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기조의 신작 시집 <기술자가 등장하는 시간>이 출간되었다. 시인은 시집의 권두에 실린 ‘시인의 말’에서 “처음 시를 짓기 시작할 무렵 기계, 기름, 기술이라는 세 가지 상징으로 삶과 노동의 세계를 그려보자는 마음을 먹었다”고 밝히고 있는데, 시인은 특유의 ‘기계적 상상력’을 발휘하여 시집 <낡은 기계>와 <기름美人>을 펴낸 바가 있다. 따라서 이번 시집으로 ‘기계 → 기름 → 기술’로 이어지는 소위 ‘기계 3부작’을 마무리하고 있다. 한국시가 갈수록 가볍고 발랄한 시들로 명맥을 유지하는 정도의 최근 문학 현실 속에서 자신만의 단독적인 시세계를 펼쳐 보이려는 진중함이 담긴 시집이다. 시집에는 56편의 시가 4부로 나뉘어 수록되었다.
조기조는 “기계 만드는 일하다 / 책 만드는 일”(「은유의 기술」)을 하며 사는 시인다. 그는 마흔을 분기점으로 이전에 20년간 공장에서 기계 만드는 일을 하다 이후 인문학 출판사를 차리고 다시 20년 가까이 책을 만들고 있다. 시인은 기계를 만들 때 모터와 유공압 기술을 전문으로 공장자동화 라인을 설계, 제작, 시운전을 하는 기술자였다고 한다. 현재는 기름 범벅으로 잔뼈가 굵어진 손으로 난해한 최신 철학 원고를 들고 편집, 교정, 교열, 표지디자인, 제작, 영업 등등 출판의 전 공정을 직접 수행하는 전천후적 기술자다. “기계도 어려웠고 / 책도 난해했지만 // 책 만드는 일은 / 기계 만드는 일과 다르지 않다”고 말한다. 기계와 책 만드는 일이 충분히 이질적일 수 있는데 서로 다르지 않다고 하는 말은, 물론 시인 나름의 고단수의 은유일 테지만, 은유를 넘는 실제라고 말해도 좋을 듯하다. 그것은 아마도 시인이 삶을 풀어나가는 원리, 즉 삶의 기술을 이해하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어디서 누군가가 / 부르면 달려가”(「기술자가 등장하는 시간」)서 그 누군가가 당면한 가장 큰 곤란을 해결하는 기술자처럼 말이다.
그러한 기술자의 눈으로 그가 살피고 있는 시적 대상들은 인간이든, 자연 사물이든, 기계든, 현실 세계 속에서 각각 그 정체 특유의 형식과 내용을 갖는 존재들이다. 시인은 그것들의 존재성, 즉 삶의 기술을 파악하고, 나아가 그 기술들이 상호 유기성으로 어우러지는 세계를 노래한다. 가령, “시각장애인을 안내한다는 문구가 적힌 / 노란 조끼를 등에 두르고 있는 개”(반려의 기술)에게서는 단지 인간과 동물 간의 보호와 위로를 넘어서 직업을 가진 개의 주체성을 읽어내고, “거대한 크레인”이 수몰 위기에 처한 “동물은 알지 못하는 시간을 산 거목”(「거목과 크레인」)을 옮기는 대목에서는 이질적 대상들 간의 일체성을 노래하기도 한다. 하지만 삶의 기술이 항상 희망적이거나 긍정적이지만은 않다. 시적 주체가 피땀으로 만든 기계의 “목적은 세계의 멸망이 될”(「기계는 자신이 하는 일을 알지 못한다」) 수도 있다고 경고를 하며, “동물과 곤충의 이름으로 / 포획과 탈출의 기술을 쌓아”(「천적의 기술」)가는 생명체들의 불가피한 천적 관계를 읽고, “죽음을 모르는 기계 앞에서 / 목숨을 걸 수밖에 없는 기술자”는 “위험을 모르는 기술자가 아니”(「기술의 길」)라는 존재의 비극성에도 포커스를 맞춘다.
한편 조기조 시인의 ‘기계, 기름, 기술시’는 기술, 혹은 문명적 방향에 대해 긍정성과 부정성을 모두 포괄하면서 나아가 문명과 생태적 관계에 대해서도 적대적이지 않은 넓은 품을 펼쳐 보인다는 점이 특장이다. 그러면서도 결코 손쉽게 동일성으로만 환원하지도 않는다는 점이다. 가령 “숲의 간지(奸智)라 해도 좋다 / 저리 서로 다른 것들이 / 서로 다르기 때문에 살아갈 수 있는 / 숲의 기술을, 그 필연을”(「숲속의 기술자」) 말하며 차이를 부각시키기도 한다. 그러한 시적 태도는 애매모호하거나 가치중립적이라기보다 주어진 현실을 온몸으로 부딪히며 밀고 나가겠다는 리얼리즘 시정신에서 비롯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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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말
처음 시를 짓기 시작할 무렵 기계, 기름, 기술이라는 세 가지 상징으로 삶과 노동의 세계를 그려보자는 마음을 먹었다. 기계는 세계라고 할 수 있고, 기름은 그 세계가 작동하는 힘의 원천이며, 기술은 세계가 작동하는 원리가 될 수 있겠다는 발상에서였다. 이렇게 마무리를 해본다.
(뭔가 마무리를 하고 나면 삶은 적나라해진다.)
추천사
시의 기술자가 시의 창작자보다 점점 더 많아진다는 느낌을 받는 요즘 시단에서 나도 그런 축에 드는 건 아닌지 의문하던 차에 조기조 시인의 시들을 읽었다. 평소 생활 제품이 고장 나도 아예 손을 쓰지 못하는 기계치인 나는 그것을 만들거나 고치는 기술을 지닌 기술자를 존중하므로 당연히 시의 기술자보다 기계의 기술자가 일상에선 더 필요한 사람이라고 여긴다. 그런데 조기조 시인은 이 한 권의 시들에서 기계를 만들고 고치는 기술을 지닌 그 사람들뿐만 아니라, 풀포기․고목․벌레․ 짐승들까지 함께 어우러져 살 줄 아는 기술과 서로 천적이 되어 잡아먹는 기술을 동시에 지닌 삼라만상을 기술자로 규정하고 있어, 사뭇 경이롭다. 시의 기술자가 아니라, 시의 창작자로서 조기조 시인이 시들 속에 살려낸 기술자는 그의 시정신의 은유자가 되고 그의 시세계의 상징자가 되어서 유려한 시의 문장과 쉬운 시의 문법을 발휘한다. 그리하여 세상의 수많은 기술을 ‘진짜 기술은 언어와 싸우는 기술’이라는 시적 명제로 환치하여 완성하고 선언한다. -하종오(시인)
기계를 만들고 움직이는 ‘기술’이라는 용어는 여러 직종의 이름 뒤에 붙여져서 만능열쇠처럼 쓰인다. 조기조 시인은 이런 점에 착안하여 기술을 세계를 움직이는 원리로 보고 이번 시집 전체를 꿰뚫는 알레고리로 삼고 있다. 자연 만물의 존재양태 속에 내재하는 기술은 인간을 포함한 동식물의 생존에 골고루 작동하면서 ‘조기조 식’ 세계관을 형성한다. 시인은 자신의 눈앞에 펼쳐지는 모든 사태를 기술이라는 상징으로 설파한다. 조기조의 시에서 기술은 단순한 복무의 의미를 넘어 시간을 움직이고 변화를 이끄는 ‘보이지 않는 손’으로 섬겨진다. 일찍부터 노동문학에 몸담고 살아온 시인의 비애가 시의 곳곳에 박혀 있다. 노동문학이 빠지기 쉬운 상투적인 항변을 자제하고 계획된 가설을 증명하는 철학자적 태도로 시의 뼈와 살을 내화하여 탄탄한 미학적 성취를 보여준다. 기술이라는 유물적 용어에 사람살이의 서정성을 새겨 넣어 보편적인 공감을 얻어내고 있는 점이 이번 시집의 돋보이는 면모라고 생각한다. -정병근(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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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기조
1963년 충남 서천에서 태어났다. 1994년 제1회 <실천문학> 신인상을 받으며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낡은 기계>, <기름美人>이 있으며, 엮은 책으로 <한국대표노동시집>(공편), <나에게 문병가다>, <서정춘이라는 시인>(공편)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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