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 차]
작가의 말
서툴고 달콤쌉싸름한 고해성사 | 오토나쿨 6
자격과 애정과 용기 | 박지완 8
01 다녀왔습니다, 어서 와! | 일본식 냉소면 / 〈 걸어도 걸어도> 오토나쿨 14
02 영화와 커피와 김지운 감독님 | 에스프레소와 초콜릿 케이크 / 〈달콤한 인생> 박지완 28
03 그녀는 내 생각을 하긴 했을까 |피넛버터 쿠키 / 〈 호텔 슈발리에> 오토나쿨 40
04 나를 지켜낸 여름 점심 | 연두부 낫토 / 〈 녹차의 맛> 박지완 54
05 차라리 사랑에 빠지는 게 낫잖아? | 콩나물 냉국 / 〈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 오토나쿨 64
06 늘 먼저 고백해버리는 사람의 이야기 | 월남쌈 / 〈노팅 힐> 박지완 76”
07 엄마, 다음에 또 같이 와요 | 풍기 샐러드 / 〈 딸에 대하여> 오토나쿨 88
08 아직 모르는 사람들의 반짝이는 슬픔을 위하여 | 삼계탕 / 〈수프와 이데올로기> 박지완 102
09 또다시 고독이 찾아오면 어떻게 하지 | 멘치카츠 / 〈 토니 타키타니> 오토나쿨 114
10 살 수도 훔칠 수도 없는 인생을 위해 | 프리타타 / 〈리플리> 박지완 128
11 “Kiss me, my girl, before I’m sick.” | 버섯 오믈렛 / 〈 팬텀 스레드> 오토나쿨 140
12 끝까지 가는 두 사람의 이야기 | 스테이크와 구운 채소 / 〈나를 찾아줘> 박지완 152
13 덧대고 기운 내 마음속 누더기 같은 영화 | 광동식 닭고기 덮밥 / 〈 해피 투게더> 오토나쿨 164
14 예측 가능한, 예측 불가능한 안정감 | 매실청 / 〈줄리 & 줄리아> 박지완 174
15 가장 어려운 동거 | 돼지국밥 / 〈 콘클라베> 오토나쿨 184
16 언젠가 나도 찍을 수 있을까 | 야구장 김밥 / 〈날 미치게 하는 남자> 박지완 194
17 오늘도 같은 걸로? | 포테토 사라다 / 〈 퍼펙트 데이즈> 오토나쿨 204
18 우아한 대답 | 소고기 미역국 / 〈케이 넘버> 박지완 216
19 손 안 가득 전해지는 단단한 위로 | 오니기리 / 〈 카모메 식당> 오토나쿨 228
20 세상은 바뀌고 사랑은 남는다 | 바게트와 레드와인 /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박지완 242
[본 문]
오랜만에 지난 영화들을 떠올리며 웃고 울면서 아쉬움과 씁쓸함을 손끝에 담아 요리하고 일기를 썼다. 고해성사는 아니지만 기쁜 것도, 슬픈 것도, 잘한 것도, 잘못한 것도 다 썼다. 덕분에 새로운 영화를 보면서 일기를 쓰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무엇보다 이 마음의 설렘이 정말 행복하다.
_ 오토나쿨, 작가의 말 〈서툴고 달콤쌉싸름한 고해성사〉, 7쪽
나를 돌아본다는 것은 언제나 어렵고, 사랑하는 대상을 고백하는 일도 조심스럽다. 그리 재주가 없음에도 해 먹는 음식을 늘어놓자니 부끄럽기도 하다. 이미 잘 아는 영화와 음식에 대해 쓴다고 생각했던 것은 나의 오만이었다. 고백건대, 무엇을 알고 알지 못하는지, 어떤 것을 느끼고 왜 좋았는지, 나는 결국 이 글을 쓰면서 깨닫게 되었다.
_ 박지완, 작가의 말 〈자격과 애정과 용기〉, 9쪽
“잘 먹겠습니다!”
손을 모으고 크게 외친 뒤 맥주 캔을 따서 나에게 먼저 건넨다. 소면을 젓가락 가득 집어 간 생강과 파를 넣은 쯔유에 찍어 먹으면서 한국에서는 냉소면을 어떻게 먹느냐고 물었다. 멸치 육수를 차게 식힌 다음 큰 그릇에 넣어 먹는다고 했더니 맛이 궁금하다며 맥주를 마셨다. 간 생강과 잘게 썬 쪽파가 담긴 멘쯔유는 짭조름하고 향기롭다. 그저 서너 번 넣었다가 뺄 뿐인 국수에 맛이 밸까 싶지만, 진하지도 옅지도 않은 쯔유에, 파 몇 조각과 간 생강이 면과 함께 입에 들어올 때면 그렇게 향긋할 수가 없다. 특히 면을 잔뜩 ‘빨아들인’ 뒤 숨을 내쉬면 입과 코 안에 기분 좋은 생강과 파 향이 가득했다. 거칠게 간 덕에 남아 있는 생강을 면과 함께 씹을 때는 눈이 저절로 지그시 감긴다. 그리고 맥주 한 모금. 이웃의 다정함이 넘치던 밤.
_ 오토나쿨, 〈다녀왔습니다, 어서 와〉 : 일본식 냉소면 & 〈걸어도 걸어도〉, 24쪽
영화를 직접 만들지 않고 살아갈 수 있나, 이걸 해보지 않고 후회하지 않을 자신이 있나, 나에게 질문했다. 반대로 이 많은 스태프들을, 돈을, 관객을 대할 재능이 있는지, 혹은 서른을 앞둔 시점에 그 어떤 영화적 재능도 없다고 결론이 나면 어떻게 할 것인지 생각했다. 결국 회사를 그만두고 영화 학교에 가겠다고 했을 때 김지운 감독님은 인생에 영화를 담고 사는 데는 다른 선택지도 많다고, 이미 직장을 그만둔 나에게 느긋하게 말했다. 그때 나는 잘했다는 칭찬을 듣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서운한 마음에 추천서도 마지못해 써주는 것처럼 느껴졌는데 지금은 감독님이 왜 그랬는지 알 것도 같다. 첫 영화를 투자받는 과정에서 느끼는 괴로움을 토로할 때도 감독님은 일본에서 사 온 향이 좋은 원두로 그저 조용히 커피를 내려줄 뿐이었다.
_ 박지완, 〈영화와 커피와 김지운 감독님〉 : 에스프레소와 초콜릿 케이크 & 〈달콤한 인생〉, 35쪽
해마다 여름이면 낫토의 촉감이 떠오른다. 발효된 콩에서 나온 미끈한 실에 가득한 차가움은 사실 일반적인 좋은 맛에는 포함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무슨 맛이냐고 물어도 설명하기 쉽지 않다. 그냥 한번 먹어보라고 할 뿐.
마찬가지로 〈녹차의 맛〉을 보지 않은 사람이 있다면 줄거리를 설명하기 어려우니 직접 보고 느껴보라고 얘기하고 싶다. 일본 어디엔가 살아가고 있을 그 가족의 안녕을 바라게 되는 나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_ 박지완, 〈나를 지켜낸 여름 점심〉 : 연두부 낫토 & 〈녹차의 맛〉, 61~62쪽
꽤 더웠던 여름, 같이 점심을 먹자며 집으로 온 여자 친구가 차가운 콩나물 냉국을 만들어 내놓았다. 뭘 넣긴 했을까 싶을 정도로 맑은 국에 청양고추와 파를 올린 차가운 콩나물 냉국. 식탁에 앉자마자 그녀가 말했다. “국물부터 한번 먹어봐.” 자신에 찬 목소리와 말투. 숟가락을 들어 국물을 한 입 먹었는데 그 맛은 솔직히,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콩나물 냉국에서 쉽게 느껴지는 특유의 콩나물 비린 맛이나 멸치 육수의 비린 냄새와 맛은 전혀 느낄 수 없었고, 육수라고 하 기에는 너무나도 맑은 맛이었지만, 분명 육수였다. 미원이나 다시다의 들큼한 맛도 전혀 나지 않는, 그동안 먹었던 콩나물 냉국 중에서 가장 맛있었다.
_ 오토나쿨, 〈차라리 사랑에 빠지는 게 낫잖아?〉 : 콩나물 냉국 &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 70쪽
나의 좁은 세상을 깨부수어주고 자신의 인생을 나누어준 영화를 생각하면서 삼계탕을 한 입 먹는다.
내가 아직 알지 못하는 사람들의 반짝이는 슬픔을 생각한다.
나는 여전히 카메라가 무섭다. 하지만 두려움을 이겨내고 카메라 뒤에 있는 사람의 아름다움에 대해서도 생각한다.
2022년 작고하신 강정희 선생님의 명복을 빈다.
_ 박지완, 〈아직 모르는 사람들의 반짝이는 슬픔을 위하여〉 : 삼계탕 & 〈수프와 이데올로기〉, 111쪽
멘치카츠는 1인분의 요리는 아니다. 다른 의미가 있는 게 아니라 글자 그대로 1인분만 만들기에는 들이는 품이나 재료들이 아깝다는 말이다. 당장 튀김옷을 입히는 달걀만 봐도, 한 알을 깨서 달걀물을 만들면 언제나 절반 정도 남고, 맛있는 튀김을 위해서는 기름이 넉넉히 필요하다. 그래서 일본 가정에서는 멘치카츠를 많이 만든 뒤 냉동해서 두고두고 먹곤 한다. 이런 의미에서 멘치카츠는 어쩌면 고독한 요리일지도 모르겠다. 혼자서 만들기 힘든 요리도 아니고 혼자서 먹기 힘든 요리도 아니다. 1인분을 만들고 남은 재료들을 보면 함께 먹을 사람이 없다는 외로움을 현실적으로 마주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는 말이다.
_ 오토나쿨, 〈또다시 고독이 찾아오면 어떻게 하지〉 : 멘치카츠 & 〈토니 타키타니〉, 119쪽
요리는 내가 맛보고 느낀 것을 공유하는 물질적 텔레파시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뭔가를 해줄 때는 내가 널 위해 이걸 했어 같은 마음보다는 이걸로 날 기억해주길 바라는 마음이 더 크지만, 오감의 자극이 기억에 남는 행위인 요리를 해줄 때는 솔직히 이걸로 나 아니면 안 되게끔… 같은 상대를 길들이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한다. 어릴 때 엄마가 해준 요리를 기억하며 평생 그 맛을 찾아 헤매는 것처럼 상대도 그러기를 바라는 것.
_ 오토나쿨, 〈“Kiss me, my girl, before I’m sick.”〉 : 버섯 오믈렛 & 〈팬텀 스레드〉, 145~146쪽
지난 5월에 〈케이 넘버〉를 본 후 아직도 나에게는 많은 질문들이 머물러 있다. 그래서 이 영화를 좋아하는 만큼 글을 쓰기가 정말 어려웠다. 하지만 이토록 치열하게 만든 영화로부터 생겨난 질문들은 오히려 나에게 힘이 되었다는 사실을 떠올린다. 누군가에게 미역국 한 그릇이 그러하듯이.
_ 박지완, 〈우아한 대답〉 : 소고기 미역국 & 〈케이 넘버〉, 226쪽
영화 속에서 거의 완성된 자신의 초상화를 앞에 두고 엘로이즈가 마리안느에게 묻는다.
“(그림 작업이) 끝이라는 걸 어떻게 알아요?”
“그리는 것을 멈추면.”
그 장면에서 나는 웃으면서 울었다. 나는 멈춰야 하는 순간을 정말 알 수 있을까. 끝까지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쏟아붓고 나면 어떤 운명이라도 담담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_ 박지완, 〈세상은 바뀌고 사랑은 남는다〉 : 바게트와 레드와인 &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24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