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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0년 전, 그 법정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나?
저자 : 다나카이치로 ㅣ 출판사 : 사람과나무사이 ㅣ 역자 : 서수지

2018.08.03 ㅣ 270p ㅣ ISBN-13 : 9791188635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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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기 A5(210mm X 148mm, 국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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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명인가? 음모인가?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과연 과학을 탄압하는 가톨릭교회와
로마 교황청에 맞서 싸운 영웅이었을까?


과학과 진실을 탄압하는 가톨릭교회와 로마 교황청에 맞서 싸우다 감옥에 갇혀 신음하는 ‘영웅적 과학자’ 갈릴레오 갈릴레이. 이는 18세기 철학자 볼테르를 비롯한 계몽주의자들에 의해 하나의 ‘신화’로 완성되었으며, 나폴레옹도 그 열렬한 신봉자 중 하나였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갈릴레오를 사랑했던 나폴레옹이 로마 교황청의 바티칸 서고와 이단 심문소에서 총 3,239상자, 책 10만 2,435권 분량의 문서를 약탈하면서 갈릴레오 재판에 관한 중요한 문서도 함께 프랑스로 이송되었다. 그리고 그중 상당 부분이 소실됨으로써 갈릴레오를 둘러싼 진실을 밝히는 데 결정적 걸림돌이 되었다. 나폴레옹이 권력을 잃고 몰락한 이후 교황청은 집요한 노력 끝에 ‘갈릴레오 재판 기록’ 중 일부 문서를 간신히 되찾아 오는데…….

400년 전, 위대한 과학자이자 독실한 가톨릭교도였던 갈릴레오 갈릴레이를 피고인으로 이단 심판을 벌인 그 법정에서는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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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 차]

저자 서문

1. 갈릴레오를 사랑했던 나폴레옹
2. 종교재판
3. 은밀하게 다가오는 위기
4. 서막 – 1616년 종교재판
5. 『천문대화』
6. 재판 개시
7. 제1차 심문 – 1632년 4월 12일
8. 제2차 심문 – 1632년 4월 30일
9. 제3차 심문 – 1632년 5월 10일
10. 판결
11. “그래도 지구는 돈다”

주요 등장인물
저자 후기
주요 참고문헌

[본 문]

종교재판이라는 이름이 붙었지만, 재판은 재판인지라 나름대로 규칙과 판례가 있었다. 그런데도 법의 테두리에서 크게 벗어나 면죄부를 줄 수는 없었다는 당연한 사실을 간과하는 사람이 많다. 어쩌면 의도적으로 무시했을 수도 있다. 이러한 사고방식의 배후에는 종교재판 판결이 법정 밖에서 은밀하게 오간 뒷거래에서 벗어나지 못하며, 소문을 믿던 교황을 비롯한 로마 교회 권력자들의 손바닥 안에서 이리저리 놀아났다는 생각이 은연중에 깔려 있다. 이단 혐의로 기소된 사람의 운명은 최고 성직자의 손에, 혹은 그들의 변덕에 온전히 맡겨졌다고 믿었던 셈이다.
‘잘못된 재판’이든 ‘누명’이든 재판 절차를 꼼꼼히 따져보고 판단해야 하며, 재판으로(물론 현대의 재판이 아니라 종교재판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보았을 때) 실제로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분명히 밝혀내자는 게 이 책의 목적이다. 그러나 이런저런 사정으로 이미 여러 연구서가 출간되었음에도 갈릴레오 재판은 최근까지 충분한 검토가 이루어지지 못했다. 제1장에서 다시 자세히 이야기하겠지만,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어리석은 행동과 분탕질로 재판 자료 상당수가 소실되었다는 안타까운 현실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다행히 소실되지 않고 용케 살아남은 재판 자료도 판결문 등을 제외하면 최근까지 바티칸 비밀문서고 밖으로 반출이 허용되지 않았다.
판결문 외의 주요한 재판 기록은 19세기 말부터 20세기에 걸쳐 안토니오 파바로(Antonio Favaro)가 편찬한 『국정판 갈릴레오 갈릴레이 전집(Le opere di Galileo Galilei)』에 담겨 있다. 이 전집은 이탈리아 통일을 목표로 내건 이탈리아 왕국군이 바티칸을 점거했던 1870년 이후의 혼란기에 특별 허가를 받았던 파바로가 바티칸 비밀문서고의 방대한 자료를 취사선택해 한 권의 책으로 엮어 만들어졌다.
이러한 상황에 변화의 물꼬를 튼 사건이 일어났다. 1979년 11월 10일, 당시 로마 교황이던 요한 바오로 2세의 「갈릴레오 갈릴레이의 위대함을 만인이 알 수 있도록 하라」라는 강론이 마중물 역할을 했다. 바티칸 궁전에서 열린 아인슈타인 탄생 100주년 축전 도중에 있었던 강론으로, 이 책에서 검토하려는 갈릴레오 재판에 중요한 분기점이 되었다.
이 강론을 계기로 1980년에 갈릴레오 사건 조사 위원회가 설치되었다. 그때까지 바티칸 비밀문서고에 소장되어 외부인 열람을 허락하지 않았던 갈릴레오 재판 기록이 비로소 세상의 빛을 보게 되었기 때문이다.
― 본문 중에서 (7~9p.)

1798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이끄는 프랑스군이 로마를 침공했다. 나폴레옹은 교황 비오 6세(Papa Pio VI, 재위: 1775년 2월 15일~1799년 8월 29일)의 퇴위를 촉구하고 로마 공화국 수립을 선포했다. 이후에도 프랑스군의 로마 점령은 간헐적으로 되풀이되었다. 급기야 1810년에 나폴레옹은 로마 교황청에 보관되어 있던 모든 문서를 몰수해 프랑스로 이송하라고 명령했다.
그해 2월, 최초로 바티칸 서고에서 문서가 반출되었다. 4월과 7월에는 이단 심문소에 보관되어 있던 문서가 약탈당했다. 프랑스 이송에 필요한 비용은 60만 루블로 추산되었는데, 당시 기준으로는 천문학적 액수였다. 프랑스에 도착한 문서의 양은 총 3,239상자, 책으로는 10만 2,435권에 달했다. 당시 특히 중요하게 여겨진 갈릴레오 재판 기록은 별도로 운송되었다. 갈릴레오 재판 기록이 프랑스에 도착한 후 이를 괘씸하게 여긴 교황 비오 7세는 나폴레옹을 파문한다는 칙서를 내렸다.
뜻밖에도, 나폴레옹이 프랑스로 가져온 바티칸 문서는 대중의 시선을 사로잡지는 못했다. 오히려 그가 1797년에 베네치아에서 가지고 돌아온 날개 달린 사자상이 더 많은 관심을 끌었을 정도였다. 나폴레옹은 그 점에 별로 신경 쓰지 않는 분위기였다. 바티칸 문서가 그에게는 이탈리아 침략의 전과를 과시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라고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나폴레옹은 갈릴레오 재판 기록을 책으로 엮어 출간하려고 했다. 그는 과학의 진보를 저해한 가톨릭교회의 무지몽매함을 대중에게 낱낱이 알리기 위한 도구로 갈릴레오 재판 기록을 활용할 속셈이었다.
― 본문 중에서 (19~20p.)

피렌체 시절, 갈릴레오는 더욱 중요한 발견을 했다. 1610년 12월, 금성이 달과 마찬가지로 차고 이지러짐을 반복한다는 금성의 위상 변화를 발견한 것이었다. 게다가 관측을 계속하면서 금성이 차오르며 작아지고 이지러지며 커진다는 사실도 추가로 밝혀냈다.
이 현상은 지구가 우주의 중심에서 움직이지 않고 태양을 포함한 모든 천체가 그 주위를 돈다고 생각하는 천동설로는 설명할 길이 없었다. 천동설에서는 금성이 지구에서 보면 태양 너머에 가는 경우가 절대 있을 수 없다. 천동설을 받아들인다면 금성은 보름달처럼 완전히 차오를 수 없다. 한편 태양이 우주 중심에 있다고 생각하는 지동설에서는 금성은 지구에서 보면 태양 너머로 움직이면서 점점 멀어지고 작아지며 차오른다. 반대로 태양과 지구 사이에 오면, 크기는 커지지만 차츰 이지러진다.
갈릴레오는 프라하에 머물던 토스카나 대사 줄리아노 데 메디치(Giuliano de’ Medici)에게 “금성은 필연적으로 태양 주위를 돌고 수성과 다른 행성도 마찬가지입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관측을 바탕으로 금성의 위상 변화는 지동설을 뒷받침하는 탄탄한 증거라고 믿게 되었다.
― 본문 중에서 (72~73p.)

갈릴레오는 천동설을 채용하더라도 「여호수아기」와 같은 상황에서는 지구는 자전하지 않기 때문에 태양을 포함한 평소 천체 운행은 천구 전체의 일주운동에 따르며, 태양의 독자적인 움직임과는 무관하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 태양 그 자체는 서쪽에서 동쪽으로 1년에 걸쳐 12개의 별자리를 따라 이동한다. 그러므로 태양의 움직임을 멈추면 도리어 일몰 시간이 빨라진다. 이런 맥락에서 『성서』는 천동설을 지지하지 않는다고 주장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논리적으로는 그의 말이 옳다. 그러나 갈릴레오는 이 편지로 금단의 영역에 들어서고 말았다. 감히 건드려서는 안 되는 『성서』의 해석이라는 위험한 영역에 발을 들인 갈릴레오에게 위기가 닥쳤다. 그는 한술 더 떠서 코페르니쿠스 지동설 지지를 확실하게 표명했다. 허물없는 사이인 제자에게 보내는 편지였기에 방심하고 자신의 속마음을 너무 솔직하게 내비쳤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카스텔리에게 보낸 편지를 완전히 사적인 편지라고 볼 수는 없다. 학회지라는 매체가 없었던 시절에 편지는 연구 성과를 발표하는 수단이기도 했다. 갈릴레오도 자신의 편지가 남의 손에 넘어가리라는 상황 정도는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다. 그런 터라 편지 사본이 공공연히 나돌자 비판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 본문 중에서 (83~84p.)

지동설을 인정하지 않는 완고한 종교인과 싸웠던 영웅적 과학자, 우리가 아는 갈릴레오 갈릴레이라는 이미지를 무너뜨리는 공방이 심문에서 펼쳐졌다. 갈릴레오는 제1차 심문에서 지동설이 “결정적인 사실이 아니다”라는 증거를 보여주려고 했다고 말했다. 그리고 이번에는 “피하려고 했다”고까지 말했다.
이 공술 발언 탓에 갈릴레오의 위대함이 손상되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다. 그러나 당시는 관계자 이외에는 이날 갈릴레오의 공술을 읽을 수 없었다. 갈릴레오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을 터다. 오늘날이 되어서야 겨우 누구나 읽을 수 있게 재판 자료가 공개되었다는 사실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공술 이외에도 갈릴레오는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이 진실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일관되게 주장했다. 만약 자신이 지동설을 믿는다고 오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책을 저술했다면 ‘헛된 야심’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그는 말했다. 요컨대, 자신은 붓을 잘못 놀린 죄밖에 없다는 주장이다.
갈릴레오의 본심에서 우러난 말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그 말을 순순히 믿고 싶지는 않다. 갈릴레오는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믿었다. 1625년 10월 20일에 파리의 엘리야 디오다티(Elie Diodati)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가 지동설을 확신했음을 분명하게 읽어 낼 수 있다.
― 본문 중에서 (203p.)

갈릴레오가 재판 결과에 순순히 승복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전해주는 일화가 남아 있다. 재판 직후에 “그래도 지구는 돈다”라고 혼잣말했다는 이야기다. 너무나 유명해 그 발언의 진실성을 의심하는 경우조차 드물다. 로마 교회의 압력에 굴하지 않고 진실을 꿋꿋이 주장했던 영웅 과학자 갈릴레오 갈릴레이라는 이미지를 굳히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대사다.
갈릴레오의 한마디는 종교와 과학의 대립 구도를 널리 알리는 데 이바지하기도 했다. 이 한마디는 후대 사람들이 갈릴레오 재판 결과를 어떻게 받아들일지 생각할 때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우리는 이 대사가 어떻게 만들어지고 어떻게 전해졌는지 검토해야 한다.
……[중략]
일단 갈릴레오가 “6년간 조사를 받고 고문을 당했다”라는 주장은 사실과 다르다. 말 그대로 자유의 몸이 되었다는 표현도 옳지 않다. 따라서 이 이야기를 그대로 믿기에는 의문이 남는다.
그런데 이 책이 나오고 몇 년 뒤에 비슷한 일화를 전하는 책이 출간된다. 수도원장이라는 저자명만 있는 익명의 인물이 1761년에 프랑스어로 집필한 『문학 논쟁』이라는 책이다. 그 책에는 “자유의 몸이 되자 갈릴레오는 곧장 자책감에 사로잡혔다. 그는 땅바닥을 내려다보고, 발을 구르며 말했다. 그래도 돈다(E pur si m〔u〕ove)”라는 구절이 실려 있다.
갈릴레오가 세기의 명대사를 중얼거렸던 상황을 두고 이 두 권의 책이 이야기하는 내용은 땅바닥을 바라보며 발로 찼다는 부분에서는 일치하지만 세부적인 묘사는 미묘하게 차이가 난다. 또 의미는 같아도 발음하면 거의 차이가 없다고 하지만, 이탈리아어 표기도 미묘하게 다르다. 그러므로 나중에 출간된 수도원장이 먼저 나온 바레티의 책을 인용했다고 단정할 수 없다. 또한 이 두 권의 책보다 앞선 세 번째 출처가 충분히 존재할 가능성이 있다. 두 저자 모두 이 일화의 출처를 밝히지 않았고, 지금까지 다른 정보원도 찾지 못했다.
이 일화를 전해주는 두 권의 책 모두 18세기 중반에 출간되었다는 사실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이미 뉴턴의 만유인력 법칙으로 태양 주위를 도는, 지구를 포함한 여러 행성의 운동이 설명되었고, 누구에게나 지동설이 확고한 진실로 받아들여졌다. 이와 같은 과학의 발전을 배경으로 삼아 18세기부터 갈릴레오는 기독교와 싸운 영웅으로 숭배받게 되었다.
― 본문 중에서 (251~253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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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0년 동안 베일에 감춰져 있던 ‘갈릴레오 재판 기록’이
오롯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다

근대물리학의 기초를 닦은 물리학자이자 아인슈타인・뉴턴과 함께 인류 과학사에 뚜렷한 발자취를 남긴 위대한 과학자 갈릴레오 갈릴레이. 그는 과연 과학을 탄압하는 가톨릭교회와 로마 교황청에 용감히 맞서 싸운 영웅이었을까? 또한, 그는 오늘날 평범한 초등학생도 알 정도로 유명한 “그래도 지구는 돈다”라는 말을 실제로 했을까?
도서출판 사람과나무사이에서 갈릴레오 갈릴레이에 관한 일본 최고 전문가로 인정받는 학자인 다나카 이치로 교수가 ‘갈릴레오 재판’의 진실을 낱낱이 밝힌 책 『400년 전, 그 법정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나?』가 출간되었다.

1633년,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니콜라 코페르니쿠스를 지지하며 지동설을 주창했다는 죄목으로 로마 교황청의 종교재판에 회부되어 재판을 받았다. 그리고 역사적인 재판에서 갈릴레오는 ‘무기한 투옥’이라는 무거운 형벌을 선고받았다. 이튿날 바로 감형되기는 했지만, 이상하리만치 엄격하고 가혹한 이 판결을 두고 오늘날까지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다. 어떤 이는 ‘명백히 잘못된 재판’이라 규정했고, 또 어떤 이는 ‘갈릴레오가 누명을 썼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또 다른 어떤 이는 ‘로마 교황청과 갈릴레오 둘 다 잘못이 없다’는 양시론까지 폈다. 진실은 과연 무엇일까?
오늘날 갈릴레오 재판에 대한 수많은 주장과 억측이 난무하고 음모론까지 종종 제기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흥미롭게도, 18세기 계몽주의자들과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영향이 컸다. 이 점에 대한 저자의 논지를 간략히 살펴보자.
1798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이끄는 프랑스군이 로마를 침공했다. 나폴레옹은 교황 비오 6세를 권좌에서 끌어내리고 로마공화국 수립을 선포했다. 그리고 10여 년 뒤인 1810년에 그는 로마 교황청에 보관돼 있던 대다수 문서를 약탈하여 프랑스로 가져갔다.
당시 나폴레옹이 약탈한 문서의 양은 총 3,239상자, 책으로는 10만 2,435권에 달했다. 그 방대한 문서들 중에는 ‘갈릴레오 재판 기록’도 포함돼 있었는데, 나폴레옹은 다른 어떤 문서들보다 그것을 중요하게 여겼다고 한다. 나폴레옹은 왜 갈릴레오 재판 기록을 약탈했을까? 저자에 따르면, “나폴레옹은 갈릴레오 재판 기록을 책으로 엮어 출간하려고 했다”고 한다. 그는 과학 진보를 가로막고 진리를 왜곡한 가톨릭교회의 무지몽매함과 비합리성을 만천하에 알리기 위한 도구로 갈릴레오 재판 기록을 활용할 속셈이었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이런 생각을 품은 데는 당대의 사회 분위기가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나폴레옹이 프랑스 황제의 자리에 올라 전 유럽을 제패한 18세기 후반부터 19세기 전반 프랑스는 계몽주의의 전성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계몽주의자들은 당시 프랑스를 지배하던 귀족과 성직자들을 거세게 비난했다. 그들은 또 마땅히 과학적 합리주의에 따라 국가를 운영해야 하며, 신학 역시 과학의 합리성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구체제를 대표하는 가톨릭과 성직자들에 대항하고자 했던 계몽주의자들에게 갈릴레오는 새로운 시대정신을 대표하는 상징적 인물로 받아들여졌다. 정복자 나폴레옹의 마음에도 계몽주의 정신이 살아 숨 쉬고 있었다. 그런 터라, 그는 이탈리아반도 침략과 이집트 원정 시 당대의 프랑스를 대표하는 과학자들을 거느리고 갔다.
이런 맥락에서, 계몽주의를 신봉하는 나폴레옹에게 갈릴레오가 겪어야 했던 모진 수난과 수모를 백일하에 드러내는 것은 가톨릭교회의 추잡함과 치부를 만천하에 공개하는 정의로운 일이었다. 다시 말해, 나폴레옹의 갈릴레오 사랑에는 당대의 프랑스 지식인 사회가 공유하는 과학적 합리주의에 대한 신봉과 구체제 계급에 대한 반감과 증오가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었다.
그러나 나폴레옹의 계획은 수많은 장애물에 막혀 의도대로 실행되지 못했을 뿐 아니라 그가 실각하고 엘바섬에 유배당하게 되면서 귀중한 갈릴레오 재판 기록 중 상당수가 소실되어 진실을 정확히 알기가 더 어려워졌다. 아무튼, 로마 교황청의 집요한 노력과 프랑스 정부의 협조에 힘입어 일부 문서나마 반환된 뒤 서고에 보관되어 대중에 공개되지 않았다.
그렇게 갈릴레오 재판 기록은 200년 가까이 로마 교황청의 서고 깊숙한 곳에서 잠자고 있다가 운명적으로 세상에 공개되었다. 1979년 11월 10일, 당시 로마 교황이던 요한 바오로 2세의 「갈릴레오 갈릴레이의 위대함을 만인이 알게 하라」라는 제목의 강론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바티칸 궁전에서 열린 아인슈타인 탄생 100주년 축전 도중 있었던 강론이었다. 이 강론을 계기로 이듬해인 1980년에 갈릴레오 사건 조사 위원회가 조직되었고, 10년이 남는 길고 긴 조사 끝에 1992년 10월 31일 보고서가 제출되었다.
‘갈릴레오 재판 기록’의 진실이 마침내 베일을 벗고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이었다. 이 책 『400년 전, 그 법정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나?』는 그 기록에 근거해 집필되었다. 400년 전, 위대한 천문학자・물리학자・수학자이며 독실한 가톨릭교도였던 갈릴레이를 피고인으로 이단 심판을 벌인 그 법정에서는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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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나카 이치로
고베시에서 태어나 고베대학교 문학부를 졸업했으며, 도쿄대학교 대학원 이과계 연구과 석사 과정을 수료했다. 「근대 유럽의 특허제도 기원과 기술혁신 연구 - 1474년 베네치아 특허법 성립을 중심으로」라는 긴 제목의 학술논문으로 가나자와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전공은 과학 기술사다. 니혼대학교 이공학부 조교수로 일했으며, 이후 가나자와대학교 이학부 자연과학 연구과 교수로도 재직했다. 2012년에 가나자와대학에서 정년퇴임했으며, 현재 명예교수이자 가나자와 의과대학 초빙교수로 활동하며 집필에 전념한다. ‘갈릴레오 갈릴레이’에 관한 일본 최고 전문가로 인정받는 학자로, 『갈릴레오 비호자들의 그물 속에서』를 비롯한 과학사 서적을 다수 집필하고 번역 출간했다.


옮긴이 서수지
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했지만 회사생활에서 접한 일본어에 빠져들어 회사를 그만두고 본격적으로 일본어를 공부해 출판 번역의 길로 들어섰다. ‘나는 읽는다. 고로 존재한다!’가 삶의 좌우명으로 더 많은 책을 읽고 알리기 위해 오늘도 열심히 책을 읽고 옮긴다. 옮긴 책으로 『세계사를 바꾼 10가지 약』 『당신이 잔혹한 100명 마을에 산다면?』 『소수는 어떻게 사람을 매혹하는가?』 『유럽 사상사 산책』 『백곰 심리학』(2010년 문화관광부 추천 우수교양도서) 『처음 시작하는 그리스 신화』 『세상 끝의 아이들』 『어쩌다 너랑 가족』 『천국 마일리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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