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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차와 시대착오
저자 : 전하영 ㅣ 출판사 : 문학동네

2024.02.07 ㅣ 372p ㅣ ISBN-13 : 9788954698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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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도서 > 문학 > 국내소설 > 한국소설
“아름답고 우아하면서도 냉정한 결기로 반짝인다.”
_젊은작가상 심사평

2021 젊은작가상 대상 수상작가
전하영 첫 소설집!

문학, 영화, 미술
그 모든 아름다운 것들의 디렉터
전하영의 섬세하고 풍부한 수장고-소설 속으로


단편소설 「그녀는 조명등 아래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로 2021 제12회 젊은작가상 대상을 거머쥔 소설가 전하영의 첫 소설집 『시차와 시대착오』가 드디어 독자의 곁을 찾는다. 저온을 유지하는 차분한 문장, 롱 테이크로 촬영중인 영화 속 장면을 좇는 듯한 안정적인 호흡, 현실적인 에피소드의 중첩이 만드는 서사의 부피감, 그리고 그 속에서 문득 돌올하게 모습을 드러내는 삶의 아이러니를 통해 전하영은 자신의 소설에 세련된 분위기와 신선한 감각을 동시에 불어넣었다.
전하영 소설의 참신함이 그가 추구하는 소설쓰기의 방식 자체에서 비롯된다는 점은 주목을 요한다. 소설가로서의 전하영은 ‘아트 디렉터’라 불릴 만한데, 다양한 예술 분야를 소설 안으로 왕성하게 끌어와 배치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영화를 공부하고 영상 예술가로 활동한 이력을 지닌 그는 텍스트를 마치 필름처럼 편집하는 장기를 발휘하여 영화를 닮은 장면 전환을 구현하고(「영향」 「남쪽에서」), 실제로 출품해도 손색없을 가상의 미술작품을 창조해 주요한 이미지로 활용한다(「당신의 밝은 미래─현대미술 작가로 살아남기」). 직접 촬영한 사진을 소설의 뼈대로 삼아 문학과 시각예술의 경계를 허무는 흥미로운 시도 또한 눈길을 사로잡는다(「JHY를 위한 짧은 기록」). 그뿐 아니라, 우연히 조우한 기성 문학·영화·미술 작품들에 독자적인 맥락을 부여해 소설 속에 녹여내는 순발력과 탁월한 연출 감각은 전하영 소설만의 깊고 풍부한 스타일을 완성해낸다.
예를 들어 『시차와 시대착오』의 첫머리에 놓인 「검은 일기」는 살아 움직이는 듯한 기묘한 저택에 사는 소설가가 주인공인데, 누아르 영화 속 탐정 역으로 유명한 배우 험프리 보가트를 닮은 비밀스러운 캐릭터가 소설가를 찾아오며 이야기가 시작된다. 두 인물 사이에 흐르는 흑백영화풍의 팽팽한 긴장감은 이 단편 자체의 특징은 물론 텍스트 바깥의 참고 자료들이 내뿜는 인상에 의해서도 탄탄하게 뒷받침된다. 전하영은 이 절제된 미스터리로 창작자의 자기분열적 인식이라는 주제를 형상화하면서, 작가란 그를 둘러싼 현실과 허구의 소설세계 양쪽에 “한 사람이 두 사람으로 쪼개”(38쪽)진 것처럼 존재하는 이라는 메시지를 던진다. 그럼으로써 소설 속 화자와 소설 밖 작가를 구분하며 독해해주기를 요청한다.
전하영 소설의 미학을 집약해놓은 듯한 이 단편이 수록작 여덟 편 중 가장 나중에 쓰인 동시에 소설집의 맨 앞에 실려 있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소설집 전체를 조망하며 쓰였을 「검은 일기」는 『시차와 시대착오』를 읽어나갈 독자를 위해 전하영이 제시하는 하나의 열쇠로도 읽힌다. 이번 소설집은 여성 청년 예술가의 삶을 주로 그려 보이는바, 작가의 메시지에 따르면 소설에 드러나는 인물 개개인의 삶의 세부는 허구이되, 인물들이 처한 환경과 그들이 속한 사회는 전하영 자신이 다양한 방면에서 예술가로 활동하며 경험한 생생한 현실을 반영하고 있을 것이다. 작가와 등장인물의 관계에 대한 이러한 거리감과 균형 감각을 유지할 때, 우리는 ‘여성’ ‘예술가’가 등장하는 전하영의 작품들을 더욱 자유롭게 향유할 수 있게 된다.


인생은 원 테이크로 찍는 영화 같은 것
그 안에서는 무슨 일이든 벌어질 수 있으며
무슨 일이 벌어져도 삶은 앞으로 나아간다

전하영 소설의 중요한 특징은 여성 청년 예술가의 삶을 한국문학에서 익숙하게 다뤄져왔던 것과는 다른 방향으로 전개해나간다는 점이다. 전하영의 인물들은 예술을 성역화하고 작품을 위해 인생을 내던지며 자기파괴적 결말로 내달리던 그간의 예술가 캐릭터에서 한발 더 나아간다. 전하영이 스스로 소설 속 등장인물과 적절한 거리감을 유지하듯이, 그의 인물들도 사랑해 마지않는 예술과 생활 영역 간의 관계를 건강하게 재설정하기에 이르는 것이다. 전하영은 여성 청년 예술가가 오래도록 놓지 못하던 ‘낭만화된 예술’에 대한 기대에서 해방되는 과정을 그리며 새로운 시대의 여성/예술가 소설을 선보인다.
데뷔작 「영향」에는 전하영 소설의 이러한 지향점이 일찌감치 암시되어 있다. 「영향」의 주인공 ‘난희’는 서른 살을 넘긴 비혼 여성 영화감독이라는 위치성으로 인해 다양한 각도에서 차별받는다. 그를 둘러싼 차별적 시선은 “이제 더 팔 게 없겠네요”(81쪽)라는 모욕적인 언사로 압축되어 던져진다. 난희는 지금까지 쏟아부은 돈과 시간을 무가치한 것으로 만들지 않기 위해 스튜디오에 틀어박혀 하염없이 카메라를 들여다본다. 그러던 난희가 지난 노력의 기억과 관성에 얽매이기를 멈추고, “내게도 뭔가 팔 게 있을지 생각해봐야지”(115쪽)라고 되뇌며 생계 수단으로서의 예술을 도모할 생활의 현장으로 나가보기로 마음먹는 모습은 산뜻한 여운을 남긴다.
또 한 편의 초기작 「남쪽에서」에는 청춘을 바쳐 쓴 시나리오를 어떻게든 영화화해보려는 ‘남작가’가 등장한다. 남작가의 시나리오는 “여자가 주인공이라는 점이 ‘치명적인 문제’로 지적”(46쪽)되는 등의 수모를 겪으며 오래도록 빛을 보지 못한다. 암묵적인 경쟁 대상으로 삼았던 한 ‘천만 영화’를 관람한 남작가가 차츰 현실을 자각하며 청춘의 한 시절을 통과하는 동안, 동료인 ‘손감독’은 시나리오에 대한 확신과 기대를 놓지 않고 남작가의 주위를 맴돌며 열정과 치기를 토해낸다. 어느 날 뒤늦게 문제의 ‘천만 영화’를 본 손감독이 남작가에게 전화를 걸어오고, 통화하던 두 사람은 이제 곧 그들의 청춘이 진정한 완결을 맞을 것임을 감지한다. 그 순간 두 사람이 전화기를 부여잡은 채 함께 통곡하는 장면은 비극의 해소를 예비하며 진한 카타르시스를 불러일으킨다.

예술에 대한 허구적 상상을 벗어던짐으로써, 전하영의 인물들은 실체 없는 예술에 특권을 부여하고 그것에 휘둘리는 대신 예술을 일상화하고 생활의 수단으로 삼기 시작한다. 「경로 이탈」은 매일 정해진 시간에 미술관의 부설 상영관으로 영화 필름을 배달하는 노동을 반복하며 몽유병에 걸린 듯한 기분을 느끼는 인물 ‘최사해’를 통해 예술과 생활의 경계면을 따라 배회하는 존재의 내면 풍경을 소설화한다. 「당신의 밝은 미래─현대미술 작가로 살아남기」는 젊은 여성 예술가 ‘당신’이 작가로서 생존하기 위해 겪어내는 처절한 과정을 증언하며 ‘당신’이 예술가들을 둘러싼 불건강한 현실과 결별할 때 “당신 인생의 가장 밝은 날이 다가”(302쪽)올지 모른다고 예언한다. 이 대목에 이르러 일견 반어적으로 읽혔던 이 단편의 제목이 뜻밖의 진실성을 획득하게 된다는 점은 이 소설이 지닌 묘미이다.
전하영 소설은 예술에 대한 빛바랜 낭만에서 벗어난 뒤로도 계속되는 ‘이후의 삶’이 무엇보다도 소중하다고 말한다. 인생의 여러 목표 중 하나일 예술적 성취가 인생 그 자체보다 중요해진다면, 그때 예술은 무슨 의미를 갖는 것일까. 일상생활보다 중요해진 예술에는 어떤 비합리적인 아우라가 덧씌워져 있는 것은 아닐까. 예술과 삶의 선후관계를 바라보는 관점의 변화를 포착하면서 과거와 현재의 시차를 조율해나가는 소설쓰기를 통해, 전하영은 우리가 알게 모르게 물들어 있던 시대착오들을 한 꺼풀씩 벗겨나간다. 마지막 꺼풀 밑에는 꿈을 좇는 동안 몇 번을 실패하고 얼마나 깊이 좌절하든 삶은 계속 이어진다는 진실이 건조한 위안처럼 자리한다. 이 진실에 도달하기 위해 쓰인 전하영의 소설들은 연민이나 단정 없이 인생이라는 영화를 차분히 따라가는 카메라 워킹을 닮았다. 그 촘촘한 발자국들의 궤적이 그의 첫 소설집에 한 행 한 행 수놓아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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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 차]

검은 일기 _007
남쪽에서 _041
영향 _077
숙희가 만든 실험영화 _117
시차와 시대착오 _161
경로 이탈 _215
당신의 밝은 미래―현대미술 작가로 살아남기 _263
JHY를 위한 짧은 기록 _303

해설|김보경(문학평론가)
낭만과 환멸이 지나간 후에 _341

작가의 말 _367

[본 문]

그 짧은 이야기가 너무 좋아서, 몸속에 흩어진 조각들이 맞춰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이런 이야기를 쓰는 여자가 있었다. 내가 모르게. 무언가를 쓰고, 사라진 여자들이 있다. _「남쪽에서」

제이미의 말에 의하면, 퍼시벌 로웰이 ‘발견’한 화성 운하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밝혀졌으며 아마도 그가 본 것은 기계적인 결함으로 인해 망원경 렌즈 안으로 스며들어온 빛의 산란일 뿐이었으리라 추정되었다. 퍼시벌 로웰에게서 불과 몇 걸음 떨어지지 않은 곳에 떠다니던 작디작은 티끌들이 바로 그 운하의 정체였을 것이다. 애리조나의 관측소 안에서 난희는 입을 벌리고 걸으며 퍼시벌 로웰이 봤을지도 모를 화성의 운하를 들이마셨다. _「영향」

“나는 아마 내 멋대로 살다가 죽겠지.”
포기하는 기분으로 아무 말이나 중얼거렸는데, 이상하게 힘이 났다.
뭐든지 다 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난희는 괜히 팔을 뻗어올렸다. (…) 씩씩한 기분으로 일정치 않게, 기분 내키는 대로 팔을 놀렸다. 제멋대로 움직이던 손이 책상에 쌓여 있던 육 밀리 테이프들을 건드렸고, 그것들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흩어졌다. 난희는 돌아보았다. 천천히 한 걸음 다가가서 그 옆에 있는 다른 테이프 더미들도 밀어 넘어뜨렸다. 한동안 스튜디오 안을 돌아다니며 테이프 외에도 깨지지 않을 만한 것들을 바닥으로 떨어뜨렸다. 내동댕이쳤다. 동시에 그것들을 정리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도 상상했다. 어느 때보다도 침착하고 평온했다. 이 지겨운 것들 중 소중하지 않은 것은 하나도 없었다. _「영향」

어느 평화로운 주말, 수영장에 갔다가 그 옆 편의점에 들러 간식을 계산할 때 세상에서 제일 지루한 표정을 짓고 있던 남자 아르바이트생이 계산 직후 숙희를 흘끔 보더니 포스기에 ‘중년 여성’이라 쓰인 견출지가 붙은 버튼을 탁, 하고 내리쳤던 것이었다. 그 버튼 옆으로는 ‘젊은 여성’ ‘노인 여성’ 등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만족스러운 문장을 적은 소설가가 그다음 단락으로 넘어가기 위해 경쾌하게 엔터 버튼을 누르는 것처럼 단순하고 분명하고 무의식적이기 그지없는 손짓에 의해 숙희는 중년 여성이라는 세계에 입문했다. _「숙희가 만든 실험영화」

더이상 예술만으로 만족하며 인생을 살아갈 수 없어졌다는 것. 무리라는 걸 알면서도 대학원에 진학하고 작가로 살아남기 위해 안간힘을 썼던 지난 수년간의 삶이 전생처럼 멀게 느껴졌다. 결국 그놈의 유학병 하나 고치려고 그 돈지랄 대잔치를 했던 것인가.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라도 하듯 자아도취에 빠져서. 현실은 아버지에게 빌붙어 기생하는 어린아이에 불과했는데도. 애초에 언제 그만두어도 이상할 게 없는 그런 생활을 고집스럽게 이어갔을 뿐인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그토록 사랑하던 세계를 어째서 이렇게나 쉽게 내쳐버리게 되었는가. 그녀는 스스로가 만든 정교한 함정에 빠진 듯한 기분을 느꼈다. 너무나도 깊숙이 들어와버렸다. 자신이 인생에 무슨 일을 저지른 것인지 곰곰이 생각해볼수록 그녀는 미로 속에서 길을 잃은 것만 같았다. _「시차와 시대착오」

잔디밭에서는 여전히 스프링클러가 돌아가고 있었다. 최사해는 한동안 스프링클러가 돌아가는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중독성 있는 움직임이다. 하려던 생각을 모조리 잊도록 만드는 움직임이다. 단순하고 아름다운. 스프링클러는 고장난 시곗바늘처럼 제자리에서 멈칫거리면서도 지치지 않고 꾸준히 방향을 틀어 사방으로 물을 분사해나갔다. (…) 입력된 시간이 되면 스프링클러 헤드가 땅 밑에서 일제히 올라온다. 그것들은 한시가 되면 자동적으로 깨어나 변하지 않을 움직임을 반복한다. 식물들을 위한 자동급식 기계장치. 직원들은 모두 제자리로 돌아가서 일을 시작하십시오. 자연스럽고 조화롭다. 최사해는 멍하니 물안개를 바라보았다. 영원히 그 상태로 있었던 것처럼. _「경로 이탈」

사람들은 작업의 이면에 낙인찍힌 불발된 저주를, 그 가능성만을 반복적으로 더듬는다. 그것이 일어나지 않아서 유감이라는 듯이. 운이 좋았다면 ‘성공’할 수도 있었다는 듯이. 안타깝습니다. 이번에도 살아남으셨군요. 다음을 기대하겠습니다. 곧 당신도 서서히 깨닫는다. 세상 사람들이 예술가에게 원하는 것은 그런 종류의 이벤트임을. 또한 자신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는 선에서 어쩌면 그들은 불행을 진심으로 바라며, 오직 그런 일에만 흥분한다는 것도. _「당신의 밝은 미래─현대미술 작가로 살아남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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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답고 우아하면서도 냉정한 결기로 반짝인다.”
_젊은작가상 심사평

2021 젊은작가상 대상 수상작가
전하영 첫 소설집!

문학, 영화, 미술
그 모든 아름다운 것들의 디렉터
전하영의 섬세하고 풍부한 수장고-소설 속으로

단편소설 「그녀는 조명등 아래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로 2021 제12회 젊은작가상 대상을 거머쥔 소설가 전하영의 첫 소설집 『시차와 시대착오』가 드디어 독자의 곁을 찾는다. 저온을 유지하는 차분한 문장, 롱 테이크로 촬영중인 영화 속 장면을 좇는 듯한 안정적인 호흡, 현실적인 에피소드의 중첩이 만드는 서사의 부피감, 그리고 그 속에서 문득 돌올하게 모습을 드러내는 삶의 아이러니를 통해 전하영은 자신의 소설에 세련된 분위기와 신선한 감각을 동시에 불어넣었다.
전하영 소설의 참신함이 그가 추구하는 소설쓰기의 방식 자체에서 비롯된다는 점은 주목을 요한다. 소설가로서의 전하영은 ‘아트 디렉터’라 불릴 만한데, 다양한 예술 분야를 소설 안으로 왕성하게 끌어와 배치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영화를 공부하고 영상 예술가로 활동한 이력을 지닌 그는 텍스트를 마치 필름처럼 편집하는 장기를 발휘하여 영화를 닮은 장면 전환을 구현하고(「영향」 「남쪽에서」), 실제로 출품해도 손색없을 가상의 미술작품을 창조해 주요한 이미지로 활용한다(「당신의 밝은 미래─현대미술 작가로 살아남기」). 직접 촬영한 사진을 소설의 뼈대로 삼아 문학과 시각예술의 경계를 허무는 흥미로운 시도 또한 눈길을 사로잡는다(「JHY를 위한 짧은 기록」). 그뿐 아니라, 우연히 조우한 기성 문학·영화·미술 작품들에 독자적인 맥락을 부여해 소설 속에 녹여내는 순발력과 탁월한 연출 감각은 전하영 소설만의 깊고 풍부한 스타일을 완성해낸다.
예를 들어 『시차와 시대착오』의 첫머리에 놓인 「검은 일기」는 살아 움직이는 듯한 기묘한 저택에 사는 소설가가 주인공인데, 누아르 영화 속 탐정 역으로 유명한 배우 험프리 보가트를 닮은 비밀스러운 캐릭터가 소설가를 찾아오며 이야기가 시작된다. 두 인물 사이에 흐르는 흑백영화풍의 팽팽한 긴장감은 이 단편 자체의 특징은 물론 텍스트 바깥의 참고 자료들이 내뿜는 인상에 의해서도 탄탄하게 뒷받침된다. 전하영은 이 절제된 미스터리로 창작자의 자기분열적 인식이라는 주제를 형상화하면서, 작가란 그를 둘러싼 현실과 허구의 소설세계 양쪽에 “한 사람이 두 사람으로 쪼개”(38쪽)진 것처럼 존재하는 이라는 메시지를 던진다. 그럼으로써 소설 속 화자와 소설 밖 작가를 구분하며 독해해주기를 요청한다.
전하영 소설의 미학을 집약해놓은 듯한 이 단편이 수록작 여덟 편 중 가장 나중에 쓰인 동시에 소설집의 맨 앞에 실려 있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소설집 전체를 조망하며 쓰였을 「검은 일기」는 『시차와 시대착오』를 읽어나갈 독자를 위해 전하영이 제시하는 하나의 열쇠로도 읽힌다. 이번 소설집은 여성 청년 예술가의 삶을 주로 그려 보이는바, 작가의 메시지에 따르면 소설에 드러나는 인물 개개인의 삶의 세부는 허구이되, 인물들이 처한 환경과 그들이 속한 사회는 전하영 자신이 다양한 방면에서 예술가로 활동하며 경험한 생생한 현실을 반영하고 있을 것이다. 작가와 등장인물의 관계에 대한 이러한 거리감과 균형 감각을 유지할 때, 우리는 ‘여성’ ‘예술가’가 등장하는 전하영의 작품들을 더욱 자유롭게 향유할 수 있게 된다.


인생은 원 테이크로 찍는 영화 같은 것
그 안에서는 무슨 일이든 벌어질 수 있으며
무슨 일이 벌어져도 삶은 앞으로 나아간다

전하영 소설의 중요한 특징은 여성 청년 예술가의 삶을 한국문학에서 익숙하게 다뤄져왔던 것과는 다른 방향으로 전개해나간다는 점이다. 전하영의 인물들은 예술을 성역화하고 작품을 위해 인생을 내던지며 자기파괴적 결말로 내달리던 그간의 예술가 캐릭터에서 한발 더 나아간다. 전하영이 스스로 소설 속 등장인물과 적절한 거리감을 유지하듯이, 그의 인물들도 사랑해 마지않는 예술과 생활 영역 간의 관계를 건강하게 재설정하기에 이르는 것이다. 전하영은 여성 청년 예술가가 오래도록 놓지 못하던 ‘낭만화된 예술’에 대한 기대에서 해방되는 과정을 그리며 새로운 시대의 여성/예술가 소설을 선보인다.
데뷔작 「영향」에는 전하영 소설의 이러한 지향점이 일찌감치 암시되어 있다. 「영향」의 주인공 ‘난희’는 서른 살을 넘긴 비혼 여성 영화감독이라는 위치성으로 인해 다양한 각도에서 차별받는다. 그를 둘러싼 차별적 시선은 “이제 더 팔 게 없겠네요”(81쪽)라는 모욕적인 언사로 압축되어 던져진다. 난희는 지금까지 쏟아부은 돈과 시간을 무가치한 것으로 만들지 않기 위해 스튜디오에 틀어박혀 하염없이 카메라를 들여다본다. 그러던 난희가 지난 노력의 기억과 관성에 얽매이기를 멈추고, “내게도 뭔가 팔 게 있을지 생각해봐야지”(115쪽)라고 되뇌며 생계 수단으로서의 예술을 도모할 생활의 현장으로 나가보기로 마음먹는 모습은 산뜻한 여운을 남긴다.
또 한 편의 초기작 「남쪽에서」에는 청춘을 바쳐 쓴 시나리오를 어떻게든 영화화해보려는 ‘남작가’가 등장한다. 남작가의 시나리오는 “여자가 주인공이라는 점이 ‘치명적인 문제’로 지적”(46쪽)되는 등의 수모를 겪으며 오래도록 빛을 보지 못한다. 암묵적인 경쟁 대상으로 삼았던 한 ‘천만 영화’를 관람한 남작가가 차츰 현실을 자각하며 청춘의 한 시절을 통과하는 동안, 동료인 ‘손감독’은 시나리오에 대한 확신과 기대를 놓지 않고 남작가의 주위를 맴돌며 열정과 치기를 토해낸다. 어느 날 뒤늦게 문제의 ‘천만 영화’를 본 손감독이 남작가에게 전화를 걸어오고, 통화하던 두 사람은 이제 곧 그들의 청춘이 진정한 완결을 맞을 것임을 감지한다. 그 순간 두 사람이 전화기를 부여잡은 채 함께 통곡하는 장면은 비극의 해소를 예비하며 진한 카타르시스를 불러일으킨다.

예술에 대한 허구적 상상을 벗어던짐으로써, 전하영의 인물들은 실체 없는 예술에 특권을 부여하고 그것에 휘둘리는 대신 예술을 일상화하고 생활의 수단으로 삼기 시작한다. 「경로 이탈」은 매일 정해진 시간에 미술관의 부설 상영관으로 영화 필름을 배달하는 노동을 반복하며 몽유병에 걸린 듯한 기분을 느끼는 인물 ‘최사해’를 통해 예술과 생활의 경계면을 따라 배회하는 존재의 내면 풍경을 소설화한다. 「당신의 밝은 미래─현대미술 작가로 살아남기」는 젊은 여성 예술가 ‘당신’이 작가로서 생존하기 위해 겪어내는 처절한 과정을 증언하며 ‘당신’이 예술가들을 둘러싼 불건강한 현실과 결별할 때 “당신 인생의 가장 밝은 날이 다가”(302쪽)올지 모른다고 예언한다. 이 대목에 이르러 일견 반어적으로 읽혔던 이 단편의 제목이 뜻밖의 진실성을 획득하게 된다는 점은 이 소설이 지닌 묘미이다.
전하영 소설은 예술에 대한 빛바랜 낭만에서 벗어난 뒤로도 계속되는 ‘이후의 삶’이 무엇보다도 소중하다고 말한다. 인생의 여러 목표 중 하나일 예술적 성취가 인생 그 자체보다 중요해진다면, 그때 예술은 무슨 의미를 갖는 것일까. 일상생활보다 중요해진 예술에는 어떤 비합리적인 아우라가 덧씌워져 있는 것은 아닐까. 예술과 삶의 선후관계를 바라보는 관점의 변화를 포착하면서 과거와 현재의 시차를 조율해나가는 소설쓰기를 통해, 전하영은 우리가 알게 모르게 물들어 있던 시대착오들을 한 꺼풀씩 벗겨나간다. 마지막 꺼풀 밑에는 꿈을 좇는 동안 몇 번을 실패하고 얼마나 깊이 좌절하든 삶은 계속 이어진다는 진실이 건조한 위안처럼 자리한다. 이 진실에 도달하기 위해 쓰인 전하영의 소설들은 연민이나 단정 없이 인생이라는 영화를 차분히 따라가는 카메라 워킹을 닮았다. 그 촘촘한 발자국들의 궤적이 그의 첫 소설집에 한 행 한 행 수놓아져 있다.

작가의 말
어쩌면 나는 그때부터, 그 작은 방에서부터 소설을 써왔던 건 아니었을까. 왜 하필 소설인가, 라는 질문에 그것은 언제나 소설이었다는 대답. 어릴 적 그 방에서 시작한 이야기의 씨앗을 키우기 위해 지난 수십여 년을 살아온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든다. 그렇다면 내가 했던 성과 없는 허무한 모험들에도 다 제각각의 의미가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끊임없이 이야기를 지어대는 작은 여자아이들의 방은 이제 내 마음속에 있다. 여행 끝에 도착한 곳은 소설이었다. 그 세계는 거대하지만 단 한 권의 책에 들어갈 수 있을 만큼 작기도 하다. 나는 이 세계를 사랑한다. 그렇다.

추천사
여성들을 사로잡은 실존적인 두려움을 전하영만큼 농밀하게 표현하는 작가는 매우 드물다. 자기가 원하는 대로 인생을 살고자 했던 여성이 언제나 돌연 ‘혐오스런 마츠코’의 독방으로 끌려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아마 동시대의 여성이라면 결코 모르지 않을 것이다. (…) 전하영이 참고하는 무수한 레퍼런스는 예술가의 삶이 단단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또 하나의 실존적 메시지다. _박민정(소설가)

내성의 치열과 정직으로, 우수를 품은 지적이고 명징한 언어의 힘으로 전하영 소설은 이미지의 재생과 부활을 자기만의 소설 미학이자 소설의 윤리로 만들어가고 있는 듯하다. _정홍수(문학평론가)

이 성실한 쓰기, 중단 없는 산책, 고요하고 반항적인 행위를 보라. 전하영의 소설은 그렇게 낭만도 환멸도 없이 예술을 통해 꿈꾸는 법을, 사라지지 않고도 다른 삶의 경로를 만들어나가는 법을 가르쳐준다. _김보경(문학평론가)


* 2019 문학동네신인상 심사평

예술가와 세계가 부딪칠 때 이글거리게 되는 감정들, 유예된 상처들, 통제되고 있는 광기, 교차하는 자부심과 열등감, 희망과 염증의 기묘한 배합이 단단하고 적확하고 깊은 발자국을 남기는 문장들로 표현되어 있다. _정세랑(소설가)

반복해서 읽는 동안 인물들의 감정이 훼손되기는커녕 점점 더 많이 느껴진다는 것이 개인적으로는 가장 좋았다. 누구나 삶에 거절당해본 경험이 있다는 것, 누추해지고 다른 누군가가 아닌 자기 자신에게 가장 창피해지는 순간이 있다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식으로든 살아가야 한다는, 사소하지만 중요한 이야기를 포착해낸 솜씨가 아주 좋았다. _손보미(소설가)

청년세대의 담론에서는 소거되어 있던, 여성 청년이자 여성 예술가의 불안에 대해 정확히 지목하고 있다. 예술가를 둘러싼 환상이 깨져나가고 패러다임이 바뀌는 분기점에 선 지금, 우리에게는 여성 예술가의 성공만큼 여성 예술가의 절망과 좌절과 고뇌에 대한 재현 역시 절실하게 필요하다. _강지희(문학평론가)

이 작품의 미덕은 그런 주인공이 끈질기게 붙들려 있던 허구적인 낭만적 예술가의 이미지를 포기하고 생활과 예술의 새로운 관계 설정으로 나아가는 과정이 설득력 있게 그려지고 있다는 점이다. (…) 이것은 여성 예술가소설인 동시에 생활과 예술의 대립을 해체하는 탈낭만적 예술가소설이다. _김영찬(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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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하영
2003년부터 2017년까지 다수의 단편영화와 영상 설치 작품을 만들었다. 2019년 단편소설 「영향」으로 문학동네신인상을 받으며 소설을 발표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조명등 아래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로 2021년 제12회 젊은작가상 대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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