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광고
AD광고5만원 이상 결제 시 (*배송비 제외)
정가제FREE(상품/사은품) 금액이 2,000원 이상이면 2,000원 추가적립
10만원 이상 결제 시 (*배송비 제외)
정가제FREE(상품/사은품) 금액이 2,000원 이상이면 2,000원 추가적립
정가제FREE(상품/사은품) 금액이 5,000원 이상이면 5,000원 추가적립
신용카드 무이자할부 안내
결제사 혜택 안내




배송안내
- 배송지역 선택
- 주소 검색
| 네이버페이 구매하기 | 찜하기 |
[네이버페이]
| ISBN | ISBN-13 : 9791160871456 |
|---|---|
| 쪽수 | 727쪽 |
| 크기 | A5(148mm X 210mm, 국판) |
| 제품구성 | 양장 |
- 인문/역사 > 동양철학
공자의 유교 사상을 계승 발전시킨
전국시대의 대표적인 사상가 맹자 평전
중국 역대 제왕이 가장 사랑한 책,
그러나 동시에 가장 멀리한 책
우리에게는 막연히 성선론(성선설)으로만 알려진 『맹자』는 우여곡절을 많이 겪은 책이라 할 수 있다. 분서 당시 제자로 분류되어 화마를 피했지만 아이러니하게 살아남은 이후에는 역대 제왕들의 애증하는 경서가 되었다.
우리는 성선설로만 알고 있지만 제왕들은 『맹자』를 좀 다른 시각으로 보았다. 제선왕은 역성혁명을 염두에 두고 “신하가 군주를 죽이는 것이 가한가?”를 물었다. 맹자는 인과 의를 해친 잔적지인(殘賊之人)인 일부(一夫)는 죽여도 된다고 했고, 이후 맹자의 의도와는 달리 역성혁명을 꿈꾸는 자들은 그 이론적 근거 내지 정당성을 모두 여기서 찾았다. 그러나 일단 명태조 주원장같이 역성혁명에 성공한 임금이 보기에는 “백성이 가장 귀중하고, 사직이 그 다음이고, 군주는 가벼운 것이다.” 같은 말이 거슬렸다. 주원장이 송대에야 경서의 반열에 오른 『맹자』를 다시 경서에서 제외하려 한 이유다.
이 책은 경서의 주해에만 치중했던 기존의 시각에서 벗어나 맹자의 생애와 왕패·경권·의리지변 등 내용분석은 물론 『맹자』가 제자로 진시황의 분서를 피한 것부터 시작하여 마지막으로 경서에 편입되기까지의 과정을 샅샅이 밝히고 있다.
[목 차]
역자 서문
생애편
제1장 맹자의 생애 사적
1. 맹자의 이름
2. 맹자의 고향
3. 맹자의 선대
(1) 맹자의 선조 | (2) 맹자의 부모 | (3) 맹자가 부친을 여읨 | (4) 맹자 모친의 가르침
4. 맹자의 사승(師承)
5. 맹자의 제자
(1) 자사는 결코 증자를 사승하지 않았다 | (2) 맹자는 결코 자사를 사승하지 않았다 | (3) 증자와 자사가 맹자에게 끼친 영향 | (4) 『중용』의 작자 고증
6. 맹자의 유력
(1) 추(鄒)에서의 출사 | (2) 위왕 때 처음으로 제를 유세하다 | (3) 송으로 가면서 설을 거쳐 추로 돌아왔다가 노로 가서 등을 유력하다 | (4) 양에서의 유력 | (5) 선왕 때의 두 번째 제나라 유력 | (6) 추로 돌아오다
7. 맹자의 생몰
(1) 맹자의 생몰에 관한 각종 견해 | (2) 쳰무의 맹자 생몰년 문제에 대한 관점 | (3) 쳰무의 관점에 대한 몇 가지 수정
제2장 『맹자』의 작자 고증
1. 『맹자』의 작자
(1) 『맹자』의 작자에 관한 몇 가지 상이한 관점 | (2) 『맹자』의 행문(行文) 특징 | (3) 『맹자』의 작자에 대한 분석
2. 『맹자』의 외서 문제
사상편
제3장 왕패지변(王霸之辨)
1. 왕패지변의 기인(起因)
(1) 왕패지변의 시대적 정신 | (2) 두 가지 다른 평치(平治)의 방략(方略) | (3) 맹자가 패도는 물리치고 왕도를 올리다
2. 성왕(聖王): 왕도주의의 전제
(1) 임금 | (2) 임금과 신하 | (3) 임금과 백성
3. 백성을 보호함(保民): 왕도주의의 시행
(1) 백성을 편안하게 함(安民) | (2) 양민(養民) | (3) 백성을 가르침
4. 왕도주의에 관한 이해의 세 가지 문제
(1) 유학은 본질상 심성의 학문인가 | (2) 유학은 법을 이야기하지 않았는가 | (3) 민본론은 백성이 정치의 주체임을 말하는가
제4장 경권지변(經權之辨)
1. 이론의 선도
2. 맹자 경권을 논하다
(1) 맹자는 반경을 주장하고 또한 행권을 찬성하다 | (2) 반경과 행권의 관계 | (3) 행권의 표준과 가치 형정의 원칙 | (4) 맹자 경권학설의 이론적 의의
3. 의(義)와 명(命)
제5장 의리지변(義利之辨)
1. ‘의’와 ‘이’의 탐구
2. 치국 방략의 의의를 가진 의리지변
3. 사람과 짐승을 분간하는 의의의 의리지변
4. 도덕 목적 의의의 의리지변
5. “의를 말함만 허락하고 이를 말함은 허락하지 않는다”를 변정함
제6장 순척지변(舜跖之辨)
1. 순척지변과 이상 인격(理想人格)
2. 이상 인격의 층차
3. 이상적 인격의 전범
4. 이상 인격의 실천
5. 이상적 인격의 동력
6. 순척지변의 의의
제7장 인성지변(人性之辨)
1. 기본 개념 풀이
2. 성선론의 기본 사고 방향
(1) 양심과 본심으로만 성을 논함 | (2) 양심과 본심은 모든 사람이 본래 가지고 있음 | (3) 양심과 본심은 성선의 근거 | (4) 악은 그 재능을 다할 수 없는 데 있다 | (5) 성선은 사물의 법칙 | (6) 성선은 하나의 과이다
3. 성선론의 주요 원칙
(1) 마음을 두고 성을 기름 | (2) 먼저 그 큰 것을 세운다 | (3) 마음에 부끄러움이 없음 | (4) 알면 반드시 행함
4. 성선론의 현대적 해석
(1) 양심과 본심의 특징 | (2) ‘윤리심경(心境)’ 개념의 정의 | (3) 양심과 본심은 일종의 ‘윤리심경’
5. 공맹 심성학설의 분기
제8장 맹자 사상의 기타 방면
1. 맹자가 미를 논함
2. 맹자가 기를 논함
(1) ‘말을 알고 기를 기름(知言養氣)’ 장의 새로운 해석 | (2) 맹자의 고대 기론에 대한 발전
3. 맹자가 시를 논함
4. 맹자의 변론을 논함
(1) 변론하기를 좋아하는 시대와 변론하기를 좋아하는 맹자 | (2) 맹자 변론 방법의 두 가지 특징 | (3) 맹자와 고자의 변론하는 실제 상황
5. 『맹자』의 문학적 특색
(1) 광대무변한 기세 | (2) 생동적이고 명쾌한 언어 | (3) 개성이 선명한 형상 | (4) 『맹자』의 문학적 지위
영향편
제9장 맹자 사상의 역사적 영향
1. 왕패지변이 후세에 끼친 영향
2. 경권지변이 후세에 끼친 영향
3. 의리지변이 후세에 끼친 영향
4. 순척지변이 후세에 끼친 영향
5. 인성지변이 후세에 끼친 영향
제10장 맹자의 역사적 지위의 변천
1. 한에서 당초까지의 지위는 높지 않았다
2. 당송 이래 차츰 격이 올라가다
(1) 맹자 승격 운동의 원인 | (2) 맹자 승격 운동의 과정 | (3) 맹자 승격 운동 중의 역류
3. 명청 양대의 순탄한 발전
부록
맹자 연표
참고서목
후기
[본 문]
누구와 누구의 ‘도가 같고’ 누구와 누구의 ‘처지를 바꾸면 모두 그렇다’는 것은 『맹자』에서 비교적 자주 보이는 화법이다. 「이루 하」 제29장에서 말한 것처럼 우와 직 그리고 안회는 일에 대하여 대처 방법이 상이하다. 이는 우와 직은 태평한 시대를 만났고 안자는 난세를 만나 조건이 같지 않아서이지만 그들이 문제를 처리하는 도리는 오히려 마찬가지여서 서로 위치를 바꾼다고 한다면 세 사람의 대처 방법 또한 반드시 서로 같을 것이다. 이는 “우와 직·안회가 도가 같다”라는 것이고, “우와 직·안자가 처지를 바꾸면 모두 그렇다.”는 것이다. 이로부터 『맹자』에서 누구와 누구의 “도가 같다”고 한 것은 다만 문제를 처리하는 도리가 서로 같거나 간 길이 서로 같다는 의미이지 그 사이에 사승 관계가 존재한다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후인들이 겨우 “증자와 자사는 도가 같다”라 한 논법에 의지하여 증자와 자사가 사승 관계가 있다는 것을 증명하려 한다면 근거가 부족하다.
- p.48
사실 맹자는 결코 자사에게서 직접 학업을 배우지 않았다. 하나의 유력한 증거가 있으니 곧 맹자가 분명히 “나는 공자의 문도가 되지는 못하였으나, 내 남에게서 사사로이 선하게 하였다.(予未得爲孔子徒也, 予私淑諸人也)”라 말한 적이 있다. 그가 공자의 손자에게서 직접 학업을 배웠던 적이 있었으면 생각건대 필시 분명히 말하여 자신의 역량을 증강시킬 수 있었을 것인데 그렇게 하지 못하고 다만 “남에게서 사사로이 선하게 하였을” 뿐이다. 이런 견해는 완전히 주관적인 추측이 아니라 『맹자』에서도 방증을 찾을 수 있다. 『맹자』에서는 자사를 직접 부른 것이 16차례가 있는데 이런 곳에서는 모두 자사를 부자(夫子)라 일컫지 않았다. 맹자가 직접 자사에게서 학업을 배웠다면 그 스승을 이렇게 무례하게 대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요컨대 시기적으로 고증을 하든 『맹자』의 언어로 분석을 하든 간에 모두 맹자는 결코 직접 자사에게서 학업을 배우지 않았음을 단정할 수 있다.
- p.55
맹자는 추에서 출사한 후 추와 노의 일을 당하였다. 추목공이 맹자에게 말하였다. “내 유사로서 죽은 자가 33명이나 되지만 백성들은 죽은 자가 없으니, 이들을 죽이려면 이루 다 죽일 수 없고, 죽이지 않는다면 장상들이 죽는 것을 질시하면서 구원하지 않은 것이니, 이를 어찌하면 좋겠습니까?(吾有司死者三十三人, 而民莫之死也. 誅之, 則不可勝誅; 不誅, 則疾視其長上之死而不救, 如之何則可也?)” 맹자는 추목공이 이렇게 묻는 말에 매우 불만을 가지고 비판하여 말하였다. “흉년과 기세에 군주의 백성들이 노약자들은 시신이 구학에 뒹굴고, 장성한 자들은 흩어져서 사방으로 간 자가 몇천 명이나 되는데도 군주의 미곡창고는 곡식이 꽉 차 있으며 부고에는 재화가 충만한데도 유사 중에 아뢴 자가 없었으니, 이것은 윗사람들이 태만해서 아랫사람을 해친 것입니다.(凶年饑歲, 君之民老弱轉乎溝壑, 壯者散而之四方者, 幾千人矣; 而君之倉?實, 府庫充, 有司莫以告, 是上慢而殘下也)” 아울러 추목공에게 권고했다. “군주께서 인한 정치를 행하시면 이 백성들이 그 윗사람을 가까이하여 어른[官長]을 위해 죽을 것입니다.(君行仁政, 斯民親其上, 死其長矣)”(2.12) 맹자와 추목공의 대화는 7편 가운데 한 차례밖에 보이지 않는다. 출사 후에 추나라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는 자료가 부족하여 확정하기가 쉽지 않다.
- p.101
맹자가 양에서 유력한 것은 맹자의 평생을 고증하는데 있어서 가장 문제가 많은 사안 중의 하나다. 논쟁의 초점은 맹자가 양에 유력한 것이 양혜왕 35년인가 아니면 후원 15년인가 하는 것이다. 사마천은 전자를 주장하였다. 『사기』 「육국연표」 양혜왕 35년의 주에서는 말하였다. “맹자가 오자 왕이 나라를 이롭게 하는 것을 물었는데 대답하기를 ‘임금은 이로움을 말해서는 안 됩니다.’라 하였다.” 이는 맹자가 양혜왕 35년 양을 유력한 가장 이른 출처로 이후로 이 설을 주장하는 자가 적지 않았다. 이를테면 초순은 『맹자정의』에서 주병중(周柄中)의 『변정(辨正)』을 인용하여 말하였다. “맹자의 제와 양의 선후 문제는 「육국연표」 및 「위세가(魏世家)」를 근거로 하여야 하며 「맹자열전」을 근거로 해서는 안 된다. 「연표」의 위혜왕 35년은 제선왕 7년이다. 이 해에는 특별히 ‘맹자가 왔다(孟子來)’라 기록하였다. 맹자가 제선왕 7년 이전에 먼저 제에서 유력하였다면 어째서 「연표」에 기록하지 않았겠는가? 곧 「맹자전」에서 이른바 ‘제선왕을 유세하며 섬겼는데 선왕이 쓸 수가 없어 나중에 양으로 갔다’라 한 것은 곧 사공(史公: 司馬遷)의 엇섞인 글이지 사실이 아니다. 본서로 살펴보건대 첫 편에는 양혜왕을 만난 여러 장 및 양왕을 만나 꺼낸 이야기와 이런저런 말을 수록하였다. 그다음 십수 장은 모두 제에서 선왕과 묻고 답한 일이다. 이 그 선후의 종적은 분명히 알 수가 있어서 『통감』처럼 선왕 10년으로 옮겨서 연나라를 쳐서 쾌(?)를 죽인 일과 합치시킨 다음 맹자가 먼저 양을 유력한 후에 제에 이르렀다고 볼 필요가 없다.”
- p.128
맹자와 여러 차례 대화를 거치는 동안 양혜왕의 태도에는 큰 변화가 생겼다. 이는 “과인은 마음을 편안히 해서 가르침을 받들기 원한다.(寡人願安承敎)”(1.4)라 한 말로 알 수 있다. 그러나 정말 공교롭게도 맹자가 양에 이른 이듬해 곧 B.C. 319년에 양혜왕은 죽고 말았다. 양양왕(梁襄王)이 즉위한 후 맹자의 그에 대한 인상은 매우 좋지 않아 “바라보아도 임금 같지 않고, 그 앞으로 나아가도 두려워할 만한 것이 보이지 않았다.(望之不似人君, 就之而不見所畏焉)”(1.6)는 탄식을 하였다. 양왕이 묻기를 “천하가 어디로 정하여질 것인가?(天下惡乎定)”라 묻자 맹자가 답하기를 “하나로 정하여 질 것이다.(定於一)”라 하였다. 양왕은 맹자가 한 말을 정확하게 이해할 수가 없어서 또 묻기를 “누가 하나로 정할 수 있겠는가?(孰能一之)”라 하였다. 맹자는 더 이상 양에 머물러봤자 유익할 것이 없으리라 느꼈다. 이때는 마침 제선왕이 막 즉위한 때였다. 직하의 학문을 부흥시키려는 노력을 하여 맹자에게 새로운 희망을 가져다주자 그는 대량을 떠나 재차 제로 갔다. 때는 B.C. 319년이었다.
- p.134
맹자에게는 ‘변론하기를 좋아한다(好辯)’는 이름이 있다. “공도자가 말했다. ‘외인들이 모두 부자가 변론하기를 좋아한다고 칭하니, 감히 묻겠습니다. 어째서입니까?’ 맹자가 말하였다. ‘내 어찌 변론하기를 좋아하겠는가? 내 부득이 해서이다.’(公都子曰: ‘外人皆稱夫子好辯, 敢問何也?’ 孟子曰: ‘予豈好辯哉? 予不得已也.’)”(6.9) ‘부득이(不得已)’는 맹자가 강렬한 역사적 책임감을 추진해 나가면서 공자의 학설을 지키고 자기의 이상을 지키기 위하여 어쩔 수 없이 이렇게 한다는 것을 말한다. 변론하기를 좋아하는 것은 맹자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 중의 하나라고 말할 수 있다. 일반적인 법칙에 따르면 쌍방이 변론하는 주제는 왕왕 쌍방의 사상적 차이에 초점을 맞추며, 사회적 변론의 주제는 종종 사회 사조의 핫이슈이다. 이 때문에 우리는 맹자의 ‘변론하기를 좋아하는’ 특징에 근거하여 맹자의 주요 사상을 파악할 수 있다. 내가 보기에 맹자가 ‘변론하기를 좋아한’ 주제는 주로 왕패(王?: 왕도정치와 패도정치)와 경권(經權: 經法과 權道), 의리(義理), 순척(舜?: 虞舜과 盜?), 그리고 인성(人性) 등 다섯 방면에 집중되어 있다. 이런 방면을 제대로 파악하기만 하면 기본적으로 맹자 사상의 혈맥을 제대로 파악하게 되고, 당시의 시대정신을 제대로 파악하게 된다.
- p.200
소 한 마리를 종(이 완성된 것)을 알리는 제사를 지내는 제물로 쓰려고 하자 제선왕이 그 소가 벌벌 떠는 모습을 차마 보지 못하여 양으로 바꾸라 하였다. 백성들은 그 까닭을 분명히 알지 못하여 제선왕이 인색하다고 생각하였다. 거기서 제선왕이 차마 하지 못하는 마음을 맹자만 읽어냈다. 다른 곳에서도 맹자는 한 번 더 모든 사람은 차마 하지 못하는 마음을 갖고 있다고 제기하고 아울러 자기가 그렇게 말하는 근거를 명확하게 들었다. 아이가 우물로 떨어지려는 것이 갑자기 눈에 들어오게 되면 모두 두려워하고 동정하는 마음을 갖게 될 것인데 이는 결코 아이의 부모와 모종의 관계를 맺으려는 것이 아니다. 이웃의 벗들 사이에서 훌륭한 평판을 얻으려는 것도 아니며, 오명을 싫어해서도 아니다. 이런 두려워하고 동정하는 마음은 차마 (남을) 해치지 못하는 마음이다. 차마 하지 못하는 마음을 확충시키고 발전시켜 나가는 것은 차마 해치지 못하는 정치이다.
- p.229
공자는 백성을 ‘부유하게 해 주고(富之)’, ‘가르쳐 준다(敎之)’는 말을 하였으며, 무엇보다 인민의 자연 생명의 수요를 만족시켜주고 난 다음에 다시 교육을 진행할 것을 강조하였다. 맹자는 이 사상을 계승하여 양혜왕과 대화 중에 말하였다. 백성이 기본적인 산업을 가지고 풍년에는 배불리 먹을 수 있고 흉년에는 굶어 죽지 않은 “그런 뒤에야 백성들을 몰아서 선으로 가게 합니다. 그러므로 백성들이 (명령을) 따르기가 가뿐할 것입니다.(然後驅而之善, 故民之宗之也輕)” 그렇지 않다면 기본생활을 보장받지 못하게 되어 “죽음을 구제하기에도 부족할 것이니, 어느 겨를에 예의를 차리겠는가?(救死而恐不贍, 奚暇治禮義哉?)”(1.7) “콩과 곡식이 물과 불 같다면 백성들이 어찌 인하지 못한 자가 있겠는가?(菽粟如水火, 而民焉有不仁者乎?)”(13.23) 이는 『관자(管子)』의 “미곡 창고가 차야 예절을 알고 의식이 족해야 영욕을 안다(倉?實, 知禮節; 衣食足, 知榮辱)”고 표현한 기본사상과 매우 일치한다. 이는 유가 철학은 시종 백성의 기본적인 생활의 수요를 보장하는 것이 첫째 의무이며, 인륜의 교육과 덕성의 제고는 그다음이라는 것을 설명한다. 이 방면의 태도는 실제 대단히 높고 멀거나 현묘한 곳도 없다.
- p.256
맹자가 정전제를 극구 선양한 것은 이런 제도가 왕도주의에 대해 매우 많은 장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위에서 인용한 장구에 근거하여 분석해보면 이런 장점은 최소한 아래의 다섯 방면이 있다. ① 전지를 나누고 녹봉을 제정하는 데 편하다. 정전의 획분은 먼저 전지의 분계로부터 시작되어야 하며 분계가 획분되고 나면 전지를 분배하여 봉록을 제정하는 데 매우 편하다. ② 행정관리에 편하다. 정전의 기초에서 상장(喪葬)과 이사가 향리를 벗어나지 않는데 한 향리는 곧 하나의 작은 행정관리 단위로 유효한 행정관리가 편리함을 가져오기 때문이다. ③ 향풍의 순화(純和)에 편하다. 향리가 정전에서 함께 경작하여 출입과 노동이 상호 수반되고 도둑을 막는 데 서로 도우며 의외의 병고는 서로 돌보아 백성의 우애와 화목에 유리하다. ④ 야인(野人)과 구별되는 데 편하다. 국인(國人)과 상대적으로 야인은 전야(田野)의 사람을 가리키며, 군자와 상대적으로 야인은 노동자를 가리킨다. 농민은 정전에서 공전을 먼저 경작하고 사전은 나중에 경작하여야 하는데 공전은 세금이 되고 사전은 양식이 되는데, 이렇게 하면 또한 군자와 야인을 구분하는 데 도움이 된다. ⑤ 가장 중요한 것은 항산(恒産)과 항심(恒心)에 편하다. 정전제도의 실행은 모든 농민에게 고정된 토지를 보유하게 하고 ‘항산’을 가지게 하며, ‘항산이 있는 자는 항심이 있게 되어’ 심정과 사상도 안정이 되고 이렇게 하면 전 사회 또한 안정될 것이다.
- p.261
민본론을 ‘이상화한 군본론’으로 이해하는 것은 중요한 이론적 의의가 있다. 이왕의 민본론에 대한 이해는 비록 각기 차이가 있긴 하지만 언제나 민본론을 군본론과 절대적으로 대립하는 범주로 본다. 이런 견해는 비록 중국 전통정치에 내재한 장력의 몇몇 규율로 효과적으로 해석할 수 있지만 몇몇 문제가 존재한다. 이는 민본론이 군본론과 절대적으로 대립할 때 군주전제의 중국에서는 극히 개별적인 상황을 제외하면(明 太祖가 孟子를 孔廟에 配享한 것 같은 것) 어째서 민본론이 생존할 수 있어서 군주전제의 정체과 장기적으로 ‘평화롭게 공존’하겠는가? 민본론을 ‘이상화한 군본론’으로 이해한다면 이 문제를 합리적으로 해결할 수 있다. 민본론의 기초가 여전히 군본론이고, 이 큰 한계는 결코 타파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전제정체에서도 살아남았고 금하여 근절되지 않았다. 또한 민본론은 ‘이상화한 군본론’으로 현실의 군본론과 일단의 거리가 있어서 일정한 장력을 형성하였기 때문에 충분히 일종의 ‘이상정치’를 이룰 수 있었다. ‘현실정치’와 서로 맞섰기 때문에 2천 년 이내로 군주전제를 반대한 사상적 무기가 될 수 있었다.
- p.300
『맹자』의 많은 곳에 맹자의 백이와 이윤, 유하혜 그리고 공자에 대한 평론이 기록되어 있다. 대체로 백이는 성인 가운데 맑고 고상한 사람인데, 그는 눈으로 좋지 않은 사물은 보지 않고 귀로 좋지 않은 소리를 듣지 않았다. 이상적인 군주가 아니라면 섬기러 가지 않고 이상적인 백성이 아니라면 부리러 가지 않으며, 천하에 도가 있으면 나와서 일을 하고 천하가 혼란하면 전야로 물러나기 때문이다. 이윤은 성인 가운데 책임을 지는 사람인데 그는 스스로를 ‘천민(天民)의 선각자’라 생각하여 ‘이 도로 이 백성을 깨우치려고 하기 때문에’ 모든 군주를 모두 가서 섬길 수 있고, 모든 백성을 모두 가서 부릴 수 있어서, 천하가 태평하면 나와서 벼슬을 하고 천하가 혼란해도 나와서 벼슬을 하니 이 때문에 천하의 중임을 질 수 있기 때문이다. 유하혜는 성인 가운데 화함을 따르는 사람이다. 그는 나쁜 임금을 섬기는 것을 수치와 욕으로 생각지 않으며 또한 관직이 작다고 직책을 떠나지 않으며 조정에 서면 자기의 재능을 숨기지 않았다. 다만 반드시 그의 원칙에 따라 일을 처리하여 버려져도 원한을 품지 않고 곤궁함을 만나도 근심하지 않는다. 공자는 그들과 모두 서로 같지 않으며 성인 가운데서 시의에 딱 들어맞는 사람이다.
- p.321
맹자는 제왕과의 만남에 큰 희망을 품고 있었는데 나중에 원만하지 못하여 떠나게 된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제나라를 떠날 때 주현에서 만 사흘을 꼬박 묵은 것은 제왕이 회개하는 뜻을 가지기를 바라서였다. 제왕이 회개를 할 수 있었다면 반드시 쫓아왔을 텐데 나중에 제왕이 쫓아오지 않은 것을 보고서야 미련 없이 떠났다. 사정이 이러하였는데도 맹자는 제왕을 포기하지 않았다. 제왕이 진심으로 맹자를 등용한다면 제의 백성뿐만 아니라 천하의 백성이 모두 안정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로써 맹자는 제나라를 떠나는 상황에 내몰리어 자기의 정치 이상이 이미 실현될 길이 없는 것을 알았을 때마저도 여전히 자기의 주관적 노력을 버리지 않았다. 운명에 굴하지 않고 공자와 마찬가지의 ‘그 불가함을 알면서도 하는’ 정신을 표현해내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불요불굴의 정신이 바로 맹자의 의와 명에 관한 사상이 실제 행동에서 생동적으로 표현된 것이다
- p.344
공자는 백성에 대하여 ‘부유하게 해 주고’, ‘가르친다’는 견해를 가진 적이 있는데, 맹자는 이 사상을 계승하여 먼저 백성을 풍족하게, 특히 백성의 산업을 제정해주어야 서민의 기본생활을 보장한다고 생각하였다. “5묘의 집 담장 아래에 뽕나무를 심어 필부가 누에를 치면 늙은이가 충분히 비단옷을 입을 수 있으며, 다섯 마리의 암탉과 두 마리의 암퇘지가 새끼 칠 때를 놓치지 않게 하면 늙은이가 족히 (식탁에서) 고기를 빠뜨리는 일이 없을 것이다.(五畝之宅, 樹墻下以桑, 匹婦蠶之, 則老者足以衣帛矣. 五母鷄, 二母?, 無失其時, 老者足以無失其肉矣)”(13.22) 이런 말은 『맹자』에 여러 차례 출현하여 맹자가 이 문제를 얼마나 중시했는가를 알 수 있다. 백성의 생활을 보장해야 하는 까닭은 백성들이 고정된 산업 수입이 없으면 좋은 도덕관념과 행위준칙이 있을 수 없을 것이고 나라는 잘 다스려질 방법이 없을 것이라는 걸 맹자가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맹자는 임금에게 국태민안과 천하가 태평하기를 생각한다면 반드시 선왕처럼 인민의 생활을 마음속에 두고 먼저 그들을 따뜻하게 입히고 배불리 먹이는 문제를 해결하여 그들이 항산(恒産)을 갖고 항심(恒心)을 갖게 하여 집안을 편안히 하고 생업을 즐기게 하도록 하라고 타일렀다. 이럴 경우 당연히 맹자는 백성들이 이를 이야기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없다.
- p.371
도덕 목적 의의의 의리지변과 치국방략 의의의 의리지변은 얼마간 비슷한 점이 있다. 맹자가 보기에 선(善)은 반드시 순수한 것으로 어떤 이욕 목적도 함유할 수 없다. 우물에 빠지려는 어린아이를 구하는 것과 똑같이 그 부모와 교유를 맺기 위해서일 수가 없고 명성을 얻기 위해서일 수가 없으며, 또한 오명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일 수도 없다. 이런 것들은 완전히 일을 이를 말한 것으로 진정한 도덕은 반드시 순수한 것이어서 다만 자기 양심의 요구를 만족시키기 위함이어야 하며 이렇게 해야만 의를 이룰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 일러 ‘인과 의로 말미암아 행한다’ 하고 ‘인의를 행하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바꾸어 말하면 두 가지 같지 않은 선이 있는데 한 가지는 의를 위해서 선해지는 것으로 이것이 진정한 선이며 ‘인과 의로 말미암아 행한다’는 것이다. 한 가지는 이를 위해 선해지는 것인데 이는 진정한 의가 아니며 ‘인의를 해하는’ 것이다. 따라서 맹자는 도덕 목적의 문제에서 의와 이는 상호 대립적이며, 진정한 도덕을 얻으려면 반드시 이욕의 목적을 배척해야 하며, 이욕의 목적을 배척하지 않으면 진정한 도덕에 이르지 못하게 된다고 생각했다.
- p.392
이론적으로 말하여 순척지변의 실질은 이상적인 인격을 추구하는 것이다. 근년 들어 이상적인 인격에 관한 토론이 많아졌다. 일반적으로 말하여 “일정한 문화 환경과 사회제도에서 현실의 수요에 따라 사람들의 이익과 요구 그리고 기대가 한 모범적인 신상에 집중되는데 이것이 곧 이상 인격이다.” 이는 또한 곧 이상 인격은 일종의 문화적인 사람들이 가장 추숭하는 인격의 규범화된 유형이며, 이런 유형은 전형적으로 이 문화의 기본적인 특징과 가치표준을 체현하였고 거대한 감화력을 갖추고 있으며, 사람들이 열심히 추구하는 목표라는 것을 말한다. 유가 문화에서 이상적인 인격의 전형적인 대표는 곧 요순(堯舜)이다. 맹자가 순척지변을 전개하는 것은 곧 이상 인격을 배양하고 구축하고 추구하여 사람들을 순 같은 성인이 되도록 이끄는 것이다. 분명히 순척지변의 이론적 의의는 매우 깊으며, 맹자의 이 방면의 사상 또한 특별히 풍부하고 다채로워 중화민족 문화의 발전에 큰 공헌을 하여 깊이 파고들 만하여 이에 우리는 주로 이상 인격의 각도에서 순척지변의 문제를 토론하겠다.
- p.402
맹자가 보기에 사람의 도덕적 요구의 중요성이 사업적 요구를 크게 뛰어넘는다는 건 주의할 점이다. 이는 매우 중시해야 할 만한 문제이다. 맹자는 천하의 사람은 모두 자신을 따르는 것을 기쁘게 생각하며 이는 매우 영광스러운 일이지만 오히려 그것을 초개처럼 여겼다. 이와는 반대로 부모의 환심을 사는 일과 부모의 뜻에 순종할 것을 더욱 중시하여야 한다고 생각하였다.(7.28) 심지어 고수(??)가 사람을 죽였다면 천자가 되지 못하는 일이 있더라도 몰래 부친을 둘러업고 달아나 해변에서 살면서 평생을 즐겁게 살아가려고 했다.(13.35) 이런 도덕적 요구는 사업적 요구의 위에 놓인 가치 지향으로 이상적 인격 발전의 방향을 직접 결정하고 “먼저 사람이 되고 나중에 사업을 세우는” 원칙을 결정하여 나중의 사회발전에 매우 큰 영향을 끼쳤다.
- p.443
순척지변이 성인을 사람이 되는 최고의 표준으로 삼은 적극적인 의의도 가지고 있지만 문제가 나타나기도 쉽다. 전체 사회를 가지고 보면 절대다수의 사람이 모두 보통 백성이기 때문에 표준을 전부 성인에게 둔다면 대부분의 사람에게는 도달할 방법이 없으며, 도달할 방법이 없으면 자신감을 잃어버리고 허위가 발생하기 쉽다. 이렇게 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표준을 구체적인 점으로 정하여 먼저 보통 인격의 개발에 힘을 쏟은 다음에야 성인의 인격을 구축하여야 한다. 완전한 인격은 두 개의 층차가 있어야 하는데 보통사람의 인격이 먼저이고 그다음이 성인의 인격이다. 중국 근대의 신인 배양에 관한 학설은 이미 뚜렷하게 이 방향의 필연성을 명시하였다. 펑치(馮契)가 말한 것과 똑같다. “평민화한 자유인격이 근대인의 신인을 배양하는 데 대한 요구는 고대인이 성현을 만들고 영웅을 만들려고 했던 것과는 다르다. 근대인의 이상적 인격은 높아서 올라갈 수 없는 것이 아니며 보통사람도 노력을 통하여 모두 도달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배양하려고 하는 일종의 평민화한 자유인격이며 결코 전지전능한 성인의 배양을 요구하지 않으며 궁극적인 의미의 각오와 절대적인 의미의 자유를 인정하지 않는다.”
- p.450
맹자가 공자를 매우 존중하여 공자는 생민 이래로 가장 출중한 발군의 인물이라고 인정을 하기는 하면서도 그는 여전히 공자가 생민과 동류에 속한다고 생각하였다. 「고자 상」에서 맹자는 또 말하였다. “그러므로 무릇 동류인 것은 대부분 서로 같으니, 어찌 홀로 인간에 이르러서만 의심을 하겠는가. 성인도 나와 동류인 자이다.(故凡同類者, 擧相似也, 何獨至於人而疑之? 聖人, 與我同類者)”(11.7) 사람과 사람은 동류이고 성인과 보통사람 또한 동류이다. 무릇 동류에 속한 것은 모두 서로 비슷한 곳이 있어서 ‘똑같이 그렇게 여김(同然)’이 있는데 맹자는 ‘똑같이 그렇게 여김’이 곧 이이며 의라고 생각하였다. 성인이 성인인 까닭은 다른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은 “우리 마음이 똑같이 그렇게 여기는 것을 먼저 아셨을 따름이다.(先得 我心之所同然耳)” 맹자가 “사람은 다 요순이 될 수 있다(人皆可以爲堯舜)”고 칭찬한 견해는 충분히 마음속의 의리를 발양하여 빛나고 크게 할 수만 있다면 사람은 누구나 성인이 될 수 있고 대인의 기상을 가질 수 있어서 대인의 사업을 성취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맹자의 말대로라면 곧 “요의 옷을 입고, 요의 말을 외우며, 요의 행실을 행한다면 요임금일 뿐인 것이다.(服堯之服, 誦堯之言, 行堯之行, 是堯而已矣)”(12.2) 확실히 이 모든 것은 반드시 동류의식이 전제되어 있어야 하며 동류의식이 없다면 이 위대한 사상은 상상할 길이 없다. 이렇게 말하면 맹자의 사상 관계는 매우 명료하다. 성인과 사람은 동류이며, 동류인 자는 반드시 ‘똑같이 그렇게 여김이 있다.’ 성인은 양심과 본심이 있기에 사람들은 모두 양심과 본심을 가지고 있다.
- p.471
맹자가 마음에 부여한 새로운 함의는 성이 선하다는 것을 논한 것이. 양심과 본심은 사람이 본래 가지고 있는 것이라 주장하여 마음이 선하다는 것이다. 여기서 맹자는 아직 문제를 완전히 설명하지 못하였다고 느낀 것 같아 상하로 도움을 청하고 근거를 찾으려 했다. 다만 이 임무는 매우 막중하였다. 당시의 사유 수준에 의하면 도덕적 형상의 근거에 대하여 해석을 진행하기가 매우 어려워서였는데 2천 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옛날 사람들의 사상에는 일종의 관습이 있었다. 분명히 알지 못하는 문제를 위에 맡기는 것으로, 서방에서는 신에게 맡겼고 중국에서는 하늘에 맡겼다. 이에 중국 고대의 천론사상의 전통은 맹자에 수중에서 유용하게 되어 도덕적 형이상의 근거라는 난제의 ‘법보(法寶)’에 해답이 되었다. 맹자는 공공연하게 성선의 궁극적 원인과 도덕적 형이상의 근거는 하늘에 있다고 선포하였다.
- p.482
마음에 부끄럽지 않은 것은 맹자의 매우 중요한 사상으로, 『맹자』의 처음과 끝을 관통하고 있다. 이를테면 호연지기를 기르는 것은 곧 마음에 부끄러움을 떠나지 않는 것이다. “그 기가 의와 도에 배합되니, 이것이 없으면 굶주리게 된다(其爲氣也, 配義與道; 無是, ?也)”, “행하고서 마음에 부족하게 여기는 것이 있으면 (浩然之氣가) 굶주리게 된다.(行有不慊於心, 則?也)”(3.2) 조기는 『주』에서 말하였다. “겸(慊)은 쾌(快)함이다. 스스로 성찰하여 행하는 인의가 갖추어지지 않아 호연지기에 해를 끼치게 되면 심복(心腹)이 굶주리게 된다.” 호연지기는 가장 위대하고 가장 굳세고 강하여 의와 도와 함께 배합되면 천지사방에 충만하게 되어 없는 곳이 없게 된다. 마음에 부끄러운 일을 한 가지만 저질러도 이런 기는 약해져서 힘을 잃게 된다. 이곳의 ‘행하고서 마음에 부족하게 여기는 것이 있음’이 곧 마음에 부끄러움이 있는 것이다. 호연지기를 기르려면 반드시 먼저 마음에 부끄러움이 없게 해야 한다. 어린아이가 우물에 빠지려 하는 예가 문제를 가장 잘 설명해줄 수 있다. 어린아이가 우물에 빠지려고 하는 것을 보면 두려움과 측은한 마음이 절로 생겨 구하러 간다. 구하는 것은 달리 추구함이 있어서가 아니라 다만 자기의 양심과 본심에 떳떳하게 하기 위해서이다. 구하러 가지 않는다면 마음속에 반드시 부끄러움이 있다.
- p.500
맹자가 보기에 양심과 본심은 도덕의 본체이다. 그것은 일에 부딪히면 스스로 주체할 수 없이 당장 드러난다. 동시에 거대한 역량을 내뿜어 사람들이 반드시 그 요구에 따라 해나가야 하며 선을 향하고 악을 버리고 떨쳐 나아가 그만두지 못하도록 다그친다. 사람들이 양심과 본심의 요구에 따라 하면 희열과 만족을 체험하게 되어 이욕 방면에서 손실을 입는다 하더라도 조금도 개의치 않는다. 우물에 빠지려는 어린아이를 응급 구조하려면 자연히 체력적 소모가 있을 것이고 심지어 생명이 위험해질 때도 있겠지만 이런 것들은 결코 본심과 본체의 명령을 가로막을 수 없다. 단사와 두갱을 불러서 주고 발로 차서 주어 받지 않으면 자연히 위장이 고통받고 심지어 굶어 죽을 위험도 있겠지만 이것이 결코 본심과 본체의 명령을 거스르는 이유가 될 수는 없다. 이 때문에 이욕의 혜택을 입지 못해서 본심과 본체는 반드시 용을 발하며, 체와 용은 서로 이어져 있어 한 층 떼어놓지 못한다. 성선론의 이러한 특징은 유학 발전 사상 절기공부(切己功夫: 자기에게 절실한 공부), 지행합일로도 불리는데 심학의 큰 장점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왕왕 이 장점에 대하여 깊은 이해가 결핍되어 있으며 그 이론적 근거가 무엇인지 확실히 알지 못한다. 심지어 지행합일에 대한 견해조차 많은 오해를 낳았다. ‘윤리심경’으로 해석하면 이 문제는 비교적 명료하고 분명할 것이다. 알면 반드시 행하고 체와 용에는 틈이 없다는 것은 신비롭게 들리지만 실제로는 다만 ‘윤리심경’에 선을 좋아하고 악을 미워하며 옳은 것을 가까이하고 그른 것을 멀리하는 내용 때문에 사람은 반드시 이대로 행해야 한다고 채찍질하여 다그치는 것일 따름이다.
- p.528
『맹자』는 기세가 광대무변하지만 정감도 넘쳐흐르기 때문에 고갈되지 않아 꾸준히 읽으면 감화력이 있다. 이런 감화력은 주로 세상을 근심하고 백성을 근심하는 작자의 강렬한 감정에서 온다. 「양혜왕 상」에서는 당시 민중의 고난을 드러내어 말하였다. “푸줏간에는 살진 고기가 있고, 마구간에는 살찐 말이 있으면서, 백성들은 굶주린 기색이 있고, 들에 굶어 죽은 시체가 있다면, 이것은 짐승을 몰아서 사람을 잡아먹게 한 것입니다. 짐승끼리 서로 잡아먹는 것도 사람들은 미워하는데, 백성의 부모가 되어 정사를 행하되 짐승을 몰아 사람을 먹게 함을 면치 못한다면 백성의 부모 됨이 어디에 있습니까?(有肥肉, 廐有肥馬, 民有飢色, 野有餓莩, 此率獸而食人也. 獸相食, 且人惡之; 爲民父母, 行政, 不免於率獸而食人, 惡在其爲民父母也?”(1.4) 세상을 근심하고 백성을 근심하는 작자의 뚜렷한 마음이 없었다면 사람을 감동하게 하고 폐부를 찌르는 이런 말을 절대로 써내지 못했으리라는 것을 상상할 수 있다. 당연히 이런 감화력은 맹자 내심의 풍부한 정감 세계에서 왔다. 맹자가 세상에서 알아주는 이를 만나지 못하여 제나라를 떠나는 노상에서의 심정은 매우 무거웠다. 제자가 맹자에게 이전에는 “군자는 하늘을 원망하지 않으며, 사람을 허물하지 않는다.(君子不怨天, 不尤人)”라고 이야기한 적이 있는데 지금은 왜 또 “기쁘지 않은 기색(不豫色)”이 있느냐고 물었을 때 맹자는 감탄하여 말했다. “그때는 그때고, 지금은 지금이다.(彼一時, 此一時也)”(4.13) 겨우 이 일곱 자에 혈육의 정이 있고 정감이 넘치는 맹자가 지상에서 용약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읽으면 친절하여 믿게 한다.
- p.611
진정으로 맹자의 의명 사상을 중시한 것은 송대의 사상가로부터 시작되었다. 장재(張載)가 처음으로 그 단서를 열었는데 의명합일(義命合一)의 명제를 제기하여 말하였다. “의(義)와 명(命)이 하나로 합쳐지는 것은 이(理)에 있다.” 의는 마땅히 그러한 이치(當然之理)이고 명은 절로 그러한 이치(自然之理)로 의와 명이 하나로 합쳐지는 것은 곧 마땅히 그러한 이치와 절로 그러한 이치가 하나로 합쳐지는 것이다. 이뿐 아니라 장재는 또한 의를 특별히 강조하였다. 그는 말하였다. “살아야 할 때 살고 죽어야 할 때 죽으며, 오늘의 만 종(萬鍾)을 내일은 버릴 수가 있고, 오늘의 부귀가 내일 굶주림으로 된다 해도 또한 근심하지 않으니 오직 의만이 있다.” 이는 생과 사, 화와 복에 상관없이 운명이 어떠하든 막론하고 말하고 행하는 것이 의와 서로 부합하는 것을 구할 뿐임을 말한다. 이는 분명히 맹자의 의명에 관한 사상을 계승하고 아울러 새로이 발전시킨 것이다.
- p.647
맹자는 공자의 인학(仁學) 노선을 따라 발전하여 성선론을 창도하였다. 공자의 중대한 공헌은 인학을 창립하였고 예를 실행하는 근거를 인의 위에 놓았다는 데 있다. 인이 내재하기는 하지만 공자는 결코 명확하게 인이 무엇인가는 설명하지 않았다. 다만 그때그때 지적하여 구체적으로 해설하였다. 맹자는 그 특유의 자질과 남보다 빼어난 오성(悟性)으로 공자의 인학을 “열 자로 열어 더 숨기지 않았으며”(陸九淵의 말), 창조적으로 인을 마음에 놓았으며 인은 곧 사람의 마음이며 곧 사람의 양심과 본심이라고 지적하였다. 사람마다 모두 양심과 본심을 가지고 있어서 모두 성실하고 선한 성을 가지고 있다. 이 때문에 유학의 발전사에서 성선론은 처음으로 양심과 본심이 자기가 도덕을 성취하는 근거임을 명확히 하여 심학의 선하를 환하게 열어놓았다.
- p.668
이정과 장재가 맹자를 높인 언론은 매우 많다. “공자가 돌아가심에 공자의 도를 전한 자는 증자일 따름이다. 증자가 자사에게 전하여주고, 자사가 맹자에게 전하여주었으며, 맹자가 죽자 전하여지지 않았다. 맹자에 이르러 성인의 도는 더욱 높아졌다.” “맹자가 성문에 공을 세운 것은 말할 수 없다. 중니는 단지 인만 말하였는데 맹자는 입만 열면 인의를 말하였다. 중니는 단지 지(志)만을 말하였는데 맹자는 수많은 양기(養氣)를 말하였으니, 단지 두 글자의 차이일 뿐이지만 그 공은 매우 크다.” 장재 또한 말하였다. “옛 학자는 곧 천리를 세웠는데 공맹 이후로 그 마음이 전하여지지 않아 순자와 양웅이 모두 알 수 없었다.” “성인을 알려면 『논어』 『맹자』만큼 중요한 것이 없다. 『논어』 『맹자』 두 책은 배우는 자에게 큰 족적으로 함영해야 한다.” 『정몽(正蒙)』의 「중정(中正)」, 「작자(作者)」, 「삼십(三十)」, 「유덕(有德)」, 「유사(有司)」 등 여러 편 가운데에는 『논어』 『맹자』에 대해 대량으로 인증하고 발휘한 것이 있으며 따로 『맹자해(孟子解)』 14권을 지었다.
- p.694
명 홍무(洪武) 3년(1370)에 주원장(朱元璋)은 『맹자』를 읽고 “군주가 신하 보기를 수족과 같이하면 신하가 군주 보기를 복심과 같이 여기고, 군주가 신하 보기를 개와 말처럼 하면 신하가 군주 보기를 국인[路人]과 같이 여기고, 군주가 신하 보기를 토개와 같이하면 신하가 군주 보기를 원수와 같이 한다.(君之視臣如手足, 則臣視君如腹心; 君之視臣如犬馬, 則臣視君如國人; 君之視臣子如土芥, 則臣視君如寇讐)” 등의 구절에 대하여 크게 불만을 가져 이는 신하가 할 말이 아니라고 생각하여 배향을 철회하라는 명을 내리고 아울러 조칙을 내려 이에 대해 간언하는 자가 있으면 큰 불경의 죄로 논하겠다고 말하였다. 형부상서 전당(錢唐)이 죽음을 무릅쓰고 직언하여 소장을 올려 간언하고 말하였다. “신은 맹자 가를 위해 죽는다면 죽어서 큰 영광일 것입니다.” 이듬해에 대신들의 완강한 반대로 주원장은 부득이하여 말을 바꾸었다. “맹자는 이단을 변별하고 사설을 물리쳐 공자의 도를 발명하였으므로 옛날처럼 배향한다.”
- p.703

구매(배송/수령완료) 후 리뷰를 작성하시면 적립금 300원을 드려요!
등록된 리뷰가 없습니다
첫번째 리뷰어가 되어주세요
































































| 반품/교환방법 |
|
|---|---|
| 반품/교환 가능기간 |
|
| 반품/교환비용 |
|
| 반품/교환 불가 사유 |
|
| 상품 품절 |
|
| 소비자 피해보상 환불지연에 따른 배상 |
|

- [이벤트 당첨자 발표] 26년 9월 <리뷰왕을 찾아라> 이벤트 당첨자 안내
- [이벤트 당첨자 발표] 무라카미 하루키 『가호』 기대평 이벤트 당첨자 발표
- [이벤트 당첨자 발표] 재레드 다이아몬드 『리더는 언제 차이를 만들어내는가』 리뷰 이벤트 당첨자 발표
- [이벤트 당첨자 발표] 10월 모두의 서가 이벤트 당첨자 안내
- [공지사항] 추석 연휴 전국 지점 영업시간 안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