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침내 처음으로 만나게 되는 J. D. 샐린저 최고의 걸작, 『아홉 가지 이야기』
최승자 시인의 번역으로 국내에 처음으로 소개되는 『아홉 가지 이야기』는 여러 면에서 의미 깊은 소설이다. J. D. 샐린저는 『호밀밭의 파수꾼』으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사실 『호밀밭의 파수꾼』을 제외한 그의 작품들은 모두 중편 혹은 단편이다. 그중 네 편의 중편이 『목수들아, 대들보를 높이 올려라』와 『프래니와 주이』로 묶여 나왔으며, 샐린저 문학의 정수라 할 수 있는 단편소설들은 단 한 권의 소설집 『아홉 가지 이야기』(1953)로 묶여 출간되었다.
샐린저는 1940년부터 1965년까지 중단편소설을 모두 35편 썼는데, 상기한 두 권의 책에 실린 중편 네 편과 샐린저가 직접 작품을 고르고 제목을 붙인 『아홉 가지 이야기』에 실린 아홉 편이 책으로 출간되었고, 나머지 스물두 편은 최초에 잡지에 발표된 이후 아직 한 번도 책으로 묶여 나오지 않았다. 완벽한 한 점의 도자기만 남기고 아흔아홉 개는 모두 부숴버리는 도공처럼, 샐린저는 『아홉 가지 이야기』에 실린 작품들을 제외한 나머지 단편들은 모두 버린 셈이다. 그러나 샐린저의 열혈 팬들은 1974년에 책으로 묶이지 않은 스물두 편의 단편들을 모아 해적판 선집을 펴내고 비밀리에 돌려 읽을 만큼 샐린저의 작품에 대한 커다란 사랑을 보여주기도 했다.
우연과 필연, 삶의 신비와 아름다움을 그려낸 아홉 개의 보석!
수많은 ‘바나나피시 중독자’(일본에서는 ‘바나나피시’가 인기 만화의 제목이 되기도 했다)를 양산한 「바나나피시를 위한 완벽한 날」을 위시한 아홉 편의 단편들은 편편이 샐린저 문학의 지형과 방향을 짐작하게 한다. 『목수들아, 대들보를 높이 올려라』에 등장한 ‘글래스 일가’가 이 작품집에서도 여전히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데, 특히 「바나나피시를 위한 완벽한 날」은 『목수들아, 대들보를 높이 올려라』에서 화자가 추억하던 맏형 시모어 글래스의 자살을 스케치한 소설로, 샐린저의 작품세계 전체를 이해하는 키워드가 되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바나나피시를 위한 완벽한 날」
1948년 1월 31일『뉴요커』지 21~25p 게재
샐린저의 단편소설 중 가장 유명한 작품인 동시에 그에게 작가의 길을 열어준 작품이기도 하다. 『뉴요커』지에 열 편 이상의 단편소설을 보냈으나 번번이 거절당했던 샐린저가 처음으로 소설을 게재하게 되어 명성을 얻은 것이 바로 이 작품이기 때문이다.
플로리다의 바닷가 휴양지, 주인공 시모어 글래스는 부인인 뮤리엘과 함께 한 호텔에서 휴가를 보내고 있다. 시모어는 언어의 천재이자 감수성 예민한 시인이지만 그의 아내 뮤리엘과 장모와의 전화 통화를 통해 독자는 그가 속물적인 이 세상으로부터 이해받지 못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시모어는 해변에서 시빌이라는 어린 소녀를 만나 ‘바나나피시’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다. 그 직후 호텔방으로 돌아온 시모어는 잠든 부인 곁에서 머리에 권총을 쏘아 자살한다.
‘글래스 가(家) 연작소설’의 첫 작품이기도 한 「바나나피시를 위한 완벽한 날」은 선불교와 에피파니(epiphany), 초월과 신비, 순수와 환멸이라는 샐린저의 중심개념들을 가장 핵심적으로 밝힌 작품이기도 하다. 샐린저가 만들어낸 순수 상징인 ‘바나나피시’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아직도 독자들과 학자들 사이에 많은 의견이 오가고 있다.
「코네티컷의 비칠비칠 아저씨」
1948년 3월 20일 『뉴요커』지 30~36p 게재
어느 겨울 오후, 대학 동창인 두 명의 젊은 중산층 여인이 술을 마시며 지난 이야기를 나눈다. 잃어버린 꿈과 충족되지 않는 일상 속에서 그들은 아주 조금은 현명해졌을지도 모르지만, 그 대가로 얻은 것은 고독과 자기 방치, 그리고 순수의 상실뿐이다. 여주인공인 엘로이즈의 회상 속에 등장하는 옛 연인은 군대에서 사고사를 당해 죽은 글래스 가의 쌍둥이 중 하나인 월트 글래스이다.
「에스키모와의 전쟁 직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