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 차]
책을 펴내며 / 4
순환하는 종말 속에서_《사탄탱고》와 크러스너호르커이의 덫 / 조원규 / 10
사탄과 함께 탱고를, 크러스너호르커이는 여섯 스텝 앞으로, 벨라 타르는 여섯 스텝 뒤로 / 정성일 / 34
이토록 망해버린 세계에서_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의 문학 세계 / 장은수 / 78
교수와 천사 / 금정연 / 112
고정된 회오리의 세계_마지막 늑대 / 고영범 / 134
[본 문]
크러스너호르커이는 니체에서 카프카를 경유하여, 주인이 죽었다는 사실조차 모르거나 알면서도 여전히 주인의 명령을 기다리며 헛되이 움직이는 존재들을 그린다. 아니, ‘카프카의 개인들’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어리석은 슬픔의 군상, 그들의 황폐함을 형상화한다. 카프카의 인물들이 여전히 성에 도달하려 하고 법정의 판결을 이해하려 애쓴다면, 《사탄탱고》의 인물들은 그마저도 포기한 채 무의미한 순환 속에서 춤춘다. 그들은 주인이 죽었다는 것을 어렴풋이 알면서도 새로운 주인(이리미아시)이 나타나기를 갈망하며, 춤을 추다 취해서 뻗어버린다.
흥미로운 것은 크러스너호르커이가 이를 1985년, 냉전 말기 헝가리를 배경으로 썼다는 점이다. 공산주의 체제라는 ‘주인’은 이미 정당성을 잃고 사실상 죽었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그 시스템 안에서 움직이고 있었다. 카프카가 합스부르크제국 말기의 ‘들려야 할 소리가 들리지 않는’ 이명을 포착했다면, 크러스너호르커이는 20세기 후반 동유럽의 또 다른 이명-이미 죽은 이데올로기의 메아리-를 기록한 것이다._15~16쪽
쉼표와 줄임표로 문장을 늘이면서 감각적인 사물들을 묘사해나갈 때, 그 표현의 ‘과잉’이 오히려 ‘허망함’을 부각할 때, 독자는 바로크적 주제를 깨닫는다. 17세기 바 로크 정물화에서 풍요로운 과일과 화려한 꽃이 화면을 가득 채우지만 그 한가운데에는 해골이 놓여 있었던 것처럼. 바니타스, 모든 것은 헛되다.
이처럼 소설 곳곳에서 ‘용암처럼 흘러가는 덩어리진 언어적 축적’을 헤치고 나아가며 독자는 힘겨워하지만, 그것은 타협할 수 없다는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의 작의에 부합하는 일이다._27쪽
유럽 문예사에는 허무와 니힐리즘을 극복하는 매개체로 예술과 형식을 상정하는 예술 형이상학의 전통이 있다. 니체로부터 카프카를 경유하여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에 이르기까지, 하강하는 어두운 예술 형이상학의 노선을 거론할 수 있다.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의 문학은 이전보다 더 어둡지만, 구원하지 않으며 동행하는 예술의 가치를 익숙하게 증명한다. 그래서 우리는, 그와 함께, 여전히 예술 안에서 추락하는 쪽을 택한다._31~32쪽
나는 이 저택을 시적으로 읽는 대신 역사의 정치경제 학으로 돌려놓고 싶다. 텅 빈 저택. 귀족들이 살았던 집. 그들이 모두 사라지고 집만 남았다. 왜냐하면 귀족의 시작이 끝났기 때문이다. 귀족의 하부 토대였던 콜로누스 들은 생산력의 모순 과정을 통해 예속을 벗어났다. 하지만 다음 단계가 기다리고 있었다. 기나긴 투쟁. 그리고 농민들은 집단농장에서 새로운 생산양식의 삶을 시작했다. 지금 그들은 농장을 떠나서 여기에 도착해 6시 43분에 이리미아시가 한 약속, “여러분을 위해 사흘 동안 잠도 못 자고 몇 시간씩 빗속을 걸어왔어요.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려고 이 관청 저 관청을 찾아다녔구요”라는 말에 다시 한번 속는다. 미래의 보금자리. 새로 시작하리라는 약속, 황홀한 자유의 공기, 해방의 감각. 하지만 그런 곳이 정말 지상에 남아 있을까? 집단농장의 농민들을 위해 서 누가 만들어놓고 기다리고 있을까?_44~45쪽
롱테이크 촬영.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하는 촬영. 찍고 있는 동안의 영화의 시간과 장소의 물리적 시간의 일치. 첫 신을 롱테이크로 촬영했지만, 이 영화의 원칙은 아니다. 종종 벨라 타르는 카메라의 이동을 잊어버린 것처럼 세워놓기도 한다. 또한 1부 두 번째 장 경찰서 관공청에 서 이리미아시와 페트리너가 보고할 때 과도할 정도로 전통적인 문법에 따라 대화를 주고받으면서 쇼트를 진행 한다(shot_reverse shot). 하지만 두 가지를 함께 말해야만 분명해질 것이다. 하나는 카메라는 둘 중 하나의 방향으로 이동한다. 수평으로 이동하거나, 아니면 수직으로 물러나거나 다가간다. 수직으로 물러날 때는 인물이 앞으로 다가오기 때문이고, 다가갈 때는 등 뒤에서 따라갈 때다. 모든 장면이 두 개의 방향만 있는 것은 아니다. 2부 네 번째 장 ‘천국의 비전인가, 환각인가’. 슈타이거발트의 술집에서 이리미아시는 이제까지 집단농장의 마을 사람 들의 성향을 한 명씩 부르고 페트리너는 그걸 받아쓴다. 그때 카메라는 빙빙 원형을 그리면서 돌기 시작한다. 2부 두 번째 장 ‘그저 일과 걱정뿐’. 관공청 사무실에서 이리 미아시와 페트리너가 ‘상스러운’ 단어들로 작성한 보고 서를 다시 타이핑하는 두 명의 관료를 찍을 때 카메라는 타이핑을 하는 책상을 중심으로 마치 행성 주변을 회전 하는 위성처럼 느리게 빙빙 원형 운동을 한다. 같은 내용은 같은 방법으로 찍을 수밖에 없다는 것처럼 그렇게 회전한다._65~66쪽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가 시나리오를 쓰고 벨라 타르가 연출한 마지막 영화는 〈토리노의 말〉이다. 1889년 1월 3일 니체는 토리노의 카를로 알베르토 광장에서 한 마부가 자신의 말에 채찍질하는 것을 바라보고 달려가서 말의 목에 매달려 울었다. 세계의 종말. 정신의 종말. 주변에서는 모두 〈사탄탱고〉를 본 다음 절망을 보았다고 말한다.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를 읽은 다음 환멸을 보았다고 말한다. 나는 희망을 본다. 이번에는 더 잘하겠다는 의지의 희망, 이번에는 승리하겠다는 두 번째 긍정의 내기._76~77쪽
그래서 크러스너호르커이는 ‘노벨문학상 수상 연설’을 ‘바닥난 희망’을 이야기하면서 입을 떼었고, 희망이 (아마도 절대로) ‘있을 수 없음’을 말하면서 입을 닫았다. 이런 극단적 비관주의는 인식이자 경고이고, 새로운 삶의 스타일의 탐구이자 선언이다._83쪽
이 작품은 세상 모든 만물을 해로운 것과 유익한 것으로 나누고는 유익한 것만 남기려는 계산적 이성이 작동하면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를 경고한다. 작가가 “질서에 대한 애착”이라고 부르는 욕망의 작동, 인간의 이익만을 기준 삼아 세계의 질서를 잡으려는 서구적 이성의 뒤에는 해롭다고 판별된 생명의 사체가 쌓이고, 그 피가 우리가 딛고 선 대지를 녹여 진창을 이루는 “극악무도하고 무자비한 참학”, 그러니까 지옥이 열려 있다.
끝없는 진보와 유토피아를 약속하는 계몽 이성이 곧 끔찍한 폭력이자, 무참한 종말을 앞당기는 촉매다. 크러스너호르커이는 이로부터 사냥하는 이성, 그러니까 근대 서구 문명의 종말을 냉정하게 선언한다. 그건 처음엔 동물을 사냥했지만, 다음엔 인간을 사냥할 것이고, 마지막엔 자신마저 사냥할 것이다. 인간 이성, 그 예측하고 계획하는 이성은 더 이상 아무 문제도 해결하지 못한다. 합리적인 인간이 애쓰고 몸부림칠수록 오히려 종말의 기울기는 커질 뿐이다. 우리에겐 ‘다른 길’이, 합리적 희망보다 예술적 절망에 내기를 거는 모험이 필요하다._90~91쪽
전쟁, 기후 붕괴, 정치적 분열 등, 우리 시대의 특징은 우울과 절망이다. 단테가 지옥의 밑바닥에서 사랑의 천국을 꿈꾸었듯, 쓰라린 세상은 작가들에게 커다란 영감을 준다. “우리는 살아남기 위해서 훨씬 더 큰 힘이 필요하다. 작가들이 다음 세대를 위해 무언가를 줄 수 있기를, 어떻게든 이 시기를 살아 견딜 수 있기를 바란다.”(노벨위원회)
절망 속에서 다른 삶의 가능성을 발견하기, 이는 모든 위대한 작가의 조건이자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 문학의 특징이다._110쪽
크러스너호르커이에 따르면, 원래 천사란 위에 계신 분의 말씀을 전하는 존재였고, 천사 자체가 곧 메시지였 다. 그러나 오늘날의 새로운 천사에게는 날개도 없고, 전할 말도 없다. 우리와 똑같이 옷을 입고 우리 사이를 걸으며, 오히려 우리가 그들에게 무슨 말을 좀 건네주기를 기다리는 존재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전할 메시지가 없다. 따라서 거기엔 어떤 대화도, 이해도 이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크러스너호르커이는 말한다. 그들은 더 이상 천사가 아니라 희생자라고, 우리를 위해 희생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때문에 희생당하는 존재들이라고. 그리고 그는 그 사실을, 자신이 늘 가지고 다니는 (상상의) 청진기를 꺼내 진동판과 종 모양 부분을 우리의 가슴에 부드럽게 가져다 댔을 때 들려오는 ‘운명의 소리’를 통해 감지할 수 있다고 말한다._121쪽
천사는 여전히 희생되고, 교수는 여전히 아무것도 구하지 못한다. 하지만 4부작의 교수는 더 이상 안전한 관찰자의 자리에 머물지 못한다. 그는 벗어나고 싶지만 결코 벗어날 수는 없었던 세계(와 그 자신)를 함께 불태워버리는 쪽으로 조금 더 기울어져 있고, 벵크하임 남작은 전과 달리 이 소설을 쓴 작가 쪽으로 조금 더 가까워진 천사처럼 보인다. 이 새롭게 조정된 미묘한 거리가, 라슬로가 말한 “한 권의 책”을 향한 네 번째이자 마지막 시도의 결과라는 게 의미심장하게 느껴진다._128쪽
그러니까, 액자 속의 이야기가 고조되는 한편으로 액자를 이루는 이야기 또한 바텐더를 화자의 위치로 올려놓으면서 일종의 전환을 이뤄낸다. 액자 속 여행담은 고조되지만, 액자인 슈파쉬바인 이야기에서는 여행담의 화자인 ‘그’를 끌어내려 엇갈리게 교차시키는 것이다. 이렇게 한 줄기의 용암이 흘러내리면서 굳고, 그 자리 위로 또 다른 줄기의 용암이 흘러내린다. 그리고 이런 겹침과 교차의 원리는 이야기의 큰 단위에서뿐만 아니라, 문장의 진전 과정도 관통한다. 물론 이 작품은 전체가 마침표 없는 하나의 문장으로 이어져 있으니 이 말은 하나의 쉼표에서 다음 쉼표 혹은 다른 문장부호로 이어지는-혹은 단절되는-하나의 문장 단위를 일컫는 것인데, 이런 겹침과 교차는 이야기가 무르익으면서 한 지점으로 수렴되기도 한다._149~15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