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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SBN | ISBN-13 : 9788956657431 |
|---|---|
| 쪽수 | 160쪽 |
| 크기 | 기타 규격 |
| 제품구성 | 단행본 |
- 소설/에세이/시 > 시
배순옥 시인의 언어 사용은 그 운신이 자못 활달하면서도 갈피갈피 변화를 담아낸 장히 옹골진 기량과 마주하고 있다. 그리고 그만한 자리가 그의 시적 괄목상대를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고 구사하는 시적 언어 또한 품이 그만큼 새롭고도 특이하다.
그가 보인 시적 에너지는 시의 주체와 객체를 향한 교감과 동화, 갈증, 애환, 정한 등으로 대별할 수 있을 것이다. 사물과의 소통에는 언어를 통한 시적 서정성이 그 출발점이라 하겠다. 시인의 언어가 위치하는 곳은 그래서 늘상 사물을 향한 새로움을 특이함으로 치환하는 지점이었다. 시인의 문학적 일상은 사물을 접속하여 “시의 감각을 찾아가는” 일의 연속일 터이고 거기에다 시의 생명력을 담아내는 일이 한 편의 시가 태어나는 일과 맞먹는다면 이는 ‘출산의 고통’에 비견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겠고 이에 이르기까지 견디고 순응하는 시인만이 시적 성과 또한 대단할 것임은 물론이다.
이번 시집에서 드러난 배순옥 시인의 시적 서정성은 생수 한 모금 같은 생명감이 압권이다. “겨우, 내가 늙어/겨우, 나를 건져내었으므로” 〈나를 불러들인 나라〉처럼 “늙어”의 시어는 생명감을 넘어선 것이지만 한 겹 더 깊이 들어가 보면 그것은 생명의식에 대한 갈구와 절실함에 값한다는 사실이 눈여겨진다. 저녁놀이 번진 하늘에다 생에 대한 집착과 미련을 비춰보면 어찌 떠오르는 아침놀이 그에 비견한다할 것인가? 그러기에 배순옥시인은 인생 후반기의 그 뜨거운 샘자리에서 새롭게 우거질 희망의 숲을 노래하고 있다. 이번 시집에서 그가 창작한 시작품들이 우리네 절망을 녹여내고 새살이 차고 새 생명의 새순을 키울 확신을 응원한다. - 김종(시인, 화가)
[목 차]
서문 · 6
1부 가끔은 타인이 되어
가끔은 타인이 되어
自我, 결코 달아날 수 없는
화암사를 가다
가슴벌레
진실, 그 소리
나의 현주소
허방
광대
경계人
상상의 터미널
천둥
탄생
삼각 변주곡變奏曲
피아노 그리고 나
詩를 심다
소리 밑동 다 열고
이명
피아노 그리고 고뇌
포도주를 읽다
2부 잔설
잔설殘雪
기립
생명
박꽃
위기의 기후
詩·1
詩·2
문 없는 입구
이면의 구속
시詩에 대한 모반謀反
노파의 실금웃음
석양이 동해를 잡다
몸무게
詩, 그 환한 알들
詩作
주름의 기록
팽나무 밑동 북쪽에 핀 이끼
묵호항
외로움
내 면의 저녁
3부 다시, 동백
다시, 동백
묵비권
무청 말리다
오동도 판화
나의 하나님
젓갈 내리다
아버지의 밥상 건반
기억의 저항
축제 뒤편
모정
그곳
그리움이 너를 놓지 않았다
실직자의 배후?
나를 불러들인 나라
4부 너에게
너에게
말벌집
그믐달
어느 날, 바다
空
수선화
마음의 오지
기억의 문
사공과 나룻배
장대비
조용한 결별
부조화의 조화
문무대왕수중릉
베팅Betting
출항, 이 알 수 없는 떨림
술
이산의 아픔
뜨거운 기억
소리, 육체를 얻다
| 평설 |
갯바람 푸른 관절을 감싸 도는 시편들 | 김종
[본 문]
가끔은 타인이 되어
가끔은 탐욕이
보리밭처럼 촘촘히 자라고 있다
휘청거리다
갇힌 그늘의 구름같이
나의 중심에 맴돌던 나는 없다
내 안에 고여 있는
몸 벗은 마음도 없다
새싹 몇 개가
땅 껍질을 열치고
세상에 없는 나를 깨운다
나는 이제
누구의 소유도 아니다
다만
나를 읽어가는 나일 뿐이다
自我, 결코 달아날 수 없는
어느 심장 밑에 숨은 덫인지요
뉘 아린 버팀목 같은 반란인가요
누룩처럼 부풀고 있는
이 무언無言
뭉툭한 꼬리 달랑 하나 달고 허공마다 끄집어내는
저 소리의 극점極點
생生은
굽이굽이 건반을 타고 흐르는
곡선이라는데
아닌가요?
결코 달아날 수 없는
화암사*를 가다
나는 짐 얹힌 마음 털어내려고
비틀비틀
화암사에 간다
번뇌의 품목 몇 개쯤
덜어내기 위해
산중 화암사에 간다
구름길을 지나고
산 번지 길 몇 개 등에 지고 가는데
한달음에 달려온 화암사
스님이 무릎기도 안고 와서 던진,
마디마디 속마다
대나무 속 둥근 마음 보란다
눈물보다
진한 몇 마디 그 설법
〉
이제는 옭매인 보따리
죄다, 광목천에 둘둘 말아 내던지고
굴뚝새처럼 떠다니고 싶다
*전북 완주군 경천면에 있는 사찰
가슴벌레
기억의 서랍마다 덜컹거리는
저 서늘한 밀착
상처가 묵은 상처를 오도독오도독 파먹고 있다
더하기에 더하기를 더하는,
진실, 그 소리
내 등뼈에서 고양이 울음소리가 들린다
손목까지 야금야금 먹어 치운
화석 같은 상처
올무에 갇힌 혓바닥은
그 기억의 일부를 훔쳐쥐고
비가 내린다
견뎌내는 것이 맞서는 것보다 큰 고통인 것를
엎드려 울어본 자들은 안다
진실을 향해
돌을 집어 들고 힘껏 던진다
가슴에 파동을 그리며
켜켜이 찢어지는 소리들
누가 아직도 내 몸에 빨대를 꽂는가
너무 깊게 패인
그 진실 하나, 눈물 시리게 선명해서 아프다
나의 현주소
몸속에 고인 소리가
허공의 긴 정체구간에 끼어 있다
발을 헛디딘 것인가
오그라진 음들이 안개같이 펄펄 기어든다
삼키지도 뱉지도 못했던 물컹한
소리의 내력들
순간, 생生을 바꿀 수만 있다면
소리의 밑동을 파서 손가락 하나 툭 분질러 묻겠다
쉼표조차 숨죽인 내 안의 파동들
주먹 꽉 쥔 아이같이 야윈 심장 불끈 세워, 휘청이는
나를 붙든다
나는 아버지 등뼈로 키운, 하늘바라기꽃*
✽당당하게 하늘을 바라보며 오랫동안 시들지않고 피는 꽃
허방
세월
주소도 버린 채 무게만 올렸구나
늙은 기억보다
물음 많은 섬들만 등재되어
집착이, 차디찬 고독이
헐린 구멍으로 생겨 있구나
이제는
계절도 야위어가는 골목길
눈 멀 듯 부신
동굴 속
눈물 같은 거품들이 하늘 가득
비릿하구나
| 평설 |
생수 한 모금의 시, 그 샘자리에 서다
- “뜨거운 살점으로 온 몸에 들어선 가락들” -
김 종
(시인, 화가)
파도소리가 사철 내내 자장가를 들려주고 키가 큰 등대가 바다를 지키는 곳, 회색 날개 갈매기가 종횡으로 끼룩거리며 추운 겨울에도 빨간 눈 동백이 손님들을 마중 나와 따뜻하게 반기는 곳, 이곳은 지구촌 최고의 해양도시, 물의 낭만이 더없이 아름답다는 배순옥 시인의 고향, 여수麗水다.
배순옥 시인의 천석고황의 땅, ‘여수’
최근 여수는 「여수 밤바다」란 노래가 멜로디를 타면서 찾아든 관광객으로 엄지척의 고을이 되었다. 여수의 물빛은 남해의 눈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을 만큼 유난히 맑고 깨끗하고 푸르다. 배시인은 이곳에서 보낸 꿈이 자라던 쌍갈래머리의 소녀시절을 못 잊어한다. 어른이 된 지금에도 못 잊을 아련한 그리움의 땅, 천석고황의 땅이 여수인 때문이다. 어딘가에도 썼었지만 고향은 어머니가 살고 계시고 나 자신이 나고 자란 곳이라면 배순옥 시인에게 지금의 여수는 여전한 달려가 안기면 손잡아 안부 물을 사람들이 기다리는 청라언덕이다. 한 권의 시집에서 만날 수 있는 시인의 표정과 생각은 삼라만상 우주만물의 생김새만큼이나 무궁해 보인다. 시인이 창조하고 시인이 풀어낸 언어 속에는 질감의 의미역意味域이 녹아들어 유채색이냐 무채색이냐를 가리는 독자들에게 희로애락을 불어넣고 감동 주입의 통로가 된다. 배순옥 시인의 눈길이 머무는 곳에 그가 리듬을 다하여 노래한 풍경들이 아리도록 결곡하다.
시인의 가슴에 비쳐든 풍경은 이처럼 그만의 시의 곡간이 된다. 태생적으로 아름다우면서 아픈 게 풍경이라면 풍경 속에는 화려한 아름다움과 시리도록 아픈 상처가 공존한다. 세상을 궁구하는 시인이라면 풍경을 살피고 그 풍경의 주름 너머에 인간을 위로해줄 노래가 필요하다. 그런 점에서 배순옥 시인의 눈길이 머문 풍경들의 밑자리에는 배순옥 시인만의 웅숭깊은 배려와 온기의 언어들이 숨 쉬고 있음을 읽을 수 있다.
문학은 한 마디로 의미를 담아낸 제반 주제의 감각적 형상화라 할 수 있다. 시를 빚고 구성하는 자리에 언어란 처음엔 하나의 추상적 기호에 지나지 않았음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언어는 그 자체로는 실감의 세계가 아닌 때문이다. 허지만 사물을 통한 상상과 감각화를 거쳐 시의 주제가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것이다. 이는 사물의 청각적, 시각적 형상화에 다름 아니며 시작품의 언어적 성공과 감각화를 동일지점에서 이끌어낸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시인이 자신의 시작품을 독자적인 생명체로 끌어가기 위한 형상화에는 사물의 감각성을 접목하고 삶의 메시지를 담아내는 데까지 나아가야 한다. 배순옥 시인은 자신의 시작품을 독자적인 생명체로 형상하면서 언어의 감각성과 가락을 삶의 메시지를 담아내는 데까지 접목하여 투입하고 있다. 이들 시어의 밀도나 표현 또한 감각을 통한 삶의 메시지를 이야기의 형태로 풀어내면서 그에 내재된 감동성이 언어적 개성이 되는 터라 시인에겐 무릇 제2의 창조주라는 칭예가 주어질만도 하다.
학동시장 한쪽 귀퉁이
방석만한 땅바닥에 서너 주먹쯤 되는 달래를 앞에 놓고
노파가 입을 떼지 못한다
산비탈 아래쪽을 몇 날 호미로 더듬어 모았을
백발의 굽은 손
딱하게도 내 몸속에 시린 바람 끝 같은 것이 파고든다
조선낫처럼 휘어진 저 모습
쩍쩍 벌어진 논바닥 같은 주름살
못 견디게 선한 얼굴이
다 찢겨진 청바지 맨살 보이듯
뭉텅뭉텅 내보인 노파의 지친 눈동자를
지워내다 만다
꼭꼭 몸속으로 숨어든 가난의 그 젖줄
나는 쿡쿡 쑤시는 흉통을 밀어내며 몇 발자국 옮기다
다시 오백원짜리 동전 몇 개 쥐고
노파가 있는 쪽으로 되돌아간다
새똥만한 새싹이 굽은 등 발밑에서 새초롬하게 올라온다
노파는 찬찬히 내려다보다 실금웃음을 품는다
- 「노파의 실금웃음」
「노파의 실금웃음」에서 배순옥 시인이 진정 보고자 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전경前景으로 내민 “학동시장 한쪽 귀퉁이” ‘방석만한 땅바닥’에는 ’서너 주먹쯤 되는 달래‘를 파는 노파가 시인이 보여주고자 작품 속 광경의 전부다. 오가는 행인더러 사달라는 말조차 꺼내지 못 하는 노파는 우리네 민초들의 정직한 모습이 이 같았다 할 수 있다.
그가 펼쳐놓은 서너 주먹쯤의 달래는 산비탈에서 몇 날의 호미작업으로 모은 것일 게다. 백발에다 굽은 손을 합하여 할머니의 그간의 세월을 헤아리는 화자는 “시린 바람 끝 같은 것이 파고든다”고 했다. 노파를 대한 화자는 아픈 마음이 앞섰었고 그것은 어쩌면 고향에 계신 어머니의 또 다른 대입으로 생각할 수 있겠다. 화자가 노파의 행색에서 그간의 생의 신산辛酸함을 헤아리는 일은 ‘백발의 굽은 손’에서 ‘내 몸속’에 살고 있는 시린 바람의 세월을 읽었기 때문이다.
화자는 “다 찢어진 청바지”에다 허리가 ‘조선낫처럼 휘어진’ 채로 땅바닥에 쭈그려 앉은, 가뭄 든 논바닥 같은 할머니의 굵은 주름살에서 “못 견디게 선한 얼굴”을 보고 만 것이다. 하기야 서너 주먹도 안 되는 달래로 노상에 퍼질러 앉아 손님을 기다리는 노파의 ‘지친 눈동자’를 지워내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걸 두고 화자는 ‘지워내다 만다’고 했고 이 자리의 기억들 또한 오래도록 따라다녔다는 것이다. 하기야 시인의 눈에서 노파의 행색을 지운다는 것은 매우 강력한 세제라도 불가능했을지 모른다. 어디 그뿐인가. 제 몸속으로 흔적도 없이 숨어든 ‘가난’마저도 그대로 둘 수가 없어서 노점에서 달래 나부랭이라도 파는 것이 노파가 보여준 생의 정직성이 아니겠는가.
그걸 본 화자는 “쿡쿡 쑤시는 통증을 밀어내며” 오백 원짜리 동전 몇 개를 쥐고 발자국을 다시금 노파에게로 옮겨간다.
지우다가 지워지지 않아 되돌린 발걸음
노파의 지친 눈동자를 지워내다가 지워지지가 않아 저절로 되돌린 발걸음인 것이다. 그때 화자의 눈에 비친 것, “새똥만한 새싹이 굽은 등을 하고 새초롬하게 발밑을 올라”오고 있었다. 이를 아는지 모르는지 “찬찬히 내려다보며 실금웃음을 품는‘ 노파에게서 배순옥 시인이 요량한 시적 연민과 소망감을 읽어내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느티나무 속에서 생명 하나 보았다
소리 내어 울지 않았으나 흠뻑 얼어
눈 부릅뜬
꼬리만 남은 배후, 이름 잃은 너의 얼굴이다
새끼봄이 생겨 있다
- 「잔설殘雪」
군데군데 잔설더미가 쌓여있고 한기를 품은 바람이 횡행하는 계절은 희망의 봄을 말하기는 아직은 이른 때라 하겠다. 화자는 고목이 된 느티나무에서 파릇한 새순을 보고 생명 하나를 만났다 여긴 것 같다. 이어지는 대목에서 “소리 내어 울지 않았으나” 겨우 참았다는 사실 자체가 신기하게도 작품의 한 부분으로 읽히고 있다.
이유는 춥기 때문이라고 하지만 그걸 이기려고 “흠뻑 얼”었어도 눈 부릅뜬 채 꼬리만 남은 배후까지를 열어둔 것이다. 그러면서 더 이상 소생의 기운을 일으키지 못하고 패색 짙은 ‘너의 얼굴’을 기적처럼 나 여기 이렇게 살아서 자라고 있다는 생의 시그널을 보여주기에 이르고 “새끼봄이 생겼”다고 하였던 것이다. 시인이 구사한 ‘새끼봄’이란 용어는 여태껏 문학작품에서 접한 적이 없었건만 그럼에도 그럴 듯하게 읽히는 것은 자연스럽기 때문이다.
요컨대 잔뜩 한기에 짓눌린 고목의 등걸에서 세상을 새롭게 시작한다는 새싹의 의미는 “이름 잃은 너의 얼굴”에서 ‘새끼봄’을 발견했을 때의 환희감 같은 것이 잔설더미를 일시에 녹여버리고 말겠다는 느낌에 나아간 것이다.
허공에 소리를 올린다
가슴을 움켜쥐니 늑골 아래까지 번져 아프다
온몸에 들어 선 가락은 살점이다
떠밀려온 소리의 파동이 멸치떼처럼 밀려든다
들끓는 심장의 손가락이 뜨겁다
나는 비로소 소리에 소리를 가둔다
내 안의 나를 북 치듯 두드린다
건반을 만난 손은 희고 검은 몸이 되었다
모두가 기립이다
- 「피아노 그리고 나 -독주회」
이 많은 세월에 팔다리 걷어 부치고 피아노를 타고난 운명처럼 공부한 배순옥 시인, 그에게 피아노 건반을 두드린 손가락은 “들끓는 심장”을 두드린 손가락이고 그래서 마냥 뜨겁기만 한 손가락이기도 했다. 언젠가 예술을 얘기하는 자리에서 사람은 몸 전체가 예술품이기 때문에 무엇을 들춰봐도 예술을 설명하기에는 안성맞춤, 부족함이 없다는 말을 한 일이 있다.
예컨대 사물을 보는 눈, 냄새를 맡는 코, 소리를 듣는 귀, 말을 하는 입, 어디 그뿐인가, 춥고 덥고 외부적인 온갖 반응을 고스란히 감각하는 피부 등등 이들은 자체만으로도 예술이라는 표현이 적합할 듯하다. 그러나 이 같은 것들이 그 자체로는 예술이 될 수 있다는 건 어디까지나 하나의 중간과정일 뿐 완성된 본격예술로 가기 위해서는 ‘손’이라는 과정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했다. 두말이 필요 없이 인간이 예술을 제작하는 힘은 바로 ‘손’에 달려있다는 얘기다. 모든 것이 가능해도 손이 없다면 그 무엇도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위의 작품에서도 그 같은 사실이 감지되고 예술제작에도 그 절대적인 요건으로 ‘손’의 존재가 필요하다는 이유이며 이는 어떤 의미에서든 당위적이기까지 하다. 전제하기로 화자는 “허공에 소리가 울린다”고 하였다. 사뭇 치열한 연주회의 뒤끝이라 움켜쥔 가슴의 늑골 아래까지 통증이 번져온 것이다. 온몸을 다하여 건반을 두드렸으니 ‘가락’ 또한 온 우주에 퍼졌을 것이고 ‘소리’ 자체가 연주자에게는 피가 통하는 ‘살점’에 진배없었을 것이다. 어차피 이들은 화자에게 오고 간 영혼의 연주이고 시간이었을 테니까 그 소리가 조장한 거대한 덩어리처럼 떠밀려온 ‘파동’이 멸치떼처럼 청중의 심장을 들끓게 하였을 때 손가락 또한 뜨거워질 대로 뜨거워진 채였을 것이다.
그제서야 화자는 “비로소 소리에 소리를” 가두면서 “내 안의 나를 북치듯 두드린다”고 했다. ‘건반을 만난 손’은 마냥 ‘희고 검은 몸’이고 이에 상징되는 낮과 밤을 온전히 투입하였다고 할 것이다. 사람들은 기립하여 혼신을 다한 연주자에게 우레 같은 박수로 답을 하면서 연주회는 대단원의 고개를 넘어갔던 것이다.
수북한 밤을 벗느라 고요도 환한
동그라미 음문陰門
후끈 단 몸
정표인 듯 속살 박힌 촉수가 뜨겁다
쿵쾅, 심장 뛰는 소리
썰썰한 물소리 엉겨 붙어
밤의 등짝 덥석 안고 몸을 여는
저 하얀 꽃
황적색 해를 업고 달로 뜬 詩의 집
내 가난한 시 한 편도 들어가 살것다
- 「박꽃」
‘박꽃’을 두고 ‘저 하얀 꽃’이라는 말에는 ‘저 하얀 어깨선!’ 이리 말하는 것만 같았다. 그러면서도 “황적색 해를 업고 달로 뜬 詩의 집”을 꺼내들었으니 박통이나 박꽃과 짝을 이루는 맞춤 사물은 아무래도 달빛과 ‘달’이 아닐까 싶다. 배순옥 시인이 구사한 시적 서정성은 “정표인 듯 속살 박힌 촉수”가 썰썰한 물소리에 몸을 여는 일이었고 한국인이면 누구나 좋아했을 언어적 조합으로 그 흐름을 잡았다고 하겠다. 풍정風情에 비추어 「박꽃」이 등장하고 “수북한 밤을 벗느라 고요도 환한/동그라미 음문陰門”에서 박꽃의 자태는 더없이 아름답고 조요로운 모습을 직핍하게 드러냈고 이들 뒤에 ‘고요도 환한’이라는 탁월한 표현을 보여주기에 이른다.
‘고요도 환한’ 동그라미 음문
요컨대 달빛 아래 피어난 정갈하면서도 요염한 박꽃이 이리도 직핍하게 다가온 것이다. 그걸 놓칠 세라 배순옥 시인의 시적 상상력이 “밤의 등짝 덥석 안고 몸을 여는” 이란 표현을 보태면서 ‘음문’이라는 제법 외설스러운(?) 용어로 분위기의 일신을 꾀하고 있다. 허지만 ‘정표’처럼 내세운 “속살 박힌 촉수가 뜨겁다”는 박꽃을 묘사한 한 부분에 오면 이들의 이미지는 다시금 예의 그 정갈한 자리에 들어선다고 하겠다.
이쯤에서 예견이라도 하듯 “쿵쾅, 심장 뛰는 소리”로 이동하게 되고 ‘박꽃’에서 읽은 ‘고요도 환한’ 동그라미 음문을 만났다는 대목에서 후끈 단 몸에 저 하얀 박꽃의 심장 뛰는 소리가 뜨거워진 물소리를 불러들여 어깨선 너머로는 선경처럼 아름다운 달을 띄우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같은 분위기에 얹어 한 편의 서정시가 태어난다고 할 것이고 풍경으로 쳐서 이만한 절경 또한 없었겠다 싶다.
만월처럼 둥글어진 박을 업고 “내 가난한 시 한 편”이 들어가 살아도 좋겠다는 화자의 독백에는 이 집의 여주인 배순옥 시인의 시적 상상력이 가득하고 이를 견인하여 자못 풋풋하고 싱그럽단 표현을 올리는 것은 지극히 마땅하다고 하겠다.
구름 뒤쪽
무등산 송이눈바람에 흘러 다니다
벗어놓은 반달의 입술
광주천 물결에 얹힌 채 겨우 폭설이 되었을까
청춘의 잎새주잔 추억을 적어 넣고, 다시
분홍꽃 피우려 가슴 한쪽 헐어내는 돛배
수정될 수 없어
만삭의 땡볕보다 더 뜨거운
- 「출항, 이 알 수 없는 떨림」
어느 지역엔가 가서 이웃한 그곳의 행정명이 북면 뒤에 남면이 위치한 것을 보고 저 지역은 남쪽이 북쪽보다 더 춥겠다는 말을 하며 웃은 적이 있다. 헌데 작품 「출항, 이 알 수 없는 떨림」이 ‘구름 뒤쪽’으로 시작되면서 새삼 구름에도 뒤쪽과 앞쪽이 있겠다는 생각 또한 했었다.
출항은 다음의 과정을 향한 출발의 시간이다. 이는 이후에 펼쳐질 시간을 호기심에 걸어서 나아가는 길이지만 그 길은 가다 보면 일면 두렵기도 하고 떨리기도 할 것이다. 누구에게나 미래의 시간은 존재하는 법이고 세상사는 일 또한 미지를 향한 출항이라는 의미에 다름 아니다. 일단 구름의 뒤쪽이 있었으니 앞면 또한 존재하겠지만 벗어놓은 무등산의 송이바람에 반달 입술이 흘러 다니고 광주천 물결에 폭설이 얹혔다면 상황에 비춘 ‘출항’의 일은 상상처럼 그리 녹록치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청춘의 잎새주잔 추억을 적어 넣고” 분홍꽃을 피우려 가슴 한쪽을 헐어 돛을 올린 ‘돛배’의 의미는 “수정될 수 없어/만삭의 땡볕보다 더 뜨거운” 악조건으로 나아가야 했을 것이다. 여기에서 화자가 견디기 어려운 폭염을 ‘만삭의 땡볕’이라 한 것은 더 뜨거운 적도를 지나는 선박들이나 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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