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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시대의 서예
저자 : 정현숙 ㅣ 출판사 : 일조각

2018.06.29 ㅣ 508p ㅣ ISBN-13 : 9788933707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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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도서 > 취미/실용 > 취미 > 서예
『삼국시대의 서예』는 고구려, 백제, 신라의 서예를 총망라하여 조명한 최초의 연구서이다. 현재까지 발굴된 금석과 목간 등 삼국의 문자 자료 대부분을 실었으며, 이를 바탕으로 삼국 서예의 특징을 각각 살피고 삼국 글씨의 유사성과 차별성을 비교, 분석했다. 또한 삼국의 중국 서예의 수용과 변용, 고구려 서예와 신라 서예의 연관성, 백제 서예가 일본 서예에 미친 영향, 신라 서예가 가야와 일본 서예에 미친 영향을 통해 고대 동아시아의 서예문화가 전파되는 과정도 살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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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 차]

책머리에
표 목록

제1장 삼국 이전의 서예
1. ‘서書’의 연원과 변천
2. 한반도의 한자 수용과 확산
3. 삼국 이전의 서예
(1) 그림으로 의사를 표현한 선사시대 암각화
(2) 한나라에서 전래된 낙랑군 서예

제2장 고구려의 서예
1. 한자의 수용과 발달
2. 고구려 서예의 특징
(1) 중국풍이 가미된 고분묵서명 글씨
(2) 웅건하면서 자유자재한 석각 글씨
(3) 고박하면서 절제된 동명 글씨
(4) 예스럽고 굳건한 전명‧와명 글씨
(5) 강건한 고구려 유민 묘지명 글씨
3. 신라 서예에 미친 영향
(1) 신라 서예의 고구려적 요소


(2) 신라 서예에 영향을 미친 시대적 배경
4. 맺음말

제3장 백제의 서예
1. 한자의 수용과 불교문화의 발달
2. 백제 서예의 특징
(1) 유미하면서 강건한 석각 글씨
(2) 세련되고 순박한 동명 글씨
(3) 편안하고 자연스러운 전명‧와명 글씨
(4) 유려하면서 노련한 목간 글씨
(5) 전아한 백제 유민 묘지명 글씨
3. 일본 서예에 미친 영향
(1) 일본 서예의 백제적 요소
(2) 일본 서예에 영향을 미친 시대적 배경
4. 맺음말

제4장 신라의 서예
1. 한자의 수용과 변용
2. 신라 서예의 특징
(1) 정연하면서 단아한 동명‧칠기명 글씨
(2) 고박하면서 토속적인 석각 글씨
(3) 투박한 묵서명과 자연스러운 토기명 글씨
(4) 순박하면서 강건한 목간 글씨
3. 가야 서예에 미친 영향
(1) 가야 서예의 신라적 요소
(2) 가야 서예에 영향을 미친 시대적 배경
4. 일본 서예에 미친 영향
(1) 일본 서예의 신라적 요소
(2) 일본 서예에 영향을 미친 시대적 배경
5. 맺음말

장별 영문 요약
부록
서예 용어 / 삼국 문자 유물 지도 / 삼국시대 서예사 연표 / 중국(한漢~당唐) 서예사 연표

그림 목록 / 참고문헌 / 찾아보기

[본 문]

<광개토왕비>(그림 2-20)는 고구려 제19대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崗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이하 광개토왕)의 능비로, 아들 장수왕이 아버지 광개토왕의 업적을 기려 세운 기념비이다. (중략)
비문의 서체는 예서이다. 예서 중에서도 파책이 약간 가미된 고예로 쓰여 서한 예서가 동한 예서로 변하는 과정을 보여 준다. 비의 크기에 걸맞은 웅강한 고예의 서풍에서 고구려의 진취적 기상이 느껴진다. 세로로 계선이 있고 행간과 자간이 일정하여 정연한 장법이며, 정방형의 자형은 장방형의 소전小篆에서 편방형의 예서로의 변화 과정을 보여 준다. 다양한 결구는 변화미와 중후함을 동시에 드러낸다. 전체적으로 소전의 원필과 부분적으로 예서의 파책이 있으며, 행서와 초서 및 해서의 필법도 혼합되어 있어 모든 서체의 필의가 복합적으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모든 서체를 섭렵한 후에라야 가능한 필법이므로 서자의 필사 수준이 상당한 경지에 이르렀음을 말해 준다. ― ‘제2장 고구려의 서예’ 중에서, 76~77쪽

마지막으로 주목할 것은 국내의 유일한 고구려비인 <충주고구려비>이다(그림 2-26). (중략)
비의 형태는 <광개토왕비>를 축소한 것과 같은, 자연석 사각 석주형이다. 처음에는 비의 전면(1면)과 좌‧우측면(2‧4면)에서만 문자가 확인되어 삼면비라는 주장이 있었으나, 근자에 후면(3면) 좌측 끝에서 ‘巡’ 자를 판독함으로써 왕의 순수 관련 비라는 추정이 가능하게 되었으며, 장수왕이 천도 전 집안에 세운 <광개토왕비>를 따른 사면비가 된 셈이다.
명문은 전면 10행, 좌측면 7행이며, 우측면은 5행으로 추정된다(그림 2-27). 1행 23자이며, 한 글자의 크기는 약 3~5cm이다. 가장 넓고 글씨가 가장 잘 남아 있는 전면과 좌측면 일부로 내용을 파악할 수 있다. 전면 첫머리는 ‘五月中高麗大王(오월중고려대왕)’으로 시작하는데 고려는 고구려를 뜻한다. ‘前部大使者(전부 대사자)’, ‘諸位(제위)’, ‘使者(사자)’ 등 고구려 관직명과 <광개토왕비>에 있는 ‘古牟婁城(고모루성)’ 등의 글자가 보이고, ‘募人三百(모인삼백)’, ‘新羅土內(신라 토내)’ 등 고구려가 신라를 불렀던 말들이 새겨져 고구려비임을 알 수 있다. (중략)
이 비는 상술한 <광개토왕비>나 <집안고구려비>보다 더 6세기 신라비의 글씨와 유사하다. 예서의 필의가 있는 해서인 서체가 같고 원필의 자연스러운 풍치도 비슷하다. 이 비를 세운 지역이 후에 신라의 영토가 되었기에 6세기 신라 글씨에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추정된다.
― ‘제2장 고구려의 서예’ 중에서, 88~92쪽

<무령왕지석>(그림 3-3)은 무령왕릉 연도羡道 중앙에 있는 진묘수鎭墓獸 앞에서 <무령왕비지석>과 함께 발견되었다. 두 지석의 관계를 보면, 대체로 왕의 지석 양면과 왕의 매지권(왕비의 지석 후면)은 모두 왕의 장례 때 이미 작성되었으며, 현실 연도 중간에 놓아두었다가 왕비 합장 시 왕 매지권 후면에 왕비에 관한 기사를 추각追刻한 것이라 보고 있다. (중략)
탁본에서는 느낄 수 없는 필법을 논하기 위해, 필자가 실견한 바를 바탕으로 원석의 각법을 통해 글씨의 특징을 살펴보자. 원석을 자세히 살펴보면, 한 자 한 자가 서자書者의 필의대로 새겨졌음을 알 수 있는데, 이 때문에 각고刻稿 없이 바로 돌에 새겼을 가능성도 제기되었다. 즉, 서자가 곧 각자刻者이거나 각자의 서사 솜씨가 능숙하다는 의미인데, 서로 다른 사람이라면 각자의 수준이 서자를 능가할 정도로 뛰어났다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삼국의 어떤 금석문에도 없는 뛰어난 각법으로, 백제 장인의 우월성을 보여 주는 것이다.
전체적으로 획이 가는 곳은 얕게, 획이 굵은 곳은 깊게 파면서 그 속에서 각법의 변화를 추구했다. 특히 깊게 판 부분은 추획사錐劃沙의 각의刻意가 담긴 중봉으로 새겨졌으며, 그것은 마치 깊은 계곡의 힘찬 물줄기와도 같다. 4행 ‘辰’ 자의 왼쪽 삐침과 오른쪽 파임, ‘乙’, ‘巳’ 자의 긴 가로획 등 획이 굵은 부분은 모두 깊게 파여 마치 종이 위에서 눌러 굵게 쓰는 것과 같은 각법이다. 또 ‘七’ 자의 가로획처럼 기필起筆이 가늘다가 행필行筆에서는 굵어지는 기법, ‘十’, ‘二’ 자의 가로획처럼 기필이 굵고 행필이 가늘어지는 기법, ‘王’ 자의 첫 가로획처럼 기필은 가늘고 행필은 굵고 수필은 가는 기법, ‘安’ 자의 가운데 가로획처럼 기필은 굵고 행필에서는 가늘어지다가 수필에서 다시 굵어지는 기법 등의 다양한 각법은 새김을 쓰듯이 한 각자의 능수능란한 솜씨를 잘 보여 준다. 특히 ‘安’ 자의 女에서 세 종류의 획이 겹쳐지는 부분을 각각 가늘게 새긴 것은 서사의 필의로 새긴 기법이다. 필사를 능가하는 이런 다양한 각법은 글씨에 능숙한 각자가 아니면 표현할 수 없는 기법이므로 서자와 각자가 동일인일 가능성도 있다.
필법에서는 노봉과 장봉, 방필과 원필의 구별이 엄격하다. 1행의 ‘大’ 자처럼 기필이 방필의 장봉인 것도 있고, ‘百’ 자처럼 원필의 노봉인 것도 있다. 전절이 ‘百’ 자처럼 방절方折에 배세인 것도 있고 ‘丙’처럼 원전圓轉에 향세인 것도 있다. 필세는 앙세仰勢, 평세平勢, 부세俯勢가 다양하게 혼재되어 있다. 2행의 ‘二’ 자는 평세, 3행의 ‘年’ 자는 앙세‧평세‧부세, 6행의 ‘立’ 자는 앙세‧부세, 4행의 ‘年’ 자는 부세이다. 5행 ‘酉’ 자의 긴 가로획의 수필은 아래를 향해 세게 눌러 거두어들이는 필법이다. ― ‘제3장 백제의 서예’ 중에서, 172~176쪽

<사택지적비>의 글자는 정방형 또는 편방형이며, 방필과 원필이 혼용되어 있고 필세는 대부분 평세이며, 획이 도톰하고 굵기가 일정하여 웅강무밀하다. 이런 점이 <오평충후신도동궐吳平忠侯神道東闕>(그림 3-12)과 같은 남북조풍과는 유사하지만 <구성궁예천명九成宮醴泉銘>(그림 3-13)과 같은 당풍과는 다르다. 전절을 한 번 더 꺾은 방각이 아니고 부드러워 남조풍과 유사하나 원필의 북위풍과도 비슷하다. (중략)
표 3-10의 ‘難’ 자에서 좌측 상부의 두 점과 가로획의 형태는 북위묘지와 유사하고, 艹로 쓴 당비와는 다르다. 자형도 정방형인 북위비와 유사하고 장방형인 당비와는 다르다. 그러나 백제 글자는 가로획과 세로획의 굵기가 비슷하여 밀한 반면, 북위비와 당비는 가로획이 세로획보다 가늘어 획간이 성글다. 이처럼 결구는 북위묘지와 유사하지만 획간의 여백이 무밀한 점은 소랑한 북위비나 당비 와 다르다. 이것은 북위풍을 수용하되 원필로 단아하고 유려한 미감을 창출하여 백제화한 글자에 속한다.
표 3-11의 ‘還’ 자의 辶과 표 3-12의 ‘建’ 자의 廴을 견주어 보면, 공통적으로 두 점 아래 ㄴ 형태로 썼다. 북위비에도 辶과 廴의 구분은 없지만 한 점 아래 ㄴ형태로 표기한 점이 조금 다르다.
또 글자를 세로로 삼등분하여 우측 두 획을 몸통과 분리한 것이 특이하다. 가운데 부분에 밀착시켜 한 덩어리를 이루는 보편적 결구와 견주어 보면 이것은 밀밀소소密密疏疏를 염두에 두고 서자 자신의 의지대로 변형시킨 것이다. 이로 인해 자형은 편방형이 되고, 중간 부분의 행서 필의, 우측 두 획의 해서 필법과 辶에서 예서의 파책은 한 글자 안에서 예서‧해서 ‧행서의 혼용을 보여 준다. 이런 이색적 필법은 백제만의 독특함이다. (중략)
상술한 글자들뿐만 아니라 <사택지적비>의 글씨는 대부분 기본적으로 남북조풍이며, 부분적으로 수풍이 가미되었다. 더하여 백제풍으로 변형시킨 독특한 글자들도 있는데, 이는 백제 서예의 독창성으로 보아도 무방하다. 당시 유행하던 당풍을 좇지 않고 복고한 것은 백제인의 서예 취향과 함께 서로 대치되는 백제와 당의 당시 정치적 상황과도 무관하지는 않은 듯하다.
― ‘제3장 백제의 서예’ 중에서, 187~193쪽

목간이 출토된 두 번째 산성은 삼국이 서로 다투던 전략의 요충지였던 하남 이성산성이다. 한강 하류는 삼국이 서로 차지하려던 요지였는데 한강의 북쪽은 아차산, 남쪽은 풍납토성이 있다. 아차산을 거슬러 올라가면 북한산이 있고, 풍납 토성 남쪽에는 여러 성들이 있는데 이 성 가운데 하나가 이성산성이다. (중략)
이성산성목간은 단면, 양면, 삼면, 사면 등 그 종류가 다양하며, 명문은 대부분 1행이지만 그 옆에 작은 글씨를 부기하여 2행인 것들도 있다. 서체는 행서의 필의가 많은 해서와 행서이며, 서풍은 질박하면서 웅강하다.
이성산성목간 가운데 가장 주목할 것은 <‘무진년’목간>이다(그림 4-52 우). 1면의 묵서 “戊辰年正月十二日明南漢城道使”로 보아 608년 이 성이 주변의 여러 성과 긴밀하게 군사 연락을 주고받았음을 알 수 있다. “무진년 정월 12일 동틀 무렵, 남한성의 도사”로 해석되는 명문은 이른 새벽부터 긴밀한 연락을 주고받던 전선의 긴장감을 느끼게 한다.
사면 중에서 1, 2, 3면에만 묵흔이 있다. 1면은 해서로 쓰였지만 넷째 글자인 ‘正’에는 행서의 필의가 있고, 2, 3면은 행서로 쓰였다. 획이 굵고 힘차며 거침이 없고, ‘正’, ‘月’, ‘明’ 등의 글자에는 원필의 북위풍이 농후하다. 또 ‘十二’는 자간의 여백이 없는 합문인데, 특히 숫자를 합문으로 쓰는 것은 6세기 신라비에도 자주 나타난다(표 4-21). 6, 7세기 신라에서 합문이 빈번히 사용되었음을 이 목간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남산신성비제10비>에서 쓰인 북위풍이 이 목간에서도 사용된 것은 6세기 말 이후 신라에서 외래서풍이 지속적으로 사용되었음을 의미한다. 즉, 6세기 전반의 토속적 서풍이 점차 노련하고 성숙된 모습으로 변화되어 가는 신라 서예의 변천 과정을 보여 준다. ― ‘제4장 신라의 서예’ 중에서, 401~402쪽

<산상비>는 <포항중성리비>, <금정택비>는 <대구무술명오작비>와 같은 6세기 신라 자연석비와 유사하고, <다호비>는 정형의 <진흥왕순수비>를 닮았다. 다만 신라의 정형 순수비 가운데 너비와 두께를 비교해 볼 때 <북한산진흥왕순수비>는 두께가 얇은 양면비이고, <마운령진흥왕순수비>와 <황초령진흥왕순수비>는 너비와 두께가 비슷한 석주형에 가깝다. <다호비>가 너비와 두께가 비슷한 석주형인 것을 감안하면, 일본의 정형비는 <북한산진흥왕순수비>보다는 <마운령진흥왕순수비>, <황초령진흥왕순수비>에 가깝다. 전면에만 글씨를 새겼음에도 불구하고 사면에 글씨를 새긴 <광개토왕비>처럼 석주형인 점이 주목된다. (중략)
비의 명문에서 첫 행의 ‘岡’ 자를 주목해 보자(표 4-40). 이 이체자는 중국 동진의 <사곤묘지명謝鯤墓誌銘>(323)에 사용되었는데, 이것은 예서이다. 남북조시대에는 거의 보이지 않고 7세기 이후 당나라 때 다시 등장한다.
한반도에서는 고구려의 <광개토왕비>(414), <광개토왕호우>(415), <모두루묘 지명>(413~450년경)에서 보이는데, 이는 5세기 고구려에서는 보편적으로 쓰인 글자임을 의미한다. 또 신라의 <울주천전리서석원명> 위의 큰 글자들 사이에 있는 ‘岡’ 자(그림 4-20 원 안 글자)를 고구려의 글자와 비교하면, 하부가 止 대신 正으로 바뀌었다. 이것은 북위의 <원랑묘지명元朗墓誌銘>(526) 하부와 같은 것으로 보아 止와 正은 서로 통용됨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신라의 이 글자는 고구려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아도 무리가 없다.
일본에서는 이 글자가 <호류지금당관음보살조상기동판法隆寺金堂觀音菩薩造像記銅板>(694)에서 먼저 나타나고 이어서 <다호비>(711)에서도 보인다. 호류지가 있는 나라 지역은 주로 백제계 도왜인이 정착한 곳인데, 조상기 후면의 ‘百濟’라는 글자를 통해서도 이를 확인할 수 있다. <다호비>가 있는 군마현은 주로 신라계 도왜인이 정착한 곳이며, <다호비>를 세운 군장관 히츠지는 신라 도왜인으로 추정되니 ‘岡’ 자는 신라의 영향으로 보아도 무방하다. 신라 고비와 일본 고비의 형태적‧서예적 유사성은 고대 동아시아의 문자는 중국에서 한국으로, 그리고 한국에서 일본으로 전파되었음을 말해 준다. ― ‘제4장 신라의 서예’ 중에서, 418~42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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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삼국 글씨의 다름에서 독창성과 정체성을 찾고자 한 동시에 서로 영향을 주고받을 수밖에 없었던 삼국의 서예가 공통점이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또한 각기 다른 색을 가진 삼국의 글씨는 각기 다른 역할로 고대 동아시아 문자문화에 금자탑을 세웠음을 설명하고 있다.
삼국은 석비, 벽돌, 기와, 나무 등 다양한 재료에 문자를 남겼으며, 그 내용은 공적인 것도 있고 사적인 것도 있다. 용도에 따라 재료의 선택이 달라지고 글씨가 달라지기도 했으며, 서사 재료나 도구에 따라 서체와 서풍이 달라지기도 했다. 반면 약 1세기 동안 같은 서풍을 유지한 나라도 있다.

삼국 서예의 특성과 그 영향
고구려의 글씨는 용도에 따라 서풍을 달리했는데, 공식 비문에서는 웅강함을, 비공식 각석에서는 자유스러움을 추구했다. 즉, 국가적 사건을 기록한 비에는 고구려의 진취적 기상을 드러내는 웅건무밀한 글씨를 썼고, 개인적 용도의 금석문에는 편한 마음으로 자유로운 서체를 구사했다. 이것은 삼국 가운데 고구려에서만 나타나는 현상이므로 고구려 서예의 특징이자 정체성이라 해도 무방하다. 또한 고구려 서예는 신라 서예에 영향을 주었다. 신라 왕경인 경주에서 출토된 <광개토왕호우>, <연수원년명은합>과 <광개토왕비>, <집안고구려비>, <충주고구려비>, <평양성고성각석> 등 5, 6세기 고구려 금석문에 보이는 예해지간의 글씨, 힘차면서 고박한 서풍, 예서와 행서의 필의가 가미된 필법 등을 통해 6세기 신라비와의 유사성을 찾을 수 있다.

백제는 고구려나 신라에 비해 전아하면서 유려한 서풍을 구사했는데, 이는 중국 남조와의 빈번한 교류를 통해 선진문화를 수용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근래에 출토된 불교 관련 문자 자료들은 기존의 서풍과 대비되는 질박한 분위기를 가지고 있어 백제 서예에 대한 총체적 연구가 필요해졌다. 또한 고구려에는 없는 행정 문서인 목간이 다량 출토되어 백제의 서예문화를 더 깊게 살필 수 있게 되었다.
백제 서예는 동질성보다는 이질성을 중시하면서 서사 재료에 따라 각기 다른 맛의 세련미와 고박미를 동시에 보여 주는 개성적 서예를 창조했다. 한문 발달 정도도 같은 시기 고구려나 신라보다 앞섰는데, 이두吏讀 양식을 보인 고구려나 신라의 명문과는 달리 <무령왕지석>에서 보듯이 백제는 중국의 한문 양식을 따랐다. 또한 백제의 글씨는 고대 일본의 목간문화에 영향을 미쳤다. 7세기 아스카 시대의 목간에 쓰인 『논어』, 『천자문』, 『관세음경』은 백제가 전한 유교경전, 불교경전과 밀접한 관련이 있으며, 목간의 문장 양식이나 글자 형태 등도 백제와 유사하여 백제 도왜인이 전한 글씨를 수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일본 목간에서 보이는 백제 서예의 흔적은 7세기 백제의 개방성과 다양성, 국제성을 보여 주는 증거이다. 백제는 자국의 서예문화를 융성시킴과 동시에 그것을 일본에 보급하는 전령사 역할을 함으로써 동아시아 문자문화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신라는 5세기에 정치적으로 고구려에 예속되었고, 따라서 문화도 그 영향을 받았다. 당연히 서예문화도 고구려의 영향을 많이 받았는데, 5세기 후반 고구려의 정치적 영향에서 벗어날 무렵에는 문장과 글씨에서 신라만의 특색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7세기에는 목간을 통해 신라식 이두를 표현했으며, 자간이 없어 두 글자가 한 글자처럼 보이는 합문을 자주 사용했는데 이것은 고구려나 백제의 명문에서는 거의 보이지 않는다.
신라 서예의 특징은 한마디로 일관성과 다양성이다. 다양한 석비 형태와 그 석비 형태를 따른 서법의 다채로움은 주어진 환경을 이용하는 신라인의 적응력과 순발력을 상징한다. 또한 서체와 서풍의 일관성은 중국으로부터 먼 지리적 환경으로 선진 문물의 영향을 덜 받은 신라인의 소박하고 꾸밈없는 성품의 표상이다. 이것이 곧 글씨를 통해 표현한 신라인의 창의성이요, 정체성이다. 신라는 고구려의 서예를 수용했지만 창신創新을 통해 정체성을 확립했으며, 이후 중국과의 활발한 교섭을 통해 외래 서풍인 북위풍도 수용했는데 이는 신라 서예의 진일보된 모습을 보여 주는 것이다. 그리고 가야와 일본에 자신의 서예문화를 전함으로써 동아시아에서 문자문화 전파의 매개체 역할을 했다.
이런 특성을 지닌 삼국의 서예문화는 통일신라 서예문화의 기반이 되고 그 다양성의 원천이 되었다.

서예학적 관점에서 판독한 삼국 글씨
저자는 서체와 판독에 이견이 있는 자료를 서예학적 관점으로 접근하여 풀었다. 서체에서는 전체적인 분위기와 각 글자의 운필과 필법을 기준으로 삼았고, 판독에서는 내용보다는 당시 서자의 관점에서 장법과 결구, 필획의 특징 등으로 글자 자체를 읽는 데 초점을 맞추었다. 글자를 구성하는 요소들을 근거로 누구나 쉽게 판단할 수 있도록 합당한 의견을 제시했다. 초기의 잘못된 판독이 검증 없이 재인용되는 사례가 비일비재했는데, 그런 명백한 오독도 수정했다. 후학들이 같은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그 출처도 최대한 밝혔다.
또한 서자의 필법은 물론 각자의 각법刻法에도 초점을 맞추었다. 저자는 금석문 연구에서 글씨의 미적 요소를 논하기 위해서는 입체감이 살아 있는 각刻을 살펴야 하고 이를 위해서는 반드시 실물 중심의 연구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강조한다. <무령왕지석>, <왕궁리오층석탑금강경판>, <대구무술명오작비> 등을 통해 고대에는 각공조차 서법을 터득한 후 각에 임했음을 확인했다.

이 책은 크게 5개 장으로 구성되었다. 제1장에서는 선사시대 한반도 사람들이 한자가 유입되기 전에는 어떻게 의사를 표현했는지 간략히 정리했고, 제2장에서는 삼국 가운데 가장 먼저 한자를 받아들여 삼국 서예문화를 선도한 고구려의 글씨를 살펴보았다. 제3장에서는 백제 서예의 참모습을 알아보고, 남조와 북조 글씨와의 연관성은 물론 이전까지 크게 다루지 않았던 고구려와 신라 서예와의 연관성을 살폈다. 제4장에서는 신라 서예의 총체적 모습을 살피고 거기에 내재된 다양성과 일관성을 고찰했다.
이 책의 말미에는 외국 학자들에게도 이 책의 내용을 소개하기 위해 장별 영문 요약문을 실었으며, 연구자의 이해와 편의를 돕기 위해 서예 용어, 삼국 문자 유물 지도, 삼국과 중국의 서예사 연표를 별첨했다.
다양한 재료에 쓰여진 방대한 삼국의 문자 자료를 모아 엮은 데서 나아가 삼국의 글씨를 서예학적 관점에서 일목요연하게 분석한 이 책은 관련 연구자들에게 더없이 좋은 양분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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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현숙
대구 출생으로 경북여자고등학교, 이화여자대학교를 졸업하고 원광대학교에서 한국서예사로 미술학 석사학위를, 펜실베이니아대학교(UPenn)에서 동양미술사로 철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KBS전국휘호대회 초대작가로 활동했으며, 원광대학교에서 금석학, 서예사, 서예미학 등을 강의했다. 이천시립월전미술관‧열화당책박물관 학예연구실장을 역임했고, 현재 한국목간학회‧한국서예학회 부회장, 원광대학교 서예문화연구소 연구위원으로 한국 고대‧중세 금석문과 목간 글씨에 천착하고 있다.
저서로 『신라의 서예』, 『한국서예사』(공저), 『영남서예의 재조명』(공저), 『월전 장우성 시서화 연구』(공저), 『한류와 한사상』(공저), 역서로 『광예주쌍집』 상‧하권(공역), 『미불과 중국 서예의 고전』, 『서예 미학과 기법』이 있으며, 서화 논문 45여 편이 있다. 또한 『월간서예』에 「전시회순례기」를 50회 연재했다. 「김충현 현판글씨, 서예가 건축을 만나다」, 「출판인 한만년과 일조각」, 「서예, 우리 붓글씨 예술의 세계를 찾아서」, 「한국수묵대가: 장우성‧박노수 사제동행」, 「당대 수묵대가: 한국 장우성‧대만 푸쥐안푸」, 「20세기 한국수묵산수화」, 「옛 글씨의 아름다움」 등을 기획, 전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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