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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로 읽는 김시습의 강원 한시 - 매월당 김시습의 강원 배경 한시 번안시조집
- 허대영 저
- 윈클루(WINCLEW)
- 2025년 11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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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SBN | ISBN-13 : 9791199540705 |
|---|---|
| 쪽수 | 406쪽 |
| 크기 | 기타 규격 |
| 제품구성 | 단행본 |
- 소설/에세이/시 > 시
매월당 김시습, 누가 감히 잘 안다고 말할 수 있으랴
지난 10여 년간 김시습과 관련된 여러 권의 책을 읽었다. 자연 속에 살며, 세상을 곁에 두었던 매월당, 정치와는 거리를 두면서 처참한 백성의 삶에는 울분을 토했던 김시습, 자기 안에서 살며 자가 밖의 변화에 관심이 컸던 경계인, 나이와 관계없이 사고(思考)의 동질성을 중시했던 열린 사유(思惟) 소유자, 유불선(儒佛仙) 학제간(學際間) 연구의 물꼬를 최초로 튼 학자, 충효(忠孝)의 갈림길에서 임금 단종에 대한 일편단심을 평생 가슴에 품고 살았던 생육신, 방외인이면서 조선 최고의 지식인으로 우리나라와 중국의 역사와 인물에 대한 사색(思索) 결과를 한시(漢詩)에 녹여 냈던 시인(詩人). 평생 꿈을 꾸며 외롭게 살다 간 늙은이. 이렇게 다양한 언어로 김시습을 수식(修飾)한다고 해도 모두 다 표현할 수 없다.
그래도 그간 꽤 방대한 독서 결과, 생각 조각들이 차곡차곡 쌓인 오두막에 불을 지핀 후, 매월당이 가장 오랫동안 머물렀던 관동(강원도)을 배경으로 썼거나, 강원도에서 쓴 것으로 판단되는 한시를 분류하고, 그의 한시를 보다 쉽게 이해하는 방안을 모색하다가 번안 시조로 재창작하기로 마음먹고 고된 작업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읽으면 읽을수록 매월당은 시적(詩的) 표현은 깊고 넓어 보통 사람이 범접(犯接)할 수 없었기에, 둔재(鈍才)인 저자에게도 매우 어려운 접근이었지만, 잠재(潛在)되어 있는 소규모의 감성(感性)과 지성(知性)을 총동원하여 『시조로 읽는 김시습의 강원 한시』라는 제목의 번안시조집(飜案時調集)을 탈고하게 되었다. 감히 활자로 내놓기는 부끄러운 일이나 그래도 이쯤에서 관심 있는 여러분들과 함께 동행(同行)하여 보자는 뜻에서 용감하게 빛을 보기로 하였다.
[목 차]
□ 머리말 □
* 김시습, 우연히 만나 필연이 되다
□ 읽기 도움 자료 □
* 이렇게 썼으니, 이렇게 읽으세요
Ⅰ. 김시습, 손을 잡다
매월당 김시습에 대하여 알아보자 / 김시습, 관동(강원)과 어떤 관계인가 / 김시습의 강원 한시, 시조로 다시 탄생하다
Ⅱ. 오세신동(五歲神童), 이십 전후에 고난이 오다
천재 소년 김시습, 본관(本貫)은 ‘강릉’이다 / 강릉에서 어머니 삼년상을 모시다 / 고난이 이십대(二十代) 전후를 강타하다
Ⅲ. 철원(김화) 사곡촌에 숨어들다
여덟 명의 은사(隱士)를 만나다 / 사곡촌에 충혼(忠魂)을 남기다 / 첫 유람은 관서 지방으로 떠나다
Ⅳ. 내금강, 그 절경에 빠지다
김화 누각을 지나, 단발령에 이르다 / 장안사·표훈사·정양사의 만천 구역을 가다 / 만폭동·보덕굴·세암의 만폭 구역을 가다 / 마하연·원적암·만회암·만경대의 백운대·비로봉 구역을 가다 / 백천동·송라암·망고대·국망봉의 명경대·망고대 구역을 가다 / 원통암·개심폭·진불암의 태상 구역을 가다 / 내금강에서 불심을 읊다 / 내금강에서 선경(仙境)을 보다 / 내금강에서 세상을 읽다 / 내금강을 뒤로하고, 단발령을 넘다
Ⅴ. 1차 관동 유람 길에 오르다
원주에 들어서면서 관동을 만나다 / 횡성을 거쳐 평창 여러 역(驛)을 지나다 / 전나무 숲에서 월정사를 만나다 / 오대산의 여러 봉우리와 사찰을 둘러보다 / 나옹도 만나고, 소옥(小屋)도 짓고 선담(禪談)도 나누다 / 대관령을 넘어 강릉으로 접어들다 / 강릉의 아름다운 풍광(風光)을 노래하다 / 강릉을 떠나 다시 평창으로 향하다 / 영월에서 단종을 만난 후, 호서(湖西)로 떠나다
Ⅵ. 경주에 머물며, 관동 남동부를 유람하다
어머니 품에 안겨, 울진을 돌아 보다 / 우릉도를 바라본 후, 태백산·정선에 이르다 / 다시 한성으로 올라가 폭천정사에 머물다.
Ⅶ. 한양에 머물며, 「춘천십경」을 쓰다
춘천 10경, 시작(詩作) 배경을 살펴보자 / 춘천십경, 누구에게 듣고 썼을까 / 춘천십경, 땅(地) 배경 다섯 편을 읽어보자 / 춘천십경, 강(江) 배경 다섯 편을 감상해 보자 / 환속, 재혼, 그러나 다시 한성을 떠나다
Ⅷ. 2차 관동 유람, 훌훌 털고 떠나다
사십 대의 한성 생활은 꿈이었다 / 한성에서 출발하여, 사탄(史呑, 사내)에 들리다 / 모진 나루를 지나 우두벌에 이르다 / 소양정(昭陽亭)에 올라 소양강을 노래하다 / 춘천의 절경(絶景)을 찾아 회포를 풀다 / 춘천 산하를 한 폭의 그림처럼 그리다 / 청평사 세향원에 머물다 / 겨울을 나니, 마음은 떠나고 있었다 / 인제 오세암에 들리다 / 홍천을 지나 평창 독산원에 이르다 / 사패(詞牌)에 전사(塡詞)하며 강릉을 노래하다 / 관향 강릉, 볼거리를 둘러보고 사연도 만나다 / 동산관(東山館)에서 동해를 바라보다 / 낙진촌(樂眞村)에서 산관(散官)과 젊은이들을 만나다
Ⅸ. 양양 검달동, 불꽃이 차츰 스러지다
검달동에 은거하며 세월을 낚다 / 마지막 사랑의 불꽃, 짧은 심지를 불사르다 / 오십 중반에 들어 노년기 현상이 나타나다 / 제자 선행(善行)을 놓아주다 / 검달동의 외로움, 시와 술로 달래다 / 자연의 소리를 들으며, 삶을 돌아보다 / 낙산사 법회(法會), 번민을 보내다 / 벼슬아치는 힐난(詰難)하고, 백성 삶을 걱정하다 / 양양 부사 유자한과 깊게 교유하다
Ⅹ. 한성·설악에 들려, 무량사에서 잠들다
양양 검달동을 떠나 중흥사에 나타나다 / 다시 양화진에서 마지막 석별을 나누다 / 법수치에 들려 주변을 정리하다 / 설악을 떠나 만수산 무량사에 도착하다 / 방랑을 끝내고 잠들다 / 왜 무량사에서 입적하였을까
Ⅺ. 김시습, 손을 놓다
그의 글에서 ‘사람됨’을 살펴보자 / 그의 글에서 진심을 찾아보자 / 김시습, 조선 선비들은 어떻게 보았는가 / 김시습의 안식처, 관동(關東)을 다시 생각한다.
□ 부 록 □
* 부록 1 국역 매월당 전집 분석
* 부록 2 매월당 김시습 해적이
□ 참고문헌 □
[본 문]
김시습, 우연히 만나 필연(必然)이 되다
김시습, 만나기는 여러 차례 만났다.
처음 만난 것은 고등학교 국어 시간에 최초의 한문 소설 『금오신화』의 작가로 지나가듯 만났다. 두 번째도 강릉의 매월당김시습기념관에서 스치듯이 만났다. 세 번째는 서울 종로구 인사동 고서점에서 정말 우연히 만났다. 구하는 책이 없어 이런저런 도서 산책을 하던 중에 『매월당 김시습 연구』가 눈에 띄었다. 네 번째는 한국시조협회에서 펴내는 『시조』 지에 게재한 「강원도 배경 한시의 유적지를 찾아서」를 쓰면서 ‘번안시조’를 통해서 만났다. 그때는 김시습뿐만 아니라 강원도를 배경으로 하는 대표적인 여러 한시를 현대시조로 번안하는 작업을 하였다. 그리고 이번이 다섯 번째 만남이다.
첫 번째 만남은 대부분의 학생이 접하는 만남이요, 매월당김시습기념관에서의 만남은 관광 중 지나가는 만남이요. 세 번째는 『매월당 김시습 연구』라는 도서를 통한 머릿속의 만남이요, 네 번째 만남은 한시를 현대시조로 번안하는 과정을 통한 가슴 속 단타(短打) 만남이고, 이번에는 매월당의 강원 배경 한시를 현대시조로의 번안하는 뜨거운 만남이니, 이는 온몸으로의 만남이 아니겠는가?
전체적으로는 한 발짝 김시습에게 가까이 다가가다가 지난해에는 헤어질 수 없는 주제로 만났으니 첫 만남은 우연이었으나 결국은 끈질긴 인연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남들은 ‘이렇게 더운 날들이 계속되는 건 처음이다’라고 힘들어하였지만, 1905년에 있었던 치욕의 을사늑약(乙巳勒約) 두 번째 회갑을 뼛속 스미는 아픔으로 맞이한 저자의 이번 여름은, 김시습과 동행하였기에 시원하고 행복했다.
그러나 이 글을 마치면서 극복할 수 없는 무거움과 두려움이 어깨를 누른다. 저자의 수준에서는 너무 벅찬 상대를 만나 제대로 풀어내지 못하였다는 부끄러움이다. 더 깊은 연구를 통하여 부족한 것을 채워 보리라. 많이 읽어보시기를 바라며, 아울러 많은 지도 편달을 기다린다.
평생 서예와 글을 즐기셨던 영원한 문인 아버님(仁(園, 許南圭), 언제나 크신 자애로움으로 올곧은 길을 가게 인도하셨던 어머님(朴玉順), 그리고 늘 은은한 사랑으로 언제나 최선을 다할 수 있도록 믿어주고 이끌어 준 아내와 세 딸에게 이 책을 자랑스럽게 내놓는다.
아울러 이 책이 발간될 수 있도록 후원하여 준 강원특별자치도와 강원문화재단, 그리고 어려운 편집 과정을 거쳐 예쁜 책으로 재탄생시켜 준 도서 출판 윈클루에 고마움을 전한다.
2025년 여름, 춘천시 석사동 가천우거(佳泉寓居)에서
허대영 쓰다.
예시(例示) : 본문 145~149
강릉의 아름다운 풍광(風光)을 노래하다
김시습은 관동팔경 등을 둘러보며 2~3달을 그곳에 머물렀다. 그러나 과거 급제의 꿈을 이루지도 못하고 떠도는 입장에서 맹모같이 열정적으로 공부를 가르쳤던 어머님께서 잠들어 쉬시는 곳에 왔으니 죄송함도 넘쳤을 것이다. 성씨의 조상(祖上)인 명주 군왕에게도 가문의 영광을 다하지 못함에 가슴이 아팠을 게다. 어쩌면 명주군왕릉에 들려 눈물도 흘렸을 것이다.
강릉에서 첫 시(詩)는 문수당(文殊堂)에서 만나다
문수당은 통일신라 후반에 세워진 사찰이다. 문수사(文殊寺)로도 불렸으며 한산사(寒山寺)로 바뀌었다가 다시 한송사(寒松寺)로 불렸다. 고려시대에는 문인들이 이곳을 유람하고 시와 글을 남기기도 했다.
문수당(한송사)의 위치는 강릉시의 동쪽 남항진 바닷가로 두 보살상을 받치던 대좌(臺座)가 남아 있다. 조선시대까지는 중수(重修)가 이루어지기도 하였으나 19세기 이후 황량한 터만 남긴 채 폐사되었다.
문수당(한송사), 출처 : 디지털강릉문화대전
김시습은 ‘문수당’ 시에서 해변의 여유로움을 잘 표현하고 있다. 이는 김시습이 아주 편안한 가운데 유람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된다. 김시습의 ‘문수당(文殊堂)’을 읽어보자. 현재 문수당(한송사)은 현재 제18전투비행단 대지 내에 편입되어 있어서 출입이 자유롭지 못하다.
문수당(文殊堂) 488
寺在東溟碧浪涯 (사재동명벽낭애) 절이 있는 동쪽 바다에 물가의 파도는 푸른데
野棠花裏鳥喈喈 (야당화리조개개) 들판의 해당화 꽃들 속에서 새들은 지저귀네.
白沙翠竹客相送 (백사취죽객상송) 흰 모래에 푸른 대나무 나그네 서로 전송하고
靑海黃茅風正喈 (청해황모풍정개) 푸른 바다 누런 띠풀 바람은 때마침 온화하네.
古佛有靈能善幻 (고불유령능선환) 오래된 부처 신령함 있어 능히 착하게 바뀌고
居僧無事坐淸齋 (거승무사좌청재) 거주하는 스님 일 없어 맑게 재계하고 앉았네.
禪宮亦似人寰變 (선궁역사인환변) 참선하는 절은 또한 사람 세계가 변한 것 같고
古砌草荒雲半埋 (고체초황운반매) 오래된 섬돌 거친 잡초를 구름이 반쯤 감추네.
〈번안시조〉
절 동쪽 바닷가에 푸르른 파도 일고
해당화꽃 사이에서 새들이 지저귀니
나그네 서로 전송하고 청해황모(靑海黃茅) 잠자네
부처님 신령하여 착하게 바뀌었고
스님은 일이 없어 재계하고 앉아 있네
참선은 사람 감추고 섬돌 풀은 구름이 감추네
재계(齋戒)는 제사에 참여하는 헌관(獻官)을 제외한 여러 사람이 해당 관서에서 1일간 유숙하면서 깨끗이 재계(齋戒)하는 의식이며 선궁(禪宮)은 사찰(寺刹)을 의미한다. 인환(人寰)은 사람이 살고 있는 세계를 뜻한다. 청해황모(靑海黃茅)에서 청해는 푸른 바다, 황모는 누런 띠풀이라고 해석이 가능하다. 즉 바다가 보이는 들판의 누런 띠풀을 의미한다. 가을이라는 의미가 아니겠는가?
김시습은 ‘거주하는 스님 할 일이 없어 맑게 재개하고 앉았네’라고 하였다. 상주하는 스님이 할 일이 없이 그저 몸을 깨끗이 하고 좌선하고 있다는 표현일 것이다. 조금 쇠락한 사찰의 안타까움을 간접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대동여지도의 한송사와 백시정, 출처 : 대동여지도
백사정, 한송정을 노래하다
며칠 쉬다가 바닷가로 가보았다. 모래벌이 드넓게 펼쳐져 있다. 아무래도 강릉은 동해를 바라보며 백사장을 걷는 것이 멋진 풍경 중의 하나이다. 김시습도 빠질 수 없어 바닷가로 나간다. 그리고 백사정(白沙汀)을 노래한다.
‘백사정’ 시를 이해하려면 해안지형을 알아야 한다. 다음 글을 참조하자.
해안지형으로는 곳(串, 바다로 돌출된 육지의 끝부분)과 양(梁, 들보, 다리, 둑, 제방 등을 뜻하는 한자)이라고 붙은 지명이 많다. 이외에 지형적 특색을 설명하는 백사(白沙)가 있다. 모래밭에 있는 해안 지방은 백사(白沙), 백사장(白沙場), 또는 백사정(白沙汀) 등으로 표현한다. 강릉에서는 백사정이라고 한다. 정(汀)은 곶과 같은 뜻을 갖는다. 동해안에는 양(梁)이 발달하지 않았다.
강릉 백사정은 대동여지도를 보면 오늘날 강문교(江門橋)가 있는 바로 위에 표시되어 있다. 경포호에서 나오는 물이 바다와 만나는 곳이 강문교인데 여기서 호텔 현대 경포대를 왼쪽으로 올라가면 이곳이 경포해수욕장이다, 대동여지도에서는 이곳을 백사정이라 하였다.
김시습의 ‘백사정(白沙汀)’을 읽어보자. 하얀 백사장을 걸으며 드넓은 동해를 보면 더 넓은 세상에서 뜻을 펴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벼슬이란 순식간에 사라지기도 하고 목숨이 날아가기도 하는 것을 생각하며 여유로운 유람 생활에 만족했을 수도 있다. 삶은 양날의 검이다.
흰 모래 깔린 바닷가〔白沙汀〕 488
依依煙樹似雲屯 (의의연수사운둔) 한들거리는 안개 낀 나무에 구름이 진을 친 것 같고
沙軟風輕十里原 (사연경풍십리원) 십 리의 언덕에 가벼운 바람에 모래는 부드럽구나.
島影正同雲影杳 (도영정동운영묘) 섬 그림자 때마침 함께하며 구름 그림자 아득하고
松濤長伴海濤喧 (송도장반해도훤) 소나무 물결 짝하여 나가니 바다의 파도 시끄럽네.
煙開鯨口波聲壯 (연개선구파성장) 고래 입에서 안개를 뿜어대니 물결 소리 웅장하고
日射鼇頭曉色暾 (일사오두효색돈) 햇살이 비치는 거북이 머리에는 새벽빛이 비치네.
汀畔白鷗閑似我 (정반백구한사아) 물가 경계의 흰 갈매기는 나를 닮은 듯 한가하고
忘機相對弄春暄 (망기상대농춘훤) 서로 마주해 속새를 잊고서 따스한 봄을 희롱하네.
〈번안시조〉
안개 낀 나무 곁에 구름이 진(屯)을 치고
저 멀리 모래바람 부드럽게 불어오니
아득한 섬 그림자에 파도 소리 드세다
고래는 안개 뿜어 잔물결 잠재우고
햇살은 거북 머리에 새벽빛 비추는데
한가한 갈매기들은 따뜻한 봄 즐긴다
의의(依依)는 고향을 떠날 때와 조금도 다름없다는 뜻으로 연약한 나뭇가지가 바람에 한들거리는 모양이다. 아쉬워하고 사모하고 그러면서도 뭔가 섭섭해하는 모양을 뜻한다. 아쉽다는 이야기이다. 연수(煙樹)는 연기나 안개구름 따위에 둘러싸여 뿌옇고 멀리 보이는 나무를 의미하고 오두(鼇頭)는 큰 바다 자라의 머리이다. 망기(忘機)는 속의 일이나 욕심을 잊음을 뜻한다.
김시습은 모래바람, 파도 소리, 고래 안개, 거북 머리, 흰 갈매기 등 백사정의 정겨운 모습을 담담하게 그려내고 있다.
오늘날에는 강릉 해변의 백사장의 모래가 깎이며 해안침식이 발생해 심각하게 훼손되고 있다는 보도(2021.05.05. 강원일보 등 보도) 에 안타까울 뿐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 원인이 불명하다는 데 있다. 철저한 원인 분석과 그에 따른 올바른 처방으로 원래 모습대로 회복되기를 바란다.
한송정(寒松亭) 노래를 살펴보자.
한송정은 강릉시 강동면 하시동리의 차(茶) 유적지가 있는 정자(亭子)이다. 『동국여지승람』에서는 한송정을 ‘동쪽으로 큰 바다에 임했고 소나무가 울창하다. 정자 곁에 차샘(茶泉), 돌아궁이(石竈), 돌절구(石臼)가 있는데 곧 술랑선인(述郞仙人)들이 놀던 곳이다’라고 기록하였다. 한송정이 언제 지어졌는지 또 언제 없어졌는지에 대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신라 진흥왕 때 화랑들이 한송정을 방문했다는 기록이 있고 그 이후 여러 역사적 인물이 한송정을 방문한 기록과 한시가 전한다. ‘한송정(寒松亭)’이다. 현재는 공군 제18전투비행단 안에 있어 출입이 자유롭지 않다.
한송정에서〔寒松亭〕 489
海風吹斷浪滔天 (해풍취단낭도천) 바닷바람이 불다 끊기며 함부로 하늘 높이 퍼지고
松作雲和意外絃 (송작운화의외현) 소나무에 이른 구름 화답하며 뜻밖의 현악기 뜯네.
敗砌草埋狐兔過 (패체초매호토과) 무너진 섬돌은 잡초에 묻혀 여우와 토끼가 지나고
野棠花落鷓鴣眠 (야당화락자고면) 들의 팥배나무 꽃이 떨어지니 자고새가 잠이 드네.
神仙舊迹桑田變 (신선구적상전변) 신선들의 오래된 자취는 뽕나무밭으로 변하였고
塵世浮生甲子遷 (진세부생갑자천) 티끌 많은 세상 덧없는 인생 속에 갑자만 옮겨가네.
獨上高亭回首望 (독상고정회수망) 높은 정자에 혼자서 올라가 머리를 돌려 바라보니
蓬萊島在五雲邊 (봉래도재우운변) 신선이 사는 섬이 오색구름 가장자리에 있구나.
〈번안시조〉
바닷바람 불다 끊겨 하늘 높이 흩어지고
흰 구름 화답하며 현악기를 뜯고 있는데
섬돌에 잡초 우거지고 자고새가 잠잔다
신선들 간데없고 뽕 밭은 한창인데
덧없는 인생 속에 갑자(甲子)만 옮겨가네
누(樓)에서 봉래도(蓬萊島) 보니 구름 속에 잠겼다
도천(滔天)은 높은 하늘에 널리 퍼짐을 뜻하니 세력이 엄청나게 크게 퍼진다는 뜻이다. 봉래도(蓬萊島)는 삼신산(三神山)의 하나로 신선이 산다는 곳이다.
김시습이 한송정을 방문했을 때는 정자는 이미 많이 쇠락했었다. 다 쓰러져 가는 한송정. 글의 흐름으로 보면 도교적 감각으로 글을 썼다. 신선을 비롯하여 자연의 섭리가 시 한 수에 가득하다. ‘덧없는 인생 속에 갑자만 옮겨가네’하며 이룬 것은 없는데 나이만 먹어간다고 자기반성을 하고 있다.
한송정, 출처 :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김시습은 방외인이고, 경계인이었다.
김시습의 생을 요약하여 보면 유가(儒家) → 출가(出家) → 환속하여 유가(儒家) → 출가(出家)의 길을 걸었다. 그는 일반적인 유자들과 달리 불교의 진리를 인정했으며, 도학에도 심취했다. 실제 거처했던 곳도 출세간(出世間)과 세간(世間)을 오갔고, 어디에도 안주하지 않았다.
조선시대는 유학(儒學)을 기본 이념으로 삼아 불교나 도교 같은 사상을 이단으로 여기고 탄압했는데, 이러한 체제에 반발하여 이단(異端) 사상을 추구하거나 세속적 현실을 초월한 삶을 살았던 사람들을 방외인(方外人)으로 불렀다. 김시습은 유교를 숭상하는 사회 질서나 규범의 밖에서 살며,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세상의 권위에 얽매이지 않는 방외인의 삶을 살았다.
김시습은 유불(儒佛)에 대한 긍정적인 면을 논(論)하면서도 백성의 정신적, 경제적 삶을 풍요롭게 하지 못하는 유·불(儒佛)에 대해서는 비판적 시각으로 보면서, ‘이념·사상·종교나 조정(朝廷)의 정책이 모든 백성의 삶을 궁핍하지 않게 하는 데 중점을 두어야 한다’라고 강조하고 있다.
김시습은 세속적 삶에도 ‘방외인인가’, ‘아닌가’의 경계를 오가며 살았고, 학문에도 유·불·도를 모두 수용하거나 그 경계에서 살았다. 그가 걸어가는 방외인의 길은 스스로 선택한 길이며, 아무런 제약을 받지 않았기에(직접적으로는 부모, 아내, 자식이 없었다) 더 가능하였다.
김시습은 유불도(儒佛道)를 통섭하는 삶, 지금으로 말하며 간학문적(間學問的) 탐구와 실천에 심취했던 자유로운 영혼이었으며,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방(方) 안팎 드나듦에 있어 제약이 없던 경계인이었다.
관동(關東, 강원도)은 김시습의 고향이며 안식처였다.
김시습은 관동의 사나이이다. 관동을 뜨겁게 사랑하였다. 중흥사에서 유람을 시작한 이래 절반 이상의 시간을 보낸 곳이 관동이고, 강원이다. 그의 긴 호흡은 산마루에서, 강나루에서, 골 깊은 산골짜기에서 계속 이어져 왔다. 행동하는 지식인, 그래서 아직도 함께 걷고 있을 김시습, 그러나 이제는 일단 놓아주자. 더 큰 곳으로 갈 수 있도록….
김시습은 진정 행동하는 지식인이다. 김시습은 부당한 현실에 타협하지 않은 진정한 고독의 지식인이었다. 김시습은 유자(儒子)로 출발하였으나, 세상을 등지고 절집을 떠도는 불자(佛子)가 되었고, 불자가 되어 산천을 가까이하다 보니 도인(道人)도 되었다. 그래서 김시습은 유불선(儒佛仙)을 통달하게 되었다. 이는 그렇게 되기 위하여 시도하였다고 보기보다는 살다 보니 그렇게 된 면도 있다. 우리의 삶이 다 그런 것이 아닐까? 꿈은 열심히 꾸고, 세밀한 실천 계획을 세워, 그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다가 어느 날 꿈에서 깨어나면 남은 시간이 얼마 없음을 자각(自覺)하고는 ‘이것이 순리인가 보다’하는 그런 것.
정주동은 『매월당 김시습 연구』에서 이렇게 적었다. “김시습(時習)의 일생(一生)은 방랑(放浪)의 일생이요, 병고(病苦)와 투쟁(鬪爭)의 일생이요, 궁수비한(窮愁悲恨)의 일생이요, 자학(自虐)과 저항(抵抗)의 일생이요, 시주광객(詩酒狂客)의 일생이었다” 라고….
김시습은 강원도를 뜨겁게 사랑했던 관동인(關東人)이다.
금강산에 관한 자료를 검색하다가 보니 몇 가지 새로운 자료가 있어 추가한다. 『국역 매월당 전집(강원도, 2000)』에는 없는 김시습의 관동 관련 시(詩) ‘관동명산(關東名山)’을 「북한 지리 정보」에서 발견하였다.
관동명산(關東名山) 북한지리정보
臺嶠靑萬疊 (대교청만첩) 오대산 푸르고 푸르러 일만 겹이요
楓缶白千層 (풍부백천층) 금강산 희디희며 일천 층이라.
國島波雷壮 (국도파뇌장) 국섬 파도 소리 우레가 마냥 장하고
叢亭石柱稜 (총정석주릉) 총석정 돌기둥은 모나기도 하여라.
沙明三日浦 (사명삼일포) 삼일포 모래밭은 깨끗하기도 한데
苔蝕六書陵 (태식육서릉) 봉우리에 새긴 여섯 글자엔 이끼가 꼈구나.
渤海連天闊 (발해연천활) 하늘에 잇닿은 듯 저 바다 넓고 넓어
三山藥可仍 (삼산약가잉) 삼신산 불로초도 여기서 캐겠구나!
〈번안시조〉
오대산은 푸르르고 일만 겹 겹쳐있고
금강산은 희디희게 일천 층 층계 있고
국섬의 우레 파도는 총석정에 이른다.
삼일포 모래벌은 깨끗해 보기 좋고
사선정 여섯 글자 세월이 쌓였구나!
삼신산 불로초 약도 이곳에서 캤겠네.
이 자료는 2004년 북한에서 발행된 ‘금강산 한자 시선(상)’에 수록된 자료로 ‘북한에서 사용되는 표현이 일부 포함되어 있다’라고 하며 유의 사항에 안내하고 있다. 북한에서 발굴(發掘)한 시(詩)라는 이야기이다.
김시습은 이 시에서 오대산, 금강산, 국도, 총석정, 삼일포 등을 제시하고 있다. 김시습은 이토록 관동의 아름다운 산하(山下)를 사랑하였다.
김시습 손을 잡고 다시 찾고 싶은 금강산
오늘날, 금강산은 2007년 잠시 열렸다가 닫혔다. 언젠가 다시 활짝 열려 한 번이라도 내 차를 몰고 표훈사 정류장까지 올라가 김시습의 발길을 따라 탐승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으랴! 아마도 세 시간 정도면 갈 텐데….
국토적 통일 뿐만 아니라 민족 문화의 뿌리들을 자랑스럽게 정리하고 관람할 수 있도록 분명, 금강산은 다시 열려야 한다. 하여, 새로운 만남으로부터 더 아름다운 금강산 꽃을 활짝 피워야 한다.
한편, 금강산을 유람할 당시 김시습이 가장 오래 머물렀던 사찰에서 그는 금강산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시들을 많이 지었는데, 당시 그의 작시(作詩)와 관련되는 일화(逸話)가 전해오고 있다. ‘김시습과 금강산(2018.08.23.)’ 이야기에서 인용한다.
“사찰 부근의 만폭동(萬瀑洞)계곡에는 수많은 폭포와 소(沼)들이 즐비해서 여름에 한참 소나기가 퍼부으면 순식간에 계곡물이 불어나 세차게 흘러내리곤 하였다. 시습은 이런 때면 으레 100여 장의 종이를 준비해 계곡물을 따라 내려가다가 여울목의 너른 바위 위에 자리를 잡고 추악한 세조의 행위를 비판하는 시들을 썼다. 시 한 편을 쓰면 목이 메인 채 읊다가 여울물에 띄워 보내고, 또 한 편을 써서 읊은 다음 다시 띄워 보내곤 하였다. 이때 그가 하루에 쓴 시는 무려 백여 수에 달했다고 한다. 뒷날 누군가 이런 사실을 알고 다음과 같은 시를 지어 읊었다고 한다.”
이 시(詩) 제목을 ‘누군가 김시습에게로’로 붙여보자.
‘작자 미상(未詳)의 누군가’가 김시습에게
세차게 흐르는 물 어디로 가나
굽이치며 흘러서 바다로 가지
푸른 하늘 한 조각 같은 종이쪽에
읊고 쓰고 쓰고 읊고 여념 없었네.
〈번안시조〉
세차게 흐르는 물 어디로 흘러 가나
굽이쳐 흘러 흘러 바다로 달리겠지
저 하늘 조각 종이에 읊고 쓰고 또 쓰네.
이런 기록은 사실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문제는 ‘왜 이런 기록이 남아 있느냐’에 있다. 남아(南兒) 26세면 아직 젊은 나이이다. 꿈도 있고 그 꿈을 이룰 능력도 갖추고 있다. 그런데 계유정난 이래 세상이 온통 미처 돌아가고 있었다. 그 더러운 구정물에 몸을 섞고 싶지 않았다.
그러므로 김시습은 자기 힘으로 할 수 있는 방법으로 자기 자신을 익히고, 행동으로 표현하였다. 당시 금강산에서 나오는 김시습은 마음이 많이 정리되었다. 집권층에 대한 증오에 가깝던 반감(反感)도 이십대 후반으로 가는 나이와 함께 상당히 무디어졌다. 그리하여 쓰고 또 쓴 후 물에 띄워 한양으로 보냈을 것이다.
금강산 관광, 특히 내금강 관광이 다시 열린다면 김시습의 손을 잡고 김시습의 감성적 서정(抒情)으로 내금강을 천천히 걷고 싶다.
매월당은 지금도 관동의 어디에선가 걷고 있을 터…
김시습은 우리나라의 관북을 제외하고 관서, 관동, 호서, 호남, 영남 등 온 나라를 유람하였다. 그런 중에도 관동에는 여러 번 왔다. 관향(貫鄕)의 고향이고 맹모 같았던 어머니를 모신 곳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단기간 머무른 것까지 고려한다면 충청남도 공주시 동학사 방문을 가장 많이 했을 것이다. 김시습은 단종의 위패(位牌)를 모신 공주 동학사(東鶴寺)에서 열리는 춘향(春享)과 추향(秋享)에 참석하기 위하여 거의 빠짐없이 초혼각(招魂閣)을 방문하였다. 이런 특별한 예를 제외하고는 김시습의 발길이 제일 많이 머무른 곳은 관동이다.
김시습의 주거주지(主居住地)를 다시 살펴보자. 먼저 삼각산 중흥사는 과거시험 공부하던 곳이고, 수락산(水落山) 내원암 부근 폭천정사는 서울에 머물렀던 곳이며, 경주 금오산실(金烏山室)은 관향(貫鄕)의 본향(本鄕)이다. 강릉은 관향의 고향(故鄕)이고, 강릉(양양?)은 어머니를 모신 곳이었다. 춘천은 제자 학매의 고향이었고, 그 외의 산사(山寺)는 대개 나옹선사(懶翁禪師)와 인연이 깊은 사찰이 많았다.
그중에서 지방으로 나들이할 때는 관동에 대한 발길이 가장 잦았다. 김시습에게 관동은 현실의 도피처요, 휴식처요, 공부하는 곳이요, 고향처럼 아늑함이 있는 곳이다. 또 비교적 서울에서 멀지 않을 뿐만 아니라 산수(山水)가 수려하다는 특징도 있었다. 끌리지 않을 수 없었다.
김시습에게 산은 세속에서 고뇌를 잠재울 수 있는 자연이 있었다. 사람의 세계에서는 도리에 맞지 않는 일을 부끄러움 없이 행하고 수없이 이루어지는 인간의 본질에 대한 회의적인 사실이 끝없이 계속되고 반복되지만, 자연은 그냥 거기에 그 모습으로 늘 있었다.
김시습의 마지막 주 거주지는 양양군 법수치리 검달동의 띠 집이었다. 띠집은 띠풀로 지붕을 올린 집이다. 골 깊은 산골짝에는 논이 없어 논농사를 지을 수가 없었다. 볏짚이 있어야 이엉을 엮고 이엉을 지붕에 올려서 초가집을 짓는데 볏짚이 없으니 볏짚이엉 대신 산골짜기에 흔한 띠풀로 띠풀 이엉을 엮어 지붕에 올려 눈비를 막았다. 울타리와 대문은 짐승의 접근을 막을 정도면 되었기에 싸릿대를 엮어 세운 싸리문이면 충분했다.
검달동은 김시습의 놀이터요, 생활 공간이요, 일용할 양식을 공급받는 농경지요, 목축지였다. 그리고 시문(詩文)이 솟아오르는 샘터였다. 그러니 자연은 김시습 영육(靈肉)의 모두였다. 이 모두를 충족시켜 주었던 검달동을 비롯한 관동은 김시습의 영원한 고향이 아니었을까?
유람의 긴 세월 중에 전국에서 가장 오랫동안 근거지로 삼고 유람하고 은거하며 영육이 숨 쉬던 혈육의 고장 강릉에서, 어머니의 본향 울진(지금은 경북이지만)에서, 김화(사곡촌), 금강산, 화천(사탄, 지금은 사내면), 춘천(소양강과 청평사), 인제(오세암), 홍천, 횡성(각림사), 원주(치악산), 평창(오대산, 상원사), 영월(청령포와 주천), 정선, 태백, 삼척, 양양(동산관, 낙진촌, 법수치, 낙산사, 검달동) 등등 관동의 산하(山河)를 누볐다. 이외에도 저자(著者)가 알지 못하는 곳은 또 얼마나 많을까?
매월당 김시습은 생육신으로서의 절의(節義), 뛰어난 재능, 선구자적 면모, 방외인(方外人)으로 사는 삶, 시대를 앞선 선각자로 긍정적인 평가를 받지만, 괴벽한 행동, 은둔생활에 대한 의문(은둔이냐 현실 도피냐) 등은 비판적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러나 하나의 눈으로 보기에는 너무나 다양한 면모를 가진 인물이다.
10대에는 학업에 전념하였고, 20대에 산천과 벗하며 천하를 돌아다녔으며, 30대에는 고독한 영혼을 이끌고 정사수도(靜思修道, 조용히 사색하면 도(道)를 수련하여 인생의 터전을 닦는 것) 하였고, 40대에는 더럽고 가증스러운 현실을 냉철히 비판하고 행동으로 항거하다가, 50대에 이르러서는 초연히 낡은 허울을 벗어버리고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다, 1492년, 마지막으로 찾아든 곳이 충청남도 홍산(鴻山, 현재는 부여) 무량사였다. 이곳에서 1493년(성종 24) 59세의 나이로 병사하였다.
작은 키에 뚱뚱한 편이었고 성격이 괴팍하고 날카로워 세상 사람들로부터 광인처럼 여겨지기도 하였으나, 배운 바를 행동으로 옮긴 실천하는 지성인이었다. 이이 율곡도 ‘백 세의 스승’이라고 칭찬하지 않았던가.
영원한 관동인(關東人) 김시습, 일단 손을 놓아주자.
짧은 기간이었고, 애당초 감히 손을 대서는 안 될 위대한 인물이었지만, 기왕 손을 댄 김에 관동 곳곳에 숨어 있던 김시습 시혼(詩魂)의 샘(泉)을 더 많이 깨워 온 나라를 향해 도도하게 흐르게 하고 싶었다. 여기까지 와서 생각해 보니, 다 파내지는 못했어도 이제 마라톤 출발선에는 함께 손잡고 서 있을 만큼은 된 것 같다. 앞으로 더 지루한 씨름을 하며, 완주(完走)를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김시습의 ‘자회(自悔)’를 읽어보자.
스스로 후회하며〔自悔〕 : 64
詩酒淸狂四十年 (시주청광사십년) 시와 술로 마음 비우고 미처 살기 사십 년
如今往事更依然 (여금왕사갱의연) 이제 와서 지나간 일 생각해도 그대로 하리
迷途末遠應須覺 (미도말원응수각) 길 잃어도 멀리 벗어나지 않았으니 응당 깨닫기만 한다면
擬把□□學地仙 (의파□□학지선) □□잡고서 지상선(地上仙) 배움만도 하여라.
〈번안시조〉
시주(詩酒)로 마음 비워 미처 살기 사십여 년
내 삶이 반복돼도, 지금처럼 살아가리
깨닫고 지상선(地上仙) 닮아 옳은 길을 걸었네.
지상선(地上仙)은 하늘로 승천하지 않고 이 세상에 머물며 인간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신선을 의미한다. 김시습은 지상선의 삶을 살았다고 자부하고 있다.
뜻깊은 작품인데, 시어(詩語) 두 자가 누락된 것도 계획적인 듯 기가 막히게 빠져 있다. ‘□□잡고서 지상선(地上仙) 배움만도 하여라.’라고 하였는데 과연 빈 자리에 어떤 시어가 채워져 있었을까? 매우 궁금하다.
이 시는 만년에 쓴 작품이다. ‘시주(詩酒) 사십 년’이 이를 증명한다. 그렇다면 거의 육십이 다 되어 쓴 작품이다. 제목을 자회(自悔)라고 썼으나 실제로는 ‘이제 와서 지나간 일 생각해도 그대로 하리. 길 잃어도 멀리 벗어나지 않았으니 응당 깨닫기만 한다면….‘라고 하였다. 잘 살았고, 올곧게 살았다고 자위(自慰)하고 있다. 자기의 삶에 만족한 김시습, 역시 ’김시습‘답다.
일단 여기서 잰걸음을 멈추고 김시습의 오른손을 놓아주자. 그래도, 관동(關東)의 어디에선가 불쑥 나타나 휘적휘적 걷고 있을 매월당. 그 이름 김시습! 그가 말한 천년 뒤가 아니라, 영원히 영원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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