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 차]
머리말
첫 번째 회상
두 번째 회상
세 번째 회상
네 번째 회상
다섯 번째 회상
여섯 번째 회상
일곱 번째 회상
마지막 회상
작품 해설
막스 뮐러 연보
[본 문]
■너, 가엾은 인간의 마음이여! 그렇게 해서 이미 봄철에 너의 꽃잎들은 너무도 빨리 꺾이고, 네 날개에서는 깃들이 뜯겨나가는구나! (21쪽)
■낯선 세계의 차가운 돌풍이 어린이의 작은 가슴에 처음으로 불어닥칠 때, 만약 어머니와 아버지의 눈에서 내비치는, 마치 신의 빛, 신의 사랑의 반영처럼 내비치는 따스한 사랑의 햇빛이 없다면, 어찌 어린이의 가슴이 그 두려움을 감당할 수 있을까? 그러고 나서 어린이의 내부에서 눈뜨는 동경, 이것이야말로 가장 순수하고 심오한 사랑이다. 그것은 온 세계를 포괄하는 사랑이다. 그 사랑은 인간의 열린 눈빛이 반사될 때 타오르며, 인간의 목소리가 들리는 곳에서 환호한다. 그것은 태곳적부터 있어온 도저히 헤아릴 수 없는 사랑이요, 어떤 추를 사용해도 측량해낼 수 없는 깊은 샘물, 아무리 퍼내도 고갈되지 않는 분수다. (22쪽)
■사랑을 아는 이는, 사랑에는 척도가 없는 것, 크다거나 작다거나 하는 비교가 있을 수 없다는 것, 사랑하는 사람은 오로지 온 마음, 온 영혼, 온 힘과 온 정성을 다해야만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고 있다. (22쪽)
■영혼의 날개는 깃을 잃어가고 꽃잎들은 거의 뜯겨나가고 시들어버린다. 그리고 고갈될 수 없는 사랑의 샘에는 단지 몇 방울 물밖에 남아 있지 않다. 이 단 몇 방울의 물에 매달려 우리는 혀를 축이고 갈증으로 타 죽는 것을 겨우 면하는 것이다. (23쪽)
■어느 옛 현자는 이런 말을 했다.
“나는 난파당한 한 조각배의 파편들이 바다 위를 떠다니는 것을 본 적이 있다. 그 파편 중에는 서로 부딪쳐 잠시 엉겨 붙어 있는 것들마저 극히 드물다. 곧 폭풍이 몰아쳐 그것들을 각기 반대 방향으로 몰아간다. 그리하여 두 파편은 이 지상에서는 다시는 못 만날 것이다. 인간의 경우 역시 이와 같은 것이다. 하지만 엄청난 난파를 본 사람은 지금껏 아무도 없지 않은가.” (24~25쪽)
■“사람들은 어릴 적부터 새장 안에서 사는 데 길이 들어 있지요. 그래서 자유로운 대기 속으로 풀려나도 감히 날개를 펼 엄두를 못 내고, 날아오르기만 하면 사방에 부딪칠세라 두려워하고 있어요.” (44쪽)
■그때부터 아름다운 삶이 열렸다. 매일 저녁 나는 그녀를 방문했고, 우리는 곧 서로가 진정한 옛 친구임을, 서로 ‘두우’라고 부를 수밖에 없는 사이임을 절감했다. 우리는 서로 지금껏 늘 함께 어울려 살아왔던 것 같은 느낌이었다. 어쨌든 그녀가 켜는 감정의 현치고 이미 나의 영혼 속에서 울리지 않은 음이 없었고, 내가 입 밖에 낸 생각치고 그녀가 다정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나도 그렇게 생각했어요’라고 응해오지 않은 생각은 없었다. (49쪽)
■“인간은 살아가면서 언젠가는 자신의 존재의 무상함을 인식해야만 합니다. 자기 자신만으로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 자기의 존재, 출생, 영생은 불가사의한 초지상적 영역에 뿌리를 두고 있음을 깨달아야만 해요. 이것이 곧 신에게 귀의하는 길입니다. 이 길은 비록 지상에서는 끝내 그 목표에 이르지 못하지만, 인간의 마음속에는 영원히 꺼지지 않는 신에게로의 향수를 남겨주지요.” (59쪽)
■운명이 아무런 뜻도 없이 우리 둘을 만나게 한 것일까? 내가 그녀의 위안이 되고, 그녀가 나의 안식이 되어선 안 된단 말인가? 인생이란 유희가 아니지 않은가. 두 인간의 영혼이 만나는 것이, 소용돌이치는 열풍이 모았다가 흩어버리는 저 사막 모래알의 만남과 같을 수는 없지 않은가. 행운이 마주치게 한 우리의 영혼들을 꼭 붙잡아야 한다. 왜냐하면 그 영혼들은 우리를 위해 점지된 것이니까. 그것을 위해 살고 싸우며 죽어갈 용기만 갖고 있다면, 어떤 힘도 우리에게서 그 혼을 빼앗아가지 못하리라. 그 나무 그늘 밑에서 그토록 행복한 꿈을 꾸다가 첫 번째 뇌성에 놀라 나무를 떠나가듯, 이제 내가 이렇게 그녀의 사랑을 떠나버린다면, 필시 그녀는 나를 경멸하리라. (76~77쪽)
■인간의 마음에 생겨나는 최초의 공포는 신에게서 버림받는 일일 것이다. 그러나 생활은 그 공포를 몰아낸다. 바로 신의 형상에 따라 창조된 인간들이 외로움에 빠진 우리를 위로해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의 위로와 사랑마저 떠나가면, 우리는 실로 신과 인간 모두에게서 버림받는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절감하게 된다. (84쪽)
■너의 오빠라도 좋고 / 너의 아버지라도 좋다. / 아니 너를 위해 세상 무엇이라도 되고 싶다. (101쪽/117쪽)
■“이처럼 내 마음이 깨끗해진 순간에 있는 그대로 내 온 마음의 사랑을 고백하게 해주십시오. 우리가 초지상적인 것을 이처럼 가까이 절감하고 있는 지금, 우리를 다시는 갈라놓지 않도록 영혼의 약속을 맺읍시다. 사랑이 어떤 것이든 간에, 마리아,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그리고 느끼고 있습니다. 마리아 당신은 나의 것이라는 것을. 왜냐하면 나는 당신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112~113쪽)
■오, 육체 없이도 정신이 존재할 수 있다는 듯이 정신을 들먹이지 마라! 완전한 현존, 완전한 의식, 완전한 기쁨이란 오로지 정신과 육체가 하나인 곳에만 있을 수 있다. 육화된 정신, 영화된 육체로만. 육체 없는 정신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건 한낱 유령일 뿐. 정신 없는 육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건 한낱 시체일 뿐. 들판에 핀 꽃이라고 정신을 갖지 않을까? 그 꽃은 그 생명과 현존을 부여하고 지켜주시는 신의 뜻, 곧 창조주의 생각으로부터 내다보고 있지 않은가? 그것이 곧 꽃의 정신이다. 다만, 그 정신이 인간의 경우에는 언어로 나타나는 반면, 꽃의 경우에는 침묵할 뿐. 실재하는 삶이란 어디에서든 육체적, 정신적 삶이요, 실재하는 향유란 어디에서든 육체적, 정신적 향유다. 또한 실재하는 만남이란 어디에서든 육체적, 정신적 만남이다. (122~123쪽)
■“왜 당신은 나를 사랑하나요?”
그녀는 결정의 순간을 마냥 미루려는 듯 나직한 소리로 물었다.
“왜라니요? 마리아! 어린애한테 왜 태어났느냐고 물어보십시오. 꽃한테 왜 피었느냐고, 태양에게 왜 비추느냐고 물어보십시오. 나는 당신을 사랑하도록 되어 있기 때문에 사랑하는 겁니다. 이 대답이 미흡하다면, 당신 옆에 놓인, 당신이 그토록 애독하는 책으로 대답을 대신하지요.” (131쪽)
■“마리아, 당신은 내가 알고 있는 최선의 피조물입니다. 그래서 나는 당신에게 기울고, 그래서 당신을 사랑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 사랑하는 겁니다. 당신 안에 살아 있는 말을 그대로 하십시오. 당신은 나의 것이라고. 당신의 가장 깊은 감정을 부인하지 마십시오. 신은 당신에게 고통스러운 삶을 주셨지만 그 고통을 당신과 나누도록 나를 당신에게 보내신 겁니다. 당신의 고통은 곧 나의 고통이어야 합니다. 한 척의 배가 무거운 돛들을 감당하듯이, 우리는 그 고통을 같이 짊어져야 합니다. 그러면 고통이라는 돛이 인생의 폭풍을 헤치고 마침내 안전한 항구로 안내해줄 겁니다.” (133쪽)
■그녀의 마음속은 차츰 잔잔해졌다. 소리 없는 저녁노을처럼 그녀 뺨에 홍조가 떠올랐다. 그리고 그녀는 눈을 반짝 떴다. 태양이 신비스러운 빛을 발하며 다시 한번 뜬 것이었다.
“나는 당신 것이에요”라고 그녀는 말했다.
“그것이 신의 뜻입니다. 이대로의 나를 받아주세요. 살아 있는 한, 나는 당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더 아름다운 삶 안에서 다시 하나가 되게 하시고 당신의 사랑을 보답해주시기를 바랍니다.” (133쪽)
■내가 짊어졌던 것처럼 자네도 삶을 짊어지게. 헛된 슬픔에 사로잡혀 하루라도 잃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되네. 자네가 아는 인간들을 도와주게나. 그들을 사랑하면서, 한때 이 세상에서 마리아 같은 성품의 인간을 만나 알고 지냈으며 사랑했던 사실을 신에게 감사하게. 또 그녀를 잃은 것까지도.” (135~136쪽)
■그 후 며칠이 지나고 몇 주일, 몇 달, 그리고 몇 년이 흘렀다. 그러는 새에 내게 고향은 타향이 되었고, 타향이 고향이 되었다. 그러나 그녀에 대한 나의 사랑은 아직도 남아 있다. 눈물 한 방울이 대양에 합류하듯이 그녀에 대한 사랑은 이제 살아 있는 인류의 대양 속에 합류하며, 몇백만, 어린 시절부터 내가 사랑했던 몇백만 ‘타인들’의 마음에 스며들어 그들을 포옹하고 있다. (13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