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 차]
무어의 말
〈10월〉
새벽 달리기 / 무어에 관하여 / 벽돌 쌓기 / 생뚱맞게 시작한 마라톤
〈11월〉
스트레칭 / 행복에 관한 단상 / 밴댕이 마라토너 / 모스 이야기 / 옷차림 / 담배, 미용사 그리고 결혼 / 가위손 / 운동화 이야기 / 서당 개보다 못한 시라소니 / 팀 무어 / 그리움 하나 / 트리를 위하여 / 메리 트리마스 / 단상 1 / 길 위에서 배운다 / 단상 2 / 짐승의 호흡으로 닌자처럼 달리기 / 꾀 부리고 싶은 날은 계단으로 / 고라니와 벌침 / 하루키처럼, 그리고 뇌를 속여라! / 치앙마이 이야기 / 마스크 달리기 / 램프 증후군 / 단상 3 / 장인은 월급쟁이가… / 귀찮음 / 귀신 본 사람? / 잠든 사람은 죽은 사람과 같아요
〈12월〉
반면교사 / 나의 홍제천 친구들 / 단상 4 / 2024년 12월 3일 내란의 밤 / 고시원 청소 달리기 / 첫눈과 끝눈 사이 / 단상 5 / 오만과 편견 / 하늘공원 선녀 둘 / 운동성과 율동 / 단상 6 / 공짜인데 김포쯤이야! / 단상 7 / 가끔은 아날로그 / 달리기 요정, 여의도 김부장님 / 보상은 있다 / 학이시습지 불역열호 / 단상 8 / 몽키 매직 / Paris / Tokyo / Bangkok / 할렐루야의 행복 / 달리기 매너 / 춘천 마라톤 / 단순하지만 지루하지는 않아 / 갈까 말까 고민되면 가는 거야 / 2025년 마무리 / 러너는 멈추지 않는다!
[본 문]
그날그날의 컨디션과 출근 시간에 따라 코스를 변경하여 10~30km를 달린다. 대회 시즌이 아니면 굳이 25km 이상은 달리지 않는다. 특별한 이유는 없고 그냥 힘들어서……. 그리고 10km 미만도 웬만하면 달리지 않는다. 역시 특별한 이유는 없는데, 무언가 나태하게 느껴져서다. 하지만 10km를 달리든, 40km를 달리든 힘듦의 차이는 없는 것 같다. 하루하루 달리는 행위를 하루 한 장의 벽돌을 만드는 작업이라고 생각한다. 42km의 튼튼한 벽을 3시간 동안 만들기 위한. 오늘 14km를 달렸으면 14km의 무게를 갖는 벽돌 한 장, 5km를 달리면 5km만큼의 벽돌 한 장. 42km를 달리는 일은 무척 고단하다. 그 거리를 3시간에 들어오든, 4시간에 들어오든 그건 중요하지 않다. 평상시 벽돌을 얼마나 성실하게 만들었는지, 그리고 목표하는 시간을 달리는 동안 얼마나 즐거웠는가에 비례할 뿐이다. 참으로 정직한 달리기._〈벽돌 쌓기〉 중
의상을 전공했다. 왜 의상을 선택했는지 사실 잘 모르겠다. 어쩌면 담배와 같은 이유이지 싶다. 고3 수능이 끝나고,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 대입 책자를 놓고 보니, 의상학과가 꽤 멋져 보였다. 예쁜 여학생이 많을 거라는 얄팍한 계산도 있었고……. 입학 후 학교생활은 그저 그랬다. 낭만도, 예쁜 학생도 없었고, 그저 술 마실 시간만 넘쳐났다. 어영부영 졸업이 다가오고 있었지만 난 아직 사회에 나갈 준비가 되지 않았다. 사실 준비를 안 했다.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몰랐고. 그렇다고 기다려줄 시간도 아니고. 처음으로 심각하게 진로에 대해 고민해봤다. 하지만…… 심각한 고민의 무게에 비해 가볍게 결론이 내려졌다. 동네 미용실에서 일하는 미용사들을 보니 그들의 스타일이 의상학과를 선택한 동기만큼 멋져 보였다. 당시엔 이런 유행어가 한창이었다. ‘인생 뭐 있어?!’ 일주일 고민한 결과는 “인생 뭐 있어”였고 난 결국 20년째 미용 일을 하고 있다. 물론 대학 생활은 내 인생에서 중요하다. 4년 동안 미싱을 배웠으니까!! 그래서 손바느질도 잘한다._〈담배, 미용사 그리고 결혼〉 중
-기록은요? -한 시간 20분 언더요. -네에??!!! 충분히 서브 쓰리 하시겠네요. -기대는 하고 있는데 해봐야죠. 처음 뵙는데 제가 팁 하나 드려도 될까요? -아, 그럼요! -언덕을 뛰실 때, 평지 속도 그대로 뛰어 올라가세요. 올라가서 쉰다는 느낌으로. 어차피 곧 내리막이잖아요. 제가 자전거 탈 때도 그랬는데 도움이 많이 됐어요. 뭔가 남들에게 측은지심을 부르는 모습으로 나는 달리나 보다. 길 위에서 귀인을 두 분 만났다. 달리기는 딱 두 가지가 중요하다. 거리 늘리기와 언덕 뛰기. 지금도 대회에서 달리다 보면 비슷한 시간대의 주자들보다 언덕에서는 월등히 빠르다. 그리고 평지에서 따라잡힌다. 참으로 평등한 달리기._〈길 위에서 배운다〉 중
한 달을 쉬고 조깅을 했더니 1km를 못 가서 다시 통증. 또 한 달을 쉬고 나갔더니 3km 지나서 통증. 신청한 하프, 풀 모두 못 나갔다. 우울해질 만큼 달리기를 좋아한다는 걸 그제야 알았다. 그때 친구 포도당이 추천해준 책이 『본 투 런』이다(포도당 얘기는 나중에 다시 하기로).이 책은 멕시코 원시 부족인 타라우마라 사람들의 달리기를 배경으로 하는 울트라 마라톤 이야기다. 책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은 실존하는 사람들이다. 요약하면 타라우마라 부족을 찾아가는 여정과 달리기에 미친 사람들이 가장 위험한 멕시코 산악 협곡을 달리는 울트라 마라톤 이야기가 메인 줄기다. 실제로 이 대회는 여전히 매년 열리고 있다. 부상으로 우울했던 시기를 『본 투 런』을 읽으며 대리 만족했다. 그런데, 어느 날. 책장을 덮는 순간, 가슴 깊은 곳에서 뛰고 싶다는 욕구가 너무나도 강렬하게 이는 것 아닌가. 일단 나가보자! 조금 쌀쌀한 가을밤이었다. 한강변을 따라 7km를 달렸을 무렵이었다. 고양시 경계를 넘자마자 무릎 통증이 오기 시작했다. 순간, ‘본 투 런의 미친 인간들처럼 달려보자. 나도 뇌를 속여서 내 몸이 이상 없음을 보여주겠어!’ 하는 마음으로 속도를 더 높였다. 처음으로 km당 5분 이내의 속도로 뛰었는데, 정말 미친 건지, 뇌가 속은 건지 무릎이 아프지 않았다. 그날 20km를 뛰고 완전히 회복했다. 모든 건 마음가짐이다._〈하루키처럼, 그리고 뇌를 속여라, 『본 투 런(Born to Run)』〉 중
자전거를 들고 다리 위로 올라가니, 도로에 차들이 거의 없다. 대교를 건너가는 사람은 없고, 건너오는 사람들만 간혹 보였다. 통행 제한은 없나보다, 생각했다. 평상시 같았으면 자전거를 끌고 다리를 건넜을 텐데, 급한 마음에 다시 자전거를 타고 달렸다. (...) 모두가 차량을 향해 항의하고 경찰은 우리에게 물러서라 하는데, 차량이 위협 운전을 시도하며 액셀을 밟기 시작했다. 그때 운전병 시야를 방해하자는 생각에 자전거 라이트를 떼어 어두운 차 안을 비췄는데, 그날 밤 처음으로 공포를 느꼈다. 군인 네 명이 타고 있었는데, 한 명, 한 명 얼굴을 비춰도 누구 하나 미동은커녕 눈도 깜박이지 않고 앞만 주시한다. ‘진짜 훈련된 군인이구나!’ 거친 항의가 계속되니 그제야 경찰들이 차량을 빼라고, 못 지나간다고 신호했다. 그제야 전술 차량은 후진해서 돌아갔다. 그곳에 있던, 서로 모르는 시민들과 수고했다는 인사도 잠시, 이내 실내등이 꺼진 중형 버스 한 대가 또 들어
온다. 모두가 도로로 나가 버스 앞을 막아섰다. 다시 자전거 라이트를 켜서 버스 안을 비추니 무장한 군인들이 가득 타고 있다. 무섭다._〈2024년 12월 3일 내란의 밤〉 중
방콕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도시다. 느긋하고 자유롭고. 치앙마이의 구도심이 외부와는 별개로 시간이 멈춘 느낌이라면 방콕은 뭔가 바쁜데 곳곳이 여유롭다. 그 중심에 룸피니 공원이 있다. 아침과 저녁에는 공원을 따라 달리는 사람들로 모든 공원 길이 가득 찬다. 처음 룸피니 공원에 갔을 때 목도했던, 현지인이나 관광객 할 것 없이 달렸던 장면은 정말이지 흥분 그 자체였다. ‘이렇게 많은 사람이 달린다고?!’ 룸피니 역시 달리기 코스로 보면 그렇게 큰 공원은 아니다. 넓고 크게 한 바퀴 돌면 3km 정도의 거리지만 넓은 호수가 있고, 나무와 숲이 울창해서 잘 정비된 밀림을 달리는 느낌이다. 특히나 호수 주변 길에 곧잘 보이는 거대한 왕도마뱀은 여기가 도심 한가운데임을 잊게 만든다. 공격적이진 않지만 절대 만져서는 안 되는 공원의 명물이다. 사실 만지고 싶은 마음이 절대 생기지 않는 크기에 외모도 무섭다. 룸피니 공원을 크게 세 바퀴 돌고 숙소로 돌아오면 대략 10km의 거리가 나온다. _〈Bangkok〉 중
올 한 해 2,956km를 달렸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표현을 빌리자면 열심히는 아니지만 ‘꾸준히 성실하게’ 달렸다고 생각한다. 대회 준비에 여념 없던 연초, 몰아 달리기, 한여름의 나른한 달리기, 대회가 없었던 가을 겨울의 느긋한 달리기. 이 모든 달리기의 평범한 결과물이 아니었을까. 4km의 아쉬움은 있지만, 3,000km를 채웠다면 3,100km의 아쉬움이 생길 것이다. 거리든 기록이든 욕심에는 끝이 없다. 욕심을 채우자고 달리는 것이 아니라 욕심을 버리자고 달리려 한다. 내년 그리고 그다음 해의 달리기도 다르지 않다. 그저 꾸준히 성실하게 달리면 된다. 남은 생의 목표가 있다면, 어느 마라톤 대회에서 최고령 참가자로 기록되고 싶은 것. 그러기에 욕심을 버리고 꾸준히 성실하게 달리려 한다. ‘러너는 멈추지 않는다!’ 평상시 농담처럼 나만의 어법으로 자주 쓰는 말이지만 툭 툭 던질 때마다 마법의 주문처럼 느껴진다. 러너이기에 길에서도 삶에서도 멈추지 않는다. 일상이 무료하거나 현실이 답답하게 느껴지면 마법의 주문을 외워보자.
“러너는 멈추지 않는다!”_〈러너는 멈추지 않는다!〉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