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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품 규격 정보
| ISBN | ISBN-13 : 9788965251002 |
|---|---|
| 쪽수 | 207쪽 |
| 크기 | A5(148mm X 210mm, 국판) |
| 제품구성 |
이 책이 속한 분야
- 인문/역사 > 서양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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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이 책은 한국연구재단(구 학술진흥재단)의 연구비를 지원받아 2007년부터 2008년까지 공동으로 수행한 <고대 그리스철학에서 감정(Pathe)의 재발견 - 온전한 인간형성을 위한 기초적 연구>의 결과물이다.
이 공동연구의 목적은 서양고대철학에서 이성(logos)과 대비되었던 감정(pathē) 개념을 심층적으로 고찰하고, 그 의미와 가치를 현대적인 관점에서 새롭게 정립하는 것이다. 최근까지 고대 그리스철학에서 감정은 항상 이성 아래에 위치하며, 올바른 세계이해의 방해물로 폄하된 것으로 해석되어 왔다. 즉 감정은 기껏해야 개인적인 희로애락과 연관되며, 따라서 인간의 영혼 안에서 마땅히 근절되어야 할 동물적 차원의 본능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고대 그리스철학의 내면적인 특성과 실제적인 흐름에 대한 심각한 오해이다. 비록 대다수 그리스 철학자들이 이성에 기초한 합리적 사고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은 사실이나, 자신 앞에 놓인 사태에 대한 이성적인 판단은 올바른 감정형성과 더불어 비로소 시작될 수 있음을 심층적으로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 점은 고대 그리스뿐만 아니라 중세나 근세철학의 다양한 논의들에 대한 관찰을 통해서도 재차 확인할 수 있다. 따라서 지금까지 철학사에서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여졌던 이성과 감정의 단순한 분리와 대립, 그리고 일면적인 우위설정은 지양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를 위해선 먼저 서양철학의 시원인 고대 그리스에서 감정을 어떻게 평가했는가, 그리고 이성과 감정의 조화를 위해서 어떤 노력을 기울였는가에 대해 심층적인 논의가 필요하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철학자가 이성의 영역을 밝히는 데 치중했으며 감정의 영역에 대해서는 비철학적 영역에 놓은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이미 고대부터 철학자들은 감정의 중요성에 대해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만 그것이 후대의 철학자들에 의해 사각지대에 몰렸을 뿐이다. 그러므로 이 연구는 오랜 기간 동안 철학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었던 감정을 회복시켜 인간에 대한 온전한 이해를 시도하고자 함이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이 감정에 대해서 논의했다고 하는 것은 어쩌면 완전히 정확한 이야기는 아닐지도 모른다. 그들은 pathē에 대해서 논의했고, 어찌 보면 당연한 이야기일 수도 있겠으나, 우리말 ‘감정’과 그리스어 ‘pathē’는 그 적용범위와 의미함축이 다소 다르다. 사실 그리스어 ‘pathē’가 일상 어법에서 주로 우리말 ‘감정’과 비슷한 의미로 사용되었던 것도 아니다. 무엇인가를 겪는다(paschein)는 말에서 유래한 이 말은 누군가가 무엇을 능동적으로 하는 경우와 대비해서 누군가에게 일어난 모든 우연적인 변화를 포괄하는 넓은 의미로 사용되었다. 그래서 이 말은 일상적인 용법에서 경험, 불운, (질병을 포함하는 좋지 못한) 상태 등의 다양한 의미를 가진다. 물론 pathē의 일상적인 용법 중에 우리가 ‘감정’이라는 말로 표현하는 현상들, 즉 화, 슬픔, 두려움, 미움, 연민 등을 지칭하는 용법도 있었고,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이 주된 관심을 가지고 논의를 한 것은 바로 그러한 용법으로서의 pathē에 대해서였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그들의 논의가 감정에 대한 논의였다고 하는 것이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pathē에 대한 그들의 논의를 감정에 대한 논의라고 할 때, ‘pathē’와 ‘감정’의 차이와 관련해서 몇 가지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 있다. 뒤집어서 말하자면, 몇 가지 염두에 둘 사항을 기억하는 한에서는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의 pathē에 대한 논의를 감정에 대한 논의라고 하는 것이 별 무리가 없다고 할 수도 있겠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은 감정을 이야기할 때 여기에 욕구 중의 일부를 포함시킨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욕구할 때 그 욕구가 격앙된 욕구인 경우, (어쩌면 우리가 ‘욕망’이라고 부를 종류의) 그러한 욕구는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에게 있어서는 감정에 포함되는 것이다. 사실 동양의 전통적 감정분류법이라고 할 수도 있을 칠정의 목록에 욕(慾)이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볼 때, 어떤 종류의 욕구는 우리에게 있어서도 감정으로 간주되어 왔다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어찌 되었든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현재 우리가 욕구를 감정에 포함시키든 그렇지 않든,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은 욕구 중의 일부를 pathē에 포함시켰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의 pathē에 대한 논의를 감정에 대한 논의라고 이해하고자 한다면, 이때의 감정에는 어떤 종류의 욕구들, 예컨대 성욕이나 식욕(혹은 식탐) 따위의 욕구들이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나아가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은 감정을 hormai라고 보았다. hormai란 자발적인 신체의 움직임을 야기하는 원인이 되는 것으로서의 영혼의 움직임을 일컫는 말이다. ‘영혼의 움직임’ 따위의 고대 그리스어식 표현을 사용해서 그렇지, 요즈음 말로 하자면 감정이 행위의 동기라는 것이다. 감정이 행위의 동기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은 어찌 보면 너무도 당연한 이야기인 것으로 생각될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때때로 분노 때문에, 질투 때문에, 또 여타의 감정들 때문에 이러저러한 일들을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우리는 보통 감정을 행위의 동기와 바로 연결하지 않는다.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바에 따르면, 감정은 어떤 종류의 욕구를 산출하고 이렇게 산출된 욕구가 바로 행위의 동기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누군가가 나를 해코지하면, 나는 그에게 화가 나고, 나의 화는 그를 혼내주고 싶어 하는 욕구를 산출하며, 화 자체가 아니라 화로부터 나온 욕구가 그를 혼내주는 나의 실제 행위의 동기라고 보통 생각하는 것이다. 어쩌면 우리가 욕구를 감정의 하나로 생각하지 않는 이유가 바로 감정과 행위를 매개해 주는 것이 욕구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어서인지도 모르겠다. 욕구가 감정과 행위를 매개해 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당연히 욕구 자신은 하나의 감정이 될 수 없을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거꾸로 고대 그리스철학자들은 감정이 행위의 동기로 작동하는 데 있어서 욕구의 매개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어떤 종류의 욕구는 감정에 포함시키는 것을 이상스럽게 생각하지 않았는지도 모르겠다. 앞에서 언급된 사항들을 기억하고 있는 한,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의 pathē에 대한 논의를 감정에 대한 논의라고 해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사실 우리가 감정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생각들이 체계적인 이론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 것이 아닌 한에서, 어떤 것이 감정에 포함되는지 그렇지 않은지, 또 감정의 성격이 어떤 것인지 등에 대한 우리의 생각은 어느 정도 가변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감정의 성격이나 감정 목록 등은 모두 체계적인 감정 이론이 밝혀줄 내용에 포함되는 것일 터이기 때문이다.
고대 그리스 철학사에서 최초로 감정에 대한 체계적인 이론을 제시한 것은 스토아 학파라고 볼 수 있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도 명백하게 감정에 대한 논의라고 보아야 할 논의들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특별히 pathē라는 말을 감정에 국한해서만 사용한 것은 아니었다. 따라서 이들이 pathē에 대해서 논의한 모든 것이 감정에 대한 논의였던 것은 아니다. 또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가 감정이라는 의미로 pathē에 대해서 논의하는 경우에도 그러한 논의를 통해서 (예컨대 필레보스편에서나 수사학에서) 이들이 감정에 대한 체계적인 이론을 제시하고 있다고 보기는 어려운 측면이 있다.
이와 비교해서 스토아 학자들은 pathē라는 말을 감정을 지칭하는 일종의 전문용어로 사용하게 되며, 이와 더불어 감정에 대한 체계적인 이론이라 할 만한 것을 제시하기에 이른다. 그런데 스토아 학자들의 감정 이론은 감정에 대한 현대적 상식만이 아니라 고대에서의 상식과도 많이 어긋나 보이며, 이 후에 많은 비판을 받게 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스토아 학파의 감정 이론이 비판을 받았든 그렇지 않든, 이후 고대 그리스 철학사에서 감정에 대한 논의는 스토아 학파의 감정 이론과 관계해서 진행되었다고 볼 수 있다. 스토아 학파는 감정에 대한 체계적인 이론을 제시함으로써, 그 이론을 받아들일지 그렇지 않을지의 문제와 별개로, 감정 이론이 대답해 주어야 할 것이 어떤 종류의 것들인지에 관한 문제를 설정해 주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다른 한 편으로 보자면, 스토아 학파의 감정 이론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감정에 대한 견해들이 없었다면 등장하기 어려운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스토아 감정 이론은 바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을 거부하면서 등장하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고대 그리스 철학에서 감정에 대한 생각이 어떻게 전개되었는지에 대한 이해를 얻고자 한다면, 플라톤으로부터 시작해서 스토아를 거쳐서 그 이후에 또 어떠한 생각들이 전개되었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하겠다.
플라톤 철학에서 감정은 추론, 인식, 합리적 판단 등 이성의 지적인 작용과는 전적으로 무관하며, 우리가 탁월하고 행복한 삶을 영위해 나가는데 방해요소일 뿐인가? 흔히 알려진 바와 달리, 플라톤에 따르면 감정은 영혼을 교란시키기에 무조건 배격하거나 근절해야 할 오류투성이가 아니라, 오히려 본능에 의거한 인간의 자연적인 성향의 표출로 볼 수 있다. 국가편의 영혼 삼분의 논의를 면밀히 고찰해 보면, 감정은 영혼의 지적인 작용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으며, 훌륭한 삶을 영위하기 위해 이성과 더불어 긍정적인 역할을 하고 있음이 드러난다. 즉 영혼의 감정적인 영역은 자체로서 사유하고 판단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으며, 역으로 영혼의 이성적인 부분도 자신의 인식과 판단내용을 현실 속에서 구현하기 위해 나름대로 행위에로의 욕구와 의지를 드러내고 있다. 이와 같은 차원에서 플라톤은 만약 감정이 좋은 교육에 의해 올바른 방향으로 인도된다면, 이성적인 생각과 행동을 고수하는 능력으로 활용될 수 있다고 보았다. 특히 국가를 구성하는 세 계층 중 수호자 계층의 인성개발 과정에서 올바른 감정교육의 중요성이 강조된다. 수호자 계층, 즉 군인은 개인적인 희로애락과 무관하게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의 국가를 사랑하고 희생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나라를 수호하는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보다도 용기인데, 이것은 두려워해야 할 것과 그렇지 않은 것에 관한 냉철한 판단력을 갖추고, 자신의 올바른 생각을 제대로 파악하여 그것을 고수하려는 태도이다. 이처럼 영혼의 격정적인 부분은 스스로 생각하고 의견을 제시하는 지적인 능력을 자신 안에 포함하고 있으며, 따라서 감정교육은 올바른 생각 및 의견개진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플라톤을 비판적으로 계승한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서 감성 자체가 훌륭한 삶의 충분조건은 아니다. 그러나 그는 인간이 자유롭게 되고자 한다면 욕구의 원천인 감성이 논리적으로 먼저 존재해야 하며, 이 욕구를 실현시키는 능력인 지성이 그것에 수반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이 문제를 아리스토텔레스 감성능력이 결핍된 본성적 노예의 예를 통해 설명하고 있다. 본성적 노예란 이성을 통해서 대상을 이해할 수는 있으나 그것을 소유할 수는 없는 사람을 일컫는다. 즉 그는 자발적으로 행해져야만 하는 것을 스스로 결정할 수 없기 때문에, 적절한 방식의 심사숙고를 통해서 훌륭한 삶을 성취할 수도 없다. 다른 한편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감성으로부터 일어나는 유일한 속성은 자유를 사랑하는 것이다. 감성은 다른 사람을 명령하려는 충동을 불러일으키는데, 만약 이런 감성을 결핍하고 있다면 그는 본성적인 노예로 전락하고 만다. 감성이 불러일으키는 어떤 욕구들의 부재에서 노예는 노예 이상이 되려는 충동을 결핍하게 된다. 본성적 노예가 훌륭한 삶에 관해 심사숙고할 수 없고 감정이 훌륭한 삶이 요구하는 욕구들을 산출할 수 없다면 본성적 노예는 심사숙고에 실패할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감성이 이성과 달리 우리에게 자신의 훌륭한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추진력으로서 적합한 욕구들을 추구하는 원동력이 된다는 점을 통찰하였다. 나아가서 이 감성의 힘은 이웃과의 관계에서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의미에서 남을 지배하고 남에게 지배당함으로써 자아실현의 기초가 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스토아 학파의 감정 이론은 두 기본적인 주장을 통하여 설명될 수 있다: (가) 감정은 믿음이다, (나) 감정은 거짓된 믿음에 기초하고 있다. 이 두 문장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배경이 되는 다른 주장들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스토아 철학자들은 모든 종류의 감정이 행위의 동기(hormai)를 제공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주장은 이들만의 독특한 주장은 아니다. 감정이 행위의 동기가 된다는 주장은 고대 그리스인들에게는 일반적이었기 때문이다. 감정 문제와 관련하여 스토아 학파만의 고유한 주장은 감정은 어떤 한 종류의 믿음이기 때문에 행위의 동기라는 점이다. 여기서 그들은 믿음을 ‘어떤 X가 좋다 나쁘다’라고 판단하는 믿음과 ‘어떤 한 행위를 해야 한다’는 믿음으로 세분화 한다. 이는 행위의 동기를 명확하게 밝히려는 노력의 소산이다. 그러므로 행위의 동기가 어떤 것을 행해야 한다는 믿음에 근거하고, 감정이 행위의 동기가 된다는 사실로부터, 감정이 어떤 것을 행해야 믿음에 근거한다는 것이 논리적으로 도출된다. 다른 한편, 감정이 거짓된 믿음에 기초한다고 할 때, 그 믿음의 내용이 ‘좋다, 나쁘다’는 것에 대한 것이다. 따라서 믿음이라는 측면에서 감정이 거짓된 믿음이라면, 행위의 동기라는 측면에서는 감정은 이성이 아닌 비이성적인 행위의 동기가 될 것이다. 뒤집어서 얘기하자면, 스토아 학파에서는 이성적인 능력을 최대로 발휘하는 것이 현자가 되는 길이다. 그런데 감정에 빠진 사람은 행위와 믿음의 합당하고 이성적인 근거를 찾지 못하고, 오히려 그 근거, 원인을 해명하려는 시도 자체를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이들은 감정을 이성을 거부하는 영혼의 움직임이라고 정의한다.
에피쿠로스는 동시대 헬레니즘철학의 지평 안에서 사상적 경쟁관계에 있었던 스토아 학파와 달리, 감정이 영혼을 교란시키는 것으로 간주하고 생활 속에서 배격하거나 부정적인 태도로만 않았다. 오히려 그는 감정이 올바른 방향으로 제대로 인도될 경우, 행복한 삶을 위해 나름대로 의미 있는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보았다. 감정은 경우에 따라서 혹은 지속적인 노력을 통해서 어떤 영혼의 혼란으로부터도 자유로운 유쾌한 느낌이 될 수 있으며, 이 과정을 통해서 유한한 인간은 무한하고 자유로운 신에 근접할 수 있다. 에피쿠로스는 감정의 문제를 욕망의 본성에 대한 분석을 통해 접근한다. 인생에는 어떤 식으로든 충족시켜야만 하는 자연스럽고 필연적인 욕망(식욕, 갈증 etc.)이 존재하며, 이 일반적인 욕구는 누구도 부정하거나 거부할 수 없는, 우리 모두에게 꼭 필요한 것이다. 이에 반해 부귀영화 같은 공허한 믿음에서 따라 나오는 공허한 욕망(물욕, 권력욕, 과도한 성욕 etc.)에 사로잡힌 사람은 결코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킬 수 없으며, 오히려 이로 인해 불필요한 고통이 발생하게 된다. 따라서 에피쿠로스에게 있어서 인생의 최종 목표인 쾌락에 도달하는 최선의 방책은, 오직 자연적이며 공허하지 않은 욕망들을 충족시킴으로써 삶을 영위해 나가는 것이다. 이처럼 쾌락과 고통의 감정에 대한 에피쿠로스의 이해는 욕구의 분석과 밀접하게 연결된다. 다른 한편 에피쿠로스는 쾌락과 고통을 포함한 모든 감정은 결코 단순하고 즉흥적인 충동의 산물이 아니라, 매우 직접적인 방식으로 우리의 믿음에 의존하고 있다는 점을 통찰하였다. 대상에 대한 우리의 믿음이 변하면, 광포한 상태에 빠진 채 불행의 근원이 되는 우리의 감정 역시 유쾌하고 문제없는 삶으로 변화될 수 있다. 예컨대 복수가 자체로서 쾌락을 가져다준다는 믿음은, 행위주체의 화를 공허한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헛된 믿음일 뿐이며, 따라서 공허한 믿음을 제거하고, 공허한 화를 불러일으키는 문제들로부터 자유로워질 때 진정한 쾌락과 행복에 도달하게 된다.
회의론자들은 경쟁하는 여러 주장들을 앞에 놓고 ‘판단 보류’와 ‘판단 중지’를 유지하라고, 주장들에 개입하지 말고 같은 거리에서 바라보라고 제안한다. 왜냐하면 이론들은 사물에 대한 지식을 포함하고 있는데, 정작 사물은 구별할 수도 없고, 측정할 수도, 규정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인식은 사물에 대하여 확실한 앎을 얻지 못하기 때문에, 이로부터 유래하는 판단은 참도 거짓도 아니다. 이런 주장의 결과는 철학이 사물의 본성, 세계의 실재 모습을 탐구한다는 전제를 제거하게 한다. 회의론은 외부 세계에 대하여 ‘알 수 없는 것’으로 간주한다. 이로 인하여 어떤 이론도 더 우위에 있다고 말할 수 없게 되는 결과를 초래한다. 섹스투스 엠피리쿠스가 지적했듯이, 회의론이란 현상이나 판단에 대하여 서로 반대되는 주장을 언제든 제안할 수 있다는 능력이라는 것이다. 즉 어떤 주장도 판단도 확실한 우위를 점하지 못하기 때문에, 한 주장에 대하여 등가의 반대되는 주장을 늘 정립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판단보류, 판단중지의 태도를 필요로 한다. 이 개념들은 고대 회의론의 중심 개념이다. 이런 태도를 유지함으로써 상호 대립하는 주장들 사이에서 어느 하나를 선택하라는 압력으로 인한 심적 혼란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다. 바로 이것이 고대 회의론의 실천적 동기였다. 따라서 극심한 심적 혼란을 야기할 수 있는 극단적인 여러 감정 상태를 회피하라고 회의론자들은 조언하지만, 스토아 학파와는 달리, 더 적극적으로 감정이 가지는 역할을 고려하고 있다.
플로티노스는 자신의 저서 <<에네아데스>>에서 감정을 주제로 집중적으로 논하지는 않는다. 이런 사실이 곧바로 플로티노스 철학에서 “감정”문제를 다룰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영혼과 육체와의 관계 문제 속에서 플로티노스는 감정을 논하고 있다. 먼저 영혼에 대하여 플로티노스는 탐구해 간다. 이런 탐구는 선행 철학자들의 영혼관을 검토하고 비판하는 작업이다. 원자론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영혼이 미세한 원자들의 결합이라고 하면, 영혼은 통일성이나 공감을 갖지 못할 것이다. 또 그는 스토아 학파가 주장하는 것처럼 물질이라고 하면, 영혼은 생명의 원리인데, 물질은 성질과 생명을 갖지 않고, 또 영혼은 사유하는 실체인데 물질은 사유하지 못하기 때문에, 스토아 학파가 내세우는 영혼은 심각한 결함을 가지고 있다고 비판하다. 더 나아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혼론도 비판한다. 플로티노스는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에서 영혼과 육체의 관계는 형상과 질료의 관계로 대체될 수 있다고 언급한다. 그러나 영혼은 육체가 목적으로 획득해야 할 형상이 아니다. 플라톤도 플로티노스의 비판을 피해 가지는 못한다. 플로티노스에 따르면, 플라톤이 영혼과 육체의 결합에 대하여 자주 얘기하지만, 그에게서 일관된 입장을 발견하기가 어렵다고 말한다. 그렇지만 플로티노스는 자신의 사상적 스승인 플라톤처럼 개별 영혼인 인간의 영혼 이외에도 세계영혼과 별들의 영혼에 관하여도 언급하고 있다. 또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입장에 동조하면서, 세계영혼과 개별 영혼의 특징은 운동 능력과 사유 능력이라고 지적한다. 플로티노스에게서 우리의 영혼은 세계영혼 그리고 다른 영혼들과 본질적으로 동일하며, 세계영혼은 정신과 감각계를 연결하는 중간자이다.
윤리적인 삶에서 감정의 적극적인 역할을 부정하는 이성 중시의 합리주의적 전통에 반해, 도덕적 판단의 사실상의 원천은 이성이 아닌 감정이며, 감정 안에서 보편타당한 윤리적 가치와 실천법칙이 그 모습을 드러낼 수 있다고 보는 철학적 입장이 최근 주목을 받고 있다. 이 입장은 감정윤리학으로 불리는데, 감정을 윤리학 내지 도덕철학에 끌어들임으로써 비로소 가치 있는 삶의 모습을 도출해 낼 수 있다는 확신에서 출발한다. 감정윤리학에 따르면 감정은 단순히 맹목적 충동이 아니라 이성의 기능에 비견할 만큼 인간 생활에서 중요하고 또 복잡한 구조로 되어 있다. 즉 윤리영역 안에서 핵심적인 요소 중의 하나인 감정은, 이성과 마찬가지로 인지적 요소를 자신 안에 갖추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와 같은 감정의 윤리적 기능에 대한 현대학자들의 강조가 단순히 이전 시대에 대한 반동이나 한 순간의 시대적 흐름에 그치는 것이 아님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최근 새롭게 부각되고 있는 감정의 능동적이며 인지적인 기능에 관한 논의의 시원에는 고대 그리스철학자들의 사유가 바탕에 깔려 있다. 즉 이미 고대 그리스철학에서는 감정의 구조와 특성에 대한 세밀한 관찰과 분석을 토대로, 감정이 도덕적 행위에서 나름대로의 타당성을 지니며, 나아가서 올바른 행동을 동기화시킨다는 입장에서 감정의 도덕적 역할과 기능을 인정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바람직한 도덕적 감정을 함양함으로써 궁극적으로 가치 있는 삶을 구현하기 위하여 고대철학자들은 구체적으로 어떤 노력을 기울였는가에 주목하고자 한다.
필자들은 이 책이 고대 그리스철학의 감정에 대한 논의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에게, 이 개념의 의미와 가치를 전달하는 길잡이 역할을 할 수 있기를 바란다.
목차
플라톤 국가에 나타난 중간자적 존재로서의 영혼의 ‘격정적인 부분’과 ‘영혼의 습관화’ 문제
/ 박규철_____19
자유에 대한 욕망으로서 아리스토텔레스의 튀모스(thymos) 개념
/ 김요한_____41
스토아 감정 이론에서 감정의 극복
/ 강성훈_____63
포세이도니오스의 감정론 이해를 위한 시론(試論)
/ 서영식_____95
에피쿠로스 철학에서 감정
/ 송대현_____117
퓌론주의자들의 감정에 대한 이해
/ 김은중_____143
플로티누스에서 감정의 문제
/ 최양석_____187
저자 소개

저자 : 박규철외6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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