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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날이 어랑어랑 오기는 하나요(걷는사람 시인선 35)
저자 : 홍경희 ㅣ 출판사 : 걷는사람

2020.12.24 ㅣ 144p ㅣ ISBN-13 : 97911912620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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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도서 > 문학 > 시 > 한국시
걷는사람 시인선의 35번째 작품으로 홍경희 시인의 『봄날이 어랑어랑 오기는 하나요』가 출간되었다. 2003년 ≪제주작가≫ 신인상으로 등단한 이후 제주에서 태어난 시인으로서의 숙명에 천착해 온 홍경희 시인의 두 번째 시집이다. 첫 시집『그리움의 원근법』(동학사, 2010) 이후 10년 만에 세상 밖으로 나온 그의 시편은 ‘나’로부터 시작된 고통이 ‘당신’과 ‘우리’, 종국에는 ‘세계’로 뻗어 나가는 공감과 증언으로 응결된다.
“막다른 길인 줄 알면서도 끝까지 걸어가고 싶고/해서는 안 되는 일이라면 한번은 해 보고 싶”은 시인은 “몸속에 똬리를 틀어/버티고 있는 어둠”(「나와 나」)을 들여다본다. 시인의 마음 한편에 단단히 자리잡은 “붉어진 서러움”은 “두고두고 갚아야 할 빚처럼”(「내 몸에 다녀간 손님」) “매듭짓지 못한 문장”(「어느 아침의 문장들」)으로 남는다.
“고요함에 쓸쓸함을 덧깔고 앉으면/시 한 편, 나무의 언어로 둥긋하게 써지리”(「세 들고 싶은 집」), “끝없이 바람의 싯구 받아쓰고 계신가요”, “또 오늘 시 한 편 속에 서럽게만 지겠네요”(「바다 무덤」) 등의 구절로 말미암아 보았을 때, “끝끝내 굴절된 고통”으로 “우울증을 앓는 여자”(「바다 억새」)는 억압과 폭력으로부터 비켜서지 못하는 이들에 대해 시 쓰는 일을 정명처럼 받아들인다. 마음속 불가해한 슬픔 때문일까, “밑바닥 무겁지 않은 영혼이 없”(「내 몸에 다녀간 손님」)기 때문일까. 시인은 4·3의 망자들에 대한 진혼과 베트남전쟁 당시 한국군의 학살에 대해 이야기한다. “가만히 떠올리기만 해도/나지막한 슬픔이 되는 이름”(「귀덕歸德」)들을 호명하고, “허공에 발을 짚어 동냥하듯 살”(「달의 헌화」)아가는 이들의 귀추를 기록한다. “섬이, 섬사람들이 서로를 신으로 모시고 살았던 그때”(「섬사람 이야기」)를 진술하기도 하고, “이 바다를 잠시 스쳐 가는 당신들은 모”(「섬의 비망록」)르는 숨비소리에 귀를 기울이기도 한다.
시인은 “골목의 빈방으로 숨어들고 싶다가도/또 아무 데도 묶이고 싶지 않은/나는 아무래도 틈이 많은 사람이다”(「환절기」)라고 말하지만 이 시집을 완독한 독자들은 알아챌 것이다. 역사화된 상흔과 자연에 대한 겸허한 연민을 지닌 그가 ‘당신’들로 정의되는 타자의 고초에 적극적으로 동참하고 있다는 것을. “꽃이 피고 지는 일이 슬픔만은 아”(「산전, 꽃 진 자리」)니라고 위로하며 “불행도 안녕하기를”(「오래된 독백」) 바란다는 것을. 해설을 쓴 이명원 평론가의 말처럼 이번 시집은 시인 홍경희가 “신들의 섬” 제주에서 목놓아 부른 “접신의 영가靈歌”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세계의 상처를 기꺼이 어루만지는 어떤 마음이 이곳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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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 차]

1부 밑바닥 무겁지 않은 영혼이 없다지만
침을 맞으며
어느 아침의 문장들
점 보는 여자
나와 나
바늘엉겅퀴
내 몸에 다녀간 손님
매화
밤비 봄비
상련
봄볕이 무거워
오래된 독백
이름을 바꿔 주고 싶었다
햇살의 무게
폐사지의 오후

2부 기대 없이 꽃은 피고 약속 없이 꽃은 지고
가을엔
꽃무릇
환절기
당신, 이라는 기호
소나기
불면
동거의 방식
담쟁이
봄밤
교정보는 여자
빈 의자 하나 내어놓고
세 들고 싶은 집
존자암 가는 길
봄은 또 덧나
새를 읽다

3부 슬픔이 어김없이 괴어들었을
섬의 비망록
제주 밭담
섬사람 이야기
귀덕
귀덕 바다
큰엉
당신과 바다
겨울 멀구슬나무
길을 내는 방식
미망의 봄
바다 억새
팽나무가 있는 풍경
비자림
수망
바다 무덤

4부 이 봄에는 다녀갈까
꽃의 내력
달의 헌화
사월에 내리는 눈
산전, 꽃 진 자리
어린 때죽나무를 위한 조사
불망기
동백 밥상
어쩌면 잊혀졌을 풍경
회천
슬픔의 종족
점등
도안응이아
물야자나무는 아름다웠으나
환지통
연꽃 비문
오늘, 없는 사람

해설
신들의 섬, 접신의 영가
-이명원(문학평론가)


[본 문]

쉰넷 생일 아침에
안면 없는 당신의 유고시를 만난다

하루치의 알약을 삼키고
하늘에 매달리려는 기대와
사람에 기대려는 문장의 실밥들을
한 올씩 풀어 헤치며 남겨 놓은 시편들

나와는 슬픔을 해명하는 방식이 다른
당신의 유언을 읽으며
매듭짓지 못한 문장을 많이 가진 나는
조금 무서워진다

씁쓸한 독백을 선물로 받는 생일이
한 번쯤 있어도 상관없겠지

문득, 고쳐 쓰고 싶은
그러나 끝내 바뀔 수 없을 것만 같은
나, 라는 문장들이 떠오른다

가끔 울음은 뻣뻣하게 경직된 어깨를
풀어 주는 처방이 되기도 한다
─「어느 아침의 문장들」 전문

붉고 붉어져서 끝내 숨길 수 없는 말

애써 도로 삼키지 않아도 좋겠지

변명하지 않아도 되는
사랑 하나 있어도 좋겠지
─「가을엔」 전문

마음을 거들어 주는 사람도 없이
서편 하늘은 언제 저렇게 붉어졌나

지난여름에 태워 버린 말들을 안주 삼아
비워낸 소주 몇 잔으로도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잃어버리고 싶은 밤

가볍게 들려오는 뒷담화같이
가끔 흔들려도 흉이 되지 않는다고
잠시 쉬어 갈까
유혹하는 골목길 연인들의 대화들

단숨에 읽어내기 어려운 문장의 쉼표 같은
이 계절의 표현법을 해석하며
나도 골목의 빈방으로 숨어들고 싶다가도
또 아무 데도 묶이고 싶지 않은
나는 아무래도 틈이 많은 사람이다
─「환절기」 전문

이 바다를 잠시 스쳐 가는 당신들은 모를 것이다

보말 몇 개로 하루의 몫을 감당해냈던 애기 해녀가
지느러미 대신 다른 호흡법을
익히며 어른이 되어 가고
거친 물결에도 몸을 내맡겨야 하는
바다의 순리를 깨우친 이후

열 길 물속,
소라씨 전복씨 뿌리고 거둬 온
저마다의 물밭이랑에
식솔 대여섯 목숨줄 걸리면
의지할 것은 오직 저 바다뿐이었다는 것

마침내 바다와 여자들은 한 몸이 되어
맥박의 주파수까지 같아졌다는 것

오늘 저 바다에서 여든두 살 할머니가
물숨을 놓았다는 소식이 또 들려온다

숨비소리 한 대목이 사라지는 날이면
바다도 몸이 무너진 채 운다
바람도 잠시 멈춘다

당신들은 끝내 들을 수 없는
울음소리
저 숨비소리들
─「섬의 비망록」 부분

소중한 것들은 너무 꼭꼭 감춰 둬서
언제부터인가 그렇게 숨겨 둔 곳조차
기억해내지 못하는 당신의 이야기

꽃 지고 잎 지고 좋은 시절 다 지나가고도
맨몸의 가지마다 노랗게 매달고 있는 멀구슬나무 열매처럼
마치 도트처럼

기억의 방식은 사람마다 달라서
비밀스럽게 점이 되거나 선이 돼 버리기도 한다
─「겨울 멀구슬나무」 부분

아무도 안녕이라
말 못 하는 사월 숲속

(…)

허물어진 비트 안에 짐승처럼 웅크려서
무쇠솥에 콧구멍을 들이밀던
밥내의 기억

오래전 녹슨 허기로
엉겨 붙은 발치쯤

흩어진 봄빛 아래 밑불 놓듯 촛불 켜고
이슬 먹은 풀잎으로 쇠솥을 닦고 닦아

싸락눈
싸락 싸그락
됫박쌀을 씻는가

가슴에 숟가락 하나 꽂고 간 그 사람도
먼 길 휘적휘적 절절히 돌아와서
여린 꿈
밀어 올렸나,
제비꽃이 피었다
─「사월에 내리는 눈」 부분

학살은 끝났지만 불타 버린 마을 어디에도 살 곳은 찾지 못했어요 더부살이 떠났지요 동생과 저를 데리고 간 다낭 먼먼 친척 집도 먹을 죽이나 발 뻗어 누울 여유조차 없었어요 엄마는 구걸이라도 다니기로 했어요 (…) 엄마는 동냥 나가며 두 개의 주머니를 찼지요 베트남 사람들이나 미군들이 건넨 돈은 한 주머니에 분간 없이 아무렇게나 넣었지만 꼭 한국군에게 한두푼 얻은 돈은 다른 주머니에 넣었어요 집으로 돌아온 뒤 우리를 불러 앉힌 엄마는 한국군에게 동냥한 주머니에서 꺼낸 돈을 인두로 한장 한 장씩 빳빳하게 다렸지요

그다음 한 장 한 장 또 돈을 세었지요

다섯 살 우리 딸 씨, 열 살 우리 아들 펀, 우리 마을 티엔, 떰, 러이, 미엔, 어이, 꾸아, 응옥, 따이, 하인… 이것은 그들 모두의 목숨값

인생은 동냥해서라도
살아내는 것, 명심해라 가르치셨지요

노잣돈, 태워 주지 못하고
이승 자식 밥알 삼았지요
─「오늘, 없는 사람」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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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사

현기영(소설가)

여러 해 동안 제주작가회의의 살림살이를 거의 도맡다시피 하면서 이끌어 온 홍경희 시인이 회심의 시집을 발간했다. 궂은일도 마다않은 성실한 살림꾼인 그를 늘 고맙게 생각하면서도 정작 그의 시를 몇 편 읽어 보지 못했던 나는 이번 시집을 읽고 적이 놀랐다. 한마디로 말해서 시들이 좋았다. 시인은 이 시집에서 자신에 대해서 말하기를, 남자로 태어났어야 할 사주인데 여자 몸으로 짊어지느라 깊은 잠을 잘 수 없는 날들이 많다고 했다.
시인은 자신의 어두운 내면을 응시한다. 몸속에 어둠이 똬리를 틀고 있고, 날카로운 갈등의 바늘엉겅퀴들이 솟아 있다. 그래서 그의 몸은 “비가 오지 않아도 눅눅하게 젖는 날이 많”(「오래된 독백」)다. 때로는 사랑에 대한 어두운 열정의 고통을 겪기도 한다. “허공에 보고 싶단 말 손톱으로 쓰고 있다”(「봄은 또 덧나」)고 말하지만, 결코 애상이나 감상에 떨어지지 않는다. 절절한 그리움에 맞서는 강한 자의식이 있다. 그는 단호하게 “불완전 사랑의 문장”을 “수정”(「교정보는 여자」)하고 싶어 한다.
제주 특유의 거친 자연을 노래한 시편들, 내면 풍경의 묘사도 좋긴 하지만 내 마음을 더 끄는 것은 4·3의 슬픔에 대한 시편들이다. 4·3의 망자들을 위한 진혼의 목소리가 절실하게 가슴에 와 닿는다. 4·3평화공원의 ‘비설飛雪’ 조각상과 케테 콜비츠의 ‘피에타’ 조각상을 연상시키는 「꽃의 내력」, 이덕구 산전을 노래한 「사월에 내리는 눈」이 특히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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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경희
제주도 귀덕에서 태어났다. 2003년 《제주작가》 신인상을 받으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으며 시집 『그리움의 원근법』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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