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 영풍문고


미리보기
내서재 보관하기 읽고 싶은 책을 담아 두셨다가 언제든지 구매하실 수 있는 회원님의 서재 입니다.
채플린과 히틀러의 세계대전
저자 : 오노히로유키 출판사 : 사계절출판사 역자 : 양지연
2017.08.18 | 350p | ISBN-13 : 9791160941043
판매가 : 16,800 원 → 15,120 원 (10%)
적립금 : 840 원 (5%)

오늘 수령 가능  (주말/공휴일 제외) 주문 수량 변경시 안내  [당일배송 지역] 안내

5,000원 할인 최대 3% 적립 무이자 혜택
  • 주문수량
  • 카드혜택
  • 서평쓰기
Now is

크기 A5(210mm X 148mm, 국판) 제품구성 단행본 이용약관 청약철회
  • 이 책의 분류
  • 도서정보
  • 목차 및 본문
  • 출판사서평
  • 저자 및 역자 정보
  • 독자서평
국내도서 > 인문 > 한국역사/지리 > 역사일반/교양/역사...
  • 이 책의 분류
  • 도서정보
  • 목차 및 본문
  • 출판사서평
  • 저자 및 역자 정보
  • 독자서평
1889년 4월 16일, 런던 빈민가에서 찰스 스펜서 채플린이 태어났다. 그리고 나흘 뒤 오스트리아 브라우나우암인에서 아돌프 히틀러가 태어났다. 20세기에 가장 사랑받은 남자와 가장 미움받은 남자는 이렇게 불과 4일 차이로 세상에 태어났다.
반세기가 지난 1940년 6월 23일 아침, 아돌프 히틀러는 파리에 도착했다. 나치 독일이 프랑스를 정복했다는 뉴스에 전 세계가 경악했고 사람들은 절망에 빠졌다. 누구도 히틀러의 기세를 꺾을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리고 바로 다음 날, 채플린은 반격을 개시한다. 할리우드의 촬영장에서 영화 <위대한 독재자The Great Dictator>의 마지막 신 촬영을 시작한 것이다. 세계 영화사를 빛낸 바로 그 ‘연설’ 장면이다.
이 책 『채플린과 히틀러의 세계대전』은 20세기 중반 무서운 속도로 유럽을 정복해나가던 나치 독일의 히틀러와 웃음이라는 방패를 들고 저항한 미디어의 제왕 찰리 채플린의 대결을 추적한다. 전 세계를 휩쓸던 전체주의의 위협 속에서 채플린은 어떻게 세기의 독재자에게 맞설 수 있었을까? 시대의 광기 앞에서 스스로 ‘평화 선동가(Peacemonger)’가 되기로 한 채플린의 이야기는 테러와 분쟁, 패권주의로 몸살을 앓고 있는 오늘 우리에게도 커다란 시사점을 던져준다.
  • 이 책의 분류
  • 도서정보
  • 목차 및 본문
  • 출판사서평
  • 저자 및 역자 정보
  • 독자서평

[목 차]

시작하며. 20세기의 빛과 그림자 … 004

제1장 콧수염
찰리 채플린과 아돌프 히틀러 … 027
병역 기피 소동 … 034
전시 공채 캠페인 … 037
역사상 최초의 반전 영화 〈어깨총〉 … 040

히틀러는 채플린의 콧수염을 따라했을까 … 042

제2장 히틀러의 등장과 채플린을 향한 공격
세계 미디어의 탄생과 채플린의 베를린 방문 … 047
히틀러의 약진 … 050
채플린을 향한 공격 개시 … 054
두 사람의 운명을 바꾼 유성영화 … 058
개전-채플린의 두 번째 베를린 방문 … 061
애국심은 광기다 … 068
제3제국의 영화 통제 … 070
나치의 소송전 … 074
세계로 퍼져가는 콧수염 비교 … 076

제3장 나폴레옹 프로젝트
나폴레옹 프로젝트의 시작 … 083
가짜 나폴레옹 이야기 … 089
반전을 담다 … 092
〈모던 타임즈〉 개봉과 나폴레옹을 향한 미혹 … 100
단념 … 104

제4장 프로덕션 6 제작 준비
〈위대한 독재자〉의 제작 동기 … 113
아이디어 숙성과 스토리 구성 … 118
강제수용소 예언 … 123
힌켈과 나팔로니 … 124
최초의 스토리 구성 … 127
나치의 훼방 … 137
스튜디오 준비기 … 143
힌켈의 아내 … 145
형 시드니와 동생 휠러 … 147
각본 완성 … 151
〈위대한 독재자〉 각본 구성 … 156
히틀러의 반응과 독일, 이탈리아, 영국의 압력 … 163
미국의 역풍 … 166
제2차 세계대전 발발 … 170

제5장 촬영 시작
마침내 시작된 여정 … 175
힌켈로 변한 채플린 … 181
지구본 댄스 … 187
소형 비행선과 잭 오키의 참여 … 191
본 촬영 종료 … 197
전쟁 장기화, 제작 장기화 … 199

제6장 연설
삭제된 ‘춤추는 군인들’ … 207
마지막 장면의 초기 구상 … 209
연설 아이디어 … 214
‘엉터리 독일어 연설’ 대본 … 217
히틀러의 진격과 채플린의 고독 … 223
반격, 연설 신 촬영 … 226
달라진 여론 … 231

제7장 완성-작품 분석, 작품 공개와 그 충격
찰리의 길 … 239
〈위대한 독재자〉 자세히 보기 … 241
유대인 영화의 틀을 넘어 … 243
음악과 춤으로 본 〈위대한 독재자〉 … 245
게토의 모략 … 248
힌켈과 나팔로니 … 250
유나이티드의 홍보 작전-독재자 놀이 … 252
개봉 당일 … 258
찬반이 뒤섞인 미국의 비평 … 262
온 국민이 열광한 영국 … 267
독일의 안티 캠페인 … 270
채플린과 히틀러의 ‘세계대전’ … 273
일본과 〈위대한 독재자〉 … 277
히틀러는 봤을까 … 279

제8장 〈위대한 독재자〉라는 미디어
끝나지 않은 전쟁 … 289
냉전기의 채플린, 평화 선동가의 고난 … 291
미국에서의 채플린 재평가 … 295
오늘날의 위상 … 297
전시에 제작된 반나치 영화와 비교 … 299
힌켈의 엉터리 연설 번역 … 303
필름에는 독이 들어 있다 … 306
영원히 현재형인 마지막 연설 … 309

마치며 … 317
감사의 말 … 319

참고문헌 … 322
주 … 324
〈위대한 독재자〉 스텝과 배역 … 344
엉터리 독일어 연설 해독 … 346
자료사진 … 350
[본 문]

채플린의 삶이 새 시대의 희망이라는 긍정적 시류와 곤경 속에서도 웃음을 추구한 전대미문의 재능이 결합해서 결실을 맺은 예라면, 히틀러의 삶은 패전의 절망이라는 부정적 시류와 좌절된 예술가의 꿈이 뒤엉켜 분출된 예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식으로든 시대의 흐름과 개인의 재능이 ‘미디어 시대’에 무한히 증폭되면서 등장한 거대한 괴물이 바로 채플린과 히틀러이다. _34쪽

히틀러가 정권을 잡은 뒤, 채플린과 히틀러의 콧수염이 자주 거론되었다. 평론가 구사모리 신이치는 “채플린은 히틀러가 정치가로 등장하기 이전부터 세계적 스타였다. 인지도로 보면 분명 따라하고도 남았을 것이다”라고 추측한다. (중략) 결론부터 말하면 채플린의 영화가 독일과 오스트리아에서 처음 상영된 것은 1915년의 일이다. 따라서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히틀러가 채플린의 콧수염을 따라했다는 사실은 성립하지 않는다. 하지만 똑같이 닮은 콧수염을 놓고 두 사람의 역사는 크게 교차한다. _42쪽

과격파의 수는 적었지만, 많은 국민이 비슷한 불안과 불만을 공유했다. 바이마르공화국의 앞길에는 연합국이 강요하는 가혹한 시련만 남아 있는 것처럼 보였다. 당시 독일에서 만든 영화에도 이런 관점이 잘 드러난다. 독일 국민에게 세계는 〈칼리가리 박사의 밀실Das Cabinet des Dr. Caligari〉(감독 로베르트 비네, 1920)과 같은 기괴한 인물을 낳는 혼돈과 악몽이었으며 할리우드 영화에서처럼 우연히 행복한 결말이 찾아오는 일은 없었다. 프랑스에서라면 민중에 의한 혁명이라는 희망을 그렸을 역사극조차도 독일에서는 〈파라오의 연인들Das Weib des Pharao〉(감독 에른스트 루비치, 1922)처럼 왕의 비극적인 사랑을 다루는 멜로드라마로 변질되었다. 민주국가이면서 민중이 만드는 역사를 믿지 않는 국민. 그들에게는 완전히 다른 새 역사를 써나갈 카리스마 있는 인물이 필요했다. _51쪽

그러나 영화를 완성하더라도 상영할 극장이 있을지 확신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미 채플린의 작품을 상영 금지시킨 독일과 이탈리아뿐 아니라, 채플린 자신이 “체임벌린 수상은 히틀러와 너무 사이가 좋다. 나는 영국 시장을 고려하지 않고 있다. 프랑스도”라고 말한 것처럼 히틀러 유화 정책을 표방하던 영국과 프랑스에서도 상영이 금지될 공산이 컸다. 평균적으로 흥행 수입의 35퍼센트를 차지하는 영국 식민지에서의 상영 기회도 잃을 것으로 전망됐다. 미국 개봉까지 금지될 가능성이 제기되면서 〈위대한 독재자〉의 필름이 빛도 못 보고 창고에 처박힐지 모른다는 우려가 커졌다. _139쪽

9월 3일 영국과 프랑스가 독일에 선전포고를 하면서 영불과 독일 간의 동맹이 깨졌다. 하지만 그렇다고 〈위대한 독재자〉 제작에 순풍이 불지는 않았다. 오히려 제작을 중단하라는 압력이 더욱 강해졌다. 〈위대한 독재자〉의 주제가 반나치에 머물지 않고 전쟁 그 자체의 비인간성을 비판한다고 알려졌기 때문이다. 전쟁이 일어난 마당에 전쟁에 만전을 기해야 할 각국 정부가 반전 영화를 지지할 리 만무하다. _170쪽

채플린은 자료 영상을 반복해서 보면서 히틀러의 일거수일투족을 연구했다. 찰스 주니어는 이렇게 회상한다. “아버지는 히틀러가 아이들에게 말을 걸거나 아기를 안아주거나 병원에 병문안을 가는 장면 등을 보면서 히틀러의 습관을 자기 것으로 만들었습니다. ‘그 사람은 배우야. 나 같은 사람은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어’라며 놀라워했죠.” _183쪽

1940년 6월 22일. 프랑스는 독일에 항복했다. 히틀러는 휴전협정의 조인 장소로 22년 전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이 프랑스에게 항복했던 굴욕의 장소, 파리의 콩피에뉴 숲을 선택했다. 이에 앞선 17일 자택에서 프랑스의 항복 소식을 들은 히틀러가 기뻐서 춤을 췄다는 뉴스를 반복해서 본 채플린은 “이 망할 자식. 개자식 같으니. 난 네 놈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고 있어”라고 화를 냈다. 하지만 곧 “이 친구는 내가 본 중에서 가장 뛰어난 배우인 걸”이라고 덧붙였다. 다음 날 채플린은 반격을 재개한다. _226~229쪽

괴벨스는 신문, 잡지를 활용한 〈위대한 독재자〉 반대 캠페인만으로는 맞설 수 없다고 판단한다. 괴벨스도 히틀러도 영화보다 강력한 매체는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 까닭에 프리츠 히플러를 시켜서 〈영원한 유대인Der Ewige Jude〉이라는 다큐멘터리 영화를 만든다. 그리고 1940년 11월 영화를 개봉해 〈위대한 독재자〉의 대항마로 내세웠다. 영화를 활용한 반격이었다. _272쪽

분명한 사실은 히틀러는 영화를 좋아했다는 점이다. 측근인 건축가 알베르트 슈페어는 회상록에 히틀러가 오버잘츠베르크에서 매일 영화를 상영했다고 적었다. (중략) 히틀러의 경호원이었던 로흐스 미슈는 회상록에 ‘히틀러가 1940년 혹은 1941년에 채플린 작품을 상영했다’고 적었다. 어떤 작품인지는 나와 있지 않지만 1940년 혹은 1941년이라는 연도를 볼 때 〈위대한 독재자〉였을 가능성이 크다. _280쪽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위대한 독재자〉는 프로파간다에 머물지 않고 인간 드라마, 전쟁의 화마에 휩싸인 사람들에게 용기를 주는 오락, 무엇보다 전체주의 자체를 풍자하는 유머로 가득 차 있다. 나치를 웃음거리로 만드는 풍자야말로 히틀러가 두려워한 것이다. 바로 그 풍자 때문에 〈위대한 독재자〉는 시대를 넘어 히틀러의 유령과 계속 싸울 수 있었다. _303쪽

그런 까닭에 〈위대한 독재자〉는 그야말로 시간을 뛰어넘는 작품이 될 수 있었다. 미국의 관객들은 베트남 전쟁에 패배한 1970년대에 들어서 드디어 핵군축과 동서 긴장 완화를 위한 행동에 나서기 시작했다. 일본에서는 1970년대에도 또다시 〈위대한 독재자〉가 대흥행을 기록했고 연설을 들은 관객들은 저성장 시대의 인간성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했다. 21세기에 들어서 프랑스에서 대히트를 친 것도, 원전 사고 이후의 현상도, 그때그때의 상황에 맞게 채플린의 연설을 듣고 당대인들이 보인 반응이다. 물론 〈위대한 독재자〉는 경제 문제나 원전 문제를 거론하지 않는다. 그리고 나 또한 예술작품을 정치에 안이하게 이용하는 일에는 연구자로서 반발심을 느낀다. 그러나 그것이 연설을 들은 관객의 살아 있는 반응이며, 〈위대한 독재자〉가 지닌 동시대적 현실성(actuality)이라는 사실 또한 절감한다. 〈위대한 독재자〉의 메시지는 시대를 넘어 계속 사람들을 끌어들이면서 그 자체로 미디어(매체)가 된 셈이다. _315쪽
  • 이 책의 분류
  • 도서정보
  • 목차 및 본문
  • 출판사서평
  • 저자 및 역자 정보
  • 독자서평
‘채플린적인 것’과 ‘히틀러적인 것’의 전쟁
1889년 4월 16일, 런던 빈민가에서 찰스 스펜서 채플린이 태어났다. 그리고 나흘 뒤 오스트리아 브라우나우암인에서 아돌프 히틀러가 태어났다. 20세기에 가장 사랑받은 남자와 가장 미움받은 남자는 이렇게 불과 4일 차이로 세상에 태어났다.
반세기가 지난 1940년 6월 23일 아침, 아돌프 히틀러는 파리에 도착했다. 나치 독일이 프랑스를 정복했다는 뉴스에 전 세계가 경악했고 사람들은 절망에 빠졌다. 누구도 히틀러의 기세를 꺾을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리고 바로 다음 날, 채플린은 반격을 개시한다. 할리우드의 촬영장에서 영화 <위대한 독재자The Great Dictator>의 마지막 신 촬영을 시작한 것이다. 세계 영화사를 빛낸 바로 그 ‘연설’ 장면이다.
이 책 『채플린과 히틀러의 세계대전』은 20세기 중반 무서운 속도로 유럽을 정복해나가던 나치 독일의 히틀러와 웃음이라는 방패를 들고 저항한 미디어의 제왕 찰리 채플린의 대결을 추적한다. 전 세계를 휩쓸던 전체주의의 위협 속에서 채플린은 어떻게 세기의 독재자에게 맞설 수 있었을까? 시대의 광기 앞에서 스스로 ‘평화 선동가(Peacemonger)’가 되기로 한 채플린의 이야기는 테러와 분쟁, 패권주의로 몸살을 앓고 있는 오늘 우리에게도 커다란 시사점을 던져준다.

“지금처럼 세상에 웃음이 절실한 때는 없었습니다.
이런 시대에 웃음은 광기에 대항하는 방패입니다.”


_찰리 채플린


[<위대한 독재자> 마지막 연설 전문]
죄송합니다. 저는 황제가 되고 싶지 않습니다. 남을 지배하는 통치자는 더욱 싫습니다.
가능하면 평범한 사람으로 살고 싶습니다.
유대인이든 흑인이든 백인이든 인간은 원래 평등합니다.
불행보다 행복을 원합니다. 서로 미워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이 세상은 우리 모두의 터전입니다.
우리의 삶은 자유롭고 아름다워야 하는데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탐욕이 양심을 짓밟아 미움의 벽을 쌓았고 우리를 비참하게 만들었습니다.
문명의 발달 속도는 소외된 계급을, 경제 성장은 빈곤한 계층을 만들었으며 지식은 인간을 교활하게 만들었습니다.
생각할 뿐 느낄 줄을 모릅니다.
물질보다는 정신이, 지식보다는 진실이 필요합니다. 그래야만 우리의 삶이 풍요로워집니다.
비행기와 라디오는 거리와 시간을 단축시켜 지구를 한 마을로 만들었습니다. 그 라디오를 통해 지금 내 목소리가 전 세계에, 절망하는 남녀와 굶주린 어린이, 고문당하고 투옥되고 박해 받는 이에게 전해질 겁니다.
그분들께 저는 호소합니다. 절망하지 맙시다.
우리가 겪고 있는 불안과 공포는 진보를 두려워하는 자의 마지막 발악입니다.
독재자는 반드시 멸망하고 민중으로부터 빼앗았던 권력은 민중에게 되돌아갈 것입니다.
자유는 영원할 것입니다.
군인이여 복종치 마십시오. 독재자에게만은!
독재자는 당신들을 조종합니다. 행동, 생각, 느낌까지도.
독재자는 당신을 개, 돼지로 여깁니다.
기계 인간에게 복종치 마십시오. 독재자는 몸도 마음도 기계입니다.
당신은 기계도 돼지도 아닙니다. 인간입니다.
가슴엔 사랑이 넘칩니다.
미워하지 맙시다! 사랑에 굶주린 자만이 남을 미워합니다.
군인이여! 자유와 정의를 위해 함께 갑시다. 누가복음 17장을 보십시오.
“하늘나라는 너희 안에 있다.”
특정한 사람이나 집단이 아닌 서로를 향해 가슴을 연 민중 안에 있습니다.
기계를 만들고 행복도 만들 수 있습니다.
민중에게는 세상을 자유롭고 인간답게 만들 수 있는 힘이 있습니다.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그 힘을 쏟읍시다. 모두 힘을 합쳐 정의를 위해 싸웁시다.
젊은이에겐 안정된 직장을, 노인들에겐 복지 시설을! 이런 공약으로 정권을 잡았지만 전부 사기였습니다.
정치가는 결코 자신의 공약을 지키지 않습니다. 독재자는 자신과 자신의 일당에게만 자유를 줍니다.
이제 우리의 권리를 위해서 싸웁시다. 자유를 위해 투쟁합시다!
국가 간의 벽을 없앱시다. 마음을 비우고 미움을 버립시다. 상식이 통하고 문명의 발전이 행복을 만드는 사회를 이룹시다.
군인이여! 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하나가 됩시다.

한나, 내 말 들려요?
하늘을 봐요.
먹구름을 헤치고 드러나는 저 찬란한 햇살을!
어둠을 벗어난 빛으로 욕심과 미움이 없는 세계로 나아갑시다.
위를 봐요, 한나!
인간의 영혼이 날개를 달고 치솟아 오르는 저 모습을!
무지개를 타고 희망을 향해 내일로!
당신과 나, 우리 모두의 내일을 향해!
위를 봐요, 한나!
위를!

찰리 채플린과 아돌프 히틀러. 20세기에 가장 사랑받은 남자와 가장 미움받은 남자. 똑같은 콧수염을 길렀지만 완전히 다른 삶을 살았던 이 둘 사이에는 불과 4일 차이로 태어났다는 우연과 예술가를 꿈꿨다는 공통점, 두 사람 모두 쇼펜하우어의 애독자였다는 자잘한 가십에 이르기까지 화제가 끊이지 않는다. 혹자는 이 두 천재의 관계를 ‘20세기의 빛과 그림자’로 비유하기도 했다. 그런데 히틀러에게는 총알과 포탄이 난무하는 전선만큼이나 중요한 또 다른 전쟁터가 있었으니, 미디어 전쟁이다. 채플린과 히틀러는 미디어라는 전쟁터에서 처음으로 대규모 전투를 벌인 인물이다.
『채플린과 히틀러의 세계대전』은 영화 <위대한 독재자>의 상세한 제작 과정을 좇으며, 이 문제작을 둘러싸고 벌어진 거대한 싸움을 추적해나간다. 저자인 오노 히로유키는 채플린가(家)에 보관된 메이킹 필름과 채플린이 직접 남긴 1만 쪽에 달하는 메모, 제작 일지, 편지, 당시의 신문 기사, 그리고 독일연방 영화 아카이브와 뮌헨 현대사연구소에 남겨진 제3제국 기록물 등을 꼼꼼히 확인한 끝에 2차 세계대전 개전 전후에 대서양을 사이에 두고 벌어진 거대한 미디어 전쟁을 복원할 수 있었다.

미디어가 만들어낸 괴물
화가가 되기를 꿈꾸던 히틀러는 1차 세계대전 패전으로 인해 민족적 자부심이 좌절된 청년기를 통과하며 극단적인 반유대주의자가 되었다. 베르사유 조약으로 군비가 제한되고 거액의 배상금에 허덕였으며 미증유의 인플레이션에 시달리던 당시 바이마르공화국의 국민들은 전후 강대국에 의해 강요된 민주적 질서보다 제정의 복권을, 그리고 전쟁의 활기를 그리워하고 있었다. 히틀러는 이 흐름에 성공적으로 올라탔다. 1919년 10월 16일 열린 독일노동자당 공개 집회에서 연단에 오른 히틀러는, 그 자리에서 쌓이고 쌓인 울분을 거침없이 토해냈다. 이 일로 히틀러는 정치적으로 주목을 받게 되고 다음 해 독일노동자당의 당명을 국가사회주의독일노동자당(나치)으로 변경하고 당수로 취임했다. 1923년 뮌헨 폭동을 주도한 혐의로 투옥(이때 옥중에서 『나의 투쟁』을 집필했다)되는 등 부침을 겪기도 했지만, 1920년대를 거치면서 히틀러는 정치적으로 꾸준히 성장해나갔다.
이 과정에서 히틀러의 힘을 배가시킨 무기가 바로 미디어이다. 그는 정치에 입문한 초기부터 미디어의 힘에 주목하고 독자적인 집회와 선전 방식을 고안했다. 히틀러는 가상의 적을 만들어 끊임없이 투쟁 상태를 연출하고 사람들을 흥분 속에 가둬두는 일, 세상이 바뀔 것이라는 기대감을 품게 만드는 일에 특출했다. 그의 선전술은 순식간에 뮌헨을 휘어잡았다. 하지만 혼자만의 활동으로는 그 기세를 독일 전역에 퍼뜨리기에 한계가 있었다. 그래서 1926년 나치는 연설가 학교를 설립해 연설 기술을 연마한 히틀러의 분신을 양성했다(그 수는 1932년 말 기준 6,000여 명에 이른다). 이후 유성영화가 발명(역사상 최초의 유성영화는 1927년 개봉된 앨런 크로슬랜드 감독의 <재즈 싱어The Jazz Singer>이다)되자 나치의 선전장관인 괴벨스는 히틀러의 연설 영상을 전국의 모든 영화관에서 영화 시작 전에 반드시 상영하도록 명령했다. 이처럼 미디어를 활용한 선전, 선동 활동은 히틀러의 권세를 확립하는 데 효과적이었다. 그 결과 1933년 총선이라는 합법적 절차에서 국민의 압도적인 동의를 얻어 일당독재 체제, 나치 독일이 수립된다.

“애국심은 온 세상이 겪은 것 가운데 가장 위험한 광기이다.
나는 지난 몇 달간 유럽 각국을 돌았다. 애국심은 도처에서 광란하고 있었다.
이것이 어떤 결과를 낳을지는 뻔하다. 또다시 전쟁이다.”
_찰리 채플린

채플린, 전 세계 미디어의 제왕이 되다
영국 뮤직홀 무대에서 연예계에 입문한 찰리 채플린은 미국 순회공연 도중 할리우드 영화계에 발탁되었다. 1914년 2월 2일 개봉한 <생활비 벌기Making a Living>로 데뷔한 뒤 같은 해에만 35편의 영화에 더 출연하며 순식간에 미국 영화 산업을 점령했다. 채플린의 영화는 곧 유럽에서도 큰 사랑을 받게 되는데, 1차 세계대전의 참화 속에서 병사들은 채플린의 영화를 보면서 삶의 희망을 이어나갈 수 있었다. 또한 채플린이 1918년 종전을 얼마 앞두고 제작한 영화 <어깨총Shoulder Arms>은 영화 역사상 처음으로 참호전의 실상을 생생하게 묘사하여 이제껏 유례없는 반전(反戰)영화로 기록되었다. 1921년 제작한 첫 장편 영화 <키드The Kid>도 1차 세계대전 직후 고아가 급증했던 당대 현실을 비추며 관객들에게 큰 울림을 남겼다.
그런데 <키드>는 뜻밖에도 미디어 전쟁의 방아쇠를 당기는 역할을 하게 된다. 이 영화가 전 세계 50여 개국에서 상영되면서, 영화는 본격적으로 전 세계적인 매체로 발돋움하게 되었다. 이로써 채플린과 히틀러 사이의 총성 없는 전쟁이 시작된다.

“베를린은 아주 오래전부터 가난한 도시이다.
이제야 겨우 <키드>가 들어왔으니까.
벌써 몇 달째 계속 상영되고 있다.”
_프란츠 카프카, 누이동생에게 부친 편지

세기의 콧수염 대결
채플린을 향한 나치 독일의 공격은 집요했다. 1926년 채플린의 대표작 <황금광 시대The Gold Rush>는 독일 당국의 검열로 일부 장면 삭제 조치를 당했으며, 나치는 “채플린은 유대인”이며 “<황금광 시대>는 안이한 모방작”이라고 비난했다. 이 시기에 이미 독일 대사관은 미국과 유럽에서 <어깨총>이 상영되지 못하도록 실력행사를 하기 시작했다. 영화라는 미디어를 통치 시스템의 기반으로 삼은 나치가 채플린을 집중적으로 공격하고 배제한 이유는 크게 세 가지를 들 수 있다. 첫째, 채플린이 유대인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채플린의 혈통에는 유대인의 피가 흐르지 않았지만, 어쨌든 나치는 그렇게 믿었다. 둘째, 독일 내에서 채플린의 인기가 히틀러의 인기를 위협했기 때문이다. 1932년 대통령 선거에서 투표용지에 ‘채플린’이라고 쓴 사람까지 나올 정도로 ‘평화주의자’ 채플린의 정치적 상징성이 대단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결정적이며 특별한 이유가 바로 ‘콧수염’이다. 독일에서 지도자의 콧수염은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빌헬름 2세, 비스마르크, 힌덴부르크 대통령과 멀리 거슬러 올라가 신성로마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1세(그는 ‘붉은 수염’으로 불린다)까지 모두 개성 있는 수염을 길러 지도자로서의 위엄을 표현했다. 히틀러 역시 개성 있는 수염을 길렀지만, 하필이면 그 콧수염의 생김새가 희대의 익살꾼 ‘방랑 신사 찰리’의 그것과 똑같았다. 유대인 희극 배우와 똑같다는 이유로 콧수염을 밀어버릴 수는 없는 일이고, 그렇다고 그대로 두면 풍자의 대상이 되어 정치적 권위가 흔들릴지도 몰랐다. 따라서 나치의 공세는 채플린의 영화에만 그치지 않고 1933년 채플린이 등장한 엽서의 판매 금지, 1935년 채플린에 관한 서적의 판매 금지, 그리고 1936년 채플린과 그의 영화에 대한 기사와 논평마저 완전히 금지하기에 이른다(이후 독일에서 채플린의 영화는 1956년까지 상영되지 않았다).
상영 금지, 논평 금지, 콧수염 금지, 소송전, 나아가 웃음까지 통제하는 나치의 이미지 전략은 국가 통치의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 그리고 그들의 전략을 가로막는 가장 큰 적은 바로 채플린이었다.

“이런 모든 일은 절대 웃을 일이 아니다.
다만 모두가 히틀러를 비웃고 있다는 사실을 빼면.”
_『미애나폴리스 트리뷴』, 1933년 10월 22일

마침내 시작된 위대한 여정
채플린 <위대한 독재자>를 준비하기에 앞서 유럽을 지배했던 독재자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를 영화화해 전 세계에 퍼져가고 있는 파시즘의 위협을 경고하려 했다. ‘나폴레옹 프로젝트’로 불리는 이 기획은 채플린이 진짜 나폴레옹과 가짜 나폴레옹 1인 2역을 한다는 점, 독재자를 통해 세계의 위기를 드러내고 평화를 호소하는 정치 영화였다는 점 등에서 <위대한 독재자>의 전조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채플린은 ‘평화와 반전’이라는 시대의 메시지를 정확하게 전달하기 어렵다고 판단하고 이 프로젝트를 중단했다. 점점 더 고조되는 전쟁의 분위기 속에서 평화를 쟁취하기 위한 더욱 확실한 무기가 필요해졌기 때문이다.
1937년 어느 날 유나이티드 아티스트 영화사의 프로듀서인 알렉산더 코르다로부터 방랑 신사 찰리와 독재자 히틀러가 모두 똑같은 콧수염을 기르고 있으니, 이 점을 모티브로 영화를 만들자는 제안이 들어왔다. 곧바로 채플린은 히틀러를 풍자하는 영화를 제작할 생각에 사로잡혔다. 초기에 ‘프로덕션 6’(찰리 채플린이 1919년 설립한 배급사 ‘유나이티드 아티스트’의 여섯 번째 영화였기 때문에 No.6라는 번호가 붙었다)로 알려진, 곧 <위대한 독재자>라 명명될 바로 그 영화이다. 마침내 1937년 10월 9일에 ‘프로덕션 6’ 신작 프로젝트가 시작되었다. 1938년 12월까지 조수 댄 제임스와 함께 영화의 스토리를 정리한 채플린은 1939년 1월 드디어 완성된 시놉시스를 들고 촬영장으로 향했다.

“다시 전운이 감돌기 시작했다.
나치가 세력을 무섭게 확장해나가고 있었다.
우리는 4년 동안 지속된 지옥과도 같은 제1차 세계대전의 상흔을
어떻게 그렇게도 빨리 잊을 수 있었을까?”
_찰리 채플린

영원히 현재진행형인 마지막 연설
<위대한 독재자>의 제작 소식을 들은 나치는 채플린을 더욱 거세게 공격했다. 『쿠리에』와 『앙그리프』 등 나치당의 기관지들이 앞장섰으며, 독일 대사관도 채플린의 차기작은 명백히 히틀러를 풍자하는 영화라면서 이 영화의 제작을 무산시키라고 미국 정부를 압박했다. 한술 더 떠서 당시까지 나치 독일과 동맹을 맺고 있던 영국과 미국 정부도 이 영화의 제작을 막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하지만 채플린은 거침없이 촬영 준비에 돌입했다.
1940년 10월 10일, 제작 기간 559일, 촬영기간 168일, 사용 필름 47만 7,440피트, 완성본 필름 1만 1,625피트, 제작 비용 140만 3,526달러가 든 <위대한 독재자>는 개봉을 닷새 앞두고 마침내 완성되었다. 미국에서 전년도의 초대작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능가하는 흥행을 기록한 것은 물론, 이미 전화에 휩싸인 영국에서는 국왕 조지 6세가 개봉 당일에 영화를 관람하고 찬사를 보내는 등 온 국민이 열광했다. 한 언론은 “런던이 독재자 채플린에게 정복당했다”라고 표현할 정도였다.
이 영화는 채플린의 필모그래피에서 특별한 위치를 점하는데, 첫째 방랑 신사 찰리가 등장하는 마지막 작품이며, 둘째 영화에서 채플린이 직접 말을 하는 최초의 작품(즉 첫 유성영화)이다. 특히 영화의 마지막 연설 장면을 통해서 <위대한 독재자>는 ‘영원한 현재성’을 부여받게 되었다. 마지막 장면에서 독재자 힌켈(히틀러의 패러디이다)로 분장한 채플린은 카메라 렌즈를 똑바로 응시하며 무려 6분간 전 세계에 평화를 호소한다. 이 장면은 히틀러 우상화의 최종 완결판이라고 할 수 있는 레니 리펜슈탈의 <의지의 승리Triumph des Willens>에 비견된다. 컷백 숏(영화에서 한 사람이 말하고 다른 사람이 반응하는 장면을 보여주는 연출 기법. <의지의 승리> 마지막 장면인 루이트폴트 홀의 연설 신에는 총 36개의 컷백 숏이 사용되었다)을 없앤 사실상 원 테이크 롱 숏에 가까운 마지막 연설 신은 구체적인 지명과 사건에 대한 언급 없이 자유, 평등, 정신, 사랑, 희망, 행복을 호소하면서 시간의 제약을 뛰어넘었다고 평가받는다. 동시에 관객에게도 지금 당신 앞에 놓인 부조리에 맞서서 “이제 어떤 (리)액션을 취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면서 어느 시기, 어느 장소에서나 평화의 본질을 떠올리게 만든다.

“찰리, 전쟁은 끝나지 않는다오.
민주주의와 자유를 향한 악전고투를 서둘러야 해요.
시간이 없소. 영화를 개봉하시오.
독재자들에게 보여줘요. 강렬하고 굳세게.”
_『픽처고어 앤드 필름 위클리』, 1940년 8월 24일

최후의 승자
그렇다면 과연 히틀러는 자신을 풍자하고 위기에 빠뜨린 이 영화를 보았을까? 저자는 몇 가지 증거들을 들어 히틀러가 이 영화를 보았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그런데 히틀러가 <위대한 독재자>를 보았는지 안 보았는지보다 중요한 것은, 이 영화가 개봉된 후 히틀러의 연설 횟수가 격감했다는 사실이다. 마치 희극왕이 희대의 연설가에게서 그 무기를 빼앗아온 듯이 말이다. 1932년 정권 탈취를 위해 비행기를 타고 하루에도 서너 곳을 방문하며 연설하던 선동가는 <위대한 독재자>가 개봉한 다음해인 1941년에는 불과 7회, 1942년에는 겨우 5회만 대중 연설에 나섰다. 괴벨스는 히틀러에게 거리로 나가서 국민을 고무하라고 요청했지만 총통은 자신의 이미지가 조롱당할 것을 두려워하며 더 이상 전선 시찰을 하지 않았다. 그때서야 중요한 것은 ‘내용’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결국 히틀러는 연합국의 포탄이 베를린 시내를 뒤덮던 1945년 4월 30일, 지하 방공호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독재자의 황당한 야망은 무너지고 채플린의 웃음만 남은 것이다.

“히틀러가 1940년 혹은 1941년에 채플린의 작품을 상영했다.”
_버드 슐버그, 히틀러의 최후를 지킨 호위병
  • 이 책의 분류
  • 도서정보
  • 목차 및 본문
  • 출판사서평
  • 저자 및 역자 정보
  • 독자서평
오노 히로유키
일본 채플린협회 회장이자 극작가, 영화 프로듀서, 극단 도테모벤리의 대표이다. 전공은 영화·연극·영미문화사이다. 지금은 채플린 연구가로 활동하고 있다. 채플린 연구로 2006년 이탈리아 포르데노네 무성영화제 특별 메달을 수상했다. 각본과 프로듀서를 맡은 영화 <우즈마사 라임라이트>는 제13회 뉴욕 아시아 영화제 ‘최우수 관객상’, 제18회 판타지아 국제영화제 ‘최고 작품상’ 등을 수상했다.
지은 책으로 『채플린 미공개 NG필름의 전모』, 『채플린 재입문』, 『채플린의 그림자 일본인 비서 고노 도라이치』 등이 있으며, 이 책 『채플린과 히틀러의 세계대전』으로 2015년 산토리 학예상(예술·문학 부문)을 수상했다.

옮긴이 양지연
서강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북한대학원대학교에서 문화언론학을 전공했다. 공공기관에서 홍보와 출판 업무를 담당했으며 글과 노니는 시간, 책과 노니는 시간이 좋아 지금은 기획 번역가로 활동 중이다. 번역한 책으로 『아빠는 육아휴직 중』, 『체르노빌 다크 투어리즘 가이드』, 『어이없는 진화』가 있다.
  • 이 책의 분류
  • 도서정보
  • 목차 및 본문
  • 출판사서평
  • 저자 및 역자 정보
  • 독자서평

독자서평 쓰기 로그인을 하시면 독자서평을 쓰실 수 있습니다.

독자서평 쓰기 로그인을 하시면 독자서평을 쓰실 수 있습니다.
도서평점
내용
등록하기
0/2000자

맨위로가기


YPlogo

  • 회사명 : (주)영풍문고
  • 대표이사 : 최영일
  • 소재지 : 서울특별시 강남구 강남대로 542번지 (우)06110
  • 사업자 등록번호 : 102-81-30788
  • 통신판매업 신고번호 : 강남-05859 사업자정보확인 ›
  • 개인정보관리 책임자 : 김현일
  • E-mail : customer@ypbooks.co.kr
COPYRIGHT © YOUNGPOONG BOOKSTORE INC. ALL RIGHTS RESERVED.
  • kb에스크로이체
  • 고객님은 안전거래를 위해 현금 등으로 5만원 이상 결제시 저희 쇼핑몰에서 가입한 국민은행의 구매안전서비스를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
  • 서비스 가입사실 확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