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 차]
Ⅰ. 필명筆名 리포트
풍경 ……… 12
얼음 마사지 ……… 17
통장 ……… 23
동지 팥죽 ……… 28
중용이란 ……… 33
필명 리포트 ……… 38
돌가루가 성가셔 ……… 43
을지로 ……… 48
사라진 텃밭 ……… 53
천둥소리 ……… 58
마지막 비행 ……… 63
Ⅱ. 거미 선생
장티푸스의 고백 ……… 70
거미 선생 ……… 75
어머니의 부엌 ……… 80
욕망이란 이름의 전차 ……… 85
시골 운동회 ……… 90
토끼몰이 ……… 96
울던 아이 ……… 101
가련다 ……… 107
미역국 ……… 113
소소한 행복 ……… 118
찰나를 사랑하라 ……… 123
Ⅲ. 기찻길 소묘
장터 밥상 ……… 130
운학천 억새꽃 ……… 135
그림자가 쉬는 정자 ……… 140
남도에 깃든 멋 ……… 145
마릴린 먼로가 웃고 있네 ……… 150
순백의 설악 ……… 155
기찻길 소묘 ……… 164
찬란한 문화 천 년의 꿈 ……… 169
봄날의 향연 ……… 174
대작代作에 관하여 ……… 187
Ⅳ. 결핍, 그 변종 발생의 찬스
구도의 길에 선 소년 ……… 194
변화, 낯섦에서 친근함으로 ……… 202
화가 박수근을 기억하며 ……… 208
결핍, 그 변종발생의 찬스 ……… 213
붓의 철학자, 이광사 ……… 218
졸拙의 미학을 추구한 추사 ……… 223
단층문화 유감 ……… 228
건축의 아이러니 ……… 233
Ⅴ. 행복하려면
성선설은 유효한가 ……… 240
내 탓이오 ……… 245
댄스 하러 간다 ……… 250
불가마 정담 ……… 255
라떼는 말이야 ……… 260
그 여름 한반도 ……… 265
살아 있잖아 ……… 270
인권이 길더라 ……… 273
병아리 물 한 모금 ……… 278
하기 싫어 ……… 283
나는 무엇으로 사는가 ……… 288
행복하려면 ……… 294
작품평설 | 한상렬 문학평론가
실존적 파토스Patos의 형상화와 인문학적 성찰 ……… 299
[본 문]
P. 14
여름철이 되면 아침이 더 일찍 찾아온다. 실눈을 뜨고 창밖을 보면 어둠 속에 초록색 아고라 가든 건물이 우뚝 서 있다. 내 창 앞 키 큰 나무에 찾아온 첫 생명의 소리가 귓가에 닿는다. 지지구재지구! 작고 귀여운 새는 밝은 음색을 지녔다. 새벽을 물고 온 첫 새가 낭랑하게 노래하면 나의 오늘이 덩달아 희망으로 채워진다. 일어나야지 하면서도 이불을 끌어당겨 다시 베개에 얼굴을 묻는 이 시간이 감미롭다. 따스함을 떨치기 싫어 떼를 쓰다 보면 하늘이 자꾸만 밝아 온다. 야속하게도 태양의 신 아폴론은 혈기 왕성한 청년인지라 사람의 감성엔 아랑곳하지 않고 오늘도 태양의 수레바퀴를 힘차게 허공으로 밀어 올린다. -〈풍경〉 중에서
P. 25
어머니의 삶은 일제 강점기와 6.25 전쟁, 그리고 폐허가 된 나라의 가난을 온몸으로 겪어 낸 시간이었다. 그러니 갈피갈피 질곡의 사연들이 오죽이나 많았으랴! 나라가 가난했던 탓인지, 타고난 분복이 그뿐이었던지 어머니에겐 평생 돈이 따라 주지 않았다. 그런데 그처럼 부족한 삶에서도 어머니는 원망이나 불평 대신 환하게 웃으며 말씀하셨다. “돈이 조금만 더 있었으면 좋겠다.” 그리고는 마치 바라지 못할 것을 바라서 자식의 마음을 아프게 한 건 아닌지 싶어 미안한 표정으로 조용히 웃으셨다. -〈통장〉 중에서
P. 46
흔들림의 진앙이 어디이든, 그것이 바람이든 천둥이든 사람이든 많고 많을 터이다. 어디에서 온 무엇이든 간에 그로 인해 우리는 자주 흔들리며 마음앓이를 하며 살아간다. 그러므로 삶이 곧 흔들림이란 사실을 기정사실로 인정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이쯤 해서 흔들릴 때마다 숨어들 공간 하나를 마련해 두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마음속에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무념의 공간 하나 마련해 놓고 그 안에 들어가 자신만의 균형을 찾아보는 것이다. 이석증을 가라앉히는 동작을 정복이라 하듯이, 마음이 평정을 회복하는 과정도 바로 정복이라 하렷다! 우리는 심신에 균열을 가져오는 감정의 파동과 다시금 균형을 회복하려는 정복의 과정 사이에서 시계추처럼 왕복운동을 지속하며 생을 통과하는 존재들이다. - 〈돌가루가 성가셔〉 중에서
P. 95
몸과 마음을 하나로 묶던 공동체의 축제가 사라진 이 시대에 우리는 너 나 할 것 없이 바쁘고 건조한 하루를 살아간다. 공부에 내몰린 청소년들이든, 변하는 세상에 적응하지 못한 어른들이든 모두가 소외감에 시달린다. 문명의 발전과 개인주의로 우리는 진정한 즐거움을 놓치고 있는 것 아닐까. 입이 귀에 걸리도록 웃고 즐기던 어린 날이 마냥 그립다.
-〈시골 운동회〉 중에서
P. 121
가족 관계라고 어찌 이 시대를 비껴가겠는가. 노년에 느끼는 주된 감정은 외로움이다. 자녀를 낳지 않으려는 시대에 손주 돌보는 조부모들은 그나마 행운이라 하겠지만 그들 역시 시대에 적응하는 게 벅차긴 마찬가지다. 외롭지는 않다 해도 과거와 같이 정겨운 조손 관계를 맺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육아 방법이 달라 고부간 갈등이 생길 때면 자존감에 상처를 입기도 한다. 문명의 발전에 민감하지 못한 노년은 때때로 얼된 아이들의 이것도 모르냐는 핀잔을 받기도 한다. 스마트폰에서 수많은 정보를 접하는 이 시대 젊은이들은 더이상 나이 든 사람의 경륜을 존중하지 않는다. -〈소소한 행복〉 중에서
P. 143
김성원은 36세에 식영정과 서하당을 지었다. 서하당은 ‘붉은 노을이 깃든 집’이란 뜻으로 자신의 호를 따서 붙인 이름이다. 서하당의 지척에 부용당이 정답게 서 있다. ‘그림자가 쉬고’ ‘붉은 저녁노을이 깃들고’ ‘연꽃이 피는 정자’란 이름들은 모두 자연과 일체로 살아가려던 선비들의 소쇄한 정신과 풍류를 담고 있다. -〈그림자가 쉬는 정자〉 중에서
P. 147
광풍각과 제월당 앞으로 흐르는 폭 좁은 계곡물은 멈춘 듯 고요하여 한가하게 떠 있는 뭉게구름을 띄워 놓았다. 발을 담그고서 시간을 거슬러 양산보의 소쇄한 정신과 교감해 본다.
인간의 욕망은 끓는 용암과 같아 그것이 분출될 때마다 파괴적 상황을 동반한다. 양산보가 겪었을 그 시대 생사의 환란이나 21세기 우리가 겪는 험난한 사건들 모두 욕망을 촉매 삼아 일어난 일들이다. 소쇄원은 나그네에게 티끌 세상의 먼지를 털어 내고 마음 비우기를 재촉하는 것만 같다. -〈남도에 깃든 멋〉 중에서
P. 165
기차는 소리 없이 나아가고 가을 햇빛이 레일 위로 눈부시게 부서진다. 차창 너머 들판에는 잉글잉글 빛나는 햇빛이 벼이삭들을 감싸 안고 있다. 초가을인데 벌써 강둑의 버드나무 잎들이 어수선한 머리카락을 늘어뜨렸다. 기차는 보이는 철길 위를 달리고, 나의 상념은 보이지 않은 시간의 레일 위를 지나간다. 스쳐가는 물상에 따라 순간순간 일어난 생각들이 무질서하게 오간다. 의식의 흐름이 과거와 현재를 넘나든다. -〈기찻길 소묘〉 중에서
P. 206
추분을 기점으로 태양은 점차 고도를 낮추고 한낮의 타는 정열도 식어 간다. 동지가 가까워지고 햇발이 길어질 무렵 빛은 더욱 창백한 얼굴로 퇴색해 간다. 마침내 동면의 겨울이 차가운 손을 내밀어 자연이 신산한 통증을 겪어야 할 때면 사람의 감성 또한 깊은 침잠으로의 여정을 시작한다.
나는 이 계절 우리네 들녘에 서 있는 모네를 보고 싶다. 차가운 대기의 출렁임 속에서 그는 또 어떤 색채의 눈부심으로 우리 감성의 문을 두드릴까.
-〈변화, 낯섦에서 친근함으로〉 중에서
P. 217
위대한 걸작이란 극한의 결핍과 고통에서 피어난 한 송이 꽃이런가. 이 위대한 시인이 겪은 질곡의 시간은 명작의 탄생을 위한 운명의 장난이었나. 예술가에게 결핍이란 정녕 변종발생의 찬스를 제공하는 필요악인가.
‘시는 삶이 궁한 이후에 공교해진다’는 말이 참 고깝다.
예술은 잔인한 웃음을 띤 채 어서 달려오라 손짓한다.
-〈결핍, 그 변종 발생의 찬스〉 중에서
P. 251
청장년 시절 이웃으로부터의 고립된 생활을 자청하였다. 조용하고 여유로운 시간을 좋아했기 때문이다. 건강에 자신이 없는 시점에 도달해 보니 이전에 없던 습관이 생겼다. 이상이니 꿈이니 하는 구호가 별 것 아니라는 자각과 함께 평범하게 살아가는 이웃들에 정겨운 시선이 머물게 된다. -〈댄스 하러 간다〉 중에서
P. 293
장자의 무한 상상력이 띄워 올린 붕새는 지금쯤 어디를 날고 있을까. 아직도 크고 거대한 날개로 하늘 가운데 유영하는 중일까. 혹 무료할 때면 우주의 구멍인 웜홀을 가로질러 블랙홀과 화이트홀 사이에서 출몰하며 우주의 놀이에 전념하고 있을까. 아니면 허공을 박차고 날아오를 새로운 붕새를 기다리고 있을까.
나는 이카로스의 열정과 장자의 상상력을 모아 날기를 꿈꾼다.
-〈나는 무엇으로 사는가〉 중에서
P. 298
완전한 행복은 완전한 조건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받아들이는 마음가짐에서 비롯되는 것임이 분명하다.
내 마음에 밝음을 들이려는 의지가 절실히 필요한 것 같다.
문 밖에서 들어오길 고대하는 행복이란 길손을 맞이하기 위하여….
-〈행복하려면〉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