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공간을 꿰뚫는 사유의 잔치이자, 시간과 존재의 기원에 대한 탐구
뿌리 없이 표류하는 현대 사회에 대한 성찰
2002년 공쿠르 상 수상 작가 파스칼 키냐르의
‘마지막 왕국’ 시리즈, 『옛날에 대하여』『심연들』
“나는 이 시리즈 ‘마지막 왕국’을 쓰다 죽게 될 것이다. 허세를 부려 혹은 로맨틱한 감상에 젖어 하는 말이 아니라, 이 작업에 끝이 없으리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하는 말이다.”
-파스칼 키냐르
우리에게 『은밀한 생』의 저자로 널리 알려진, 생존하는 현대 프랑스 문학사의 거목 파스칼 키냐르의 『옛날에 대하여』와 『심연들』이 문학과지성사에서 출간됐다.
이 두 책은 키냐르가 “열 권이 될지, 스무 권이 될지 모르지만 이 ‘마지막 왕국’ 속에서 나는 죽어가게 될 것”이라고 소명을 밝힌 ‘마지막 왕국’ 연작 가운데 두번째, 세번째 권이다. (2002년 공쿠르 상을 수상한 '마직막 왕국' 1권 『떠도는 그림자들』은 2003년 문학과지성사에서 출간되었다.)
파스칼 키냐르에 대해 말하는 것은 어렵다. 첼로를 연주하던 음악가이며, 베스트셀러 작가이고, 시나리오 작가(영화 「세상의 모든 아침」의 원작자이다), 고대 그리스 시의 번역가, 라틴어와 그리스어에 능통하고 실존주의와 구조주의의 물결을 통과한 철학자라는 작가 자신의 복잡하고 화려한 이력 때문만이 아니다. 그의 글이 “농밀하나 잘 달아나는 수은” 같기 때문이다. 보아도 보이지 않는 것, 잡아도 잡히지 않는 것을 슬쩍 기동상(起動狀)으로만 나타내기 때문이다. 상(象)은 있으나 형(形)은 만들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비워두고, 다 말하지 않고, 아리송하게, 아득하게. 황홀하게 말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통적인 장르를 파괴하고 라틴어를 비롯한 9개의 다양한 언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면서, 가장 독창적인 담론을 통해 삶의 근원을 향한 탐색을 집요하게 펼치고 있는 그의 작품에서 우리는 그의 사유의 깊이에 탄복하고, 언어의 아름다움에 매혹된다.
키냐르의 ‘마지막 왕국’ 시리즈는 2005년 4권『천상적인 것』, 5권『더러운 것』이 나왔고, 2009년 6권 『조용한 나룻배』가 나왔다. 앞으로도 이 시리즈는 계속될 계획이다.
말을 거부하며 말하기, 말없이 말하기,
언어를 부정하는 작가, 키냐르
“나는 욕망 때문에, 습관적으로, 의도적으로, 혹은 직업 삼아 글을 쓰는 게 아니다. 나는 생존을 위해 글을 썼다. 내가 글을 썼던 이유는 글만이 침묵을 지키며 말을 할 수 있는 유일한 방식이었기 때문이다.”
-파스칼 키냐르
키 냐르는 작품에서 아주 다양한 언어를 사용한다. 키냐르는 어원을 밝히기 위해 외래어(특히 라틴어와 그리스어 외에도 산스크리트어, 헤브라이어, 독일어, 이탈리아어, 중국어, 일본어, 그것도 모자라서 신조어를 만들어 쓴다)를 섞어 쓰고 있다. 이는 언어의 불완전성을 인지하고 언어를 부정하면서 글쓰기를 직업으로 삼은 작가가 자신의 방식으로 대처하는 언어관이 반영된 것이라 할 수 있다. 키냐르에게 언어는 우선 자연과 상치되는 것이며, 습득된 문화, 인위적 가공이다. 언어와 자연 사이에 질러진 가름막을 계속해서 환기하기, 언어를 부정하기. 이것이 언어를 업으로 하는 키냐르의 허패이자 진패이다.
나탈리 사로트의 『의심의 시대』(1956)에서 유래된 이른바 ‘의심의 시대’를 사는 작가들에게 언어는 더 이상 의미를 실어 나르는 매개체가 아니다. 언어는 세계를 재현할 수도 없을뿐더러 언어와 세계는 이미 이질적이다. 언어의 힘은 세계를, 자연을 해석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언어의 무력함 그 자체에 있다. 이야기하는 내용보다 이야기하는 방식에서 더 진심이, 진실이 보이지 않는가? 키냐르에게 언어는 더 이상 의미를 실어 나르는 도구가 아니다. 그는 언어라는 질료 자체가 희생물이, 제물이 되어 완전 연소되는 지경을 찬미한다.
사라지고 없는 ‘옛날’에 대한 광대하고 무변한 사유
‘마지막 왕국’ 시리즈, 두번째 책 『옛날에 대하여』
잠자는 사람은 옛날로 빠져드는 게 아니라 녹아든다. 옛날 속으로 사라진다. 옛날 깊숙이 용해된다.
-152쪽
근 원의 문제에 강박적일 정도로 천착하며 과거, 태고로의 역행을 주행하는 키냐르는 우리에게 익숙한 ‘시간’ 개념(과거-현재-미래로 이어지는 일방향적 시간 개념)과는 아주 다른 형태로 시간 개념을 재구축한다. 그리고 그는 기원(起源)의 자리에 ‘옛날’을 설정한다. 많은 테마들 중에서도 시간의 문제가 키냐르에게서 가장 중요하다 할 수 있는데, 작가가 작심하고 본격적으로 옛날에 대한 정의(定議)를 시도한 담론인 이 책은 키냐르 세계의 지침서라 할 수 있다.
『옛날에 대하여』를 비롯해 한국에 출간된 키냐르의 작품 대부분을 번역해온 송의경은 키냐르의 작품은 그것이 어떤 주제나 제목을 표방하든 간에 모두가 무늬만 다르게 되풀이되는 ‘옛날’에 대한 담론이 라고 말한다. 주제가 음악(『세상의 모든 아침』)이든, 회화(『로마의 테라스』)든, 언어(『혀끝에서 맴도는 이름』)든 간에. 그리고 제목이 『은밀한 생』이나 『섹스와 공포』 혹은 『떠도는 그림자들』이든 간에 결국엔 모두가 옛날로 수렴된다. 따라서 그의 작품 세계는 옛날에 대한 미세 담론이 모여 이루어진 옛날에 대한 거대 담론이다.
옛날은 사라지고 없는 무엇이다. 사라진 것을 부활시키는 유일한 수단은 언어뿐인데, 언어 이전의 세계를 출생 이후에 습득된 언어로 표현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언어의 불충분성 때문에 무엇에 대한 기술(記述)은 자꾸만 미끄러진다. 결코 완성될 수 없는 까닭에 작가는 끊임없이 말을 바꿔가며 새롭게 시도할 수밖에 없다. 그는 자신이 이 ‘마지막 왕국’(키냐르의 '마지막 왕국'은 출생 이후의 시기를 말한다. 엄마의 배 속에 있던 태아 시절이 '최초의 왕국'으로 키냐르는 두 개의 세계만을 상정한다.) 시리즈를 쓰다가 죽을 것이라고 공언한 바 있다. 그것이 ‘옛날’에 다가갈 수 있는 방법이므로.
키냐르에 따르면 시간은 두 가지만 존재한다. ‘옛날’과 옛날 이후인 ‘과거’. ‘과거-현재-미래’라는 일정한 방향성을 지닌 시간 개념은 사회가 우리를 안심시키려고 고안해낸 속임수에 불과하다는 것이 키냐르의 생각이다. 그가 제시하는 진짜 시간이란 방향성 없이 양끝만 있는, 흐르지 않고 제자리에서 돌며(예를 들면, 계절의 순환) 수직으로 쌓여가는 그런 시간이다. 옛날 이후에는 오직 누가적(累加的)인 과거가 있을 뿐이다. 진짜 시간에 미래는 물론 포함되지 않으며, 현재마저도 과거의 일부로서 과거에 편입된다. “과거란 현재라는 눈[目]을 가진 거대한 육체”(『옛날에 대하여』22쪽)라는 것이다.
키 냐르의 시간성에 대한 고찰은 오늘날, 뿌리 없이 표류하는, 현재, 현실에 대해 성찰하는 깊은 사색이라는 것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과거의 속성, 과거라는 것에 대해 말하고 싶어 쓴 것이 『옛날에 관하여』라면, 여기에 또 다른 이유로” 그는 세번째 권 『심연』을 썼다고 한다.
뿌리 없이 표류하는 현대 사회에 대한 은밀하면서도 폭로적인 계시
‘마지막 왕국’ 시리즈, 세번째 책 『심연들』
더 구체적으로는 대양의 가장 깊은 곳, 태양 빛이 더 이상 닿지 않는 곳을
심연이라 부른다.
-53쪽
키냐르는 2002년 9월 첫째 주 『엑스프레스Express』에 실린 인터뷰에서 ‘마지막 왕국’을 기획하게 된 동기에 대해 이런 말을 했다.
“요 즘 같은 시대에는 반드시 은신의 거주처를 만들어, 거기서 안전하지 않은 생각을 해야 합니다. 우리가 사는 사회는 그 반대를, 그러니까 안전한 생각만 하고 살 것을 요구하지요. …… 유일한 가치가 지배되는 세상, 나는 이것이 가장 싫습니다. 내 가까운 친구들마저도 신앙자들이, 독트린 주장자들이 되는 것을 보며 절망감을 느꼈습니다.…… 여성은 여신화되고, 죽음은 숭배되고, 민주주의는 페리클레스 시대보다 더 못하고, 테크놀로지가 모든 페티시즘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이 ‘마지막 왕국’은 내게는 대홍수에서 살아남기 위한 노아의 방주 같은 것입니다. 내가 이 방주에 싣고 싶은 것은, 무신론적인, 무국적적인 사고, 동요하는 생각, 불안한 성(性), 비이성, 비직선적, 비방향적 시간, 비기능적 예술, 비밀, 척도 없는, 예측할 수 없는 자연 같은 것들입니다.”
키 냐르에 따르면 오늘날 우리는 더 큰 규모의 독재주의에 살고 있다. 과거는 우리 사회를 망보고 있다가 적당한 기회를 틈타 복귀한다. 사회는 더 나은 방향으로 진보하는 것이 아니라 돌아오면 안 될 것 같은 끔찍한 과거를 반복하는 것이다.
『심연들』의 옮긴이 류재화에 따르면 ‘마지막 왕국’은 자연을 관조하고 우주를 보는 사색의 창인 동시에 진보를 외치며 오히려 퇴행하고 있는,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뿌리 없이 표류하는 현실에 대한 은밀하나 폭로적인 계시이 다. 표준화되고, 세계화되고, 획일화된 집단 모델을 강요하는 오늘날 사회에 대한 강한 불만을 가진 불굴의 레지스탕스 키냐르는 제법 무례하고도 역공적인 방식으로 시간 개념을 재구축하기에 이른 것이다. 역사보다는 선사를, 철학보다는 과학을, 신앙보다는 무신론을, 샤먼을, 집단 사회보다는 개인적 내밀을, 애국주의보다는 무국적주의를 선호함을 키냐르는 문맥 곳곳에서 단호하게 드러낸다.
그 의 방주에 실어야 할 것은 성(聖) 모독적인, 무신론적인, 더러운, 뜨듯한, 축축한 음지의 어떤 것들이다. 동굴, 자궁, 어둡고 습한 곳 속에서만 싹을 틔우는 씨앗, 정액 같은 것. 역사가들이 전승하지 않는 것, 길을 걸으나 자취를 남기지 않는 것, 보이지 않는 것, 보잘것없는 것, 드문 것, 미세한 것, 티끌 같은 것, 무어라 이름 붙일 수 없는 무형지상의 것이나 황홀한 것, 야(野)한 것, 생(生)한 것, 그윽하고 어두운 것이나 지극히 정(精)하고 정(靜)한 정수, 진수이다.
또한 키냐르는 작품의 형식에서도 자신의 이러한 무정형적인, 무국적적인 특징을 잘 드러낸다. 그의 글은 소설인지, 철학 에세이인지, 혹은 시인지 산문인지 알 수 없는 탈장르적인 독특한 형식이다. 키냐르의 글을 둘러싸고 제기되는 비장르, 탈장르적 글쓰기 논쟁의 본질은 그가 추구하는 문학적 스타일에 있지 않다. 키냐르에게 그것은 필연이고 순리이다. 키냐르에게 장르는 줄, 계통, 소속, 나라가 발급한 신분증, 영업을 위해 내미는 명함이다. 탄생과 함께 성과 이름이 등록되고, 소속이 정해지며, 국적을 국어를 획득한다. 이 모든 사후적, 사회적 획득물을 찢는 것, 문학가가 하는 일은 바로 그것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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