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 차]
나무 계단이 있는 집
연 날리기
바닷가 묘지에서
봄의 마녀
자기만의 방
재와 꽃
달과 그림자
박카스
빈칸으로 남은 영화
나무들
악사들
내 모든 것
무법자
작가의 말
추천의 말
이야기 나눈 영화들
[본 문]
나는 그런 게 너무 좋아. 그런 먼지 터는 소리. 대사가 많고 그런 것보다는, 자기 사는 모습을 그냥 보여 주고, 그걸 보는 사람이 생각할 수 있게끔 하는 거. 아아, 저 사람이 그래서 그랬구나, 그거를 말없이 하는 행동들을 보고서 나중에는 알 수 있게 하는 거……. 그래, 내가 좋아하는 영화가 다 그런 식인 거 같아. 나중에야 알 수 있어.
-p.14
그리고 이와 같은 상황에서 우리가 붙들 수 있는 진실은 오직 하나뿐이라고 느낀다. 그것은 폭력은 반드시 흔적을 남기는 법이라는 진실이다. 자연이 그랬든, 인간이 그랬든, 네가 나에게 그랬든, 내가 나에게 그랬든, 그것이 어떤 종류의 폭력이든 간에 말이다. 그래서 이 이야기만은 꼭 노아에게 전하고 싶었다. 그때 노아에게 가해졌던 폭력은 노아의 몸에 명백한 흔적을 남겼다고. 그래서 그때 노아가 분명히 아팠다는 것을 이제는 여기에 모인 우리 모두가 안다고.
-p.35
“(...) 그래서였는지, 그곳에서 나 이런 느낌도 받았어. ‘이 사람들 전부 누군지도 모르는 채로 잊혀 갔지만, 이들의 이야기는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구나…….’ 엄마가 가고 이제 백오 일이 지났는데 말이야. 참 놀라운 일이지. 시간은 정말 이상해.”
콜리의 말이 옳다. 시간은 정말 이상하다. 시간은 절대로 당신 손에 잡히지 않지만 늘 곁에서 서성거리고 있는 죽음 같은 것이다. 혹은, 죽은 엄마 같은 것이다.
-p.62
그냥 오늘 하루 나 자신을 잘 먹이고, 내 가족한테도 주변한테도 잘하고, 그냥 이렇게 사는 게 무대에서 스포트라이트 받는 것보다 중요한 거지. 왜냐하면 이게 무대지 어디 다른 데에 무대가 있는 게 아니니까, 하는 생각으로 살아가고 있으니까요. 그런데 또 한편으로는 계속 이런 생각을 하는 거예요. 아, 아프다. 주인공이 되지 못한 이 아픔은 정말 끝까지 있는 거겠구나. 그래, 이건 아마 내 평생의 숙제겠구나…….
-p.77
연정의 손길은 늘 선명했다. 어쩌면 그것은 나 사는 동안 아팠을 때 나를 만져 줬던 손길들 중에 가장 거침이 없고 이물감이 없던 것이었다. 그것은 늘 변함없이 ‘너 지금 여기 아프지? 내가 만져 줄게. 자, 봐, 이제 덜 아프지?’라고 말하는 것 같았고, 실제로도 그런 일이 종종 있었다.
-p.92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애쉬의 이야기를 듣기 훨씬 전부터 그녀는 저 절벽 아래에 더 관심이 있었기 때문에. 그녀의 영화도 마찬가지였다. 그것은 늘 저 절벽 아래를 보고 있었다. 잘 보이지도 않고 쉬이 들어가 볼 수도 없는, 저기 저 깎아지른 골짜기 속의 깊은 밑을. 얼핏 보면 검은, 그러나 그저 검다고 하기엔 짙푸름과 짙푸름과 짙푸름이 겹치고 겹치고 겹친 저기 저 아름다운 심연을……. 그래서 아직까지 그녀가 아는 것은 저기에 심연이 있다, 그것뿐이었어도.
-p.122
상당한 시간 동안, 나는 옥상의 난간 위를 혼자서 눈 감고 걸어가는 어린 세라에 대한 생각을 떨칠 수가 없어서 많이 괴로웠다. 또 한편으로는,무섭게 흥분도 됐다. 나는 본능적으로 세라라는 아이에게 압도당했던 것 같다. 그때부터 이미 너무나 무력했던 그 아이에게. 또한 동시에 너무나도 전능했던 그 아이에게.
-p.145
그때 나는 그에게 ‘이미 쓰고 있어요’라고 말하지는 못했다. 그러니까 ‘내가 쓰고 있는 모든 것들 안에는 이미 당신이 있어요. 어떻게 보면,다 당신인 것도 같아요’라고. 또 ‘어쩌면 나는 당신을 이해할 수 없어서 이 모든 것을 쓰기 시작했는데, 이제는 이해할 수 없어도 괜찮아요’라고. 그렇게 나 사는 동안에는 언제나 나의 박카스, 나의 디오니소스, 발바닥에 못 박힌 채로 피 흘리며 웃던 나의 당신이었다고, 그때는 차마 말을 하지 못했다.
-p.163
네, 근데 그게 아무것도 아닌 말이에요. 평상시에 주고받을 수 있는 말인데 그걸로 오해를 하는 거야. 그러니까 가장 큰 문제는, 고의든 아니든 간에 누군가가 마음을 다치면 안 된다는 거예요. 그 가운데 내가 뭘 배웠느냐고? 그런 건 없어요. 그냥 하루하루 조마조마하다가 끝나는 거지. 그러면서 아무 일 없기만을 바라요. 제발, 오늘은 나 때문에 누구든 마음 다치는 일이 없게 해 주십시오. 그것뿐이에요.
-p.179~180
그런데요, 사실 일반적으로 봐도 극장이란 곳이 극한 상황인 건 맞긴 해요. 왜냐하면 나를 더 드러나게 해 주는 곳이잖아요. 나의 공포감을, 불안을 드러나게 해 주는 곳. 영화가 시작되기 전에도 불안하고 또 보는 내내도 그렇고. 그렇게 보면, 영화를 보다가 눈물을 흘린다는 건 차라리 좋은 현상 아니에요? 왜냐하면 그건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나도 울 수 있다는 거니까요.
-p.189
그로부터 또 몇 년이 흐른 뒤에도, 무영네 식구들은 여전히 그쪽 길로는 발도 디디지 않으려고 했다. 마을버스를 타고 지날 때도 눈길조차 주지 않으려고 했다. 그랬더니 방치됐던 그 땅에서는 사람 키만 한 잡초들이 무성히 자라났고, 이내 다시 슬레이트 벽 바깥 세상을 흘겨보기 시작했다. 무영 누나는 그게 너무 끔찍하다고 했다. 잡초가 자란다는 게.
-p.205
누가 들어도 아름다워 귀가 번쩍 트이는 네 목소리에 비해서 내 목소리는 너무나 거칠고 탁하기만 했고, 그런 네 앞에서 나는 마치 태어날 때부터 ‘네가 아무리 노래를 잘해도 그래 봤자’라는 낙인을 받은 것처럼 느끼곤 했거든. 어릴 적부터 아예 그렇게 주눅이 들어 버렸던 것도 같아. 그런데 어떤 이유에서였는지, 그랬던 나를 사바나는 알아봤던 것 같아. 그래서 그날 사바나가 내게 가르쳐 줬던 건, 중요한 건 지금 있는 그대로의 내 목소리라는 거였어. 그리고 그 목소리를 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지금 여기, 맨발로 땅을 디디고 서 있는 나 자신부터 느껴 봐야 한다는 거였어.
-p.222
그날 이모는 강아지를 안고서 아파트 공동 현관을 막 나서려던 참이었는데, 작은 고양이 한 마리가 열린 문틈으로 뛰어 들어오며 비를 피하는 걸 보게 됐다. 그 고양이 역시 이모를 봤다. 그리고 이모의 품에 폭 안겨 있는 강아지를 한참 빤히도 봤다.
“그걸 내가 애써 못 본 척하면서 돌아섰는데, 바로 며칠 후에 길고양이가 차에 치여서 죽은 걸 보게 된 거야. 혹시 죽은 녀석이 그 녀석일까 싶더라고.”
그리하여 결국에 그녀는 이 운명을 받아들이게 됐다.
-p.2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