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확한 예언서?
예를 들어보자. 코로나 사태 3년째를 맞이하면서 우울증이 크게 늘어나고 있다. 더욱이 전 세계적으로는 ‘기후불안증’이 하나의 공식적인 정신질환으로서 인정되기에 이를 만큼 급증하고 있다. 이러한 현상 앞에서 다음과 같은 저자의 선견지명은 유난히 돋보인다.
“오늘날 인간이 경제성장이나 개발이라는 명분 밑에서 숲을 파괴하고, 토착민의 삶터를 유린하고, 생태계의 질서를 교란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갈수록 거주불능의 공간을 넓혀갈 때, 이 어리석은 일은 궁극적으로 진화론적 존재로서의 인간의 특성 자체를 무시하는 일이기도 하다는 점을 우리는 깊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인간으로서 우리에게는 반드시 물질적 재화의 획득과 소비만으로 채워질 수 없는 숱한 다면적인 기본욕구가 있다. 우리는 도덕적 존재이고, 심미적 존재이며, 종교적 존재이기도 한 것이다. 이러한 다면적인 인간 욕구의 균형있는 충족이 실현되지 않을 때 인간이 불행을 느끼는 것은 사람마다의 개인적 특성 이전에 인간이라는 종(種)으로서의 특성이 존재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1995년 5-6월호 머리말 중에서)
좋은 삶과 좋은 사회
저자 김종철은 격월간 《녹색평론》을 통해서 30년의 시간 동안 일관되게, “끝없는 성장과 팽창을 내재적인 요건으로 할 수밖에 없는 산업경제와 산업문화가 물러나고, 새로운 차원의 농업 중심의 사회가 재건되는 것만이 생태적·사회적 위기와 모순을 벗어나는 유일하게 건강한 길이라는 논리”를 이야기해왔다. 그리고 이러한 원칙이 근본적으로 옳은 것이라면, “우리는 지금보다 훨씬 더 가난해지고, 또 평등하게 가난해야 한다”고 역설해왔다. 다시 말해서 ‘공존공영’이 아니라 ‘공빈공락’이야말로 우리가 추구해야 할 올바른 방향이라는 사실을 숙고할 필요가 있다고 간곡하게 말해왔다.
즉, 개인적 자기쇄신에 더하여 사회의 전면적인 구조적 개혁이 필요하다는 것이고, 이러한 메시지를 뒷받침하기 위해서 유수한 토착사회의 전통, 세계 여러 곳에서 꾸준히 일어나고 있는 풀뿌리 협동운동, 나아가 최신 경제이론에 이르기까지 고금을 아우르며 민중의 축적된 지혜, 사회사상, 사회실험들을 《녹색평론》은 종횡무진으로 소개해왔다. 그리고 이러한 선구적 노력들은 오늘날 결국 빙산을 향해 돌진해가는 우리 사회와 우리 시대, 이 ‘타이타닉호’를 멈추지는 못할지언정 적어도 그러한 현실을 직시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진 사람들의 목소리에 힘을 실어주면서 동시에 ‘다른 미래’에 대한 비전을 준비할 수 있게 도와주었다고 평가해도 좋을 것이다.
가장 근본적이고 긴요한 질문
머리말이라는 형식으로 발표되었던 글들인 만큼, 각 원고의 분량은 비교적 짧은 편이지만 담고 있는 주제의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다. 제주도개발법, 골프장 난립, 오존층 파괴, 지구온난화 및 기상이변, 농업의 위기 및 농촌(공동체)의 황폐화, ‘지속가능한 개발’, 아마존 삼림파괴, 생물다양성 문제, 중국의 공업화, 무역자유화와 농산물 개방, 핵폐기물, 우루과이 라운드, 농촌 초등학교의 폐쇄, 삼풍백화점, 체르노빌, 컴퓨터 정보기술, 유전공학, 9·11 테러와 ‘미국식 생활방식’, 월드컵 경기와 공동체, 공유지의 파괴, 수돗물불소화, 황우석 사태, 한미FTA, 선거제도, 용산 참사, 촛불시위, 4대강, 피크오일, 후쿠시마, 2008년 금융파산 사태, 밀양 송전탑, 라틴아메리카의 21세기적 사회주의 혁명, 지역통화, 기본소득 등등 이 책에서 언급되고 있는 소재들을 훑어보기만 해도 《녹색평론》이 우리 사회와 사람살이에 대해서 선구적이고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왔다는 사실을 독자는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생태주의와 인간다운 삶
우리 사회에서 일반적으로 《녹색평론》은 생태주의 잡지로 알려져 있고, 고 김종철 발행인 역시 생태사상가라는 수식어가 붙어 일컬어지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생태주의’란 과연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건강하게 살기 위해서 환경을 보살피자는 이야기일까? 이 책을 통해 독자들은 《녹색평론》이 구체적으로 어떤 이야기들을 해왔는지 그 흐름을 살펴보면서, 생태주의라는 것이 결국은 별다른 것이 아니라, 지구라는 유한체계 속에서 나와 이웃과 뭇 생명체들이 평화롭게 어울려 살아가는 방법을 궁리하는, 오늘의 세계에서 가장 현실에 천착한 삶의 원리라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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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후변화, 피크오일, 식량위기, 그로 인한 필연적인 세계경제의 붕괴라는 가공할 전망 앞에서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는 급속히 파국의 소용돌이로 빠져들고 있다. 이 세계는 이미 10년 전, 20년 전의 상황과도 다르다. 이미 우리가 탄 배가 빙산에 부딪치는 것을 더이상 막을 수 있는 방도는 사라졌는지도 모른다. 이런 상황에서 사회적 격차와 권력의 독과점은 날로 심화되고, 교육의 실패는 돌이킬 수 없는 수준에 이르렀으며, 민주주의는 후퇴를 거듭하고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인간다운 덕성과 자질을 뿌리로부터 부정하는 물신주의(物神主義)의 일방적인 위세 속에서 걷잡을 수 없이 망가지는 인간관계, 그에 따른 인간성의 황폐화 …. ‘근대의 어둠’은 훨씬 더 깊어졌다고 할 수밖에 없다.
이 책에 수록된 글들 하나하나를 나는 절박한 위기감 속에서 썼다.
나는 이 책이 나와 비슷한 마음으로 살아가는 내 이웃들에게 약간의 위로가 되고, 나아가서 그들을 서로 연결해주는 작은 끈이 된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다는 생각으로 책을 묶었다.”
―머리말 중에서
“역사가 가르쳐주는 것은, 역병의 창궐이라는 상황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따라 문명의 흥망이 결정된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이 상황의 본질과 성격을 먼저 정확히 이해하고 평가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지금 많은 사람들은 정상적인 생활로의 복귀를 고대하며, 백신이나 치료제의 조기 개발이 급선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종래의 생활이 과연 ‘정상적’인 생활이었는지 우리는 냉정하게 물어볼 필요가 있다. … 우리가 가야 하는 길은 하나밖에 없음이 분명하다. 즉, 더이상 생태계에 훼손을 끼쳐서 결과적으로 인간생존의 기초를 스스로 무너뜨리는 어리석음을 되풀이함이 없이 인간다운 생존·생활이 가능한 시스템을 구축하는 길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니까 아직도 우리들 대다수가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붙들려 있는 신화, 즉 새로운 과학기술의 개발을 통한 끝없는 성장(혹은 진보)의 추구라는 관념과 깨끗이 결별하는 게 진짜 급선무라고 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진보’가 아니라 인간다운 ‘생존·생활’이다. 우리는 이 점을 절대로 잊지 말아야 한다. 우리를 구제하는 것은 ‘사회적 거리두기’도 마스크도 손씻기도 아니다. … 우리의 정신적·육체적 건강의 첫째 조건은 타자들―사람을 포함한 뭇 중생들―과의 평화로운 공생의 삶이다. 그리고 공생을 위한 필수적인 덕목은 단순 소박한 형태의 삶을 적극 껴안으려는 의지(혹은 급진적 욕망)이다.
내 목소리부터 낮춰야 새들의 노래도, 벌레들의 소리도 들린다. 그래야만 풀들의 웃음과 울음도 들리고, 세상이 진실로 풍요로워진다. 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바이러스는, 공생의 윤리를 부정하는, 그리하여 우리 모두의 면역력을 끊임없이 갉아먹는 ‘탐욕’이라는 바이러스다.”
― 본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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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철
1947년 경남 함양에서 태어나, 진주의 남강 변에서 자라던 유년시절에 6ㆍ25 전란을 겪었다. 전쟁 이후 마산에서 초ㆍ중ㆍ고등학교를 다녔다.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ㆍ대학원에서 영문학을 읽고, 공군사관학교의 교관으로 군복무를 했다. 제대 후 숭전대학교, 성심여자대학, 영남대학교 등에서 교편을 잡았다. 1970~80년대에는 문학평론 활동을 하다가, 1991년에 격월간 《녹색평론》을 창간하여 작고 당시까지 에콜로지 사상과 운동의 확대를 위한 활동에 헌신했다. 한편, 2004년에는 대학의 교직을 그만두고 《녹색평론》의 편집ㆍ발간에 전념하면서, 2011년 3월 후쿠시마 원전사고를 계기로 한국 최초의 ‘녹색당’ 창립을 위한 활동에 참여하였다. 또, 2004년 이후 10여 년간 ‘일리치 읽기 모임’이라는 이름으로 시민자주강좌를 개설ㆍ진행했다.
저서에 《시와 역사적 상상력》(1978), 《시적 인간과 생태적 인간》(1999), 《간디의 물레》(1999), 《비판적 상상력을 위하여》(2008), 《땅의 옹호》(2008), 《발언 I, II》(2016), 《大地의 상상력》(2019), 《근대문명에서 생태문명으로》(2019) 등이 있고, 더글러스 러미스의 《경제성장이 안되면 우리는 풍요롭지 못할 것인가》(2002), 리 호이나키의 《정의의 길로 비틀거리며 가다》(2007) 등의 책을 우리말로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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