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물로 시 쓰기, 껑충 솟아오른 시
- 이산 시인의 시세계
강희근
참으로 오랜만에 목화시배지에서 공무원 생활을 오래 해온 이산 시인의 시를 만난다. 그의 시는 아니나 다를까, 시배지에서 자란 목화가 아침이슬을 함초롬히 머금고 겨레의 민복(民福)으로 서 있다는 느낌을 준다.
그의 시는 아직 산청문인협회를 만들고 함께 산골 문협다운 함초롬한 모습의 시를 쓰자고 다짐하던 그때를 떠올리기에 오히려 행복한 순간을 선물해 주고 있다. 시가 거기 머물고 있는 것이 아니라 껑충 뛰고 솟아서 내 앞에 와 선 것이다. 함초롬한 시편들! 그는 대뜸 내가 좋아하는 북유럽으로 데리고 가서 그쯤의 이미지를 만들고 있다.
따뜻한 말 한 마디에 녹아내리는 영혼이 있다면
죽기 전에 만년설 덮인 산으로 가고 싶었다
애틋하게 쌓아올린 감정으로 이루어진
몇 개의 언덕을 넘어
수평선과 맞닿은 태양이 아래부터 녹기 시작하는
그런 바다로 가고 싶었다
혀끝에서 천천히 사라지는 산맥과 빙하의 조문을 위해
왕관을 눌러 쓴 이마가 극지에 가 닿도록
입김으로 호호 손 녹여가며 절을 올려야 하리
-「아이스크림」에서
시인은 지리산 초입에서 한국의 극지인 천왕봉을 우러러 보다가 저 노르웨이의 만년설을 그리워한다. 말 한 마디에 녹아내리는 영혼으로 죽기 전에 만년설로 가고 싶다는 것이다. 죽어서도 갈 수 있겠지만 그 전에 극적으로 가고 싶다는 것 아닌가. 애틋한 감정의 언덕을 넘어서 수평선과 맞닿는 태양이 녹는 피오르드 끝자락 바다로 치오르고 싶다는 것이다.
그래서 혀끝에서 서서히 사라지는 산맥과 빙하의 조문을 위해 달려가고 싶은 그 소망은 내 머리에 왕관 하나쯤 씌우고 달려가야 하는 경건성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 무슨 소린가. 도저한 대자연에 함께 노니는 인간은 어떤 치장 어떤 상황이라도 최상급이어야 한다는 그 피오르드의 탄력이다. 신비이다.
필자는 시를 읽으며 흥분하고 있다. 저 커다란 빙하가 녹기 전에 그 지하의 굴 뚫기로 자동차로 가서 지하 로터리로 돌고 돌아서 오슬로까지 가고 싶기 때문이다. 이미지를 아이스크림으로 풀어서 어린이가 잘 먹는 과자를 신유빈처럼 입으로 물고 달리고 싶은 것!
시인은 여기서 다시 국내로 시선을 돌린다.
영광 칠산도 앞바다에서는
해가 환하게 떠 있는 하늘에서 눈이 내렸다
어둡지 않은데도 그늘이 번진다는 것은
가슴에 누구를 깊이 슬었다는 거다
눈송이들 스스럼 없이 앙가슴 풀고 내려앉아
갯벌의 차진 몸을 끌어당기자
먼 바다 물들이 강아지처럼 달려와서
꼬리치며 품에 안겨들었다
영광 칠산도 앞바다에서는
삼켜도 미어지는 가슴을 어쩌지 못해
깜깜하게 눈 감고 서 있으면
북극에서 팔 벌리고 달려와 통곡하는
여인의 차디찬 흰 손이 보였다
-「흰 손」 전문
시인은 ‘흰 손’을 여인의 차디찬 흰 손으로 말하고 있다. 그리고 그 흰손은 눈이다. 영광 칠산도 앞바다 눈은 해가 환히 비춰지는 시간에 내리고 있다. 그런 시간에 비가 치는 것은 호랑이가 장가간다고들 했는데 해와 내리는 눈을 병치시키는 이미지는 여인의 어떤 발걸음이 성큼 다가설 듯한 것이 아닐까. 그렇지 다음에서 “가슴에서 누구를 깊이 슬었다”고 고백한다.
눈송이들 스스럼없이 앙가슴 풀고 내려 앉아
갯벌의 차진 몸을 끌어당기자
먼 바다 물들이 강아지처럼 달려와서
꼬리치며 품에 안겨들었다
그래 놓고 “영광 칠산도 앞바다에서는” 하고 한 줄짜리 숨쉬기를 한다. “삼켜도 미어지는 가슴을 어쩌지 못해” 그래서 눈 감고 서 있는데,
느닷없이 북극에서 예비하고 달려와 통곡하는 여인의 차디찬 흰 손!이라 쓴다. 그는 만년설의 녹아내림이 여기서 여인의 흰 손으로 둔갑하여 나타나고 있다. 어쩐지 “영광 칠산도 앞바다에서는”하고 나갈 때 우리는 미리 알아보았어야 했다. 그늘이 번지고 앙가슴을 풀고나 깜깜하게 눈 감고 서 있는 자세가 되리라는 것을, 그래서 그는 만년설까지 다녀왔다는 것을!
시인은 다시 차를 마신다는 것을 바라보기로 하자.
불 지피고
찻물이 끓는 동안
메말랐던 겨울을 묵념한다
마른 찻잎에 물을 부으니
잎맥이 소스라쳐 가랑비 소리를 낸다.
잡아주었던 손의 온기가 스며들어
언 가슴 한 모퉁이 녹아내리던
차디찬 새벽 별빛 희미하게 떠오른다
켜켜이 쌓인 눈을 녹여주고
가슴에 등불 하나 훤히 밝혀 준
그 사람 지금 봄비로 오고 있다.
-「우전차」 전문
우전차를 끓이고 그러자 언 가슴 한 모퉁이 녹아내리는 것을 안다. 그러자 저기서 눈을 녹이고 가슴에 등불 하나 밝혀 주는 그 사람이 봄비로 온다. 눈을 녹이고 봄비는 찻물 끓는 소리를 내며 오는 것이다. 시인은 사물에서 시작하고 사물에서 끝을 낸다. 사람을 말하지만 그 주변에는 사물이거나 녹거나 소리가 온다.
시인의 사물은 사람의 몸속에서도 엑스레이로 찍히고 있다.
전신 엑스레이를 찍었습니다
지금까지 부리며 살아온 몸의 자취들이
샅샅이 들여다보였습니다
빛이 들었다 나간 자리에는
청춘이 빠져나간 빈자리도
바람구멍처럼 드문드문 보였습니다
깊어서 캄캄한 가슴 아래
참았던 눈물들이 고여 앉은 자리
밀물이 들었다 나간 염전 바닥처럼
미어지던 것들이 보듬고 엉기어서
낱낱이 흰 눈빛을 반짝이고 있었습니다
-「소금」 전문
시에서 사물은 마지막 연에서 밀물이 들었다 나간 ‘염전바닥’으로 표현된다. 거기 인생이 미어지고 보듬고 엉기어서 낱낱이 흰 눈빛인 소금으로 형상화되고 있다. 몸의 자취는 녹아내리는 것이기도 하지만 먼저 소금처럼 딱딱한 이미지로 굳어져 있다. 그리고 반짝인다. 훈장처럼 주렁주렁 반짝이는 것이리라. 소금이 되기까지 미어지고 눈물이 고이기도 한 것을 확인한다. 구멍이 숭숭 사이를 지나치는 이미지로 잡히는 것일까? 눈은 희지만 만년설을 이루는 것처럼 눈믈도 고이면 소금의 흰 빛을 드러낸다. 만년과 고이는 것은 동일 이미지다. 시인은 그 동일성을 용케도 찾아내고 있다.
이제 이산 시인은 눈을 사람으로 옮겨 놓고 보려고 한다. 「눈사람」이 그것이다.
당신은 내 안에 있으면서도
감쪽같이 사라지려는 사람
어디론지 끝없이 흘러가면서도
노래를 멈추지 않는 사람
밤길을 뒷걸음질 치며
별빛처럼 점멸하는 사람
빙하보다도 깊고 차가운
슬픔 전부를 닦아내기엔 늦은 저녁
여태껏 단 한 번도 당신을
내 안에서 놓지 않아서
마주 보고 있으면 문득 닮아가는 사람
돌아서서 열을 헤아리라 하고서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사람
심정을 모두 털어놓고 붙잡고 싶은
내 앞에서 굳이 뜨거운 이별을 배우려는 사람
눈물로 세상을 하얗게 못질하는 사람
-「눈사람」 전문
눈사람은 사라지려 하고, 흘러가고, 뒷걸음치고, 그런데도 나는 내 안에서 한 번도 놓지 않는 사람, 그리하여 닮아가는 사람, 이별을 연습하는 사람, 세상을 하얗게 못질하는 사람이다. 눈사람은 인간이 가질 수 있는 모든 요소의 관계망을 이루는 사람의 속성이다. 눈이 녹는다는 말을 직설로 하지 않고 그 결과를 노회하게 해설하고 있다. 말하기는 그러므로 재미를 동반하는 것임을 일깨워 준다. 의미의 변용이다. 이미지보다는 관념의 창출이다. 이미지의 대명사를 관념의 구석진 부분들로 연역해 낸다. 시인은 시인다움을 끊임없이 증명해 보이고 있다.
이번에는 들꽃을 사물로서 존재하는 그 정서를 10행시로 풀어낸다. 10행시는 서정시의 적정 길이이다. 신라 향가를 떠올리게 한다.
오늘도 나는
한 줌의 햇볕으로 살고
한 줄기 바람으로 살며
떨어지는 빗방울의
감촉으로 산다
내 것과 네 것 따로 없이
필요한 만큼 주어지는 나날
나는 따스하고
나는 흔들리며
한 구석 어딘가 젖어 못내 외롭다
-「들꽃」 전문
‘들꽃’에 스스로를 가탁한 시다. 햇볕, 바람, 빗방울에 의지하며 살아가는 존재,,그것들이 없으면 한시도 서 있을 수 없는 외로운 흔들리기다. 세상 한 구석에 자리 잡아 거들떠보는 사람이 없는 사람이 누구인가. 사람이다. 오관을 가지고 살아가는 그러면서도 지극정성으로 꽃을 피운다. 이것, 고독일 것이다. 고독이 지탱의 알파요 오메가다. 오막살이가 있다면 그 울밑에 있거나 넓은 들이 시작하는 초다듬에 핀 꽃이 좋을 것이다. 내게 주어지는 수명은 얼마인가? 백세시대 거기까지 가는 길은 영욕이 교차하는 낮밤이 되리라. 병원 신세를 지지 않고도 흔들리는 사람 어디 있는가, 벤치마킹 하고 싶은 날의 들꽃! 그 운명은 어디까지인가? 시인은 아무쪼록 그렇게 흔들리다가 가시라! 만년설을 꿈속에서 거닐고 만년 만에 다 녹는 인생을 견디거라!
시인은 실로 내원사 스님처럼 ‘동백꽃 임종계’를 짓는다.
밟지 마시라!
피가 식지 않았으니
아직 얼굴이 붉은 것이다
놀라지 마시라!
임종불을 기다리고 있으니
아직 눈 뜨고 있는 것이다
감탄하지 마시라
이승의 마지막 예를 갖춤이니
조용히 바닥을 알고 가겠노라
-「동백꽃 임종계」
이산 시인은 시인인 자기를 밟지 마시라고 경고한다. 아직 얼굴이 붉다고 확인하고 있다. 아직 눈뜨고 붉은 정열을 기다리고 있으니 놀라지 마시라 고언을 쏟아낸다. 감탄하지 마시라, 조용히 바닥을 쓸고 밀리는 것이니, 이 거룩한 인간 등불 동백의 기름 찰찰 흐르는 끈기에 숨죽이며 관망하시라는 주문이다. 이른바 스님의 선시(禪詩)이자 시인된 자의 불이(不二) 문자이다. 거룩하다. 불붙어 단풍에 근접하는 자의 천지 경관이다. 결론적으로 사물 경관이다! 시인에게 축복을, 시인에게 은총의 녹아내림을 기대한다. 그는 지금 만년설 피오르드를 통과하는 중이다. 시인은 시집 한 권 손바닥에 들고 가섭처럼 뱅긋이 미소를 짓고 있다. 근엄하구나, 미소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