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 차]
추천의 글 1 추천의 글 2 추천의 글 3 추천의 글 4
들어가는 글
1. 어른들은 몰라요 2 보물 3 변신 4 주사위
5 준비물 6 반대로 7 양 8 다양성
9 억울함 10 자연 11 스토리 12 질문
[본 문]
1. 어른들은 몰라요
어릴 적 많이 듣고 부르던 동요가 있다.
그 가사는 이러하다.
“우리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어른들은 몰라요
우리가 무엇을 갖고 싶어 하는지 어른들은 몰라요
장난감만 사주면 그만인가요
예쁜 옷만 입혀주면 그만인가요
어른들은... 더보기
성경 속 “어른들은 몰라요”
재밌게도 성경 속에도 “어른들은 몰라요”가 등장한다. 유년 시절
의 예수님께서 엄마 마리아와 아빠 요셉에게 “어른들은 몰라요!”를
외치신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
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하시니 그 부모가 그가 하신
말씀을 깨닫지 못하더라”(눅 2:49-50).
유월절에 12살의 예수님과 그 부모가 함께 예루살렘으로 올라간
다. 그리고 그날들을 마치고 돌아가게 되는데 예수님은 홀로 남아
예루살렘에 머무시게 된다. 그런데 아이를 챙겨야 하는 부모가 예
수님을 챙기지 않고 그냥 길을 떠나버린다. 그리고는 한 시간도 아
니고 자그마치 하룻길을 간 후에야 아이가 사라졌음을 깨닫게 된다.
(어찌 보면 참 담대한 부모다. 지금 아이를 키우는 아빠의 입장에서
핸드폰도 없이 하루 동안 내 아이가 안 보이는데 그러려니 갈 길을
가는 부모라니...)
이 모습을 보고자 하니 오늘날 한국교회 교회학교와 오버랩되는
듯하다. 아이는 여전히 제자리에 머물고 있는데, 그곳에 남아 궁금
증을 더 해결하고 아이만의 신앙 숙제를 하고 있는데 부모는 저 멀
리로 떠나버리는 상황이다. 아이의 상황과 눈높이는 고려하지 않은
채, 자신의 신앙 활동이 끝났다고 아이는 버려두고 자기들끼리 일상
으로 복귀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많은 신앙교육도 이와 비슷한 양상을 띤다. 아이의 심리상
황과 세대 특징과 개인의 특성들을 고려하지 않은 채 어른들끼리 재
빨리 신앙교육을 ‘해치우고’ 싶어 한다.
여러 교회들의 부모들이 대 예배가 끝나면(사실 대 예배라고 부르고 싶지
않다.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가 대 예배가 어디 있고, 소 예배가 어디 있나?
어른들의 예배는 대 예배, 아이들의 예배는 작은 예배인가?) 아이들 공과
공부도 끝나지 않았는데 부서실에 쳐들어와서 아이들을 데려가는 경우를
많이 목격했다. 고작 일주일에 겨우 한 시간을 신앙교육 하는데(예배까지
교육 시간으로 후하게 포함해줘서... 교육 시간이 아니라,
올려드리는 예배 시간으로 따지면 일주일에 많아야 20분 밖에 없다.)
그마저도 제대로 할 수가 없다. 데려가지 않더라도 문 앞에 서서 빨
리 끝나길 재촉하는 것은 양반이다.
아이들의 주일예배와 공과는 어른 예배와 상관없이 ‘다’ 끝날 때까
지 충분히 주어져야 한다. 학교에서는 절대 이런 일이 없지 않은가?
학교에서 부모가 자기 스케쥴로 인해 수업 도중에 교실에 와서 아이
를 데려가지는 않는다. 왜 교회가 학교보다 못해야 하는가. 아이들
은 그 순간을 경험하면서 신앙은 언제든 뒷전이 되어도 상관없는 존
재로 여기게 된다.
때로는 내 아이가 하나님을 만나기를 원하는 것인지, 아니면 내 신
앙적 갈증이나 부담감을 해소하는 동안 적당히 탁아를 해두고 그 짧
은 시간 안에 적당한 신앙생활 적응자를 만들고 싶은 것인지 의문이
들 정도이다.
부서 안에서는 어떠한가? 교육활동을 제대로 따라오지 않는 아이
들을 향해 왜 따라오지 않냐며 다그치기도 하고, 요즘 아이들은 어른
말을 안 듣는 다음 세대라 칭해버리고 만다.
간혹 어른들을 잘 따라와서 어른의 발걸음 박자에 잘 맞추고 있는
아이들을 향해서는 “잘하고 있다”고 말하며, 그 아이들의 신앙을 치
켜세워준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데, 춤을 보고 싶어서 억
지로 칭찬하는 것은 아닌가.
과연 어른의 박자에 소리 없이 따라가는 아이들이 잘하고 있는 것
일까? 아무 말 없이 교회에 잘 출석하고 그럭저럭 교회에 적응하는
아이들이 바른길을 가고 있는 것일까? 그렇게 그럭저럭 잘하던 아이
가 왜 중고등학생이 되면 갑자기 교회를 떠나버리는가? 그것이 단지
질풍노도의 시기에 급작스러운 심리변화는 아니다.
만약 어른의 요구에, 어른의 신앙생활 방식에 그대로 잘 따라오는
것이 신앙인 합격이라면, 그것이 기준이라면 아까 읽었던 본문에서
예수님은 낙제점을 받는 어린이가 된다.
그래도 본문에서 당연한 것이기도 하지만 참 다행인 구절이 있다.
45절의 “만나지 못하매 찾으면서 예루살렘에 돌아갔더니”이다.
부모가 조금은 늦었지만 아이를 잃어버렸다는 것을 자각했다. 그
러면 부모의 다음 행동은 무엇이어야만 하는가? “찾으면서 돌아가는
것”이다. 아이가 없어졌는데도 그냥 계속 갈 길을 가는 부모는 부모
가 아니다. 아이를 찾기 위해, 왔던 길을 되짚으며 아이를 찾아내야
한다. 아이를 찾는 방법은 처음 지점으로 되돌아가 아이가 머무르고
있는 곳을 향하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의 모습은 어떠한가? 아이를 (신앙적으로) 잃어버렸다는
것은 자각했으나, 황당하게도 찾지도 않을뿐더러, 충격적이게도 돌
아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신앙을 가진 부모임에도 아이가 신앙을 잃
어버렸고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잃었으며 방황하고 있는데도 불구
하고 그 신앙을 되찾으려 하지 않는다는 것에 가장 큰 문제가 있다.
‘언젠가는 다시 신앙을 회복하겠지’
‘교회에서 전도사님, 목사님이 뭐라도 해주겠지’
‘나중에 질풍노도의 시기가 끝나면 돌아오지 않을까’
아이를 잃어버려놓고 알아서 따라오겠지 생각하며 부모도, 교회
신앙공동체도 찾지 않고 그냥 계속 갈 길을 걸어간다.
찾으며 돌아가야 한다. 대학입시든 바쁜 일상이든 사역이든 일단
다 제쳐놓고 아이의 신앙회복을 위해 부모와 교회는 찾으며 돌아가
야 한다. (교역자로서 때로는 다수를 챙기느라, 사역을 진행하느라 이 점에 최선을 다하지 못
했던 적이 생각나 많이 부끄럽다.)
무엇이 방법인지, 아이를 어디서 찾을 수 있는지는 아이마다 다르
다. 어디에 숨어있는지 알 수 없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찾고자 하면
찾을 수 있다.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그러한 애타는 마음, 간절한 마음, 사랑으로 되찾아주고자 하는 마
음은 반드시 아이에게 전달될 것이며 부모와 아이는 보이지 않는 끈
으로 연결되어 있기에 반드시 다시 찾아 만나게 될 것이다. 찾으러
떠나라. 그것이 기독교인 부모로서 제1의 사명이다.
읽었던 말씀의 46절을 보면 조금은 두려운 내용(?)이 등장한다. 분
명 하룻길을 갔는데, 만나는 데에는 사흘이 걸렸다. 멀어진 시간보
다 찾는 시간이 더 많이 걸린다는 뜻이다.
이틀 길을 갔다면 일주일이 걸렸을지도 모른다. 사흘을 갔다
면...!? 이 내용은 두 가지를 시사한다. 하루라도 빨리 자녀의 신앙
을 회복하기 위해 모든 것을 던지라는 것이다. 늦어지는 만큼 더 먼
길을 가야 한다.
또 한 가지는 애초에 헤어지지 않으면 편하다는 것이다. 아이의 신
앙과 부모의 신앙이 멀어지지 않도록 아이를 평소에 사랑하며 가정
안에서 신앙교육을 철저히 하며 아이를 이해하고 대화하는 부모가
되어야 한다. 아이를 잃어버리지 않고 처음부터 예루살렘에 함께 더
머물렀다면 그 사흘 길은 고난의 시간이 아니라, 예루살렘에서의 행
복한 휴가가 되었으리라.
46절의 후반부를 보면 예수님이 랍비들과 함께 앉아서 그들에게
듣기도 하고 묻기도 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47절에는 그 지혜와 대
답을 놀랍게 여긴다. 우리는 이것을 보면서 예수님의 “신적인 능력”
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 물론 없지는 않겠지만 과연 이 본문이 예수
님의 신성을 나타내기 위함일까? 기록된 목적이 과연 신적인 모습을
나타내고자 적었을까?
진짜 신적인 능력을 보여주고자 했다면 굳이 이런 장면이 아니라,
멀리 떨어져 간 부모에게 텔레파시로 연락하여 돌아오게 하던가, 구
름을 타고 예루살렘을 빠져나가는 장면을 만드시는 것이 더 효과적
이었을 것이다.
그런 동화적인 장면이 아닐지라도, “어린 예수님은 랍비들과 대화
를 나누지 않아도 모든 것을 통달하고 있었더라”라는 한 구절을 넣는
것이 더 신적으로 보일 것이다.
아무리 예수님이셔도 어린아이일 뿐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장면
이 그려지는 것은 어린이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이라 보아야 한다.
늘 어른의 시각으로 아이를 바라보며 아이를 부족한 존재, 하찮은 존
재, 신앙적으로 미완의 존재로 바라보는 시선을 거두라는 것이다.
아이들은 있는 모습 그 자체로 하나님의 형상이다. 미완의 형상이
었는데 어른이 되며 완성이 되어가는 것이 아니라, 존재 자체로 처
음 시작부터 하나님의 형상이다. 아이들은 충분히 성경적 사고를 할
수 있으며, 어른을 능가하는 하나님과의 친밀함을 가질 수 있는 존
재다. 어른의 생각과 형식과 스타일로 아이들을 가두지 말아야 함을
보여주신다.
많은 신앙교육의 형태들이 성경 암기, 암송, 반복, 필사 등으로 이
어질 때가 많다. 물론 그것들만의 힘이 있다. 해야 할 때도 있고 귀한
전통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우리 아이들의 무
궁무진한 하나님 만남의 장을 축소 시키지 말아야 한다. 더 많은 다
양한 상상력을 자극시키며, 대화를 통해 하나님을 알아가도록 하며,
다양한 방식의 활동과 접근을 해야 한다.
아이들을 만나면 만날수록 느끼는 것은 “아이들은 우주다”라는 사
실이다. 늘 바라보는 어른의 기대보다 큰 것을 가지고 있다. 생각보
다 넓은 하나님과의 접촉점을 가지고 있다. 좁은 것은 어른이지 결
코 아이가 아니다. 어른은 그만 이야기하고 아이들이 이야기하게 하
며, 펼치게 하는 것이 좋은 교육이다.
48절을 보면 아주 재밌는 이야기가 나온다.
“아이야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하였느냐”
마리아가 한 말이다. 왜 안 따라오고 부모를 근심하게 했냐는 것
이다. 이것은 철저히 부모의 시각, 어른의 시각이다. 아이의 시각으
로 바라보면 이 말은 부모가 아닌, 어린이 예수님이 하셔야 하는 말
이다.
“부모님, 어찌하여 저에게 이렇게 하셨습니까?”라고 해야 하지 않
는가?
부모가 되어서 아이를 내팽개치고 자기들끼리 길을 떠나놓고 아
이 탓을 하고 있다.
오늘날 우리의 모습과 닮아있다. 어느 날 갑자기 신앙에서 멀어진
자녀에게 우리는 묻는다.
“너 안 그러더니 이제 와서 왜 그래?”
이 질문은 아이가 던져야 할 질문입니다.
“부모님, 어찌하여 저에게 이렇게 하셨습니까? 왜 이제 와서 찾으
려 하십니까?”
같은 실수를 하는 우리가 되지 말아야 한다. 떨어지지 않고 함께하
며 나아가는 책임은 아이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부모에게 있다. 부
모의 책임을 아이에게 전가하지 않길 소망한다. 또 나아가 하나님께
따지며 “왜 내 아이의 신앙을 붙들어주지 않으셨습니까!”라고 외치
지 않길 바란다. 하나님이 이렇게 이야기하실지도 모른다.
“네가 먼저 떠나놓고 왜 나보고 그래?”
그래도 이 본문의 이야기가 해피엔딩이어서 참 다행이다. 마리아
와 요셉은 어린 예수님의 행동과 신앙을 끝까지 100퍼센트 이해하지
는 못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아이를 다시 만났다는 것이고, 그 아
이의 이야기를 들어주었다는 것이다. 그랬기에 그들은 다시 한 가족
이 되어 나사렛으로 향할 수 있었다.
그리고 아이를 다 이해하지는 못했을지라도 51절에 “그 어머니는
이 모든 말을 마음에 두니라”라는 말씀처럼 마음에 두고 그 아이를
다시는 놓치지 않겠노라 다짐하고 아이를 신앙으로 양육했다는 것
이다.
“어른들은 몰라요”라고 외쳤던 예수님의 말에 여전히 어린이 예수
님을 다 모르기는 하지만 찾아, 돌아가고, 만나고, 들어주고, 이해하
기에 힘쓰며, 마음에 둔 그 부모는 부모로서 합격이었다. 그 결과가
52절에 나온다.
“예수는 지혜와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스러
워 가시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