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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SBN | ISBN-13 : 9791157956579 |
|---|---|
| 쪽수 | 424쪽 |
| 크기 | 기타 규격 |
| 제품구성 | 단행본 |
- 인문/역사 > 한국역사/지리
임진왜란 3개월 전부터 전사하기 이틀 전까지 2,539일간의 기록들
국보 제76호, 2013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
류성룡에 대한 걱정, 원균에 대한 비판, 나라에 대한 애틋함
임진왜란을 승리로 이끌 수 있었던 비책(秘策)이 담긴 일기
1597년 9월 15일 명량해전 전야 일기
15일 계묘. 맑음. 조수(潮水)를 타고 여러 장수를 거느리고 우수영 앞에 바다로 진을 옮겼다. 벽파정 뒤에는 명량이 있는데 수효 적은 수군으로는 명량을 등지고 진을 칠 수 없는 까닭에서였다. 여러 장수를 불러 모아 약속하기를, 병법에는 죽으려 하면 살고, 살려고 하면 죽는다고 했고, 또 한 사람이 좁은 길을 지키면 천 사람을 두렵게 할 수 있다고 했으니 지금 우리를 두고 이름이라, 너희들은 살 마음을 먹지 말라. 조금이라도 군령을 어기면 즉각 군율대로 시행해서 작은 일일망정 용납하지 않겠다고 하면서 두 번 세 번 엄중하게 약속했다. 이날 밤에 꿈을 꾸었는데, 어떠한 신인(神人)이 지시(指示)하면서 말하기를 이와 같이 하면 크게 이기고, 이와 같이 하면 지게 된다는 꿈이었다.
이 일기는 이순신 장군이 명량해전 전야에 쓴 일기로 이순신 장군의 결의를 느낄 수 있는 글이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죽고자 하면 살 것이요, 살고자 하면 반드시 죽을 것이다”라는 말과 “한 사람이 좁은 길을 지키고 서 있으면 능히 천 사람도 막을 수 있다”라는 말은 이순신 장군님이 명량해전을 앞두고 여러 장수에게 하신 말씀이다.
그러나 당시 상황은 결의를 다진다고 해서 용기가 나는 상황이 아니었다. 원균이 이끄는 수군이 칠전량에서 대패해 궤멸에 가까운 타격을 입어 전선이라곤 판옥선 12척이 전부였다. 당시 왜군의 규모는 명확하지 않으나 133척이었다고 추정되니 누가 보더라도 패색이 짙은 전투였다. 이순신 장군이 꿈까지 운운하면서 장수들의 사기를 높이고자 할 만큼 매우 급했던 상황을 잘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이순신 장군이 처절할 정도의 결의를 다지고 사기를 북돋울 때 조정에서는 수군을 없애고 육군으로 편입하려고 했고 선조 또한 이순신을 육군으로 돌리려고 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이순신 장군은 유명한 어록으로 이를 잠재운다.
임진년부터 5·6년간 적이 감히 호서와 호남으로 직공하지 못한 것은 수군이 그 길을 누르고 있어서입니다. 지금 신에게는 아직도 열두 척의 전선이 있사오니 죽을 힘을 내어 맞아 싸우면 이길 수 있습니다. 지금 만약 수군을 모두 폐한다면 이는 적들이 다행으로 여기는 바로, 이로 말미암아 호서를 거쳐 한강에 다다를 것이니 소신이 두려워하는 바입니다. 비록 전선의 수가 적으나 미천한 신이 아직 죽지 아니하였으니 왜적들이 감히 우리를 업신여기지 못할 것입니다.
『이충무공전서』, 이분, 「행록」
이처럼 최악의 상황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는 불굴의 의지는 현대를 사는 지금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아닐까 한다. 이순신 장군의 길고도 장엄한 투쟁의 기록이 담긴 난중일기가 여전히 많은 사람에게 여전히 읽히고 있는 이유가 아닐까?
이순신 3부작을 연출한 김한민 감독 역시 “힘들 때마다 ‘난중일기’를 습관처럼 읽으면서 남의 일기를 훔쳐보는 재미도 있었다.”고 했고, 영화 ‘한산’에서 이순신역을 연기한 박해일은 “이순신 장군은 붓과 활이 잘 어울리는 군자다운 무인”이라고 했다.
조선 역사의 가장 치욕적인 고통과 함께 가장 많은 희생자를 낸 임진왜란은 아이로니컬하게도 가장 많은 관객을 동원한 영화와 드라마의 소재로 자주 등장하고 있으며 한국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로 평가받는 이순신이라는 명장을 배출하기도 했다.
‘난중일기’는 충무공 이순신은 임진왜란에서 조선의 수군을 지휘해 한산도, 명량, 노량 등지에서 왜병을 격퇴하고 전란의 전세를 조선의 승리로 이끈 명장이다. 사후 조선 조정으로부터 충무공(忠武公)의 시호를 받았다. 난중일기는 여해(汝諧) 이순신이 임진왜란이 발발하는 조선 선조 25년(1592년) 음력 1월 1일(양력 2월 13일)부터 노량해전에서 전사하기 이틀 전인 선조 31년(1598년) 음력 9월 17일(양력 10월 16일)까지의 2,539일간의 군중에서의 생활과 전란의 정세에 관한 내용을 적은 진중의 일기이다.
[목 차]
책머리에
임진년(1592)
임진년 정월 | 임진년 2월 | 임진년 3월 | 임진년 4월 | 임진년 5월 | 임진년 6월 | 임진년 8월
계사년(1593)
계사년 2월 | 계사년 3월 | 계사년 5월 | 계사년 6월 | 계사년 7월 | 계사년 8월 | 계사년 9월
갑오년(1594)
갑오년 정월 | 갑오년 2월 | 갑오년 3월 | 갑오년 4월 | 갑오년 5월 | 갑오년 6월 | 갑오년 7월 | 갑오년 8월 | 갑오년 9월 | 갑오년 10월 | 갑오년 11월
을미년(1595)
을미년 정월 | 을미년 2월 | 을미년 3월 | 을미년 4월 | 을미년 5월 | 을미년 6월 | 을미년 7월 | 을미년 8월 | 을미년 9월 | 을미년 10월 | 을미년 11월 | 을미년 12월
병신년(1596)
병신년 정월 | 병신년 2월 | 병신년 3월 | 병신년 4월 | 병신년 5월 | 병신년 6월 | 병신년 7월 | 병신년 8월 | 병신년 윤?8월 | 병신년 9월 | 병신년 10월
정유년(1597)
정유년 4월 | 정유년 5월 | 정유년 6월 | 정유년 7월 | 정유년 8월 | 정유년 9월 | 정유년 10월 | 정유년 11월 | 정유년 12월
무술년(1598)
무술년 정월 | 무술년 9월 | 무술년 10월 | 무술년 11월
에필로그
이순신 연보
[본 문]
초2일 - 맑음. 아침에 출발하여 바로 당진 선창(唐津船倉, 통영군 산양면)에 이르니 왜적의 배 20여 척이 나열하여 정박하고 있었다. 둘러싸고 싸웠는데 큰 배 한 척은 크기가 우리나라 판옥선만 하고, 배 위에 꾸민 누각은 높이가 두 길은 됨직했다. 누각 위에는 왜장(倭將)이 우뚝 버티고 앉아서 끄떡도 하지 않았다. 화살과 크고 작은 승자총통(勝字銃筒)을 비 오듯이 어지럽게 마구 쏘아 댔다. 왜장이 화살에 맞아 떨어지자 여러 왜적들은 일시에 놀라 흩어졌다. 여러 장병들이 한꺼번에 모여들어 사격해 대니 화살을 맞아 쓰러지는 자 얼마인지 알 수 없었다. 남김없이 다 섬멸해 버렸다. 이윽고 왜적의 큰 배 20여 척이 부산으로부터 바다에 대열을 지어 들어오다가 우리 군사들 바라보고는 도망쳐서 개도(介島, 통영군 산양면 추도楸島)로 들어가 버렸다.
- 38쪽 ‘임진년 6월 초2일 일기’ 전문
26일 (정미) - 맑기도 하고 비가 내리기도 했다. 원 수사가 왔다. 이윽고 우영공(이억기)·정 영공(정걸)이 한꺼번에 모였다. 순천 부사·광양 현감·가리포 첨사는 즉시 돌아갔다. 흥양 현감이 오기에 제사 음식을 대접했다. 원공이 술을 마시고 싶다고 하므로 조금 주었더니 잔뜩 취하여 흉측한 말을 함부로 지껄여 대니 해괴하다. 낙안 군수가 풍신수길(豊臣秀吉, 도요토미 히데요시)이 명나라 조정에 올린 글의 초안과 명나라 사람이 낙안에 당도하여 기록한 것을 보내왔는데 통분함을 이길 수 없었다.
- 92쪽 ‘계사년 8월 26일 일기’ 전문
초5일 (계미) - 새벽에 겸사복(兼司僕, 윤붕尹鵬)을 당항포로 보내어 적선을 쳐서 불태웠는지를 탐지하게 했더니 우조방장 어영담이 급히 보고하기를 적들이 우리 군사들의 위엄을 두려워하여 밤을 타서 도망 가고 빈 배 17척을 남김없이 불태워 버렸다고 하며 경상 수사의 보고도 같은 것이었다. 우수사가 찾아왔을 즈음 비가 크게 내리고 바람도 몹시 사나워 즉시 그의 배로 돌아갔다. 이날 아침 순변사에게서도 토벌 독려 공문이 왔다. 우조방장 및 순천 부사·방답 첨사·배 첨사(배경남裵慶男)도 와서 서로 이야기하고 있는 사이에 원 수사가 배에 오자 여러 장수들은 각각 돌아갔다. 이날 저녁 광양의 새 배가 들어왔다.
- 119쪽 ‘갑오년 3월 초5일 일기’ 전문
초8일 (신축) - 맑음. 나라의 제삿날(세조의 제삿날)이다. 이날 새벽 일찍 식사를 하는데 고기 반찬을 차렸으므로 먹지 않고 도로 내어 보냈다. 아침 식사 후 길을 떠나 감목관 있는 곳으로 가니, 감목관 및 영광 군수가 같이 있었다. 국화 떨기 속에 들어가서 술을 몇 잔 마셨다. 저물어서 동산원(東山院, 무안군 현경면 옹산원翁山院)에 도착하여 말에 먹이를 주고 말을 재촉하여 임치진(臨淄鎭)에 가니, 이공헌(李公?)의 8살 난 딸이 그의 사촌의 계집종 수경(水卿)과 함께 와서 인사했다. 공헌(公?)을 생각하니 애처로움을 이길 수 없었다. 수경은 내버린 아이를 이담(李琰)의 집에서 얻어다 기른 아이였다.
- 316쪽 ‘병신년 9월 초8일 일기’ 전문
19일 (기묘) - 맑음. 일찍 길을 떠나며 어머님 영전에 하직을 고하고 호곡(號哭)했다. 어찌하리오. 어찌하리오. 천지간에 나와 같은 일이 어디에 있으리오. 어서 죽느니만 같지 못하다. 뇌(?)의 집에 이르러 조상의 사당에 하직을 고하고 가다가 금곡(金谷, 연기군 광덕면) 강 선전(姜宣傳)의 집 앞에 이르러 강정(姜晶)·강영수(姜永壽) 씨를 만나 말에서 내려 곡을 하고 갔다. 보산원(?山院, 광덕면)에 이르니 천안 군수가 먼저 와서 냇가에서 말을 내려 쉬고 있었다. 임천 군수(林川郡守) 한술(韓述)이 중시(重試, 초시에 합격한 사람이 다시 보는 과거)를 보러 서울로 올라오는데 앞길을 지나가다가 내가 간다는 소식을 듣고 들어와서 조문(弔問)을 하고 갔다. 아들 회·면과 조카 봉·해·분·완 및 변 주부(卞主簿, 변존서)가 함께 따라왔다. 천안(天安)의 원인남(元仁男)도 찾아왔기에 작별하고 말에 올랐다. 가다가 일신역(日新驛, 공주군 장기면)에 이르러 잤다. 저녁에는 비가 뿌렸다.
- 330쪽 ‘정유년 4월 19일 일기’ 전문
18일 (정미) - 맑음. 새벽에 이덕필과 변홍달이 와서 전하기를, 16일 새벽에 수군이 야간 기습을 받아 통제사 원균과 전라 우수사 이억기·충청 수사 및 여러 장수 등 다수가 해를 입어 수군이 대패했다고 하니 들려 오는 것마다 통곡이 나오는 것을 이길 수 없다. 이윽고 원수가 이르러서 말하기를, 일이 이미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어찌하리오 하면서 오전 10시경까지 이야기했으나 뜻을 정할 수가 없었다. 나는 내가 연해안 지방으로 가서 듣고 보고 한 뒤에 결정하겠다고 고했더니 원수는 더할 나위 없이 기뻐했다. 나는 송대립·유황·윤선각·방응원·현응진·임영립·이원룡·이희남·홍우공과 더불어 길을 떠나 삼가현에 이르렀더니 삼가 현감이 새로 도임하여 나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한치겸(韓致謙)도 와서 오래 이야기했다.
- 363쪽 ‘정유년 7월 18일 일기’ 전문
15일 (계묘) - 맑음. 조수(潮水)를 타고 여러 장수들을 거느리고 우수영 앞바다로 진을 옮겼다. 벽파정 뒤에는 명량(鳴梁)이 있는데 수효 적은 수군으로는 명랑을 등지고 진을 칠 수 없는 까닭에서였다. 여러 장수들을 불러 모아 약속하기를, 병법에는 죽으려 하면 살고, 살려고 하면 죽는다고 했고, 또 한 사람이 길을 지키면 천 사람을 두렵게 할 수 있다고 했으니 지금 우리를 두고 이름이라, 너희 여러 장수들은 각각 조금도 영을 어긴다면 즉각 군율대로 시행해서 작은 일일망정 용납하지 않겠다고 하면서 두 번 세 번 엄중하게 약속했다. 이날 밤에 꿈을 꾸었는데, 어떠한 신인(神人)이 지시(指示)하면서 말하기를 이와 같이 하면 크게 이기고, 이와 같이 하면 지게 된다는 꿈이었다.
- 377쪽 ‘정유년 9월 15일 일기’ 전문
초2일 (갑인) - 맑음. 오전 6시경에 진군했는데 우리 수군이 먼저 출항하여 12시까지 서로 싸워 적을 많이 죽였다. 사도 첨사(황세득黃世得)가 탄환을 맞아 전사하고, 이청일(李淸一)도 죽음에 이르게 되고, 제포 만호 주의수(朱義壽)·사량 만호 김성옥(金聲玉)·남해 현령 유형(柳珩)·진도 군수 선의문(宣義問)·강진 현감 송상보(宋尙甫)는 탄환을 맞았으나 죽지 않았다.
초3일 (을묘) - 맑음. 도독이 유 제독의 비밀 서신을 받고 초저녁에 나가 싸워 밤 12시경에 이르도록 쳐부수었다. 사선(沙船, 명나라 배) 19척과 호선(?船, 명나라 배) 20여 척이 불타서 도독이 엎드러지고 넘어지는 모습은 말로 표현할 수 없다. 안골포 만호 우수(禹壽)가 탄환을 맞았다.
초4일 (병진) - 맑음. 이른 아침에 배를 출항하여 적을 공격했다. 종일 맞붙어 싸웠더니 적들이 허둥지둥 달아났다.
- 409쪽 ‘무술년 10월 초2일, 3일, 4일 일기’ 전문


조선 인종 원년인 1545년 서울 건천동에서 태어났다. 자는 여해(汝諧)다. 32세 때인 1576년 무과에 급제해 공직에 나섰으나 강직한 성품 탓에 모함을 받아 파직했다가 복직하기를 반복했다. 그러면서 함경도 동구비보 권관, 훈련원 봉사, 충청 병사 군관, 발포 수군만호, 함경도 건원보 권관, 훈련원 참군, 사복시 주부, 조산보 만호 겸 녹둔도 둔전관, 전라순찰사 군관 겸 조방장 등을 거쳤다. 1591년 전라좌도 수군절도사로 임명되었고,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옥포해전, 적진포해전, 당포해전 등을 이끌며 전승했다. 1593년 삼도수군통제사에 임명된 후 1594년 장문포해전, 영등포해전 등에서도 승리를 거두었다. 1597년 조정을 기망한 죄로 파직되어 투옥되었고 출옥 후엔 도원수 권율 밑에서 백의종군했다. 그해 여름 원균이 이끌던 조선 수군이 칠천량해전에서 대패하자 삼도수군통제사에 다시 임명되어 그해 9월 명량해전에서 12척의 배로 130여 척의 왜선과 맞서 대승을 거두었다. 1598년 노량해전에서 왜선 500여 척과 싸우다 총탄에 맞아 54세의 나이로 전사했다. 1643년 ‘충무(忠武)’의 시호를 받았으며 1793년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1795년 정조의 명에 의해 유고 전집 『이충무공전서』가 발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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