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역 촌가구급방≫은 중종中宗 때 형조 참판刑曹參判을 지낸 사재思齋 김정국金正國(1485~1541) 선생이 편찬한 ≪촌가구급방村家救急方≫을 국역國譯한 책이다. 국역의 대본은 국립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 영인본으로 하였다.
사재 김정국 선생(이하 사재 선생)은 벼슬에서 물러나 경기도 고양군 망동리에 20년 가까이 거처한 적이 있다. 그 당시에 주위 사람들이 질병에 걸리면, 사재 선생은 가슴 아파하며 의서醫書에서 치료법을 찾아내 알려주었다. 그리고 자신이 알려준 치료법으로 그들의 병이 나으면 기뻐하였다.
사재 선생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기존 의서의 처방處方 가운데 민간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약재로 지을 수 있는 처방과 연장자들이 효험을 본 처방만을 뽑아 모았다. 그리고 이 처방을 많은 사람들이 보고 치료할 수 있도록 편집하여 ≪촌가구급방≫이라는 의서를 간행하였다.
이와 같은 사실에서 사재 선생은 마음이 따뜻하고 어진 분으로서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이 남달랐고, 백성들이 건강을 유지하는 데도 기여했음을 알 수 있다.
김정국 1세, 성종 16년(을사, 1485) ○ 부친 김련金璉과 모친 양천陽川 허씨許氏 사이에서 윤4월 28일 2남男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나다. 10세, 성종 25년(갑인, 1494) ○ 부친상을 당하다. 부친의 유언에 따라 이모부 예빈시 정禮賓寺正 조유형趙有亨에게 양육되다. 이모부 조유형이 사재 선생을 두터운 사랑으로 길러주었으므로 그를 아버지처럼 섬기다. 이 무렵부터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에게 수학受學하다. 12세, 연산군 2년(병진, 1496) ○ 모친상을 당하다. 형님 모재 김안국과 함께 시묘侍墓하다. 시묘하며 제사를 올리는 여가에 형님에게 예서禮書와 경사經史를 배우다. 20세, 연산군 10년(갑자, 1504) ○ 언관言官(正言)으로 있던 이모부 조유형이 갑자사화에 연루되어 결성(結成:현 충남 홍성군 결성면)으로 유배되자, 그를 따라가 학문을 배우며 3년간 머무르다. 조유형은 ≪계몽도서절요啓蒙圖書切要≫를 지었고, 이를 모재 선생과 사재 선생에게 전수하였다. 23세, 중종 2년(정묘, 1507) ○ 생원시生員試에 제4등으로, 진사시進士試에 30등으로 합격하다. 25세, 중종 4년(기사, 1509) ○ 4월 6일 별시別試 문과文科에 장원壯元하다. ○ 승문원承文院 교검(校檢:정6품)을 거쳐, 홍문관 수찬修撰(정6품) 지제교知製敎 겸兼 경연 검토관經筵檢討官에 임명되다. ○ 10월 19일 검토관檢討官으로서 임금에게 도승度僧하는 옛 폐단을 고치기를 청하다. ○ 겨울에 사간원司諫院 정언(正言:정6품)에 임명되다. 26세, 중종 5년(경오, 1510) ○ 이조 좌랑(吏曹佐郞:정6품)에 추천 임명되다. 27세, 중종 6년(신미, 1511) ○ 가을에 형님 김안국金安國*김안로金安老*권백수權伯綏와 함께 천마산을 유람하다. 28세, 중종 7년(임신, 1512) ○ 홍문관弘文館 부교리(副校理:종5품) 지제교知製敎 겸兼 경연 시독관經筵侍讀官 춘추관 기주관春秋館記注官에 승진 임명되다. ○ 9월 17일 부교리로서 임금에게 천재지변을 경계삼아 사냥을 그만하기를 청하다. ○ 10월 16일 시독관試讀官으로서 임금은 엄한 형벌로 아랫사람을 교화하지 말고 관대한 법을 써야한다고 아뢰다. 29세, 중종 8년(계유, 1513) ○ 1월 19일 동료들과 함께 임금에게 소릉(昭陵:단종의 생모인 현덕왕후)을 복위復位해야 한다고 극력 진언進言하다. ○ 홍문관弘文館 교리(校理:정5품)를 거쳐, 5월 21일 사간원司諫院 헌납(獻納:정5품)이 되다. ○ 5월 29일 헌납으로서 *임금은 세세한 일로 아랫사람을 책하지 말고 오직 대체를 잡아야 한다*고 아뢰다. 이에 대한 [회성도무대명소恢聖度務大明疏]가 문집에 보인다. ○ 좌천되었다가 뒤에 승문원承文院 교리(校理:종5품)를 지내다. 30세, 중종 9년(갑술, 1514) ○ 기재企齋 신광한申光漢 등과 함께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다. 사가독서는 유능한 젊은 문신들을 뽑아 휴가를 주어 독서당에서 공부하게 하던 일을 말한다. 31세, 중종 10년(을해, 1515) ○ 임금이 벼락과 번개가 친 것으로 인하여 구언求言하니, 5월 11일 이조 정랑(吏曹正郞:정5품)으로서 *임금은 정성을 다해 신하를 대우하고, 날마다 여러 신하들을 직접 접견하여 어진 이를 선발하며, 유능한 인재를 등용하여 진심으로 일을 맡겨야 한다*는 내용의 [추성임하친접군신소推誠任下親接群臣疏]를 올리다. ○ 가을에 점마별감點馬別監에 임명되어 홍주洪州(현 홍성)에 다녀오다. 32세, 중종 11년(병자, 1516) ○ 5월 19일 이문吏文 강독 시험에서 통通을 받아, 활[弓] 1장張을 하사 받다. ○ 의정부 검상(檢詳:정5품)에 추천 임명되다. 33세, 중종 12년(정축, 1517) ○ 의정부議政府 사인舍人(정4품), 사간원司諫院 사간司諫(종3품), 군기시軍器寺 부정副正(종3품), 성균관成均館 사성司成(종3품)을 역임하다. 34세, 중종 13년(무인, 1518) ○ 홍문관弘文館 전한典翰(종3품) 지제교知製敎 겸兼 경연 시강관經筵侍講官 춘추관 편수관春秋館編修官 승문원 참교承文院參校에 제수除授되다. ○ 5월 2일 특명으로 홍문관 직제학直提學(정3품)에 승진되고, 5월 15일 등급을 뛰어넘어 통정대부通政大夫(정3품 당상관) 승정원承政院 동부승지同副承旨(정3품) 겸兼 경연 참찬관經筵參贊官 춘추관 수찬관春秋館修撰官에 제수되다. ○ 11월 2일 좌승지左承旨(정3품)에 제수되다. 11월 6일 승정원에서 ≪성리대전性理大全≫을 강할 만한 사람 26인을 뽑아 임금께 아뢰었는데, 그 중 두 번째에 들다. ○ 11월 19일 황해도黃海道 관찰사觀察使(종2품)에 제수되다. 며칠 뒤 자신이 부족함 점이 많다며 사면해달라고 청하였으나, 임금은 적임자를 제수한 것이라며 허락하지 않다. ○ 12월 19일 임금께 하직 인사를 드리고 황해도 관찰사로 부임하다. 임지任地에서 [경민편警民編] 12조條와 [학령學令] 24조를 간행하여 배포하다. 35세, 중종 14년(기묘, 1519) ○ 11월 5일 황해도 관찰사 겸兼 해주 목사海州牧使에 제수되다. ○ 11월 15일경 기묘사화己卯士禍가 일어나자, 상소를 올려 사림士林을 구하려고 하다가 형세가 어쩔 수 없음을 알고 곧 그만두다. ○ 12월 25일 고신告身을 빼앗으라는 명이 내리다. ○ 고양군高陽郡 망동리芒洞里에 *은휴정恩休亭***육무당六務堂*을 짓고 후학을 가르치다. *팔여거사八餘居士*로 자호自號를 삼다. ○ 망동리에 거처하고부터 53세(1537)에 직첩職牒을 되돌려 받을 때까지 ≪성리대전서절요性理大全書節要≫*[역대수수승통지도歷代授受承統之圖]*≪촌가구급방村家救急方≫*≪문범文範≫ 등을 저술하다. 53세, 중종 32년(정유, 1537) ○12월 15일 직첩職牒을 되돌려 주라는 명이 내리다. 54세, 중종 33년(무술, 1538) ○ 2월 21일 다시 직첩職牒(고신)을 되돌려 주라는 명이 내리다. 마침내 관작이 회복되어, 용양위 대호군龍?衛大護軍 지제교知製敎 겸兼 오위장五衛將에 임명되다. ○ 4월 12일 전라도 관찰사 겸兼 병마수군절도사兵馬水軍節度使에 제수되다. ○ 9월 백성을 편하게 하고 폐단을 제거하는 10여 조목의 시정책을 건의하다. 55세, 중종 34년(기해, 1539) ○ 5월 17일 병조 참의兵曹參議(정3품)에 체배遞拜(바뀌어 임명됨)되었으나 형님이 병조 판서를 맡고 있었기 때문에 공조 참의에 옮겨 임명되다. ○ 7월 14일 특명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에 가자加資(품계를 올림)되어 경상도 관찰사 겸 병마수군절도사에 제수되다. 56세, 중종 35년(경자, 1540) ○ 1월 18일 특명으로 예조 참판參判(종2품)에 제수되다. 병으로 말미를 받다. ○ 4월 16일 병조 참판에 제수되다. ○ 5월 12일 형조 참판에 제수되다. 6월 22일 겸직하게 된 좌부빈객左副賓客(세자를 보도輔導하는 관직)을 체직시켜달라고 건의하여 교체되다. 당시 형님 김정국金正國이 먼저 빈객賓客이 되었기 때문이다. ○ 7월 17일 병으로 서장書狀을 올려 사직하였다. 7월 20일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종2품)에 제수되다. 57세, 중종 36년(신축, 1541) ○ 4월 4일 특진관特進官으로서 경연經筵에 나아가, 임금에게 토목일로 백성들이 고통스러워하면 결국 나라가 위태로워지니, 토목 일을 줄여야 한다고 아뢰다. 같은 달에 동지돈녕부사同知敦寧府事(종2품)가 되다. ○ 5월 20일 서거逝去하다. ○ 8월 19일 장단부長湍府 폐 임진현廢臨津縣 잣나무골에 장사 지내다. 선조, 24년(신묘, 1591) ○ 손자 영유현령永柔縣令 김요립金堯立이 사재 선생의 문집文集인 ≪사재집思齋集≫을 간행하다. 선조, 36년(계묘, 1603) ○ 영유현령永柔縣令 윤효선尹孝先이 ≪사재집思齋集≫을 보완하여 간행하다. 효종 1년(경인, 1650) ○ 임강서원臨江書院에 배향되다. 효종 7년(병신, 1656) ○ 지경연知經筵 이후원李厚源이 ≪경민편警民編≫을 간행하여 반포하기를 건의하니, 임금이 허락하다. 효종 9년(무술, 1658) ○ 완남 부원군完南府院君 이후원李厚源이 상소를 올려 ≪경민편警民編≫을 간행하여 반포하기를 건의하니, 임금이 허락하다. 현종 5년(갑진, 1664) 용강龍岡의 오산서원鰲山書院에 배향되다. 숙종 14년(무진, 1688) 문봉서원文峯書院에 배향되다. 영조 8년(임자, 1732) ○ 윤5월 이조 판서(吏曹判書 정2품)에 추증되고, *문목文穆*이란 시호諡號가 내리다. 문文은 *도덕을 갖추고 학문이 넓다[道德博聞曰文]*는 뜻이고, 목穆은 *덕을 베풀고 의를 지킨다[布德執義曰穆]*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