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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SBN | ISBN-13 : 9788997533596 |
|---|---|
| 쪽수 | 336쪽 |
| 크기 | 규격 외(152mm X 225mm, 신국판) |
| 제품구성 | 단행본 |
- 인문/역사 > 교양사상
인문학으로 읽는 시네마 오디세이아
영화 탄생 150년, 영화와 인문사회과학의 만남
장뤽 고다르와 왕가위에서 크리스토퍼 놀란과 봉준호까지
영화는 사실적인 스토리와 서사에 그치지 않고 인간의 근본 문제를 미학적으로 표현하는 예술장르이기도 하다. 책과 신문이 이성적으로 설득한다면, 영화와 동영상 드라마는 우리의 감정에 호소하여 동정과 공감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에 영화가 만드는 메시지, 이미지, 서사는 매우 영향력이 크다. 곧 영화는 새로운 기술 진보와 대규모 자본투자를 무기로 순식간에 엄청난 관객을 사로잡을 수 있으며, 현대 사회의 문화 양식 가운데 가장 영향력이 커지고 있다.
오늘날 영화는 대중의 일상적 욕망을 실현하는 수단이 되었다. 그리고 영화는 개인의 문화와 정체성을 형성하고 제작자와 관객과의 상호작용은 시대와 사회의 문화적 취향을 만든다. 곧 영화가 재현하는 문화와 이데올로기는 수많은 관객을 통해 사회를 재구성한다. 이처럼 영화를 만들고 보는 행위는 개인적 행위이자 사회적 행위이다. 그러므로 영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사회적, 정치적 맥락과 권력관계, 이데올로기 차원의 분석이 필요하고 이를 알아야만 전체적인 통찰을 얻을 수가 있다.
영화는 이미지로 표현된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영화를 보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것이다. 그러나 이 보이지 않는 것을 보려면 감독의 정체성, 배우의 성격, 연기력 등을 분석하는 기술적인 비평에 머물러서는 안되며 영화의 숲을 보아야 한다. 곧 철학, 사회학, 미학 등 관련 인문학을 동원한 사회적 비평이 되어야 한다.
이 책이야말로 영화를 풍부하게 조망하여 인문학의 숲으로 안내해 주는 색다른 영화 평론서가 될 것이다.
[목 차]
차례
감사의 글
서문_ 영화와 인문학의 만남
1부_ 우리 시대의 질문
1. 탐욕과 자본주의: 왜 우리는 돈을 사랑하는가?
베르너 헤어조크, <아귀레> (1972)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 <롤라> (1981)
올리버 스톤, <월스트리트> (1987)
2. 계급과 불평등: 왜 사장님의 가족은 너무 착한가?
왜 을의 전쟁이 벌어지는가?
봉준호, <기생충> (2019)
마이클 무어, <화씨 11/9: 트럼프의 시대> (2018)
황동혁, <오징어 게임> (2021)
3. 폭력과 죽음 충동: 왜 인류는 서로 죽여야 하는가?
스탠리 큐브릭, <닥터 스트레인지러브> (1964)
2부_ 무엇을 알 수 있는가?
4. 날고기를 먹는 사람들: 원시와 문명을 구분할 수 있는가?
로버트 플래허티, <북극의 나눅> (1922)
5. 사회의 심층 논리와 구조주의: 눈에 보이는 것을 믿지 마라
존 포드, <수색자> (1979)
마이클 치미노, <디어 헌터> (1978)
박찬욱, <동조자> (2024)
6. 신화와 페미니즘: 숨겨진 구조를 찾아라
게리 마셜, <프리티 우먼> (1990)
리들리 스콧, <에이리언> (1979)
김도영, <82년생 김지영> (2019)
7. 가상현실과 포스트모더니즘:
꿈속의 세계와 현실의 세계를 어떻게 구분하겠나?
릴리 워쇼스키, 라나 워쇼스키, <매트릭스> (1999)
쿠엔틴 타란티노, <킬빌> (2003)
3부_ 권력은 어떻게 인간을 통제하는가?
8. 지식과 권력: 인간은 어떻게 자발적 노예가 되었나?
밀로시 포만,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 (1975)
벨라 타르, <사탄 탱고> (1994)
9. 억압된 본능: 내 삶의 빛, 내 은밀한 몸의 불
스탠리 큐브릭, <롤리타> (1962)
헤닝 칼슨, <내 슬픈 창녀들의 추억> (2011)
10. 범죄와 낙인: 선악의 기준은 어디에 있는가?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 <대부> (1972)
허명행, <범죄도시 4> (2024)
4부_ 인류의 미래는 어디로 가는가?
11. 우주 개발과 SF 영화: 인류는 화성으로 이주해야 하나?
조르주 멜리에스, <달나라 여행> (1902)
조지 루카스, <스타워즈> (1977)
제임스 카메론, <아바타> (2009)
12. 코로나 이후 사회: 전염병 위기와 각자도생
스티븐 소더버그, <컨테이젼> (2011)
13. 지구가 끓고 있다: 모두가 경고했다. 그러나 누구도 듣지 않았다
피셔 스티븐스, <비포 더 플러드> (2016)
딘 대블린, <지오스톰> (2017)
14. 고독과 자유: 누가 솔로의 시대를 두려워하는가?
왕가위, <화양연화> (2000)
홍성은, <혼자 사는 사람들> (2021)
5부_ 왜 나는 자유롭지 못한가?
15. 억압과 통제: 책이 사라진 세상, 알고리즘이 통제하는 세상
프랑수와 트뤼포, <화씨 451> (1966)
제프 올로우스키, <소셜 딜레마> (2020)
16. 권위와 복종: 인간은 왜 권력에 쉽게 복종하는가?
에롤 모리스, <포그 오브 워> (2003)
에롤 모리스, 〈S.O.P〉 (2008)
6부_ 어떻게 살 것인가?
17. 저항과 비판: 혁명가여, 카메라를 들어라
장뤽 고다르, <네 멋대로 해라> (1960)
장뤽 고다르, <경멸> (1963)
18.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 포기하지 말자. 세상을 바꾸자
봉준호, <설국 열차> (2013)
엄태화, <콘크리트 유토피아> (2023)
조지 밀러, <매드 맥스: 퓨리오사> (2024)
에필로그_ 영화의 가능성
주
영화와 인문학의 만남
1992년 9월 가을이었다. 프랑스 파리의 생미셀 거리는 아름다웠다. 세느강 좌안에는 부드러운 바람이 불었다. 지옥 같은 감옥에서 벗어나 자유의 몸이 된 후 한해가 지났다.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고 정처 없이 배회하기 좋은 날씨이었다. 나는 파리 바스티유 광장, 콩코드광장을 지나 도심 거리 곳곳에 가득한 마라, 당통 등 혁명가들의 동상을 (놀랍게도 어디에도 로베스피에르 동상은 없다) 보면서, 역사적 격동의 순간을 눈앞에 그려보았다.
바로 몇 해 전 동유럽에서 혁명이 일어났지만, 서유럽에는 낡은 동상들이 말없이 서 있었다. 누가 그런 변화를 예측할 수 있었나? 늦은 오후 해가 저물면서 나는 수도사가 된 기분으로 생미셀 지역의 작은 광장을 지나가다가 한 조각상을 발견했다. 소르본느대학 바로 앞이었다. 900년이 넘는 대학 앞에 앉아 있는 인물은 오귀스트 콩트Auguste Comte이었다. 사회학의 창시자였던 그는 묵묵히 사색에 빠져 있었다. 19세기 말 혁명이 휩쓸고 지나간 프랑스에서 그는 세계를 다른 눈으로 바라보았다.
오귀스트 콩트는 에콜 폴리테크닉에서 과학을 공부했지만, 프랑스혁명 이후 사회의 격변에 관심이 많았다. 왜 사회에 혼란과 무질서의 격랑이 일어날까? 어떻게 사회를 질서와 진보로 이끌 수 있을까? 콩트는 신의 섭리나 헤겔이 말한 자유와 같은 형이상학에 대신 오로지 사실의 발견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고자 했다. 그는 귀족 출신 사회주의자였던 생시몽의 영향을 받아 산업화가 사회에 미친 영향에 관한 연구에 열중했고, 사회의 비교를 통해 법칙을 발견하려고 했다.
과학자답게 실험과 관찰을 중시하는 콩트는 실증주의(positivism)로 인간 사회를 보는 새로운 눈을 제시했다. 그 후 실증주의를 지지하든 반대하든 그의 생각은 인간을 보는 눈을 바꾸어놓았다. 세상은 새로운 시대로 달려가고 있었다.
영화의 시대, 사회학의 시대
1895년 프랑스의 뤼미에르Lumière 형제가 만든 50초 길이 영화 ‘열차의 도착’이 세상에 등장했다. 파리의 오페라하우스 근처 카페에 모여든 사람들은 기차가 자신을 덮칠 듯 달려와 깜짝 놀랐다. 그렇게 영화가 탄생했다.
같은 해 프랑스 보르도대학에서 세계 최초로 사회학을 가르치던 에밀 뒤르켐Émile Durkheim이 『사회학적 방법의 규칙』을 출간했다. 콩트의 실증주의를 따라 사회를 과학적 방법으로 연구하는 학문이 새롭게 제시되었다. 자본주의의 비밀을 과학적으로 분석한 『자본론』을 쓴 칼 마르크스Karl Marx가 세상을 떠난 지 12년이 지난 해이다.
프랑스에서 처음 등장한 영화는 역사적으로 과학기술의 획기적 발전과 함께 등장했다. 19세기 말은 세계 역사상 최대 격변기였다. 증기기관, 철도, 기차, 자동차 등 새로운 기술 혁신으로 자본주의가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록펠러, 카네기, 멜론 등 역사상 최고 부자들이 잇달아 탄생했다. 당대 ‘석유왕’으로 불리던 스탠더드 오일의 존 데이비드슨 록펠러의 재산은 오늘날 아마존의 제프 베이조스와 테슬라의 일론 머스크를 능가한다.
자본주의 산업화와 함께 농촌의 인구가 대거 도시 공장으로 이동하고 노동자계급이 급증했다. 기계를 통한 대량생산으로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생활을 누릴 수 있었다. 수천 년 넘게 거의 변화가 없던 국내총생산은 1900년부터 수직선처럼 급상승했다. 교육 수준이 높아지고 다양한 중산층 일자리가 생겨나면서 노동의 분업이 고도로 발전했다. 마치 ‘빅뱅’ 이후 우주가 무한히 팽창하고 엔트로피가 증가하는 것처럼 세상은 더욱 복잡해졌다.
자본주의가 발전할수록 계급 갈등이 격화되고 혁명의 소용돌이가 그치지 않았다. 부자와 가난한 사람의 격차가 커지고, 증오와 분노가 하늘에 치솟았다. 유럽 제국주의가 팽창하면서 아메리카에 이어 아시아와 아프리카에 이르기까지 식민지 침략과 살육이 세계 각지에서 발생했다. 이러한 변화 속에 사람들은 혼란스러워했고 우울증과 자살률도 급증했다. 도대체 왜 살아야 하는지, 삶의 의미가 무엇인지, 사회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알 수 없다고 많은 사람이 생각했다.
1896년 세계 최초로 사회학 교수가 되었던 에밀 뒤르켐은 사회학은 ‘사회적 사실(fact social)’을 연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오귀스트 콩트의 제자였던 그는 실증주의로 사회를 분석하려는 야심을 가졌다. 그는 자살과 같은 사회적 사건을 개인 내면의 심리가 아니라 독립적 실체로 간주했다. 당대에 프랑스에서 유행하던 심리학을 쓰레기통에 처넣어버렸다. 사회학자로서 자부심이 강했던 뒤르켐은 사회가 개인들을 모두 합한 것보다 더 크다고 믿었다. 영국에서 유행하던 공리주의적 경제학이 이해할 수 없는 사회의 구조적 관계가 인간의 생각과 행동에 영향을 준다고 주장했다.
뒤르켐에 따르면, 인간의 행동은 무작위적인 것이 아니라 ‘구조’에 의해 결정된다. 그래서 뒤르켐은 ‘구조적 사회학’의 창시자라고 불린다. 그는 사회분업, 자살, 종교를 연구하면서 인간의 사회적 행동이 눈에 보이지 않는 구조적 요인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고 주장했다.
오늘날 사회학에서 ‘구조’란 사람과 사물들의 현상과 달리 심층에 드러나지 않은 상호 관계를 표현한다. 예를 들어 의자와 책상은 나무라는 동일한 재질을 사용했지만 다른 특성을 갖는다. 의자와 책상을 구성하는 나무들 구조적 관계가 다르기 때문이다.
인간의 사회적 관계도 구조에 의해 이루어진다. 만약 직원이 없다면 사장도 없다. 국민이 없다면 대통령도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구조적 관점은 사람들보다는 ‘사람들의 관계’에 관심을 가진다. 실제로 모든 인간관계는 ‘상호성’에 의해 형성된다.
뒤르켐에 따르면, 사회는 단지 상상의 존재가 아니라 우리 인식 외부에 실재하는 실체이다. 그는 모든 사회적 사실이 인과관계를 갖는다고 보았다. 대표적으로 종교와 직업은 모두 사회적 결과이다.
오늘날 대부분 사회학자는 에밀 뒤르켐의 자식들이다. 그가 1897년에 출간한 『자살론』은 자살의 심리적, 경제적 요인보다 사회적 요인을 강조했고, 지금도 여전히 강력한 설득력을 지닌다. 뒤르켐에 따르면 전통 농경사회가 무너지면서 종교와 사회적 규범이 약화되고 개인이 고립될수록 자살할 가능성이 커진다.
뒤르켐은 19세기 말 프랑스의 자살 급증이 사회 규범의 붕괴로 인한 ‘아노미(anomie)’ 때문에 발생했다고 보았다. 영국 철학자이자 경제학자 애덤 스미스Adam Smith가 『국부론』에서 설명한 대로 노동의 분업이 효율성을 증가시켰지만, 전통 사회에서 유지되던 종교 등 공통의 가치가 무너지는 결과를 만들었다고 본 것이다. 아일랜드 시인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William Butler Yeats가 ‘행복한 목동의 노래’(1889)에서 이렇게 노래했다.
“세상의 업적을 숭배하지 말고,
진리를 맹렬히 추구하지도 말라.
다만 애써서 그대가 얻은 것은
새로운 꿈일 뿐, 자기 마음속을 떠나서는
진리는 없나니…….”
종교가 사라진 사회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누구도 삶의 의미를 말하지 않는다면 왜 살아야 하는가? 개인의 욕망과 이익을 위해 서로 죽이며 살아야 하는가? 도대체 인간이란 무엇인가? 뒤르켐은 제1차 세계대전에서 아들을 잃었다. 그의 소르본대학 제자들도 젊은 나이에 참호에서 희생되었다. 뒤르켐은 고뇌하고 생각했다. 그는 새로운 도덕을 구상했고 젊은이들을 가르치기 위해 생애를 바쳤다.
뒤르켐은 상아탑의 고고한 학자가 아니었다. 30대의 나이에 『사회학적 방법의 규칙』을 쓰며 사회학적 야망을 추구했고, 엄청난 분량의 책을 읽고 서평을 쓰며 학계를 주도했다. 드레퓌스 사건이 터지자 작가 에밀 졸라Émile Zola 등과 함께 정부를 비판하는 목소리를 내기도 했다. 어느 정당에도 가입하지 않았지만, 당대의 진보적 정치인들과 오랜 교분을 유지했다. 마르크스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았지만, 노동자의 연대(solidarité)를 주장하고 사회보험을 도입하는 사회주의 운동에 동참했다. 뒤르켐이 보수적 학자라는 오해와는 달리, 그는 현실 참여를 중시하는 공공 지식인이었다. 그는 개인화 대신 사회적 연대의 중요성을 강조했으며, 현대 프랑스 복지국가의 발전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1902년 뒤르켐이 소르본대학의 교수가 되어 파리에 정착했다. 그는 영화가 본격적으로 태동하던 무렵인 1919년에 세상을 떠났다. 뒤르켐은 더 살았다면 수많은 대중이 영화관에 찾아가는 ‘사회적 사실’에 주목했을 것이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인간의 행동과 관객의 반응 역시 구조적 해석이 가능하다. 뒤르켐은 영화에서 아노미의 증가에 맞서 ‘사회 연대감’을 강화하는 가능성을 발견했을지 모른다. 교육에 관심이 컸던 그는 영화를 교육의 도구로 생각했을 수 있다.
오늘날 유럽에서 교회에 가는 사람은 전체 인구의 약 10퍼센트에 그치지만, 영화관을 찾는 인구는 압도적으로 많다. 매달 또는 매주 영화관에 가는 사람도 많다. 집에서도 영화를 보거나 텔레비전과 인터넷에서도 수많은 영화를 볼 수 있다. 영화는 단지 오락물에 그치지 않고 우리가 세상을 보고 이해하는 방법을 제공한다. 영화를 통해 낭만적 사랑을 느끼고, 불의에 대해 분노하고, 세상을 바꾸는 행동을 곰곰이 생각할 수 있다.
에밀 뒤르켐이 현시대를 자세하게 관찰했다면 영화가 다양한 장르로 분화되는데 주목하고, 폭력과 섹스가 난무하는 영화를 못마땅하게 생각했을 수 있다. 사회학자로서 뒤르켐은 개인주의보다 ‘사회 연대성’을 강화하는 시민 교육에 열정을 가졌기 때문이다. 과연 오늘날 영화가 사회를 하나로 만들 수 있을까? 또는 영화가 사회의 분열을 촉진할까?
기술과 문화의 역설
칼 마르크스는 1842년 독일 쾰른의 <라이니쉐 차이퉁>(Rheinische Zeitung)의 편집인이 되어 권력 앞에 진실을 말하는 용기를 보여주었다. “연극 비평 같은 글에 공산주의와 사회주의 원칙 같은 것을 슬그머니 집어넣는 것은 부적절할 뿐만 아니라 부도덕하기도 하다. 그러니 공산주의에 대해 논하기를 원한다면, 적절한 방법으로 완벽하게 해주길 바란다.” 19세기 마르크스는 ‘연극 비평’ 대신 정치, 계급 갈등, 역사적 분석에 관해 열정적으로 펜을 휘둘렀지만, 우리의 시대에 온다면 영화 비평에 관한 글을 열심히 썼을 듯하다.
오늘날 교회와 사찰에 가지 않는 사람은 많겠지만, 영화를 보러 가지 않는 사람은 거의 없다. 영화관을 찾아가거나 인터넷을 검색하며 자신이 좋아하는 영화를 발견하려고 애쓴다. 지하철 퇴근길이나 비행기로 여행을 떠나면서도 영화를 본다. 영화를 통해 세상을 보고, 타인을 이해하고, 삶의 의미를 생각한다. 이제 영화는 우리의 삶에 없어서는 안 될 필수품이 되었다.
시, 소설, 회화, 발레, 오페라, 음악 등 모든 예술 장르 가운데 영화가 가장 인기가 많을 것이다. 영화는 예술 가운데 여러 가지 차원에서 연극과 가장 비슷하다. 그러나 연극 무대의 시간과 공간은 나란히 병존하지만, 영화처럼 결합되어 있지 않다. 영화에서 시간과 공간의 경계는 유동적이다. 현대인은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시간과 공간의 동시성을 셀 수 없이 체험한다. 멀리 떨어진 장소에서 동일한 것을 체험할 수 있다는 사실은 세계적 관점을 느끼게 한다. 이런 점에서 영화의 시대는 세계화의 시대와 운명을 같이 한다.
20세기 영화의 세계화에서 미국 할리우드의 역할은 결정적이다. 영화는 프랑스에서 탄생했지만, 할리우드에서 완성되었다. 그래서 영화는 미국적이다. 영화는 미국적 사고방식과 라이프스타일을 대표한다.
1차 세계대전으로 유럽 영화는 파괴되었다. 미국의 거대한 자본과 첨단 기술은 할리우드로 몰려들었다. 이민자의 다양한 문화는 미국에 모였고, 이를 기반으로 만들어진 할리우드영화는 전 세계로 확산되었다. 민족적 특성이 강한 유럽 영화와 달리 할리우드는 다양한 민족들에게 쉽게 접근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과 아시아가 거의 파괴되면서 할리우드영화는 더욱 글로벌 문화 패권을 장악했다. 19세기 문화 수도가 파리였다면 20세기 후반 할리우드가 그 자리를 차지했다.
할리우드영화는 엄청난 규모의 관객을 불러 모았다. 지금도 그렇다. 책을 읽는 독자와 연극의 청중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난 규모의 불특정 대중이 영화를 본다. 영화를 만드는 데는 엄청난 제작비가 들지만, 입장료는 비교적 싼 편이다. 오페라와 발레, 오케스트라 음악회에 비하면 보통 사람들도 큰 부담 없이 관람할 수 있다. 영화는 수많은 사람을 유혹한다. 매표구는 투표소처럼 대중에 의해 운명이 결정된다.
21세기에 들어서서 인터넷으로 영화를 보는 사람이 늘어났지만, 역시 영화는 거대한 스크린이 있는 영화관에서 보아야 제맛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다. 어디에서 보든지 영화의 쓸모는 매우 다양하다. 보는 이에 따라 영화는 고급 예술이기도 하고, 대중 오락이기도 하고, 정치 선전이기도 하다. 텔레비전을 ‘바보상자’라고 비판하는 지식인들도 영화에 대해서는 비교적 관대하다. 영화는 예술적 성취로 인정받기도 한다. 그러나 영화를 단지 예술 형식으로 본다면 영화의 본질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영화 발전의 주역은 단연 과학이다. 시, 소설, 음악, 무용 등 예술 형식 가운데 영화만이 전적으로 기술에 의존한다. 동시에 영화는 돈에 의해 만들어졌다. 영화는 그 어떤 예술보다 막대한 자본이 필요하다. 영화는 기술의 발전과 자본의 논리에 의해 제조된 것이다. 시네마토그래프(Cinématographe)의 상업화는 자본을 끌어들였고 영화사와 금융자본의 통제가 이루어졌다. 영화는 과학주의와 자본주의가 이룩한 ‘현대성’의 특징을 보여준다. 이런 영화의 특성은 과거의 예술과 근본적으로 다른 목표를 가졌다.
영화는 사진에 크게 의존하기 때문에 객관적 현실을 표현하는 듯한 느낌을 줄 수 있다. 하지만 영화가 역사적 진실로서의 객관을 재현하는 것은 아니다. 사진 기술은 사회의 표층을 충실히 전달하는 능력이 있지만, 표층은 심층과 다를 수 있고 심층을 감출 수도 있다. 영화는 우리가 살고 있는 자본주의 사회구조를 은폐한다. 상품 물신주의, 인간의 소외, 착취 과정을 보여주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이런 복잡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파편적 이미지에 예술적 감각과 함께 메시지와 이야기의 구조를 결합시켜야 한다.
20세기 초 칼 마르크스의 철학에 심취했던 독일 철학자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은 현대 도시의 길거리 모습에 주목했다. 다양한 가게의 간판, 벽보, 플래카드, 광고판, 상점의 진열장은 현상학적 시선과 사유의 이미지를 제공한다. 영화의 놀라운 힘은 다른 어떤 매체와 예술보다 일상생활을 감각적으로 가장 비슷하게 재현한다는 점이다. 영화는 단지 환상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색다른 차원으로 재현한다는 점에서 사람들이 세상을 보는 방법을 새롭게 발전시킬 수 있다.
영화의 내용과 형식이 인간의 삶을 가장 생동감 있게 표현한다는 점에서 영화는 다른 어떤 예술보다 사람들에게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영화 쇼트의 분할과 몽타주라는 형식적 발전은 현대적인 대도시 생활의 경험과 매우 유사하다. 이런 점에서 영화는 매우 도시적 현상이다. 하지만 영화가 현실과 동일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현실보다 더 현실적이다.
영화는 대량생산 사회의 결과이다. 영화는 연극과 달리 수많은 사람이 볼 수 있다. 연극은 배우들이 한정된 장소에서 실시간으로 공연하지만, 영화는 다르다. 벤야민의 말대로, 영화는 무한정으로 ‘기술 복제’가 가능하기에 언제 어디서나 볼 수 있다. 영화관뿐 아니라 도서관과 비행기 좌석에서도 영화에 빠져들 수 있다.
영화가 인기를 얻어 블록버스터가 되면 전 세계를 휩쓸며 수천만 명의 사람들을 동원할 수도 있다. 대중의 인기에 민감한 정치인들도 영화관에 얼굴을 내밀고, 대중의 인기와 담쌓고 사는 학자들도 대중의 반응을 분석하기 위해 영화관을 찾는다. 1950년대 프랑스의 유명한 실존주의 철학자 장폴 사르트르Jean-Paul Sartre가 미국 할리우드에서 만든 서부극을 즐겨보았다는 사실은 유명하다.
기술의 진보는 관객의 규모뿐 아니라 영화의 내용에도 영향을 미친다. 벤야민은 영화를 보는 경험이 특별한 성격을 갖는다고 지적했다. 그는 기술 복제 시대의 예술적 생산물은 대중의 통일적 반응을 유도한다고 주장했다. 회화를 감상하는 행위는 개인적 성격을 가지지만, 영화를 관람하는 행위는 집합적 경험이다.
20세기 미학에서 가장 중요한 공헌을 한 벤야민은 영화를 보는 “개인적 반응들이 집합적 관객의 반응에 의해 미리 결정된다고 보았다.” 결과적으로 사람들은 “멍한 상태”에 빠지고, 비판적이고 지적인 능력은 사라진다고 보았다. 이런 생각은 1940년대 미국 로스앤젤레스 할리우드를 방문했던 독일 프랑크푸르트대학 사회학 교수 테오도어 아도르노Theodor Adorno의 대중문화에 대한 비판에도 영향을 미쳤다. 마르크스주의자를 신봉했던 아도르노는 신문, 방송, 영화 등 문화산업에 의해 비판적 의식을 잃어버린 미국인들이 자본주의를 수동적으로 지지한다고 보았다.
이런 생각과 달리 1960년대 이후 영국 버밍햄대학의 사회학자 스튜어트 홀Stuart Hall은 대중문화가 반드시 모든 사람에게 동일한 메시지로 수용되는 것은 아니라고 반박했다. 예를 들어 텔레비전의 시청자는 매우 복잡한 과정을 거쳐 대중문화를 해석한다. 이런 관점은 대중문화의 반응이 미리 결정되었다는 생각에 반대했다. 대중문화를 공격하는 ‘잘못된 일반화’를 수정해야 한다고 보았다.
스튜어트 홀은 연극과 오페라와 같은 고급 예술이 영화와 텔레비전과 같은 대중문화보다 우월하다는 생각을 거부했다. 학교 교실에서 루트비히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의 음악보다 콜 포터Cole Porter의 음악이 열등하다고 말해도 소용이 없다. 홀에 따르면, 포터와 베토벤이 같은 음악을 만든 것은 아니지만, 포터는 최소한 베토벤의 음악에 필적한 음악을 만들려고 한 것은 아니다.
구스타프 말러Gustav Mahler의 음악과 블랙핑크의 음악도 비교할 수 없다. 결국 ‘좋은’ 고급문화에서 ‘나쁜’ 대중문화의 차이보다 대중문화 자체에서 좋음과 나쁨을 구별하는 것이 중요하다. 영화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면 좋은 영화와 나쁜 영화를 어떻게 구분할까?
영화의 ‘숲 이론’
20세기 후반 최고의 문학 비평가인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는 ‘저자의 죽음’을 강조했다. 바르트는 작품 대신 텍스트(text)라고 불렀다. 텍스트를 저자의 의도나 인생 경험에 한정하려는 시도는 텍스트의 무한한 가능성을 제한하고 문학을 열린 방식으로 탐구하는 것을 방해한다고 보았다. 영화도 마찬가지이다. 어떤 영화감독도 영화를 해석하는 권위를 독점할 수 없다. 그렇다고 우리는 해석 자체를 거부할 필요는 없다. 영화가 있는 한 해석은 존재하기 때문이다.
영화에 대한 다양한 해석이 존재한다. 따라서 해석에 대한 이해가 우리의 과제가 되어야 한다. 해석은 언제나 개인과 집단의 이해관계에 관련이 있으며, 이를 실현하기 위한 행동을 요구한다. 이런 점에서 나는 해석은 미학적 차원을 넘어 사회적 실천으로 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영화는 필연적으로 권력관계의 산물이며 이데올로기의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인간의 체계적 신념은 이데올로기로서 개인뿐 아니라 사회 전체에 영향을 미친다. 영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사회적 현실의 인과관계를 설명하는 사회학 이론의 도움이 필요하다.
과연 우리가 영화를 본다는 행위는 무엇일까? 우리는 ‘영화를 본다’고 말하지만, ‘영화를 생각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하지만 본다는 것은 생각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론은 고대 그리스어 테오리아(theōria)에서 비롯된 영어 씨어리(theory)의 번역어인데, 원래 ‘보다’ 또는 ‘바라본다’는 뜻을 가진 동시에 ‘숙고하다’ 또는 ‘사색한다’라는 의미를 가졌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관조적 삶을 인간 행동의 가장 높은 차원이고 최고의 행복이라고 말했다.
이론이 매력적인 이유는 이론이 역사와 문화의 맥락에서 영화의 의미를 설명하기 때문이다. 만약 이론이 없다면 태양이 지구를 돌고 있다는 믿음 속에 갇힐 수 있다. 우리가 중력의 힘은 잘 이해하지 못하지만, 지구가 태양을 돌고 있다는 믿음을 가지게 된 것은 이론의 힘이다. 이론이 없다면 우리는 가까운 것만 보는 근시안으로 살아가야 한다. 생각하는 힘이 없다면 세상의 온갖 쓰레기와 같은 정보에 휩쓸려갈 것이다.
이 책은 나무와 함께 숲을 강조한다. 이런 점에서 ‘숲 이론’이라 부를 수 있다. 영화 한 편에 대한 정보 제공을 넘어 ‘사회 속 영화’를 살펴보고자 한다. 영화를 사회적 맥락에서 보는 것이 영화의 미학을 망치는 거라고 단정할 필요는 없다. 영화를 넓은 조망에서 본다면 우리는 영화라는 나무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우주의 원리를 알 수 있다면 인간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것과 같다.
이론은 개별적이고 모호한 사실에 개념을 부여하며 명확하게 만든다. 이론을 통해 생각하는 힘은 모든 것을 애매하게 만들고 왜곡하는 주관주의와 비합리주의에 맞서 싸우는 첫 출발이다. 우리는 영화 스크린이 보여주는 환상을 즐기는 한편 이면에 숨겨진 비밀을 폭로해야 한다. 만약 이론이 없다면 우리는 영화의 관객이 아니라 포로가 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영화를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사회학, 정치경제학, 미디어 연구, 문화 연구의 관점이 필요하다. 더 깊게 영화를 알기 위해서 마르크스주의, 프로이트의 정신분석, 상호작용주의, 구조주의 이론, 자크 라캉Jacques Lacan, 진화 심리학뿐 아니라 막스 베버Max Weber, 게오르크 짐멜Georg Simmel, 프리드리히 니체Friedrich Nietzsche, 미셸 푸코Michel Foucault, 위르겐 하버마스Jürgen Habermas, 피에르 부르디외Pierre Bourdieu 등 철학자와 사회학자의 이론적 논쟁도 이해해야 한다.
물론 이 책은 지나치게 추상적인 이데올로기와 거대한 담론은 최소 수준으로 줄이려 했지만, 영화를 이해하기 위해 도움이 될 사회학, 철학, 심리학, 미학, 영화 이론의 핵심 내용도 간략하게 소개했다. 동시에 사회학의 관점에서 영화를 이해하기 위해서 영화 생산자(투자자, 감독, 제작자)의 특성, 미학적 스타일 (서사 구조, 내용, 담론, 스토리텔링, 편집), 수용자(관객)의 특성과 반응을 고려했다. 부디 이 책이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흔히 볼 수 있는 영화 평론과는 색다른 관점을 느껴보기를 바란다. 하지만 어쩌면 독자들은 내가 영화에 관한 연구나 강의보다 사회학자로서 영화에 대한 개인적인 사랑을 고백하는 편지처럼 이 책을 읽을지도 모르겠다. 또는 영화를 보는 주관적 감상을 통해 자신을 드러내는 고백록으로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영화를 볼 때 사회학은 어떤 쓸모가 있을까? 영화를 만드는 것과 영화를 보는 것은 개인적 행위이자 사회적 행위이다. 인간의 인식 행위 자체가 사회적, 정치적 제약을 받기 때문이다.이런 점에서 영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사회학 또는 사회이론의 시각과 분석 틀이 유용할 수 있다. 이 책은 사회학의 핵심 주제인 구조와 행위자, 갈등과 합의, 지배와 저항, 권력과 이데올로기를 다루는 내용도 포함한다. 핵무기, 냉전, 베트남 전쟁, 우주 전쟁의 역사와 함께 불평등, 범죄, 고독, 도시, 사랑과 성욕, 전염병, 기후 위기, 공론장의 붕괴 등 다양한 사회문제도 다룬다. 영화는 이미지로 표현된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영화를 보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것이다. 영화에서 보이는 것만 보면 재미가 없다. 안 보이는 것을 보는 재미가 더 쏠쏠하다.
사회학자는 단순하게 사회를 관찰하는데 그치는 대신 다양한 사회 현상과 사회적 사건에 직접 관여하고 사회를 바꾸기 위해 노력한다. 사회학자들은 언제나 당연하게 생각하는 사회 현상에 다른 관점으로 문제를 제기한다. 우리 사회를 망가뜨리는 것이 무엇인지 이해하기 위해 지적 노력을 기울인다. 오늘날 세계가 고민하는 제국주의, 인종주의, 국가주의, 성차별주의, 환경 파괴의 문제를 그대로 외면하지 않아야 한다. 이런 점에서 사회학은 학자의 전유물이 아니라 보통 사람을 위한 지혜의 무기가 되어야 한다.
사회학은 기본적으로 비판이론이 되어야 하며 새로운 대안을 모색해야 한다. 우리가 화학물질로 범벅된 음식과 미학적으로 형편없는 건축물을 비판하듯이 좋은 영화와 나쁜 영화로 구별할 수 있다. 모든 영화 관람이 만족스러운 문화 행위는 아니다. 블록버스터가 좋은 영화라는 등식은 불가능하다.
영화를 보는 방식들
1970년대 미국 문화 비평가 크리스토퍼 래쉬는 미국인이 ‘병리적 나르시시즘’에 빠졌다고 주장했다. 이는 일상적 나르시시즘과 쾌락적 이기주의와 다르다. 이는 나르시시즘 성격 장애라는 의학적 진단에 가깝다. 로체스터대학 역사학 교수였던 래쉬는 19세기 미국인의 삶에서 중심적 기능을 수행했던 가족이 쇠퇴하면서 극좌파 정치 운동과 영적 컬트(spiritual cult) 운동과 같은 성격 장애의 증상이 나타난다고 보았다.
21세기 오늘날 ‘셀카’, 소셜미디어의 사진, 자기계발 서적의 확산은 새로운 형태의 문화적 나르시시즘의 증상으로 볼 수 있다. 많은 사람이 인스타그램에 자신의 사진을 쉬지 않고 올리고, 더 많은 사람이 사진을 바라본다. 우리는 사진을 통해서 자신의 정체성을 만들고, 스스로 확인하고, 타인의 인정을 갈망한다. 구글로 검색하면 ‘우리’보다 ‘나’를 사용하는 용어가 더욱 늘어났다. 자존감, 자신감, 자아 탄력성은 심리학 용어가 아니라 일상 용어로 이용된다. 오늘날 혼자 밥 먹는 사람과 혼자 여행하는 사람뿐 아니라 혼자 영화 보는 사람도 늘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영화는 다른 사람의 이야기로 우리의 상상력을 사로잡는다. 영화를 보는 가장 강력한 동기는 다른 사람의 삶에 관한 관심이다. 만약 우리가 다른 사람의 삶에 관심이 없다면 더는 영화를 보지 않을 것이다. 이는 유튜브의 인플루언서와 리얼리티쇼로 대체될 수 없다. 우리는 잘 만들어진 이야기에 마음이 끌리고 멋진 이야기 솜씨에 마음이 홀딱 빠진다. 인간은 이야기를 통해 사유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영화는 단순한 정보 또는 사실을 보여주는 그 이상을 추구한다. 영화는 세계가 존재하는 이유와 방식을 보여준다. 영화는 문학, 회화, 음악, 무용처럼 미적 감각과 형식을 추구한다. 영화는 예술과 연결되고 과거와 현재를 아우르는 종합적 사고를 제공해야 한다. 영화 평론은 야구 경기 중계처럼 디테일은 묘사하지만, 영화 자체가 무엇인지, 영화의 규칙은 무엇인지, 어떻게 영화가 사회적 의미를 만드는지 자세한 설명을 제공하지 않는다.
영화의 이해를 위해서는 영화의 기술적 차원뿐 아니라 영화의 철학적, 심리학적, 미학적 관점에 대한 지식이 필요하다. 영화를 보는 정치적, 경제적, 사회학적 관점도 중요하다. 영화의 내용과 형식만 분석하기보다 감독이 세상을 보는 관점, 관객이 열광하는 이유, 영화가 사회의 변화를 어떻게 재현하고 상징적으로 표현하는가에 대한 질문도 중요하다. 영화가 사회에서 만들어지기 때문에 사회구조와 다양한 사회집단들의 관계가 영화 속에서 드러나 표현된다. 동시에 영화가 재현하는 문화와 이데올로기는 수많은 관객을 통해 사회를 재구성한다.
영국 미술 평론가이자 소설가인 존 버저John Berger가 제안한 ‘보는 방식들’(ways of seeing)의 관점은 중요한 통찰력을 제공한다. 예술을 단순히 형식적인 입장에서 양식상 변화, 작가와 유파(流派) 사이의 영화 관계로 축소하거나, 예술 또는 미학적 영역이 다른 실제적 영역과 상관없는 특수한 영역이라는 미학적 사고에서 벗어나, 더욱 적극적으로 영화의 영역과 다른 삶에 영역의 복잡한 관계를 자세하게 살펴보아야 한다.
프랑스 시인 아르튀르 랭보Arthur Rimbaud는 시인을 ‘견자’(보는 자)라고 말했다. 세상을 평범하지 않은 시각으로 본다는 의미이다. 우리는 영화도 다른 관점에서 볼 수 있다. 우리가 기존의 영화 평론에서 덜 강조하거나 무시했던 계급, 민족, 젠더, 그리고 영화를 만드는 자본과 권력에 영향을 주는 정치경제적 관계와 사회적 맥락을 이해한다면 영화의 배경과 영향을 더 폭넓게 이해할 수 있다.
우리가 ‘인문학적 상상력’을 가지고 영화를 본다면, 영화에 관한 새로운 자극제를 얻게 될 것이고 이미 잘 알려진 영화도 새롭게 볼 수 있을 것이다. 유명한 영화가 별 볼 일 없다 느낄 수도 있고, 가치를 알아채지 못한 영화가 엄청난 감동을 줄 수도 있다. 반면 우리가 영화를 시간을 죽이는 오락으로만 간주한다면 영화 제작자들은 그런 영화만 만들 것이다.
영화적 상상력은 영화적인 환상과 일상생활의 현실을 넘나들며 우리가 세상을 보는 눈을 바꾼다. 미국 영화학자 노먼 덴진Norman Denzin이 말한 대로 현대 사회가 점차 ‘영화적 사회’(cinematic society)가 될수록 환상과 현실의 분리가 모호해지고 사라진다. 그러나 나는 덴진이 우려하는 대로 일상생활이 영화적 환상에 의해 규정되고, 시민사회의 공적 영역이 붕괴할 것이라고 단정하지는 않는다. 영화적 장치가 우리에게 점점 더 큰 영향을 미치지만, 우리가 그 안에서 구속될 것이라고 볼 수는 없다. 영화를 보고 비평하고 토론하는 사람들이 바로 우리 자신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영화를 이해하고 해석할 수 있는 ‘문화적 독해력’을 가져야 한다.
영화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면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사회를 이해해야 우리 자신도 이해할 수 있다. 그래야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다. 이것이 이 책의 주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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