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 차]
머리말
해제
간화선
Ⅰ. 선공부의 시작
일대사인연을 해결하라
큰 서원을 세워라
신념은 깨달음의 근원
금생에 해결하라
사물을 좇으면 중생을 면치 못한다
빠른 효과를 기대하지 마라
특별한 것을 찾지 마라
초보자와 고참이 따로 없다
시절인연이 있다
Ⅱ. 선공부의 이해
잘못된 가르침을 경계하라
증상만인이 되지 마라
단견과 상견에 떨어지지 마라
묵조선은 사선死禪이다
병통을 경계하라
총명함보다 둔근기가 낫다
언어는 방편이다
지식과 이해로 사량하지 마라
시비분별을 없애라
부순다는 생각과 차별 경계를 끊어라
벽관은 끊어져 없어진 게 아니다
역易의 도리는 불법의 도리와 다르다
사구백비를 떠나라
꿈과 꿈 아님은 같다
Ⅲ. 선공부의 실천
고행은 헛됨과 망령의 뿌리
시끄러움에서 힘을 얻어라
긴장해도 안 되고 늘어져도 안 된다
생소함을 익숙하게, 익숙함을 생소하게
스스로 일어서라
화두 참구의 효과
화두는 이렇게 뚫어라
답답한 곳에서 힘을 내라
선禪은 인간적이다
현재에도 집착하지 마라
방하착마저 방하착하라
공에 떨어질까 두려워 마라
방장일은 목숨을 내놓고 하는 중책
Ⅳ. 선공부와 깨달음
깨달음이란?
24시간을 부릴 수 있어야 한다
업을 짓지 않는 것이 대열반이다
적멸하되 적멸에 머물지 않는다
진실한 본바탕에는 어떤 것도 없다
알맞게 쓸 마음은 없다
세간과 출세간은 같다
불법은 둘이 아니다
에필로그
참고문헌
[본 문]
[머리말]
아무쪼록 이 책이 마음속의 갈등과 아집을 덜어내고, 나아가 호호탕탕(浩浩蕩蕩) 문(門) 없는 깨달음의 문으로 들어가는 데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기를 희망한다. 대혜 스님이 “근본적인 가르침만 드러낸다면 법당 앞에 풀이 한 길이나 깊어질 것이다.”라고 하시면서 방편문을 여신 것을 감안할지라도 이 또한 엉뚱한 핑계임을 절감한다.
[책 속으로]
중생이 일체의 고뇌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업장에 의해서 내 견해에 집착하고 분별심을 갖기 때문이다. 나의 모든 것이 공한 것을 알고 세상도 공한 것을 알면 일체고액으로부터 벗어난다. 일평생을 번뇌 속에 살고 있으면서도 인생의 막바지에서조차 이를 벗어나려고 노력하지 않는다. 그래서 평생의 숙제인 깨달음을 구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대혜선사의 일대사인연의 외침이 있다. (중략)
-p. 36, ‘일대사인연을 해결하라’ 중에서
괴로움〔苦〕이 있다면 반드시 그 원인〔集〕이 있고, 원인이 없어지면〔道〕 괴로움도 없어진다〔滅〕. 순관으로 그 원인을 알고 역관으로 그 원인을 해결하는 것이다. 순관과 역관은 마음에서 일어나는 인연의 통찰이다. 최소한 생의 막바지에서 그것을 통찰할 수 있는 공부가 되어야 한다. 이것이 일대사인연을 깨닫는 일이다.
-p. 37, ‘일대사인연을 해결하라’ 중에서
‘마치 돌로 풀을 눌러 놓은 것과 같다’는 말이 자주 등장한다. 돌만 치우면 언제든지 또 풀이 올라온다는 의미다. 그래서 옳은 선사가 되려면 신념이 중요하다. 딱 듣고 ‘이것이다’ 하면 그냥 거기에 직입(直入)해야 한다. 그래서 화두 수행할 때는 책을 보지 말라고 한다. 화두 하나만 붙잡고 전쟁터에서 전진하는 장수(將帥)와 같은 자세를 가져야 한다. 대혜 스님이 한순간 딱 붙들고 가보라고 격려하는 것은 신념과 용기의 믿음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p. 47, ‘신념은 깨달음의 근원’ 중에서
시대적 혼란과 기존 선불교의 한계에 봉착한 대혜선사의 빛나는 새로운 선공부의 제창이 간화선이다. 그러나 화두를 간(看)하여 살펴볼 뿐이다. 의심으로 뭉치거나 풀어보려고 집착하는 노력을 하는 것이 아니다. 화두 또한 방편의 수단일 뿐 그 자체가 깨달음이나 지혜가 아니다. 깨달음은 문자와 언어와 형식으로 설명할 수 없으며〔言語道斷〕, 보여줄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있는 그대로의 마음을 가리키며〔直旨人心〕,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할 뿐〔以心傳心〕이다. 도를 도라고 하지 않으며, 수행을 수행이라고 하지 않는다.
-p. 86, ‘잘못된 가르침을 경계하라’ 중에서
수행을 하면 고요해야 된다고 하는데 고요함에 빠져 수행을 계속 이어가다 보면 오히려 시끄러울 때에 안정을 잃어버린다. 고요함에만 머무는 것은 올바른 수행이 아니다. 오히려 시끄러울 때 시끄러움을 극복할 수 있는 그 방법을 찾아야 한다. 이것이 화두선이다. 고요함에 마음이 맑아지는 것은 풀을 돌로 덮어놓은 것과 같다. 돌을 치우면 풀이 다시 올라온다. 잠시 눌러놓은 것은 올바른 수행법이 아니다.
시끄럽다는 것은 주변이 시끄러운 게 아니고 마음이 혼란스러울 때이다. 마음이 혼란스러울 때 그 위에 화두를 올려놓고 집중을하면 그 시끄러운 원인이 스스로 사라진다. 마음을 화두에 집중하니 나머지는 사라진다. 고요함과 시끄러움이라는 양극단에 대한 분별심을 무너뜨려야 된다. 고요함에 머무는 그 자체가 도가 아니다.
-p. 102, ‘묵조선은 사선死禪이다’ 중에서
유무에 집착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말 없음 또한 집착하면 안 되듯이 말 있음에도 집착하면 안 된다. 우리가 배운 바 지식들은 대부분 언어로 습득된 지식이다. 언어로 습득된 지식을 털어내고 마음에서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말로써 말을 주고받으면 하는 말이 다르고, 듣는 말이 다르기에 한참 어긋난다. 운문(雲門) 스님이 말했다. “말속에 말려들었구나!”
-p. 119, ‘언어는 방편이다’ 중에서
대혜 스님이 첫 번째 깨달음을 얻고서야 말했다. “가슴에 걸려있던 것이 없어지고서야 비로소 꿈꿀 때가 바로 깨어있는 때이며, 깨어있는 때가 바로 꿈꾸는 때라는 것을 알았다.” 꿈꿀 때와 깨어있는 때를 아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가슴에 걸려있는 것을 먼저 덜어내는 일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수행의 진척 중에 일어나는 몸과 마음의 작은 일들에 헛되이 집착하는 것도 병통 중에 하나이다. 가다 보면 산도 만나고 강도 만난다. 산도 강도 다 지나가는 것들이다.
-p. 159, ‘꿈과 꿈 아님은 같다’ 중에서
옛날에 바수반두(婆修般頭)가 늘 한 끼만 먹고 눕지 않은 채 여섯 차례 예불을 하고, 깨끗하고 욕심이 없어서 대중들의 귀의(歸依)를 받았다. 20대 조사 사야다가 그를 제도하고자 그를 따르는 무리에게 질문했다.
“이렇게 두타행(頭陀行)을 실천하고 범행(梵行)을 잘 닦아서 불도를 얻을 수 있겠는가?”
그 무리가 말했다.
“우리 스승님의 정진이 이와 같은데 무슨 까닭에 얻지 못하겠습니까?”
사야다 존자가 말했다.
“너희 스승은 도(道)와는 멀리 떨어져 있다. 설사 고행을 무수한 세월 동안 행하더라도 모두가 헛되고 망령의 뿌리가 될 뿐이다.”
사야다 존자가 말했다.
“나는 도를 찾지 않지만 또한 망상 속에 있지 않다. 나는 부처를 예경하지 않지만 업신여기지도 않는다. 나는 눕지 않고 늘 앉아 있지 않지만 게으르지 않다. 나는 하루에 한 끼 먹는 것은 아니지만 이것저것 마구 먹지 않는다. 나는 족함을 알지 못하지만 탐욕스럽지 않다. 마음에 바라는 바가 없음을 일컬어 도(道)라고 한다.”
바수반두는 이 말을 듣고 무루지(無漏智)를 일으키니, 이른바 “먼저 선정으로써 움직이고 그다음에 지혜로써 뽑아낸다.”고 하는 것이다. 바수반두는 처음에는 장좌불와(長坐不臥)하면 성불할 수 있다고 오해했다가, 사야다 존자의 지적을 받자마자 곧장 돌아갈 곳을 알아차리고 무루지를 내었다. 과연 좋은 말은 채찍의 그림자만 보고도 달리는 것과 같다
-p. 164, ‘고행은 헛됨과 망령의 뿌리’ 중에서
달마에게 제자가 마음이 있는지 없는지를 물었다. 달마는 “없다.”고 대답한다. 제자는 다시 물었다. “이미 마음이 없다면 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 일이 없어야 하는데 어떻게 보고 듣고 느끼고 알 수 있습니까?”
달마가 말한다. “나에게는 마음은 없으나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고 느낄 수 있고 알 수 있다.” 달마의 『무심론』의 한 구절이다. 마음은 없어야 잘 보고 잘 알 수 있다. 마음이 있으면 번뇌의 집착으로 아는 일밖에 없다. 무심(無心)이란 마음에 번뇌가 없는 청정한 본성인 공심(空心)을 말한다. 밝은 거울과 같이 훤하게 모든 것을 비추어 아는 지혜이다. 공심이기에 어디에도 걸림이 없는 공용(空用)의 자유자재함이 있다. 그래서 내려놓는 것도 내려놓아야 대자유의 길이 열린다.
-p. 221, ‘방하착마저 방하착하라’ 중에서
깨달음에는 성인도 없고 현자도 없다. 깨달았다고 해서 천상에 가는 게 아니다. 어차피 또 밥 먹고·자고·쉬고 하는 것이 본분이다. 마조도일은 일 없는 사람을 무사인(無事人)이라고 했고, 평상심으로 일상과 깨달음의 세계가 둘이 아니라고 강조했다.
우리는 깨달음이라고 하면 석가모니처럼 완전한 지혜를 성취한 자를 연상한다. 반면 선사들의 생각은 달랐다. 선사들은 깨달음을 그냥 있는 바 그대로 알고 실천하는 것이라는 자세를 견지했다. 한 인간으로서 자심(自心)과 대상을 알고, 오고 가는 것에 머물지 아니하고, 자유인으로서 흔들림 없이 여실하게 자기의 삶을 살아가면 족하다고 보았다. 사실 부처님도 그런 사람이었다. 경전에 나타나는 부처님의 위대한 사상은 모두가 바라는 바의 상상일 수 있다. 단지 편견, 집착, 속박, 두려움 없이 있다가 가는 것이 도인이고 깨달은 자의 삶이다.
-p. 244, ‘깨달음이란?’ 중에서
대혜 선사는 임종의 글을 남겼다.
“살아도 이렇고 죽어도 이렇다.”
살고 죽는 일이 둘이 아니다.
다만 이렇고 이렇다.
-p. 281, ‘불법은 둘이 아니다’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