의 기름을 짜내는 행위들을 적발하여 중도 이폐시키곤 하였다.
그렇다고 나라가 처한 정세를 외면하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어지러운 조정의 정사로 인해 국력이 소진되어 왜적의 침입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그로 하여금 손에서 병서를 놓을 수 없게 만들었다.
더구나 요즈음 왜국 사신들의 빈번한 출입과, 조선 사신들도 왜국에 갔다 왔다는 소식, 왜관에 머물러 있던 왜인들이 철수한 일 등 뒤숭숭하게 들려오는 소문으로 짐작하건 데 이 땅에 오래지 않아 환란이 닥쳐 오리라는 예감이 들어 재우의 머리는 더욱 복잡해졌다.
그는 허울뿐인 지금의 군사제도를 생각할 때마다 이루지 못한 이이의 십만양병책이 뼈가 저리게 아쉬웠다. 뿐만 아니라 이즈음 군정의 문란으로 인한 피해와 백성들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나라의 기강은 해이하고 백성들은 도탄에 들고 왜적은 틈을 노리고 있으니 이 나라가 장차 어찌 되려는고…”
재우의 머릿속에는 이 같은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그는 때로 병서들을 읽다가도 칼을 어루만지며 긴 한숨을 토하곤 하였다.
이른 아침이었다.
재우는 길 떠날 차비를 갖추고 온 인보와 돌이를 묵묵히 맞이했다. 돌이는 양반님네들과 자리를 같이할 수 없어 툇마루에 앉으려고 하자 재우는 그를 방안으로 불러들였다.
“그래, 이제 떠나려고”
재우는 두 사람이 자리에 앉기를 기다려 조용히 물었다.
“더 지체할 필요도 없으니 곧 떠나려고 하오. 수일 내로 돌아오겠소. 헌데 계수의 안색이 좋지 않구려 아무쪼록 몸을 잘 돌보시오”
인보는 신중한 기색을 짓고 재우의 얼굴을 넌지시 바라보았다.
“허허 염려해 주어서 고맙소 허지만 오히려 내가 할 말을 백련이 하는가 싶소”
재우는 인보의 두 손을 꼭 잡고 푹 잠긴 음성으로 말한 다음 사방을 돌아보았다.
“너는 예서 며칠 지내다가 천천히 떠나거라 별로 할 일도 없을 터이니 나하고 사냥이나 같이 하는게 좋겠다”
“예, 그리하겠습니다”
돌이는 공손히 말하고 물러나려 하였다. 눈치 빠른 그는 두 어른이 긴히 할 말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던 것이다.
“네, 게 좀 앉아서 내 말을 마저 듣고 나가거라”
인보는 돌이가 다시 자리에 앉는 것을 보고 말을 이었다.
“너는 그 구붕골이라는 곳으로 부사님댁 서방님을 모시고 갈 생각일랑 말아라. 때가 때니 만큼 조심해야 하느니라 요즘은 무슨 변이 생길지 모른다 알겠느냐”
“예, 분부를 명심하겠습니다”
돌이는 머리를 숙이며 나직이 대답했다.
“어, 그럼 됐다”
인보는 그 구붕골이라는 곳이 관가에 눈을 피하여 사는 사람들의 마을이라는 말을 계수에게서 들은 적이 있는지라 마음이 몹시 불안하였다. 그는 고개를 끄덕여 이제는 나가도 된다는 뜻을 표시했다. 그러자 돌은 즉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돌이 나간 후에 재우가 빙긋이 웃으며 말했다.
“백련은 공연한 근심을 하시오. 그리도 소심해서야 나라를 어떻게 방비하겠소”
“허 그래서 더욱 조심해야 하는 거외다”
인보도 웃으며 댓구했다.
그들은 얼마 동안 시국을 논하고 이러 저런 이야기를 주고받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내, 그럼 이제 다녀오리다. 부디 몸을 삼가하시오”
재우도 일어서며 인보의 두 손을 꼭 잡았다.
“요즘 나라 형편이 심상치 않으니 오래잖아 무슨 변이 일어날 듯싶소 아무튼 먼 길에 무사히 다녀 오시외다”
이어 그들은 밖으로 함께 나왔다. 재우는 인보를 배웅하며 그의 뒷모습을 늦게까지 바라보았다
돌이는 영산고을에서 머슴살이를 하던 김장쇠의 외아들이다. 팔 년 전 돌이의 아버지 김장쇠는 부치던 땅을 잃고 아내와 함께 영산 고을 공의겸이라는 토호집 행랑채에 살면서 머슴살이를 하였는데 몇 해가 되도록 품삯을 받지 못하였다.
그들 부부는 마소와 같이 뼈빠지게 주인집 일을 해주면서도 빈번하게 어린 자식들의 배를 굶기게 되어 눈물로 세월을 보내던 중 자식 하나를 끝내 굶겨 죽였다. 큰 자식을 잃은 장쇠는 하나 남은 어린 자식이 또 그 지경이 될 까봐 돌이를 의령 고을 눌찬이에 사는 사촌집에 보내게 된 것이다.
어린 소년의 장래에 눌찬이 오 년 간의 생활이 큰 영향을 끼치게 되어 앞으로 걷게 되는 길에 운명의 가느다란 선이 만들어졌던 것이다.
돌이는 눌찬이에 온 그 해 여름부터 타고난 배짱과 영리한 기질로 인하여 재우의 귀여움을 받으며 천한 신분의 아이로는 감히 생각도 할 수 없는 길을 걷게 되었다. 그 길은 숲 속에 난 좁은 오솔길과 같은 것이었다.
어느 날 용현루에 슬그머니 올라간 돌이는 서생들의 시 짓는 모임에 나가서 흥미 있게 구경하고 있었다. 이때 한 젊은 서생이 가까이 불러 먹을 갈라고 하니 돌은 벼루 옆에 공손히 꿇어 앉았으나 정작 어떻게 하면 좋을지 알 수 없어 눈치를 살폈다.
젊은 서생은 돌이의 거동을 잠시 지켜 보다가 천한 놈의 자식은 별 수 없다는 욕을 하고 나서 물러 가라고 호령하였다. 순간 어린 돌이는 화가 나서 쥐고 있던 벼루를 번쩍 들고 일어섰다가 차마 팽개칠 수 없어 그 자리에 ‘탁’ 하고 놓아 버렸다. 그 바람에 벼루가 뒤집혀 바닥에 떨어지고 먹물 방울이 재우를 비롯한 서생들의 옷에 튀었다.
화가 난 서생들은 용현루 난간으로 뻗어 오른 나뭇가지를 꺾어 들고 돌이 앞으로 다가갔다. 하지만 돌이는 눈 하나 깜박하지 않고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돌이의 거동을 유심히 보고 있던 재우는 ‘껄껄’ 하고 웃으며 일어나 서생들의 손에서 종아리 채를 빼았었다.
어린아이의 당돌한 행동이 깜찍해서 단순하게 생각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 후 재우는 돌에게 글을 가르치고 몇 년 지나서는 병서도 읽혔다. 그는 말을 달리고 활을 쏘는 궁터며 낚시터와 사냥터, 서생들의 글 짓는 모임에도 늘 돌이를 데리고 다녔다. 나중에는 검술까지 가르쳤다.
재우의 이 같은 행동은 선비들의 눈에 거슬려 채신머리없이 상놈의 자식을 끼고 다닌다는 비난도 있었지만 원래 소탈하고 호협한 성품을 지닌 재우는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돌이는 엄하면서도 인자한 재우를 몹시 따랐다. 아직 어린 나이라 양반이 무엇이고 상놈이 무엇인지 똑똑히 알지 못했으나 계수라는 어른은 보통사람들과 다른 사람이라는 것만은 그에게도 명백히 느껴졌다. 그뿐 아니라 양반 중에 자기를 깍듯이 대해 주는 유일한 사람 임을 소년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돌이는 열두 살 되던 해에 아버지를 따라 영산 고을로 돌아갔다.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그는 어머니와 함께 주재원 마을로 자리를 옮기고 오촌 당숙의 도움으로 집 한 간을 구한 다음 농사를 지으며 근근히 살아갔다.
세월이 흘러 돌이는 어느덧 어엿한 대장부가 되었다.
기축년 정월 초하루였다. 이날 돌이는 우질포에 사는 고모에게 새해 세배를 갔다. 더욱 깨끗하고 늠름해진 돌이의 모습은 농군처럼 보이는 데가 하나도 없었다. 준수한 용모며 우람한 체구와 굵고 부드러우면서도 점잖은 음성 등 어느 하나도 빠지는 데가 없었다.
홀어머니 슬하에서 장가도 못간 조카가 마음에 걸려 하던 돌이의 고모는 언제부터인지 얼굴이 피어나는 해당화 같고 마음씨 고운 이웃 뱃사공의 딸 자온녀라는 처녀를 은근히 점 찍어 놓게 되었다.
금년에 돌이의 나이가 자그마치 스물 넷이라 더는 지체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어 돌이의 고모는 마침내 뱃사공 백고운의 집에 찾아가 청혼을 하였다. 그랬더니 백고운은 주재원에 사는 돌이라면 자기도 잘 안다고 하며 쾌히 승낙을 했다. 돌이의 고모는 그날로 사주단자를 보내고 저녁에는 따로 떡국을 마련하여 백고운 집의 식구를 데려다가 대접까지 하였다.
일이 있어 밖에 나갔다가 어두워져서 집에 들어온 돌이는 방금 집을 나와 방으로 돌아가는 자온녀와 문가에서 마주쳤다. 그들은 서로 상대가 누구라는 것을 짐작하고 어찌 할 바를 몰라 잠깐 주춤거렸다. 다음 순간 돌은 저도 모르게 자온녀의 손을 잡고 감나무 밑으로 갔다.
자온녀는 당황하여 잡힌 손을 꼼지락거렸으나 어쩔 수 없이 돌이에게 맡겼다. 세상에 태어나 처음으로 이성을 대하는 두 젊은이의 심장은 높이 고동쳤다. 그날 밤 돌이는 어둠 속에서 상대 얼굴은 확인할 수 없었어도 맑은 목소리에 고운 마음이 느껴지는 숫기 없는 웃음소리, 그리고 얌전한 태도에서 처녀의 꽃다운 모습을 능히 그려볼 수 있었다. 자온녀 역시 같은 심정이었다.
그들은 상대의 용모가 어떻게 생겼는지는 몰라도 소문을 통하여 아름답고 마음씨 고운 처녀라는 것, 또 잘생기고 늠름하며 여러모로 훌륭한 사나이라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이 날 밤 운명이 하나로 결합된 두 청춘의 가슴 속은 다정하고 따뜻한 연정의 물결이 조용히 찰랑거렸다.
그 후 이들은 그 날 밤의 다정한 모습이 그리워 밤마다 잠을 못 이루었고 어서 빨리 혼사 날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자온녀는 그리운 돌이를 위하여 온갖 정성을 다 했고 외동딸을 둔 그의 부모들도 장차 사위를 아들 삼아 살아가야 할 처지인 까닭에 돌이를 위해서라면 아끼는 것이 없었다.
자온녀의 집에는 온 식구가 정성껏 기르는 백마 한 마리가 있었다. 그 말은 무자년 여름에 김해고을 금단군 목장에서 일하던 백고운의 사촌동생 성팔이가 망아지 한 마리를 끌고 와서 주고 간 것이었다.
백고운 부부와 자온녀는 어미 찾는 어린 망아지를 자기집 어린아이 돌보듯 귀히 길렀다. 말은 세 살부터는 망아지 티를 벗고 제법 큰 말 구실을 하더니 하루가 다르게 자라 인근에서 보기드문 준마가 되었다. 백마는 자기를 위해주는 자온녀를 몹시 따랐다.
백고운은 말이 다 자라자 마을 농군들에게 빌려주어 밭갈이도 시키고 짐도 나르게 하였다. 그러다가 돌이와 자온녀의 혼약이 이루어지니 직접 말 고삐를 쥐고 끌어다가 주재원의 돌이에게 넘겨주었다. 자온녀는 그날 남의 집 길쌈을 해주며 마련해 두었던 혼수감인 명주로 두루마기를 지어 말과 함께 보냈다.
뜻하지 않은 말을 받은 돌은 너무도 감격하여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가대기로 밭을 갈던 처지에 잘 생긴 백마가 생겼으니 그럴 법도 하였지만 더군다나 자온녀의 고운 마음씨가 깃들어있는 옥색두루마기를 받게 되어 그의 가슴을 더욱 기쁘게 만들었다.
다음날부터 돌은 논밭에 나가 백마를 몰며 흥겨운 나날을 보냈다. 호사다마라고 하더니 그 흥겨운 기분은 오래가지 못하였다. 첫사랑의 순결한 애정이 담긴 말과 두루마기를 받고 그처럼 기뻐하던 돌에게 뜻하지 않는 일이 생겼던 것이다.
장인 백고운이 다녀 간지 보름째 되던 날 영산 고을 관차에게 잡혀서 말과 함께 영산 고을로 갔다.
토호 공의겸은 유씨 모자의 행적을 탐지하여 마음에 새겨두고 이따금 알아보는 것을 잊지 않고 있었으니 포교와 사령을 동반한 관차가 돌이의 집에 갑자기 나타난 것은 그러한 흉심이 마침내 행동으로 옮겨졌기 때문이었다.
심복 하인을 통하여 돌이의 소식을 들은 공의겸은 이방 옥경선을 찾아가 사람은 물론 백마까지 제 손에 넣으려고 수작을 하였으며 이 이방으로 하여금 오장 박순호를 시켜 포교와 사령들을 거느리고 가도록 하였던 것이다. 이렇게 되어 돌은 영문도 모르고 박순호에게 붙잡혀 관가로 끌려왔다.
옥경선으로 말하면 십여 대를 두고 아전을 해온 이 고을 세습 이속으로서 고을 안 사백 여 세대의 실정을 손금 보듯 잘 알며 뇌물만 가지고도 갑부 부럽지 않게 산다는 자였다. 그는 각종 문서와 부세 처리의 농간질에 능하며 권모술수 또한 비상하여 못하는 짓이 없는 불여우였다.
그와 가장 가깝게 지내는 자가 영산고을 토호들 중에서는 공의겸이 있었고 관속들 중에서는 오장 박순호가 있었다. 옥경선은 백성들에게 부과되는 가렴 잡세와 환곡을 가지고 갖은 농간질을 다하였지만 저는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고 오장 박순호의 손을 빌렸고 밖으로는 공의겸을 통하여 귀신도 모르게 감쪽같이 일을 저질렀다. 그런 것만큼 그는 언제나 공의겸과 박순호에게 각별한 호의를 보였고 때로는 한 몫 든든히 챙겨주기도 하였다.
옥경선이 시키는 데로 포교와 사령들을 거느리고 주재원 마을에 다녀 온 오장 박순호는 돌을 붙잡아 놓고 위협하며 그를 십여 년 전에 상전 몰래 도망친 종으로 몰아 댔다. 그리고 겉 곡으로 벼 다섯 말 얻었던 것을 마치 한 섬이나 가져다 먹은 것처럼 덮어 씌우고 한 섬을 옥백미로 갚으라고 하며 전혀 모르는 문건들을 보였다.
돌이 공의겸의 집을 나오던 때는 너무 어려 세상물정을 알 수 없었으나 자기 부모가 남의 집 종이라는 말은 한번도 들어 본적이 없었다. 오히려 양민이 남의 집 머슴살이를 하는 것이 한스럽다고 탄식 하던 일이 기억 속에 생생히 남아 있었다. 그리고 십 여년 동안 한번도 품삯을 못 받아 이대로 나갈 수도 없다 하시고는 병이 들어 죽게 되었다고 곱씹었던 어머니의 말은 잊을래야 잊을 수가 없었다.
그러니 몰래 도망친 종이란 왠 말이며 옥백미 한 섬이란 도대체 어인 일이냐. 문서는 또 무엇인고? 돌은 억이 막혀 말이 나오지 않았다. 한 참 만에 그는 이런 문서는 인정할 수 없다고 하며 한쪽으로 밀어놓고 나서 자기는 종이 아니라는 것과 아버지가 공의겸의 집 일을 십년 넘게 해 주다가 고역에 지쳐 세상을 떠났다는 것을 말했다.
돌의 이러한 항변이 오장 박순호에게는 천만 뜻밖이었다. 박순호는 이 청년을 가볍게 다루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으로 그 날로 봉두를 씌워서 공의겸의 집 하인청으로 끌고 갔으며 독한 매를 때리도록 하였다.
돌은 사정없는 매에 전신의 살이 너덜이 되고 피를 낭자하게 흘리고는 몇 번이나 정신을 잃었다. 다음날 또 다음날에도 매질은 계속되었다. 이렇게 이레를 견디어낸 돌은 더는 지탱할 수 없었다.
관가에 잡혀간 아들이 나오기를 하루가 멀다고 기다리며 애를 태울 어머니 얼굴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어쩌면 백년가약을 맺은 자온녀와 다시 만나 보지도 못하고 죽을 것 같기도 하였다.
그는 소위 관가의 처사라는 것이 허무맹랑하다는 것을 통절하게 느끼면서도 속으로 다시 한번 냉정하게 생각을 굴려보았다.
“이 청춘 나이에 허무하게 맞아 죽어야 옳단 말이냐 늙으신 어머님 홀로 남겨두고 백년해로를 철썩 같이 언약한 자온녀도 다시 못보고 지금까지 누구든 관가의 처세에 대항하여 무사히 놓여 나온 사람은 없을 게다. 그러기보다는 우선 순종하여 공가의 집 종으로 들어갔다가 때를 보아 행동을 취해야 할까 보다”
이렇게 생각한 돌은 그 이튿날부터 종살이를 시작하였다.
27
순국의 길을 걷는 정인보
서울을 점령한 우키다 히데이에는 고바야가와 다카가게에게 전라도를 빨리 점령하여 조선수군의 후방과 그 진입로를 확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고바야가와 다카가게는 이른바 자기의 영지로 할당 받은 전라도를 기어이 손에 넣어 보려고 또 한 번 군사를 대거 출동시킬 것을 계획하였다. 왜적이 북으로 계속 올라가면서도 남쪽의 전라도 하나를 점령하지 못한 것은 조선 수군이 바다를 지키고 있는데다가 곽재우의 의병대가 길을 가로막고 있기 때문이었다.
원래 적들은 이같은 항거에 부딪히게 되리라고는 예상도 못했었다. 그들은 전쟁터에서 잔뼈가 굵었어도 보통 백성들이 싸움에 가담하는 것은 한번도 본적이 없었던 것이다. 그들은 전쟁이란 싸움을 전업으로 군사들이나 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사실 섬나라 백성들은 어느 영주의 편에도 설 필요가 없었다. 그저 전쟁에서 이긴 자에게 복종하면 되었던 까닭이다. 하지만 조선땅에서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았다.
조선 백성들은 왜인들처럼 덮어놓고 아무에게나 복종할 의사가 없었을 뿐더러 자기 강토에 침입한 놈들에게는 한 하늘 아래 같이 살 수 없는 원수로 여겼다. 그래서 왜군은 군사가 아닌 보통 백성들에게도 맞아 죽는 일이 빈번하였다.
왜적의 괴수의 하나인 모리 데루모토는 자기 고향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이 나라 사람들은 우리를 왜구만치 여기고 산으로 들어가 숨곤 한다. 우리 왜군이 지나가면 반궁(작은활)으로 해한다. 참으로 놀랍고 어처구니 없는 일이다.”
또한 그 당시의 사실을 기록한 우리나라 옛 문헌에는곽재우와 구붕골 행수 돌이
곽재우는 남들이 천시하는 무과에 응시하여 장원 급제에 올랐다가 억울하게 탈락 된 후 입신양명 보다는 향촌에 묻혀 산수를 벗삼고 강호에서 낚시를 하면서 지냈다. 그러다 보니 양반의 관행을 벗어나 상사람들과도 어느정도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재우는 의협심이 매우 강하여 악행을 보고는 참지 못하였고 도리에 어긋나는 것은 추호의 타협도 없었다. 그래서 백성들의 피를 빨아먹는 탐관오리들을 끝없이 미워했다.
의령 현감 오웅창의 비행을 규탄하여 그자가 제멋대로 백성을 핍박하지 못하게 하였고 못된 심보를 가진 고을 원들과 아전 따위들이 문서 농간질로 백성의 기름을 짜내는 행위들을 적발하여 중도 이폐시키곤 하였다.
그렇다고 나라가 처한 정세를 외면하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어지러운 조정의 정사로 인해 국력이 소진되어 왜적의 침입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그로 하여금 손에서 병서를 놓을 수 없게 만들었다.
더구나 요즈음 왜국 사신들의 빈번한 출입과, 조선 사신들도 왜국에 갔다 왔다는 소식, 왜관에 머물러 있던 왜인들이 철수한 일 등 뒤숭숭하게 들려오는 소문으로 짐작하건 데 이 땅에 오래지 않아 환란이 닥쳐 오리라는 예감이 들어 재우의 머리는 더욱 복잡해졌다.
그는 허울뿐인 지금의 군사제도를 생각할 때마다 이루지 못한 이이의 십만양병책이 뼈가 저리게 아쉬웠다. 뿐만 아니라 이즈음 군정의 문란으로 인한 피해와 백성들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나라의 기강은 해이하고 백성들은 도탄에 들고 왜적은 틈을 노리고 있으니 이 나라가 장차 어찌 되려는고…”
재우의 머릿속에는 이 같은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그는 때로 병서들을 읽다가도 칼을 어루만지며 긴 한숨을 토하곤 하였다.
이른 아침이었다.
재우는 길 떠날 차비를 갖추고 온 인보와 돌이를 묵묵히 맞이했다. 돌이는 양반님네들과 자리를 같이할 수 없어 툇마루에 앉으려고 하자 재우는 그를 방안으로 불러들였다.
“그래, 이제 떠나려고”
재우는 두 사람이 자리에 앉기를 기다려 조용히 물었다.
“더 지체할 필요도 없으니 곧 떠나려고 하오. 수일 내로 돌아오겠소. 헌데 계수의 안색이 좋지 않구려 아무쪼록 몸을 잘 돌보시오”
인보는 신중한 기색을 짓고 재우의 얼굴을 넌지시 바라보았다.
“허허 염려해 주어서 고맙소 허지만 오히려 내가 할 말을 백련이 하는가 싶소”
재우는 인보의 두 손을 꼭 잡고 푹 잠긴 음성으로 말한 다음 사방을 돌아보았다.
“너는 예서 며칠 지내다가 천천히 떠나거라 별로 할 일도 없을 터이니 나하고 사냥이나 같이 하는게 좋겠다”
“예, 그리하겠습니다”
돌이는 공손히 말하고 물러나려 하였다. 눈치 빠른 그는 두 어른이 긴히 할 말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던 것이다.
“네, 게 좀 앉아서 내 말을 마저 듣고 나가거라”
인보는 돌이가 다시 자리에 앉는 것을 보고 말을 이었다.
“너는 그 구붕골이라는 곳으로 부사님댁 서방님을 모시고 갈 생각일랑 말아라. 때가 때니 만큼 조심해야 하느니라 요즘은 무슨 변이 생길지 모른다 알겠느냐”
“예, 분부를 명심하겠습니다”
돌이는 머리를 숙이며 나직이 대답했다.
“어, 그럼 됐다”
인보는 그 구붕골이라는 곳이 관가에 눈을 피하여 사는 사람들의 마을이라는 말을 계수에게서 들은 적이 있는지라 마음이 몹시 불안하였다. 그는 고개를 끄덕여 이제는 나가도 된다는 뜻을 표시했다. 그러자 돌은 즉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돌이 나간 후에 재우가 빙긋이 웃으며 말했다.
“백련은 공연한 근심을 하시오. 그리도 소심해서야 나라를 어떻게 방비하겠소”
“허 그래서 더욱 조심해야 하는 거외다”
인보도 웃으며 댓구했다.
그들은 얼마 동안 시국을 논하고 이러 저런 이야기를 주고받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내, 그럼 이제 다녀오리다. 부디 몸을 삼가하시오”
재우도 일어서며 인보의 두 손을 꼭 잡았다.
“요즘 나라 형편이 심상치 않으니 오래잖아 무슨 변이 일어날 듯싶소 아무튼 먼 길에 무사히 다녀 오시외다”
이어 그들은 밖으로 함께 나왔다. 재우는 인보를 배웅하며 그의 뒷모습을 늦게까지 바라보았다
돌이는 영산고을에서 머슴살이를 하던 김장쇠의 외아들이다. 팔 년 전 돌이의 아버지 김장쇠는 부치던 땅을 잃고 아내와 함께 영산 고을 공의겸이라는 토호집 행랑채에 살면서 머슴살이를 하였는데 몇 해가 되도록 품삯을 받지 못하였다.
그들 부부는 마소와 같이 뼈빠지게 주인집 일을 해주면서도 빈번하게 어린 자식들의 배를 굶기게 되어 눈물로 세월을 보내던 중 자식 하나를 끝내 굶겨 죽였다. 큰 자식을 잃은 장쇠는 하나 남은 어린 자식이 또 그 지경이 될 까봐 돌이를 의령 고을 눌찬이에 사는 사촌집에 보내게 된 것이다.
어린 소년의 장래에 눌찬이 오 년 간의 생활이 큰 영향을 끼치게 되어 앞으로 걷게 되는 길에 운명의 가느다란 선이 만들어졌던 것이다.
돌이는 눌찬이에 온 그 해 여름부터 타고난 배짱과 영리한 기질로 인하여 재우의 귀여움을 받으며 천한 신분의 아이로는 감히 생각도 할 수 없는 길을 걷게 되었다. 그 길은 숲 속에 난 좁은 오솔길과 같은 것이었다.
어느 날 용현루에 슬그머니 올라간 돌이는 서생들의 시 짓는 모임에 나가서 흥미 있게 구경하고 있었다. 이때 한 젊은 서생이 가까이 불러 먹을 갈라고 하니 돌은 벼루 옆에 공손히 꿇어 앉았으나 정작 어떻게 하면 좋을지 알 수 없어 눈치를 살폈다.
젊은 서생은 돌이의 거동을 잠시 지켜 보다가 천한 놈의 자식은 별 수 없다는 욕을 하고 나서 물러 가라고 호령하였다. 순간 어린 돌이는 화가 나서 쥐고 있던 벼루를 번쩍 들고 일어섰다가 차마 팽개칠 수 없어 그 자리에 ‘탁’ 하고 놓아 버렸다. 그 바람에 벼루가 뒤집혀 바닥에 떨어지고 먹물 방울이 재우를 비롯한 서생들의 옷에 튀었다.
화가 난 서생들은 용현루 난간으로 뻗어 오른 나뭇가지를 꺾어 들고 돌이 앞으로 다가갔다. 하지만 돌이는 눈 하나 깜박하지 않고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돌이의 거동을 유심히 보고 있던 재우는 ‘껄껄’ 하고 웃으며 일어나 서생들의 손에서 종아리 채를 빼았었다.
어린아이의 당돌한 행동이 깜찍해서 단순하게 생각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 후 재우는 돌에게 글을 가르치고 몇 년 지나서는 병서도 읽혔다. 그는 말을 달리고 활을 쏘는 궁터며 낚시터와 사냥터, 서생들의 글 짓는 모임에도 늘 돌이를 데리고 다녔다. 나중에는 검술까지 가르쳤다.
재우의 이 같은 행동은 선비들의 눈에 거슬려 채신머리없이 상놈의 자식을 끼고 다닌다는 비난도 있었지만 원래 소탈하고 호협한 성품을 지닌 재우는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돌이는 엄하면서도 인자한 재우를 몹시 따랐다. 아직 어린 나이라 양반이 무엇이고 상놈이 무엇인지 똑똑히 알지 못했으나 계수라는 어른은 보통사람들과 다른 사람이라는 것만은 그에게도 명백히 느껴졌다. 그뿐 아니라 양반 중에 자기를 깍듯이 대해 주는 유일한 사람 임을 소년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돌이는 열두 살 되던 해에 아버지를 따라 영산 고을로 돌아갔다.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그는 어머니와 함께 주재원 마을로 자리를 옮기고 오촌 당숙의 도움으로 집 한 간을 구한 다음 농사를 지으며 근근히 살아갔다.
세월이 흘러 돌이는 어느덧 어엿한 대장부가 되었다.
기축년 정월 초하루였다. 이날 돌이는 우질포에 사는 고모에게 새해 세배를 갔다. 더욱 깨끗하고 늠름해진 돌이의 모습은 농군처럼 보이는 데가 하나도 없었다. 준수한 용모며 우람한 체구와 굵고 부드러우면서도 점잖은 음성 등 어느 하나도 빠지는 데가 없었다.
홀어머니 슬하에서 장가도 못간 조카가 마음에 걸려 하던 돌이의 고모는 언제부터인지 얼굴이 피어나는 해당화 같고 마음씨 고운 이웃 뱃사공의 딸 자온녀라는 처녀를 은근히 점 찍어 놓게 되었다.
금년에 돌이의 나이가 자그마치 스물 넷이라 더는 지체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어 돌이의 고모는 마침내 뱃사공 백고운의 집에 찾아가 청혼을 하였다. 그랬더니 백고운은 주재원에 사는 돌이라면 자기도 잘 안다고 하며 쾌히 승낙을 했다. 돌이의 고모는 그날로 사주단자를 보내고 저녁에는 따로 떡국을 마련하여 백고운 집의 식구를 데려다가 대접까지 하였다.
일이 있어 밖에 나갔다가 어두워져서 집에 들어온 돌이는 방금 집을 나와 방으로 돌아가는 자온녀와 문가에서 마주쳤다. 그들은 서로 상대가 누구라는 것을 짐작하고 어찌 할 바를 몰라 잠깐 주춤거렸다. 다음 순간 돌은 저도 모르게 자온녀의 손을 잡고 감나무 밑으로 갔다.
자온녀는 당황하여 잡힌 손을 꼼지락거렸으나 어쩔 수 없이 돌이에게 맡겼다. 세상에 태어나 처음으로 이성을 대하는 두 젊은이의 심장은 높이 고동쳤다. 그날 밤 돌이는 어둠 속에서 상대 얼굴은 확인할 수 없었어도 맑은 목소리에 고운 마음이 느껴지는 숫기 없는 웃음소리, 그리고 얌전한 태도에서 처녀의 꽃다운 모습을 능히 그려볼 수 있었다. 자온녀 역시 같은 심정이었다.
그들은 상대의 용모가 어떻게 생겼는지는 몰라도 소문을 통하여 아름답고 마음씨 고운 처녀라는 것, 또 잘생기고 늠름하며 여러모로 훌륭한 사나이라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이 날 밤 운명이 하나로 결합된 두 청춘의 가슴 속은 다정하고 따뜻한 연정의 물결이 조용히 찰랑거렸다.
그 후 이들은 그 날 밤의 다정한 모습이 그리워 밤마다 잠을 못 이루었고 어서 빨리 혼사 날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자온녀는 그리운 돌이를 위하여 온갖 정성을 다 했고 외동딸을 둔 그의 부모들도 장차 사위를 아들 삼아 살아가야 할 처지인 까닭에 돌이를 위해서라면 아끼는 것이 없었다.
자온녀의 집에는 온 식구가 정성껏 기르는 백마 한 마리가 있었다. 그 말은 무자년 여름에 김해고을 금단군 목장에서 일하던 백고운의 사촌동생 성팔이가 망아지 한 마리를 끌고 와서 주고 간 것이었다.
백고운 부부와 자온녀는 어미 찾는 어린 망아지를 자기집 어린아이 돌보듯 귀히 길렀다. 말은 세 살부터는 망아지 티를 벗고 제법 큰 말 구실을 하더니 하루가 다르게 자라 인근에서 보기드문 준마가 되었다. 백마는 자기를 위해주는 자온녀를 몹시 따랐다.
백고운은 말이 다 자라자 마을 농군들에게 빌려주어 밭갈이도 시키고 짐도 나르게 하였다. 그러다가 돌이와 자온녀의 혼약이 이루어지니 직접 말 고삐를 쥐고 끌어다가 주재원의 돌이에게 넘겨주었다. 자온녀는 그날 남의 집 길쌈을 해주며 마련해 두었던 혼수감인 명주로 두루마기를 지어 말과 함께 보냈다.
뜻하지 않은 말을 받은 돌은 너무도 감격하여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가대기로 밭을 갈던 처지에 잘 생긴 백마가 생겼으니 그럴 법도 하였지만 더군다나 자온녀의 고운 마음씨가 깃들어있는 옥색두루마기를 받게 되어 그의 가슴을 더욱 기쁘게 만들었다.
다음날부터 돌은 논밭에 나가 백마를 몰며 흥겨운 나날을 보냈다. 호사다마라고 하더니 그 흥겨운 기분은 오래가지 못하였다. 첫사랑의 순결한 애정이 담긴 말과 두루마기를 받고 그처럼 기뻐하던 돌에게 뜻하지 않는 일이 생겼던 것이다.
장인 백고운이 다녀 간지 보름째 되던 날 영산 고을 관차에게 잡혀서 말과 함께 영산 고을로 갔다.
토호 공의겸은 유씨 모자의 행적을 탐지하여 마음에 새겨두고 이따금 알아보는 것을 잊지 않고 있었으니 포교와 사령을 동반한 관차가 돌이의 집에 갑자기 나타난 것은 그러한 흉심이 마침내 행동으로 옮겨졌기 때문이었다.
심복 하인을 통하여 돌이의 소식을 들은 공의겸은 이방 옥경선을 찾아가 사람은 물론 백마까지 제 손에 넣으려고 수작을 하였으며 이 이방으로 하여금 오장 박순호를 시켜 포교와 사령들을 거느리고 가도록 하였던 것이다. 이렇게 되어 돌은 영문도 모르고 박순호에게 붙잡혀 관가로 끌려왔다.
옥경선으로 말하면 십여 대를 두고 아전을 해온 이 고을 세습 이속으로서 고을 안 사백 여 세대의 실정을 손금 보듯 잘 알며 뇌물만 가지고도 갑부 부럽지 않게 산다는 자였다. 그는 각종 문서와 부세 처리의 농간질에 능하며 권모술수 또한 비상하여 못하는 짓이 없는 불여우였다.
그와 가장 가깝게 지내는 자가 영산고을 토호들 중에서는 공의겸이 있었고 관속들 중에서는 오장 박순호가 있었다. 옥경선은 백성들에게 부과되는 가렴 잡세와 환곡을 가지고 갖은 농간질을 다하였지만 저는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고 오장 박순호의 손을 빌렸고 밖으로는 공의겸을 통하여 귀신도 모르게 감쪽같이 일을 저질렀다. 그런 것만큼 그는 언제나 공의겸과 박순호에게 각별한 호의를 보였고 때로는 한 몫 든든히 챙겨주기도 하였다.
옥경선이 시키는 데로 포교와 사령들을 거느리고 주재원 마을에 다녀 온 오장 박순호는 돌을 붙잡아 놓고 위협하며 그를 십여 년 전에 상전 몰래 도망친 종으로 몰아 댔다. 그리고 겉 곡으로 벼 다섯 말 얻었던 것을 마치 한 섬이나 가져다 먹은 것처럼 덮어 씌우고 한 섬을 옥백미로 갚으라고 하며 전혀 모르는 문건들을 보였다.
돌이 공의겸의 집을 나오던 때는 너무 어려 세상물정을 알 수 없었으나 자기 부모가 남의 집 종이라는 말은 한번도 들어 본적이 없었다. 오히려 양민이 남의 집 머슴살이를 하는 것이 한스럽다고 탄식 하던 일이 기억 속에 생생히 남아 있었다. 그리고 십 여년 동안 한번도 품삯을 못 받아 이대로 나갈 수도 없다 하시고는 병이 들어 죽게 되었다고 곱씹었던 어머니의 말은 잊을래야 잊을 수가 없었다.
그러니 몰래 도망친 종이란 왠 말이며 옥백미 한 섬이란 도대체 어인 일이냐. 문서는 또 무엇인고? 돌은 억이 막혀 말이 나오지 않았다. 한 참 만에 그는 이런 문서는 인정할 수 없다고 하며 한쪽으로 밀어놓고 나서 자기는 종이 아니라는 것과 아버지가 공의겸의 집 일을 십년 넘게 해 주다가 고역에 지쳐 세상을 떠났다는 것을 말했다.
돌의 이러한 항변이 오장 박순호에게는 천만 뜻밖이었다. 박순호는 이 청년을 가볍게 다루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으로 그 날로 봉두를 씌워서 공의겸의 집 하인청으로 끌고 갔으며 독한 매를 때리도록 하였다.
돌은 사정없는 매에 전신의 살이 너덜이 되고 피를 낭자하게 흘리고는 몇 번이나 정신을 잃었다. 다음날 또 다음날에도 매질은 계속되었다. 이렇게 이레를 견디어낸 돌은 더는 지탱할 수 없었다.
관가에 잡혀간 아들이 나오기를 하루가 멀다고 기다리며 애를 태울 어머니 얼굴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어쩌면 백년가약을 맺은 자온녀와 다시 만나 보지도 못하고 죽을 것 같기도 하였다.
그는 소위 관가의 처사라는 것이 허무맹랑하다는 것을 통절하게 느끼면서도 속으로 다시 한번 냉정하게 생각을 굴려보았다.
“이 청춘 나이에 허무하게 맞아 죽어야 옳단 말이냐 늙으신 어머님 홀로 남겨두고 백년해로를 철썩 같이 언약한 자온녀도 다시 못보고 지금까지 누구든 관가의 처세에 대항하여 무사히 놓여 나온 사람은 없을 게다. 그러기보다는 우선 순종하여 공가의 집 종으로 들어갔다가 때를 보아 행동을 취해야 할까 보다”
이렇게 생각한 돌은 그 이튿날부터 종살이를 시작하였다.
27
순국의 길을 걷는 정인보
서울을 점령한 우키다 히데이에는 고바야가와 다카가게에게 전라도를 빨리 점령하여 조선수군의 후방과 그 진입로를 확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고바야가와 다카가게는 이른바 자기의 영지로 할당 받은 전라도를 기어이 손에 넣어 보려고 또 한 번 군사를 대거 출동시킬 것을 계획하였다. 왜적이 북으로 계속 올라가면서도 남쪽의 전라도 하나를 점령하지 못한 것은 조선 수군이 바다를 지키고 있는데다가 곽재우의 의병대가 길을 가로막고 있기 때문이었다.
원래 적들은 이같은 항거에 부딪히게 되리라고는 예상도 못했었다. 그들은 전쟁터에서 잔뼈가 굵었어도 보통 백성들이 싸움에 가담하는 것은 한번도 본적이 없었던 것이다. 그들은 전쟁이란 싸움을 전업으로 군사들이나 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사실 섬나라 백성들은 어느 영주의 편에도 설 필요가 없었다. 그저 전쟁에서 이긴 자에게 복종하면 되었던 까닭이다. 하지만 조선땅에서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았다.
조선 백성들은 왜인들처럼 덮어놓고 아무에게나 복종할 의사가 없었을 뿐더러 자기 강토에 침입한 놈들에게는 한 하늘 아래 같이 살 수 없는 원수로 여겼다. 그래서 왜군은 군사가 아닌 보통 백성들에게도 맞아 죽는 일이 빈번하였다.
왜적의 괴수의 하나인 모리 데루모토는 자기 고향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이 나라 사람들은 우리를 왜구만치 여기고 산으로 들어가 숨곤 한다. 우리 왜군이 지나가면 반궁(작은활)으로 해한다. 참으로 놀랍고 어처구니 없는 일이다.”
또한 그 당시의 사실을 기록한 우리나라 옛 문헌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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