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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SBN | ISBN-13 : 9791156122791 |
|---|---|
| 쪽수 | 328쪽 |
| 크기 | 기타 규격 |
| 제품구성 | 단행본 |
- 인문/역사 > 한국역사/지리
시와 같은 저항, 저항과 같은 시
백마 타고 온 초인 이육사
탄생 120주년 순국 80주기, 이육사의 삶을 찾아
한국인에게 이육사는 매우 익숙한 이름이다. 교과서에서 지하철역 쉼터에 이르기까지 〈청포도〉나 〈광야〉와 같은 그의 시를 일상에서 여상히 접할 수 있으며 그의 일대기 역시 각종 매체를 통해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간 알려진 이육사의 생애는 문학적인 성취를 쫓아가는 데에만 초점이 맞춰져 시인으로서만 설명될 뿐, 이육사의 다양한 모습과 격렬한 저항활동을 모두 담아내지는 못했다. 또한 그마저 잘못 알려진 것이 상당했다.
《이육사, 시인이기 전에 독립투사》는 언론인으로서의 삶과 무장투쟁에 이르기까지 40년간 다양한 활동을 전개한 이육사의 생애를 복원하여 이육사를 저항시를 쓴 시인이 아닌 자신의 저항시를 삶으로 실천한 독립운동가로 재조명한다. 그럼으로써 이육사를 매우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우리의 믿음이 잘못되었음을 알려준다. 지난 2010년 출간한 《이육사 평전》의 개정판으로, 이육사 탄생 120주년과 순국 80주기를 맞아 새로운 연구 성과를 보태고 도판을 일부 추가하고 판형을 좀 더 크게 하여 책을 새롭게 구성했다.
[목 차]
책을 펴내며
이육사 연보
평전을 다시 쓰면서
육사가 사용한 이름, 264에서 戮史를 거쳐
‘이원삼’에서 ‘이활’로
이활과 대구 264
264에서 육사肉瀉ㆍ戮史를 거쳐 육사陸史로
육사의 고향, 원촌 마을 881번지
육사를 만나러 가는 길
〈계절의 오행〉에 담긴 원촌 마을
1904년, 육사의 출생과 집안 전통
육사를 둘러싼 ‘무서운 규모’
육사의 형제들
1909~1924년, 육사가 자라면서 받은 교육
한문을 배우며 자라나다
보문의숙寶文義塾을 거쳐 도산공립보통학교 다니다
혼인하고 대구로 이사하다
일본 유학
1925~1926년, 중국을 드나들며 민족의식을 키우다
대구 조양회관에서 문화 활동을 벌이다
베이징 나들이
베이징에서 ‘중국대학 상과’에 다니다
1927~1930년, 감옥을 드나들면서도 꺾이지 않다
장진홍 의거에 따른 수감 생활 1년 7개월
대구에서 기자 생활
‘대구 격문 사건’으로 2개월 구금되다
잦은 만주 나들이, 결국은 베이징으로
《중외일보》에서 《조선일보》로
1931~1933년, 초급 군사간부가 되다
윤세주尹世冑가 권한 난징행
베이징을 거쳐 난징에 도착한 의열단
의열단,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를 열다
육사, 난징에서 의열단장 김원봉을 만나다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를 다니다
졸업 기념으로 연극을 공연하다
육사가 맡은 임무
봄비 내리는 난징에서 국내 침투 준비
의열단에 가입하지 않았다는데
1933~1934년, 국내 근거지 확보하다가 체포되다
상하이에서 루쉰을 만나다
서대문 감옥에 갇히다
1930~1944년, 평론가·수필가·시인의 삶
본격적인 글쓰기와 사회 활동
〈청포도〉와 〈절정〉
1933~1936년, 시사평론에 보이는 그의 시대 인식
시사평론가로서의 육사
육사의 정세 인식
1943년, 친일의 물결 헤치고 투쟁의 길로
또다시 베이징으로 간 까닭은
충칭과 옌안을 연결하려 하다
베이징에서 순국하다
‘베이징 감옥’은 어디일까
고향에 묻히다
백마 타고 온 초인, 이육사
주
찾아보기
[본 문]
이육사에게 2024년은 특별한 해다. 1904년에 태어나 1944년에 순국했으니, 2024년은 탄생 120주년이요, 순국 80주기다(5쪽).
이육사, 그는 40년이란 짧은 삶을 살다 갔다. 사실은 40년마저도 못다 채운 39년 8개월이었다. 그 인생의 반이 출생과 성장기였다면, 활동기는 겨우 20년에 지나지 않았다. 남들보다 짧은 생애에 무슨 이야기가 그리 많을까? 그렇지만 20년에 지나지 않는 활동 기간에, 그는 우리의 가슴에 짙은 여운과 자취를 남기고 있다(18쪽).
첫째, 그는 1920년대 중ㆍ후반에 이활이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둘째, 1927년 가을에 장진홍 의거로 구속된 뒤, 옥중 생활을 통해 ‘대구의 이육사’, 혹은 ‘대구 감옥의 이육사’라는 뜻을 가진 이름에 마음을 두었는데 그것은 수인 번호를 따온 것이다. 셋째, 1929년 5월에 석방되고 1년이 지난 뒤, 이활이란 이름과 함께 정식으로 이를 사용하기 시작했다(38쪽).
1926년 무렵부터 1939년까지 ‘이활’이란 이름이 사용되었다. 그리고 1930년 10월에 발표한 작품에서 ‘李活’ㆍ‘大邱 二六四’를 썼다. 숫자로 된 이름이 한 차례 등장한 뒤에는 ‘肉瀉’와 ‘戮史’, 그리고 ‘陸史’를 혼용하다가, ‘陸史’로 정착했다. 따라서 그 이름에는 일제강점이라는 상황을 혁명으로 극복한다는 항일투쟁의 뜻을 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육사라는 이름이 이활과 함께 줄곧 같이 사용되었지만, 대체로 1933년부터 순국할 때까지는 이육사가 주로 사용되었다(46쪽).
육사의 집안은 친가와 외가가 모두 강렬한 항일투쟁의 분위기를 갖고 있었다. 그 속에 자라난 육사와 형제들이 그러한 성향을 갖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68쪽).
백학학원 시절, 무엇보다 빼놓을 수 없는 일은 조재만曺再萬(용찬瑢燦, 충환忠煥)과의 사귐이었다. 백농白聾이라는 호를 쓰는 조재만 과의 만남은, 뒷날 육사가 독립운동에 뛰어들 무렵에 만난 이정기李定基의 호가 백아白啞라는 것을 고려하면 매우 의미심장하다. 예전에는 귀머거리(농)와 벙어리(아)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로 인식했다는 점에서 이들이 무척 친밀했으리라 추측할 수 있다(93쪽).
육사는 신문기자로서의 활동을 민족문제를 해결하는 길로 인식했던 것 같다. 당시 기자들이 언론을 통해 일제 침략 통치에 항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144쪽).
육사는 교장 김원봉과의 만남에서 국내로 잠입하여 활동하겠다고 말했다. 그러자 김원봉은 육사에게 “그대와 같은 수재를 조선으로 돌려보내는 것은 유감”이라고 하면서 러허熱河 방면에 가서 활동하든지 아니면 핑궈장馮國章의 군대에 입대하기를 권했다. 그렇지만 육사는 귀국 방침을 고집하였다. 이에 김원봉은 두 가지 사명을 그에게 주었다. 하나는 국내의 노동자ㆍ농민에 대해 혁명의식을 고취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2 기생 모집 파견이었다(192~93쪽).
1934년 7월 20일 자로 안동경찰서 도산陶山경찰관 주재소에서 작성한 〈이원록 소행조서〉는 육사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었다. “배일사상, 민족자결, 항상 조선의 독립을 몽상하고 암암(위)리에 주의의 선전을 할 염려가 있었음. 또 그 무렵은 민족공산주의로 전환하고 있는 것으로 본인의 성질로 보아서 개전의 정을 인정하기 어려움”(211~12쪽).
국내로 침투한 뒤, 육사는 잡지에 평론, 특히 시사평론을 발표하기 시작했다. 일반적으로 그가 시인으로 유명하기 때문에 그의 작품이 대다수 시에 집중되었을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 그렇지만 군사간부학교에 입학하던 무렵부터 시작하여 졸업한 뒤에 그가 힘써 쓴 글은 시사평론이 많았다(221쪽).
육사는 〈청포도〉를 가장 아끼는 작품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1943년 7월에 경주 남산의 옥룡암으로 요양차 들렀을 때, 먼저 와서 요양하고 있던 이식우李植雨에게 털어놓은 말이다. 육사는 스스로 “어떻게 내가 이런 시를 쓸 수 있었을까?” 하면서, “내 고장은 조선이고, 청포도는 우리 민족인데, 청포도가 익어가는 것처럼 우리 민족이 익어간다. 그리고 곧 일본도 끝장난다”고 이식우에게 말했다고 한다(237~38쪽).
그가 경주나 포항에 들렀다가 상경하는 길에 처가 동네가 있던 영천에 들른 일이 있는 것 같다. 백학학원 동기생들이 남아 있던 영천에 들른 차에 어린 학생들 앞에서 돌아다니는 개를 가리키며 “저 개처럼 사는 것이 가장 편한 일이다. 그렇지만 그렇게 살아야 할까?”라면서, 인간답게 살아가는 길을 말해 주었다는 이야기가 당시 학생이었던 노인들의 입을 통해 전해지고 있다(247쪽).
시사평론을 보면, 육사의 정치적 안목이 다양하고 정밀했다는 생각이 든다. 중국에 대한 부분은 교육과정을 통해 쌓은 지식과 판단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관세문제나 유럽 정세 분석은 그가 세계 정세의 변화를 제대로 읽어 가고 있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259쪽).
하나는 그가 일단 베이징에 간 뒤, 다시 임시정부가 있던 충칭重慶으로 가고, 그곳에서 어느 중요 인물과 더불어 옌안延安으로 간다는 행선지를 말해 주는 것이고, 둘째는 망명하는 것이 아니라 얼마 뒤에 귀국할 것이라는 예정을 전하는 것이며, 셋째 귀국할 때에는 무기를 국내로 들여올 것이며, 넷째 자금 마련을 위한 방법을 찾고 있었다는 사실이다(268쪽).
최후를 다시 요약해 본다. 첫째, 1943년 말에 육사가 국내에서 체포되어 베이징으로 온 뒤, 이병희 자신도 서울에서 파견되어 온 형사에게 체포되어 베이징 감옥에 구속되었다. 둘째, 얼마 뒤 풀려나온 이병희는 1주일쯤 뒤에 간수장으로부터 “육사가 사망했으니 시신을 인수해 가라”는 통지를 받았다. 셋째, 육사의 유해를 인수하고 화장한 뒤 친척이자 아기를 낳은 지 3일이 된 이귀례의 산실 윗목에 유골함을 두었다. 넷째, 국내에 있던 육사의 동생 원창을 불러 유골을 넘겨주었다. 그것도 베이징으로 불러오는 것이 힘든 전쟁 상황이라 원창을 용의자로 만들어 이동할 수 있게 만들었다(279쪽).
육사는 짧은 40년 생애 동안 독립운동이나 문예 활동에 있어 참으로 가시밭길을 걸었다. 민족문제를 해결하려고 나라 안팎을 넘나든 그의 노력이나 고통 속에서 펼친 문예 활동도 모두 민족에 대한 애정에서 우러나온 것임은 더 이상 다른 말을 덧붙일 필요조차 없다(292쪽).
그는 퇴계 학맥을 잇는 저항성과 문학성을 모두 이어받고, 또 소화해 냈다. 민족을 생각하여 독립운동가의 길을 택했고, 핏속에 흐르는 문학적 기질로 문인으로 활동했다. 그래서 그가 ‘저항시인’이자 ‘민족시인’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295쪽).
민족적 신념을 지키기 위해 무릎을 굽히지 않고 죽음으로 저항한 그, 온 겨레가 식민지 노예로 살아가던 그날에 해방된 세계가 가까이 왔다고 예언하면서 그 노래의 씨를 뿌린 육사. 그 씨앗의 열매를 거두며 광야에서 목 놓아 노래 부를 초인은 누구인가? 일반적으로 육사는 매화 향기이면서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린 사람이요, 초인은 해방된 민족을 의미한다고 말해 왔다. 그러나 필자의 생각은 이와 다르다. 그 초인은 바로 육사 자신이었다. 이미 광복된 날을 내다보며 미리 민족의 가슴에 노래를 불어넣은 그 자신이 곧 ‘백마 타고 온 초인’이었다는 말이다(299쪽).
시와 같은 저항, 저항과 같은 시
백마 타고 온 초인 이육사
탄생 120주년 순국 80주기, 이육사의 삶을 찾아
한국인에게 이육사는 매우 익숙한 이름이다. 교과서에서 지하철역 쉼터에 이르기까지 〈청포도〉나 〈광야〉와 같은 그의 시를 일상에서 여상히 접할 수 있으며 그의 일대기 역시 각종 매체를 통해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간 알려진 이육사의 생애는 문학적인 성취를 쫓아가는 데에만 초점이 맞춰져 시인으로서만 설명될 뿐, 이육사의 다양한 모습과 격렬한 저항활동을 모두 담아내지는 못했다. 또한 그마저 잘못 알려진 것이 상당했다.
《이육사, 시인이기 전에 독립투사》는 언론인으로서의 삶과 무장투쟁에 이르기까지 40년간 다양한 활동을 전개한 이육사의 생애를 복원하여 이육사를 저항시를 쓴 시인이 아닌 자신의 저항시를 삶으로 실천한 독립운동가로 재조명한다. 그럼으로써 이육사를 매우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우리의 믿음이 잘못되었음을 알려준다. 지난 2010년 출간한 《이육사 평전》의 개정판으로, 이육사 탄생 120주년과 순국 80주기를 맞아 새로운 연구 성과를 보태고 도판을 일부 추가하고 판형을 좀 더 크게 하여 책을 새롭게 구성했다.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한, 그러나 여전히 낯선
기존의 이육사의 삶을 소개한 많은 글들은 육사의 행적에 대한 정확한 자료 없이 전해지는 이야기를 정리하는 수준에 그친 경우가 많았다. 《이육사, 시인이기 전에 독립투사》는 이러한 한계에서 벗어나 독립운동사라는 새로운 시각과 치밀한 자료 조사 및 검증과정을 통해 이육사의 삶에 접근한다.
이 책은 당시 문인들이 남긴 자료에 일제 경․검찰 기록과 언론보도, 경북 안동에서 중국까지 아우르는 현장 답사 및 인터뷰 등을 추가하여 잘못된 사료는 바로잡고 널리 알려지지 않은 육사의 행적은 새롭게 소개한다. 여기에 2000년 첫 발간 이후 어문학과 역사 등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들이 제기한 지적과 새로 발굴한 성과를 반영하여 초판을 수정․보완, 이육사 생애 복원의 완성도를 높였다.
‘264’에 숨겨진 뜻
《이육사, 시인이기 전에 독립투사》에서 이육사가 사용한 필명의 변천사를 정리한 것은 이러한 이육사 바로알기의 대표적인 예다. 이육사라는 필명이 그의 수인번호에서 유래했다는 에피소드는 제법 유명하다. 그러나 수인번호를 이름으로 택한 이유와 ‘육사’에 담긴 뜻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 이 책은 육사의 한문 표기가 처음부터 ‘陸史’는 아니었음을 소개하며 이름의 변천과정과 각각의 의미를 밝힌다. ‘이육사’는 수인번호 ‘264二六四’에서 시작하여 세상에 대한 지독한 냉소가 담긴 ‘肉瀉’(고기를 먹고 설사하다)와 강렬한 혁명의지를 드러낸 ‘戮史’(역사를 죽이다)를 거치면서 이 모든 뜻을 품어 ‘陸史’로 자리 잡은 것이다.
또한 이 책은 육사가 ‘육사’ 외의 필명으로도 활동했다는 사실도 알려준다. 육사는 시 못지않게 시사평론에도 힘을 기울여, 장제스 정책 비판과 중국 농촌의 몰락에서 국제무역주의에 이르기까지 세계정세에 대한 날카로운 통찰을 보여주는 비평을 다수 남긴 언론인이기도 했다. 그런데 이때 시사평론에는 대부분 육사가 아닌 ‘이활’이라는 필명을 사용했다.
무인으로서의 이육사를 새롭개 소개하다
동해송도원에서 요양했기 때문에 그를 병약한 문인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육사는 항일무장투쟁을 위해 김원봉이 운영하는 조선혁명정치군사간부학교에 입교하여 보병전술에서 특수공작까지 군사훈련을 받은 군인이기도 했다. 단아한 시인으로만 알려진 통념과는 사뭇 다른 사실이다. 간부학교 동기이자 처남인 안병철 역시 육사가 권총명사수였다고 회고한다. 이러한 무인으로서의 기질을 바탕으로 육사는 순국 전까지 충칭과 옌안을 오가며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조선독립동맹의 전선戰線 통일을 위해 노력하는 한편, 국내에 무기를 반입하여 항일무력투쟁을 준비했었다.
잘못 알려진 ‘이육사’를 바로잡다
뿐만 아니라 이 책은 풍부한 문서 자료를 근거로 제시하며 이육사에 대해 잘못 알려진 부분들을 하나하나 바로잡는다. 예를 들어 이육사가 의열단원으로 활동했다고 알려진 상식은 재고해야 한다고 밝힌다. 육사는 독립운동가로서 의열단장인 김원봉을 따르며 뜻을 함께했지만 동시에 레닌주의자로서 김원봉과 사상적으로 충돌하여 의열단 소조에서 배제되는 등 갈등을 빚었다. 따라서 저자는 이육사가 넓은 범위에서 의열단의 범주에 속할 수는 있지만 의열단원으로 활동했다고 보기는 힘들다고 이야기한다.
(코민테른의) 일국일당주의一國一黨主義에 위반하고 중국에서 조선인 자신이 조선의 혁명사업을 한다는 것은 그의 혁명적 정조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 이육사가 김원봉을 비판하며
저자는 육사가 장진홍 의거에 직접 개입했다는 부분에 대해서도 근거가 희박함을 지적한다. 육사가 장진홍 의거에 대한 혐의로 수감된 것은 사실이나 이는 일제 경찰의 마구잡이식 수사로 육사뿐 아니라 대구에서 활동하던 상당수의 지식인들이 함께 받았던 고통이었다. 당시 육사는 폭탄상자에 적힌 필체가 동생인 이원일의 필체와 비슷하다는 이유로 검거되었다.
또한 육사가 조선일보에 장편소설 현상공모를 했다고 알려진 이야기도 오류임을 밝힌다. 《조선일보》 1933년 9월 20일 자 〈현상소설 예선당선자 근황〉 기사에 ‘이활’이라는 이름이 등장하는 것은 사실이나 여기서의 이활은 육사와 동명이인인 황해도 출신의 문인이다.
못다 푼 ‘이육사’를 공개하다
육사의 중국유학에 대해서는 여러 자료들의 시기가 엇갈리고 장소도 불분명하여 아직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예를 들어 박훈신과 조지훈은 육사가 베이징대학을 다녔다고 언급하지만 일제에 의해 작성된 신문조서에서는 육사가 베이징의 쭝구어대학에서 공부했다고 나온다. 이에 저자는 중국 현지답사를 통해 2000년 초판에서는 쭝산대학에 재학했을 가능성을 언급했다. 그 후 십년간 축적된 여러 연구자들의 검증노력을 바탕으로 개정판에서는 베이징유학에 대한 새로운 견해들과 더불어 ‘쭝구어대학’의 실재를 함께 소개한다.
또한 육사가 순국한 베이징의 동창후뚱 1호에 일제의 문화특무기관인 동방문화사업위원회가 위치했음을 새롭게 밝힘으로써 육사의 죽음과 일제 기관의 연관성에 대한 의혹을 제기한다.
광야에 노래의 씨를 뿌린 초인, 이육사를 다시 바라보다
친일행위자들은 자신들의 친일행위가 일제의 강압에 의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으며 당시 한국인 거의 모두가 대일부역자였다고 변명한다. 그러나 일제라는 같은 시기를 감내하면서도 친일과 항일로 극명하게 대비되는 삶이 있다. 이육사는 야만 앞에서 대세를 부정하는 것만으로도 큰 용기가 필요했던 시절, 모든 것을 버리고 한 번 떠나온 항일투쟁의 대열에 다시 뛰어들어 자신이 노래한 시와 일치되는 삶을 살았으며 그러한 삶을 시로 남긴 진정한 시인이자 독립투사였다.
육사는 시를 통해 광야에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리며 훗날 백마 탄 초인을 기다렸다. 2010년 《이육사 평전》 출간 이후 새로운 연구업적이 나왔듯이, 이번 개정판의 성과와 풀지 못한 숙제 모두가 새로운 추적과 연구의 디딤돌이 되어 육사가 뿌린 씨앗의 열매를 거두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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