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 차]
책머리에
제1부 메이지 유신으로 가는 길
1장 페리 함대의 출현과 막부의 대응
2장 천황의 등장과 반막부 세력의 대두
3장 막부 타도와 메이지 유신의 성공
제2부 19세기 한일 근대사의 명암
4장 서양의 충격과 한일의 대응
5장 1880년대 조선의 반청투쟁
6장 일본과 한국 개화파
제3부 20세기 일본사와 한국
7장 근대 일본의 제국주의와 민주주의
8장 일본 군부의 대두와 군국주의
9장 대일본제국 패망과 전후 한일관계
[본 문]
18세기 일본은 전체 인구도 많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도시 인구 비율이 세계 최고 수준이었다는 점이다. 일본의 3대 도시로 일컬어지는 에도(100만 명), 오사카(38만 명), 교토(34만 명) 외에도 각 번의 수도인 조카마치도 인구가 수만 명에 이르렀다. 18세기 중엽 베이징의 인구는 100만 명, 런던 65만 명, 파리 55만명을 헤아렸고, 서울은 30만 명을 밑돌았다. 에도는 세계 최대 도시 중 하나였다. (23쪽, 1장 페리 함대의 출현과 막부의 대응)
페리가 떠난 후 아베 마사히로는 개혁정책을 밀어붙였다. 먼저 나가사키에 해군학교를 열었다. 그다운 혜안이다. 바다에서 물고기나 건져 올려서는 나라의 명줄까지 내놓아야 하는 세상이 됐다는 걸 간파했기 때문이다. 네덜란드 교관을 모셔와 조선술, 항해술 등을 가르치게 했다. 막부나 번을 막론하고 우수한 가신을 입학시켜 미래의 해군 인재를 기르기 시작했다. 실력 있는 외국인을 최고 대우로 고용해 일본인 제자를 양성하게 하는 것은, 이후 근대 일본이 채택한 발전 전략의 출발점이다. 이로부터 불과 50년 후인 1905년에 일본 해군은 쓰시마 해전에서 러시아의 발트 함대를 궤멸시켰다(러일전쟁). (28쪽, 1장 페리 함대의 출현과 막부의 대응)
막부와 사무라이들이 천황과 신하들을 ‘긴 소매 입은, 유약하고 세상물정 모르는 사람들’이라고 업신여기며 자만에 들떠 있는 사이, 교토는 느리지만 착실하게 변하고 있었다. 막부가 통상 조약 칙허를 얻기 위해 홋타 마사요시를 파견했던 1858년에 고메이 천황은 재위 12년째를 맞는 27세의 청년 군주였다. 이상과 같은 분위기 속에서 성장하고 학습해온 이 젊은 천황과 신하들이 개항이라는 국가의 대위기를 맞아 독자적인 정치 행보를 보인 것은 오히려 자연스러운 일이다. 눈에 잘 보이진 않았지만 오래 누적된 변화가 수면 위로 드러나는 순간, 세상이 경악하는 일은 역사에서 드물지 않다. (47쪽, 2장 천황의 등장과 반막부 세력의 대두)
요시다 쇼인이 메이지 유신의 과격한 이상주의, 광신적 민족주의, 잠재적 침략주의를 대표한다면, 사카모토 료마는 명민한 현실주의, 국제 정세에 대한 통찰, 점진적 평화주의를 상징한다. 아베 신조는 요시다 쇼인을,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은 사카모토 료마를 좋아한다. 민족주의와 제국주의 시대에는 요시다가 빛났겠지만, 미래의 일본은 사카모토에게서 길을 찾아야 할 것이다. (108쪽, 3장 막부 타도와 메이지 유신의 성공)
사카모토 료마는 에도에서 가쓰 가이슈를 만났다. 막부 측 인사 중 당대 최고의 양학자이면서 일본 해군의 기초를 놓은 인물이다. 가쓰를 만난 사카모토는 해군과 무역의 중요성에 눈을 떴다. 바다의 주인이 세계를 제패할 것임을 직감했다. 그는 가쓰의 뜻을 이어받아 나가사키에 가메야마사추를 설립했다. 무역상사 같은 조직이다. 신분을 불문한 인재영입, 무역, 외국어 학습, 그리고 에조(현 홋카이도) 개척을 목표로 했다. 이게 나중에 도사번의 정식 지원을 받아 근대 해군이자 무역상사인 가이엔타이로 발전하게 된다. (110쪽, 3장 막부 타도와 메이지 유신의 성공)
1864년 대원군이 집권한 때는 일본에서는 막부와 반막부파(사쓰마번, 조슈번)가 부국강병과 근대화 경쟁에 뛰어들기 시작한 해였다. 누가 이기든 일본의 갈 길은 정해져 있었다. 부국강병과 서양화로. 그리고 4년 후 메이지 유신이 발발했다. 대원군은 집권 10년 만인 1873년에 실각했다. 그 스스로 왕이 되지 못한 한계였다. 배후조종은 언제나 위험하고 한계가 있다. 그를 대신한 고종과 민씨 정권은 힘겹게 노력했지만 대원군 같은 강력한 정치 리더십이 없었다. 그 후로 조선이 망할 때까지 그만한 강력한 지도자는 나오지 않았다. 리더십은커녕 60년에 가까운 긴 시간 동안 조선의 정치 리더십은 철저히 분열했다. (164쪽, 4장 서양의 충격와 한일의 대응)
몽상을 하는 이유는 콤플렉스 때문이었다. 서양과 중국에 대한 소국 콤플렉스, 300년 동안 쇄국으로 열도 안에 갇혀 있던 데서 오는 자폐적 자기인식, 그리고 개항 과정의 굴욕감에서 오는 콤플렉스 등등. 그러나 몽상도 자주 하면 여론이 되고 급기야 진짜 현실로 만들려는 움직임도 생기기 마련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몇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몽상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이 다수 있어줘야 하고, 그런 사람들을 이용해야 할 정치적 이유와 정치세력이 있어야 한다. 메이지 유신 직후부터 비등하기 시작한 정한론은 바로 그런 환경에서 등장한 것이다. (173쪽, 4장 서양의 충격와 한일의 대응)
‘식민지 조선’은 일본제국에게 과연 무엇이었던가. ‘식민지 조선’은 여러모로 특이했다. 먼저 조선은 일본의 이웃 나라였다. 서양 국가들도 세계 각지에 식민지를 갖고 있었지만, 바로 옆 나라를 그렇게 하지는 못했다. (...)게다가 조선은 1000년 이상 독자적인 왕국을 유지해온 나라였다. 당시 일본인들은 조선은 한사군 이래 중국에 종속되어온 나라라고 강변했지만, 자기들끼리는 조선을 가리켜 ‘천 년 왕국’, ‘자존심이 세고 위아래를 모르는 민족’ 운운한 걸 보면 조선이 독자적인 국가였음을 내심 인정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게다가 한국합병 당시 대한제국은 여느 식민지들과는 달리 어엿한 국기(태극기)도 갖고 있었고, 많은 사람이 이를 받아들이고 있었다. 구한말 정치 집회 장면을 보면 갓 쓰고 흰옷 입은 사람들이 대형 태극기 아래 모여 있는데, 이들은 이미 ‘백성’(인민)이라기보다는 ‘국민’이었다. (259쪽, 7장 근대 일본의 제국주의와 민주주의)
어리숙한 줄 알았던 중국인들이 일본의 도발에 단결하기 시작했다. 일본은 흩어진 모래알 같은 중국인들에게 ‘내셔널리즘’을 선물했다. 장제스는 여기에 재빨리 올라탔다. (...) 아무리 쥐어짜내도 일본은 중국을 완전히 장악할 수 없었다. 땅은 너무 넓고 사람은 너무 많았다. 식민지 조선에서 밥그릇까지 공출하고 조선인을 병사로 동원해도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였다. 진흙탕에 빠져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신세가 되었다. 어느 나라나 혼미할 때가 있고 약해 보일 때가 있다. 금방 제압할 수 있을 것 같은 유혹을 느끼게 된다. (...) 게다가 당시 일본의 상대는 중국이었다. 1941년 일본군은 미국과 동남아시아에까지 전선을 확대했지만 중국의 반격이 두려워 중국 주둔군을 빼내지 못했다. 대일본제국은 중국이라는 거대한 늪에 빠져 익사한 것이다. (292쪽, 8장 일본 군부의 대두와 군국주의)
그런데 왜 한국인은 계속 사과를 요구하는 걸까. 우선은 위에 소개한 일본의 사과 사실 자체를 기억하는 한국 시민이 많지 않을 것이다. 그보다 더 큰 문제는 일본인들의 ‘망언’이다. “창씨개명은 조선인이 원해서 한 것”, “식민지시대에 일본은 좋은 일도 많이 했다”, “전쟁터의 위안부는 필요한 제도였다” 등 수시로 터져 나오는 ‘망언’들은 위의 ‘사과 릴레이’를 순식간에 의미 없는 것으로 만들어버렸다. 게다가 ‘망언’을 한 사람들이 일반 시민이 아니라 현직 장관, 유력 정치인이었기에 더욱 분노를 유발했다. 한국인이 일본의 사과를 ‘진정성이 없다’며 의심하는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341쪽, 9장 대일본제국 패망과 전후 한일관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