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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파간다 파워-인간과 세상을 조종하는 선전의 힘
저자 : 데이비드웰치 ㅣ 출판사 : 공존 ㅣ 역자 : 이종현

2015.12.12 ㅣ 255p ㅣ ISBN-13 : 9791195526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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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도서 > 인문 > 심리학 > 심리학일반
이 책에서 저자는 과거와 현재에 어떤 선전이 어떻게 사용됐는지, 그 공과 과는 무엇인지 명쾌히 밝히고 있다. 그는 고대 그리스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기록에 의해 입증된 선전의 흥미진진한 역사를 기술하고 있다.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방대한 양의 삽화를 곁들이며, 역사적인 맥락 속에서 흑색선전과 회색선전과 백색선전의 실체, 선전과 검열의 관계, 선전이 선 또는 악의 목적을 달성하는 데 활용된 방식, 그리고 현대 선전의 주요 개척자들에 대해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수잔 숄티(북한자유연합 대표 겸 디펜스포럼재단 대표)

저자는 대중의 마음과 정신을 사로잡는 것이 최종 목표인 프로파간다의 역할이 정보화 시대인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다고 결론 내린다. 프로파간다의 방법은 시대를 거치며 변화해 왔지만 그 목적은 항상 영향력을 미치는 것이었으며, 그 영향은 좋을 것일 수도 나쁜 것일 수도 있다.
- 런던대학교 역사연구소

이 책은 지도자나 매체들이 여론을 형성하는 방법에 대해 풍부한 문헌 자료를 바탕으로 간결하게 소개하고 있으며, 프로파간다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독자들도 쉽게 이해하고 할 수 있게 다.
-《런던경제대학 북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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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 차]

추천사
1장 _ 심하게 왜곡되고 오인된 말: 선전의 간략한 역사
2장 _ 하나의 국민, 하나의 국가, 하나의 지도자: 국민의식과 지도자에 대한 선전
3장 _ 국가가 당신을 필요로 한다: 전쟁에서의 선전
4장 _ 입을 가리고 기침하세요: 공공 정보로서의 선전
5장 _ 너의 적을 알라: 부정적 선전
6장 _ 지금 우리는 모두 미국인인가?: 21세기의 선전
선전에 관한 정의 100년
옮긴이의 말
Picture credits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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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더, 나폴레옹, 히틀러, 스탈린, 처칠, 마오쩌둥, 김일성, 알카에다,…
그들은 선전을 왜, 어떻게 이용했는가?
고대 그리스부터 21세기 현재까지 전 세계의 선전을 통찰한다!


세계에서 가장 많은 장서와 자료를 보유한 영국국립도서관(British Library)이 2013년 5월 17일부터 9월 17일까지 개최한 사상 최대 규모의 프로파간다(선전) 전시회에 맞춰 출간한 『프로파간다 파워(Propaganda)』(2013)는 고대부터 현대까지 전 세계를 아우르며 선전의 모든 것을 소개하고 있다. 영국 켄트 대학교 명예교수이자 프로파간다에 정통한 역사학자인 저자 데이비드 웰치(David Welch)는 선전의 정의와 종류, 방법과 주요 활용 사례들을 마치 전시회처럼 펼쳐 보이며 상세하고 깊이 있게 설명한다.

본 한국어판은 30년 가까이 방송 PD로 활동한 번역자 이종현이 선전의 폐해를 최소화하고 선전의 장점을 잘 활용하기 위한 방안을 모색하는 차원에서 웰치의 책을 최적의 텍스트로 선택해 번역함으로써 출간됐다. 번역자는 북한을 취재하고 남한의 탈북자들을 도우면서, 악용된 선전으로 인해 고통 받는 사람들을 무수히 보았고, 이 책이 선전에 대한 일반인들의 이해에 큰 도움이 되리라 생각했다. 그래서 이 책의 번역 인세 전액을 탈북자들을 위한 교육에 기부하기로 했다. 아울러 본 한국어판에는 특별히 2008년 제9회 서울평화상 수상자이자 북한자유연합 대표 겸 디펜스포럼재단 대표인 수잔 숄티(Suzanne Scholte)가 추천사를 써 출간의 의미를 높였다. 수잔 숄티는 추천사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 책에서 웰치는 김일성 숭배를 마오쩌둥 숭배를 모방한 것으로 서술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주체사상은 다른 공산권 국가들과도 완전히 단절된 채, 김일성을 ‘위대한 지도자’이자 ‘민족의 태양’으로 형상화하는 기묘한 형태로 변했다고 말합니다. 오늘날 북한은 세계에서 가장 암울한 곳이 됐습니다. 그것은 무자비한 군사 정권의 지원 아래 가능한 모든 선전 방법을 동원한 결과입니다.”

선전은 원래 나쁜 것인가?
1장 「심하게 왜곡되고 오인된 말: 선전의 간략한 역사」에서는 ‘선전’이라는 말의 의미와 정의, 선전의 역사와 종류를 개괄하고 있다. 저자는 선전을 “직간접적으로 선전가의 이익에 부합하게 의식적으로 생각해내고 계획한 모종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모종의 개념과 가치관을 전파함으로써 표적청중의 여론에 영향을 미치고자 하는 의도적인 행위”로 정의하고 있다. 그래서 선전은 ‘정보 전달’이나 ‘교육’과 차별되는 정치적 행위이다. (사실 ‘프로파간다(propaganda)’의 번역어인 ‘선전(宣傳)’은 그 사전적 의미가 “주의나 주장, 사물의 존재, 효능 따위를 많은 사람이 알고 이해하도록 잘 설명하여 널리 알리는 일”일뿐더러 현실에서 ‘광고’나 ‘홍보’에 가까운 의미로 많이 쓰이고 있기 때문에 ‘프로파간다’라는 말을 그대로 사용할 필요가 있다고 번역자 이종현은 지적하기도 했다.)
하지만 ‘선전’은 고대부터 널리 활용되어 온 설득의 기술이자 수단이었고, 말(propaganda) 자체의 어원으로 보자면 17세기 가톨릭 선교 조직의 명칭에서 비롯됐다. 1622년 교황 그레고리우스 15세가 교리 전파를 증진하기 위해 선교성성(宣敎聖省, Sacra Congregatio de Propaganda Fide)을 설치한 것이 공식적인 기원이다. 이후 선전은 정치와 사회를 비롯한 다방면에서 활용됐는데, 그 의미가 부정적인 것으로 굳어진 결정적인 계기는 바로 제1차 세계대전이었다. 선전이 전쟁 중에 조직적 공략 수단으로 대규모로 이용되면서 대중들은 선전의 목적과 방법을 의심하게 됐고, 특히 전후에 진실이 밝혀지면서 선전은 거짓말, 속임수, 세뇌 같은 말과 거의 동의어가 되고 말았다.
그런데 선전의 의미가 이렇게 부정적으로 변했다고 해서 그 효과가 줄어든 것은 아니다. 오히려 선전은 그 효과가 입증됐기 때문에 더 체계적이고 더 조직적이고 더 정교하고 더 대규모로 이루어졌다. 그래서 선전은 제2차 세계대전과 냉전 기간에 활용도가 더 높아졌고, 대중은 부지불식간에 끊임없이 선전에 휘둘렸다. 초고속 정보통신과 사회관계망(social network)이 특징인 21세기 오늘날에는 선전의 목적과 방법이 더욱 다양해져서 선전의 주체와 객체 간의 경계조차 모호해지고 선전(propaganda)이라는 말 자체의 의미도 다의적으로 변하고 있다.
저자는 선전의 형태를 크게 다섯 가지로 소개하고 있다. 아돌프 히틀러는 대중을 상대로 하는 선전은 단순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큰 거짓말’을 절대적으로 신뢰했다. 그래서 자서전인 『나의 투쟁(Mein Kampf)』에서 “대중은 작은 거짓말보다 큰 거짓말(Große Lüge)에 더 쉽게 속는다”고 밝히기도 했다. 적에 대한 허구를 지어내고 통계를 조작하고 뉴스를 ‘만들어내는’ 행위들이 이에 속한다. 그리고 선전의 주체를 얼마나 노출하고 그 목적과 의도를 얼마나 드러내는지에 따라 ‘흑색선전’, ‘백색선전’, ‘회색선전’으로 나뉘며, 심리전은 ‘실제 전투와 달리, 적의 사기와 전의를 꺾기 위해 적의 마음과 감정, 행동에 영향을 미치는 생각과 정보를 전달하는 행위’로 정의된다.

유명한 통치자들은 선전을 왜, 어떻게 이용했는가?
기원전 336년에 마케도니아의 왕좌에 오른 알렉산더 왕은 능수능란한 선전가였다. 페르시아 제국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후 몇 년 동안 알렉산더는 자신을 제우스의 아들로 신격화했다. 그에 따라, 이미 제우스의 아들로 널리 알려진 헤라클레스 대신 알렉산더의 얼굴이 새겨진 동전이 주조됐다. 알렉산더 왕은 선전의 중요한 특성을 간파했다. 선전이 그의 ‘실제’ 존재를 대신했기 때문에 그의 형상이 새겨진 동전, 조각상, 건축물, 도자기, 온갖 예술품 등이 그의 제국 전체에 존재하게 했다. 그는 모든 통치자들의 관행이면서 근대 정치 리더십의 주요 특징인 ‘개인숭배’를 능숙하게 전개했다.
이집트의 피라미드들은 눈으로 보기만 해도 위엄이 느껴지는 ‘시각적 찬양물’의 일종이다. 이것들은 각 통치자와 왕조의 권능과 위엄을 형상화하기 위해 설계된 아주 오래된 기념용 건축물이다. 기원전 6세기 말경 중국의 장군 손자는 『손자병법』을 저술했는데, 그는 ‘정신 무기’인 설득력을 간파하고 있었다. 그는 “백 번 싸워 백 번 이기는 것이 최선이 아니라, 싸우지 않고 적을 굴복시키는 것이 최선이다”라고 했다.
나폴레옹은 역사상 가장 유능한 ‘자기 선전가’ 가운데 한 명이었다. 프랑스인들의 사고에 대한 그의 통제는 국민 생활 전반에 영향을 미쳤다. “천 명의 적군보다 세 개의 적대적 신문이 더 무섭다”고 주장한 그는 1801년에 프랑스 신문 73개 중 64개를 폐간시켰다. 노트르담 성당에서 휘황찬란하고 성대하게 열린 1804년의 황제 대관식에서 그는 교황 비오 7세로부터 왕관을 직접 넘겨받아 자기 손으로 자기 머리에 씌웠다. 이 행동은 그가 자력으로 황제가 됐으니 누구에게도 충성하지 않는다는 것을 상징했다.
기자 출신인 이탈리아의 베니토 무솔리니는 자신의 추종자들에게 소속감을 심어주는 데 있어 열정적인 발코니 연설과 함께 제복, 국기, 행진 같은 준(準)군사적인 과시 도구의 활용과 선전이 얼마나 중요한지 인식한 최초의 파시스트 독재자였다. 그가 권좌에 있을 때 이탈리아의 선전에서는 그를 무한한 권능을 지닌 전지전능한 초인, 즉 ‘일 두체(Il Duce, 수령)’로 묘사했다.
1933년 아돌프 히틀러가 권좌에 올랐을 때, 나치의 국가사회주의는 싸울 적이 필요한 만큼 영웅도 필요했다. 영웅적 지도자라는 구상에 맞추기 위해 나치는 국가의 운명을 구현하고 이끄는 초월적인 인물에 초점을 맞춘 ‘지도자 원리(Führerprinzip)’ 개념에 매달렸다. 민족 염원의 지휘자인 히틀러의 권위는 헌법적 한계를 넘어섰다. 곧이어 ‘안녕하세요!(Guten Tag!)’라는 전통적인 인사말을 ‘히틀러 만세!(Heil Hitler!)’라는 인사말로 대체하는 법이 제정됐다. 어른들은 새로운 찬양의 인사말로 서로에게 인사하게 됐고, 아이들은 학교에서 매 수업이 시작될 때마다 새 인사말을 사용했다. 이렇게 인사를 할 때는 오른팔을 절도 있게 뻗어 올리는 경례도 함께 했다. 또 모든 국민이 쉽게 구입할 수 있는 저렴한 라디오를 통해 히틀러의 연설이 제국 전역에 일제히 방송될 때마다 반복적으로 ‘국가적 순간(Stunden der Nation)’이 연출됐는데, 그때마다 모든 독일인들은 국가 공동체 의식을 발휘해 일상생활을 중단했다.
이오시프 스탈린에 대한 숭배가 본격화된 것은 소련의 모든 도시에 그를 추앙하는 깃발, 초상화, 현수막, 풍선 등이 내걸리고, 급부상하는 “세계 프롤레타리아들의 지도자”에게 찬사가 바쳐진 1929년 12월 그의 50번째 생일이었다. 스탈린의 첫 번째 동상이 제작되면서 선전 구호도 “스탈린은 오늘의 레닌이다”와 “스탈린은 강철 인간”으로 새롭게 바뀌었다. 그런데 스탈린의 이미지가 ‘혁명의 아버지’인 레닌을 대체하게 된 것은 소련에서 ‘대(大)조국전쟁’이라 불리는 제2차 세계대전과 그 후에 이르러서였다. 국민의 전쟁 열기를 북돋우기 위해 스탈린은 애국심을 높이는 방향으로 국내 정책을 재편했다. 공식 발표와 대중매체에서 공산주의 찬양 대신 민족주의 구호와 애국적 단합에 대한 호소가 울려퍼졌다(“크렘린 궁전의 스탈린 동지가 우리 하나하나를 굽어살피신다”, 1940).
오랜 중국 내전(국공내전)에서 승리를 거두고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을 세운 마오쩌둥은 다른 무엇보다 대중매체와 교육 체제에 대한 직접 통제를 견지했다. 그는 선전의 중요성을 이해했고, 그래서 공산주의 이념을 전파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중국 공산당은 지도자와 밀접하게 관련된 이해하기 쉬운 메시지를 인민들에게 전달하기 위해 대중 집회, 포스터, 음악 작품, 공연 같은 다양한 선전 수단을 폭넓게 사용했다. 곧이어 ‘위대한 조타수’ 마오에 대한 개인숭배가 뒤따랐다. 마오를 주제로 하는 정치적 예술품들이 대량으로 유포됐다. 수많은 포스터, 배지, 그리고 음악 작품들에서 마오는 “마오 주석은 우리 마음속 붉은 태양”이나 “인민의 구원자” 같은 미사여구로 일컬어졌다.
북한의 건국 지도자인 김일성에 대한 개인숭배는 독특한 면이 있었다. 마르크스와 레닌의 사상에 기초하긴 했지만, 북한의 이념과 선전은 여타 다른 공산권 국가들과 달리 “‘위대한 지도자’이자 ‘민족의 태양’인 김일성”을 특이한 형태로 표출했다. 그는 마르크스 레닌주의를 변형해서 자신이 설정한 지도자상의 중대함을 부각시키는 ‘주체사상(主體思想)’을 만들었다. 그리고 이를 통해 자신의 아들과 손자에게 권력을 세습하는 통치 왕조를 건설하는 한편, 개인숭배를 위해 온갖 과시적 요소들(거대한 조각상, 초상화, 동전, 우표 등)을 동원했다. 지금도 통치 일족은 권좌를 틀어쥐고 있기 때문에 절대적인 지도자 숭배를 전파하는 선전도 거의 변하지 않았다.
베네수엘라 대통령 차베스는 300만 명이 넘는 팔로어(follower, 추종자)를 거느린 트위터(Twitter) 계정으로도 유명했는데, 그는 자신이 트위터를 ‘혁명적인 목적’을 위해 이용했다고 주장했다. 트위터를 이용하면 국민들이 관료 조직을 건너뛰어 대통령과 직접 접촉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넬슨 만델라는 매우 흥미로운 지도자상의 한 전형이다. 그는 한때 무장 투쟁을 지지하는 호전적 운동가로서 차베스처럼 자기 나라에서 투옥됐다가 풀려난 후 새로운 민주 국가에서 화해와 평화의 상징이 됐기 때문이다.

지배와 전쟁을 위한 악마의 유혹 vs. 공익을 위한 천사의 나팔 소리
18세기까지는 신문이나 잡지 같은 매체들이 전쟁에 끼치는 영향력이 크지 않았다. 하지만 19세기 중반 크림전쟁(1853~56)부터는 전보가 활용되고 종군기자가 등장하면서 양상이 크게 달라졌다. 최초의 종군기자 윌리엄 하워드 러셀(William Howard Russel)이 전쟁터에서 쓴 비판적인 기사가 《타임스》에 실리자 이로 인한 비판을 견디지 못한 애버딘(Lord Aberdeen) 총리 내각이 물러나고 개혁의 바람이 불었다. 이후 보어전쟁(1899~1902)에서는 200명에 가까운 기자가 전쟁 보도에 참여했고, 정부는 언론 통제와 검열을 강화했다.
그러다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 때는 국가 문제에 대한 대중의 관심과 참여가 늘어난 데다 국가의 모든 군사적, 경제적, 심리적 자원이 최대로 동원되는 새로운 전쟁 형태, 즉 ‘전면전’이 나타나 전방과 후방의 간극이 좁아졌다. 민간인이 처음으로 폭격을 경험한 제1차 세계대전 때는 전쟁 사망자의 14퍼센트가 민간인이었고, 제2차 세계대전 때는 민간인 사망자가 67퍼센트로 어마어마하게 늘어났다. 그래서 교전국이나 참전국의 정부들은 모든 국가적 역량을 총동원하고 적을 심리적으로 이기기 위한 대대적인 선전을 펼쳤고, 선전을 전담하는 기구도 따로 설치했다. 선전은 자국민에게는 전쟁을 정당화하고 전쟁 지원을 호소하고 사기를 진작하는 수단으로, 중립국에는 영향력을 발휘해 동조나 참전을 유도할 목적으로, 적에게는 실제 무기를 능가하는 ‘정신 무기’로 사용됐다. 심지어 독일은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에 패전의 원인을 연합국의 선전 탓으로 돌리기도 했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지속적으로 사용되고 이후에도 수없이 모방되고 패러디된 이미지 중 하나는 독특한 모병 포스터인데, 그 속에서 콧수염을 길게 기른 얼굴의 키치너 경(Lord Kitchener)은 위압적인 손짓으로 영국 국민들에게 “국가가 당신을 필요로 한다(Your Country Needs You)”고 호소하고 있다. 키치너는 1914년 8월 5일 전쟁부 장관으로 임명됐는데, 수단에서 세운 무공 덕분에 그는 이미 국민들 사이에서 전쟁 영웅이었다. 잡지 표지에서 유래된 이 포스터는 승리에 대한 국가적 결의와 의지의 상징으로 여겨졌으며, 거기에 담긴 메시지는 대규모로 산업화된 전쟁의 시대에 모병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보여주는 전형이 됐다. ‘신육군(New Armies)’ 건설을 위한 키치너의 공식 의회 모병 운동은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고, 1915년 1월까지 약 100만 명이 입대했다. 미국에서는 키치너 포스터를 본뜬 ‘엉클 샘(Uncle Sam)’ 모병 포스터가 등장해 제1, 2차 세계대전에서 사용됐고 역시 대대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제2차 세계대전 때 일본의 선전은 자국, 중국과 동남아시아, 서구라는 주요 전선 3곳에서 실시됐다. 1941년 12월 미국의 진주만 해군기지에 대한 공습에 이어 일본은 중국과 태평양 두 전선에서도 동시에 전쟁을 수행해야 했다. 일본은 공식 선전을 통해 이미 1930년대부터 압박을 받아온 일본 국민들에게 한층 악화된 경제적 어려움을 견디고, 부족한 자원을 재활용하고, ‘사치는 적이다’라는 구호 아래 검소하게 살 것을 요구했다. 일본군을 향한 직접적이고 강화된 선전에서는 포로로 잡히기보다 자살하도록 부추겼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이 끝난 뒤에는 전쟁 중에 필요에 따라 맺어졌던 동맹들이 급속히 와해되어 적대 세력권으로 나뉘면서 새로운 형태의 갈등이 나타났다. 냉전은 정신 전쟁이자 이념 대결이면서 신경전이었으며, 이후 40년 넘게 세계를 양극 경쟁 체제로 분열시켰다. 이것의 특징은 ‘마음과 정신을 지배하기 위한 싸움’이었는데, 무시무시하게도 그 이면에는 상대를 핵폭탄으로 멸망시키겠다는 위협이 도사리고 있었다. 냉전 핵무기 경쟁 때문에 선전의 초점은 국가 안보와 공포라는 두 선동적 요소에 맞춰졌다. 이 두 요소는 극단적인 외국인 혐오와 점점 격화되는 사상 대립으로 이어졌다.

한편 선전은 직간접적으로 공익을 위해서도 많이 이용돼 왔다. 제1차 세계대전을 치르면서 각국 정부들은 ‘체력이 국력’임을 깨달아 국민 건강 증진을 위한 체계적인 대규모 공중보건 캠페인을 펼쳤다. 캠페인에서 다루어진 주제는 건강에 좋은 음식부터 안전한 섹스까지, 흡연의 해악부터 과속 운전의 위험까지, 예방접종 권장부터 금주 장려까지 아주 다양했다. 비록 서로 다른 이념적 이유에서 비롯되긴 했지만, 건강 유지는 실제로 파시스트와 공산주의 정권의 주요 관심사였다. 이탈리아의 파시스트와 독일의 나치가 각각 건강을 인종주의적이고 이념적인 관점에서 바라본 반면, 소련은 보다 실질적이었다. 즉 건강한 국민은 스탈린의 5개년 계획에서 제시한 목표 생산량을 달성하거나 초과할 가능성이 높으므로 보다 바람직했다.
영국에서는 1930년대에 저임금과 영양실조, 낮은 학업 성취도 간의 관계를 밝힌 존 보이드 오어(John Boyd Orr)의 연구 결과에 따라 클레멘트 애틀리 총리의 노동당 정부가 1946년에 18세 이하의 모든 학생들에게 우유를 무료로 나눠주는 학교우유급식법(School Milk Act)을 제정했다. 새로 제정된 법에 힘입어 1950년대부터 중앙정보국과 우유판촉위원회가 협력하여 주목할 만한 여러 선전 캠페인을 벌였다. 구호로는 “자연의 영양분을 가득히”, “당신의 아이는 충분히 마시고 있나요?”, “우유 1파인트 마시는 날” 등이 있었다. 1971년 당시 교육부 장관이었던 마거릿 대처가 7세 이상의 학생들에 대한 무료 우유 급식을 중단하기로 결정하자, “대처, 대처, 우유 날치기”라는 유명한 항의 구호가 등장하기도 했다. 학교우유급식법은 세계 많은 나라에 전파됐다.
소련은 한편으로는 사회적 긴장을 완화시키는 수단으로 음주를 권장했다. 또한 소련 정부는 주류 독점에서 오는 수입을 포기할 입장이 아니었다. 제1차 세계대전의 여파로 탄생한 공산주의는 마땅한 세원이 없었으며, 국가 예산의 4분의 1 이상이 주류 세금에서 나왔다. 한참 뒤인 1985년에는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금주 캠페인을 벌여 이 비율이 급격히 떨어지는 바람에 소련 경제의 쇠퇴를 야기했다.
비록 그 목적이 인종적이고 우생학적인 캠페인을 지원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보건 교육은 나치 선전의 두드러진 특징이었다. 1933년 7월에 제정된 ‘유전질환 자녀 예방법’을 통해 유전적 질환을 겪는 것으로 추정되는 사람들에게 강제로 불임 시술을 하는 것이 허용됐다. 비록 이보다는 덜 알려졌지만 1930년대에 나치는 세계에서 가장 적극적인 금연 보건 캠페인을 벌였다. 나치의 정책에는 공공장소에서의 금연, 담배세 인상, 담배 광고 금지, 담배와 폐암의 연관성에 관한 연구 등이 포함됐다. 흡연은 아리아인의 신체를 강건하게 하려는 나치의 목적에 부합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 밖에도 교통 안전, 전염병 예방, 자선 모금 운동 등과 관련 있는 많은 선전이 20세기 내내, 그리고 21세기에도 계속 펼쳐졌다. 그런데 소련과 나치의 경우처럼, 이따금 국가의 의도는 그들이 내세우는 보건상의 이익이라는 명분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은밀하다. 그리고 때로는 시민 단체나 이익 단체들이 연대해서, 특히 인터넷과 사회관계망 시대에 공공 정보의 신뢰성에 이의를 제기하기도 한다. 그래도 공중보건 문제를 다루게 되면 선전이라는 말에서 연상되는 경멸적 어감이 사라져 대체로 훨씬 우호적으로 보인다.

21세기 비대칭 시대의 전쟁과 테러, 그리고 새로운 ‘사회적 매체’의 등장
20세기에 ‘전면전’이 등장해서 매체와 구시대 외교술과 기밀 유지 필요성 간의 관계가 완전히 바뀌었다. 새로운 매체는 여론을 형성할 수 있는 힘을 가졌고, 정치인들은 그 힘을 두려워했다. 냉전이 끝난 뒤에는 변화무쌍한 국제적 위기와 급변하는 기술 때문에 전쟁과 보도의 성격도 바뀌었다. 1990년대 초에 벌어진 제1차 걸프 전쟁은 사실상 심리전이자 ‘매체 전쟁’이었다. 그리고 소수에 불과한 헌신적인 광신도들이 초강대국에 그토록 큰 피해를 입힌 9・11 테러의 엄청난 충격 때문에 새로운 분쟁 용어인 ‘비대칭전(asymmetrical warfare)’이 집중 조명을 받았다. 약한 나라나 집단이 군사 자원의 질적, 양적 불리함을 벌충하기 위해 적응유연성(resilience)과 테러 전술을 이용하는 것으로 정의되는 ‘비대칭’이라는 개념은 21세기 초의 선전 방식에 심대한 영향을 미쳤다.
9・11 테러가 있고 나서 조지 W. 부시 행정부는 ‘테러와의 지구적 전쟁(GWOT)’을 발표함으로써 미국의 군사적 대응을 정당화했다. 이를 통해 미국은 알카에다와 그들의 지도자인 오사마 빈 라덴을 돕는 그 어떤 국가나 단체라도 추적할 권리와 능력이 있다고 주장했다. 테러와의 전쟁을 선언함에 있어 서구는 ‘자위권’이라는 「유엔 헌장」 제51조를 적용했는데, 그 과정에서 테러리스트들에게 ‘전사(warrior)’라는 지위를 부여하고 말았다. 그리고 이것은 알카에다 같은 단체들이 서구에 맞서 교묘하게 역선전하는 행위를 합법화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로부터 한참이 지난 후 서구는 ‘테러와의 전쟁’이 군사적 대치를 넘어 대중의 전폭적 지지를 얻기 위한 세계적인 투쟁, 즉 장기적인 사상 정보전이자 무한히 지속될 전쟁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시발점이 된 9・11은 알카에다와 그 지지자들에게는 비대칭전의 교과서적인 작전으로서, ‘다윗과 골리앗의 대결’ 같은 엄청난 선전적 성공을 의미했다. 또 매체 기자들이 실제 공격군의 일원으로 투입된 2003년 이라크 전쟁 때는 전쟁이 ‘24시간 연속 뉴스’로 보도됐을 뿐만 아니라, 매체 통제권이 군대에서 정치인들에게로 넘어가 군대 입장에서는 매체가 승리를 위한 도구가 아닌 골칫거리가 돼 버렸다.
저자는 “미국과 주요 산업국가들에 맞서 재래식 전쟁을 수행할 능력을 갖춘 적이 없기 때문에 현대에는 비대칭전이 분쟁의 보편적 형태가 될 공산이 크다. 힘이 약한 나라나 조직들이 재래식 무기밖에 없음에도 불구하고 다양한 전투력을 발휘하고 있다. 21세기에 들어 알카에다는 처음으로 물리적 공간에서 가상공간으로 옮겨가 전 세계에서 추종자들을 결집하는 게릴라 운동을 펼치고 있다.”고 했는데, 실제로 최근 IS(이슬람국가)는 온라인으로 세계 여러 나라의 추종자들을 모아 선전용 잔혹 행위나 전투, 테러에 이용했다.
2009년 초반 이후로 ‘테러와의 전쟁’이라는 말이 테러리스트들에게 이슬람에 대한 서구의 십자군 전쟁이라는 비난의 구실을 제공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미국과 영국은 공식 문서에서 ‘테러와의 전쟁’이라는 말의 중요도를 낮추었다. 2009년 3월에 미국 국방부는 공식적으로 ‘테러와의 지구적 전쟁’이라는 작전의 이름을 ‘해외 비상 작전’으로 바꾸었으며, 오바마 대통령도 첫 번째 재임기간 중에 ‘테러와의 전쟁’이라는 말을 연설에서 거의 사용하지 않았다.
2011년 5월 미국 특수부대에 의한 오사마 빈 라덴 살해는 오바마에게 커다란 선전적 성공을 안겨주었다. 한동안 선전전에서 고전을 면치 못한 서방에게는 참으로 시의적절한 사건이었다. 오랫동안 억눌려온 대중의 불만이 ‘아랍의 봄’에 분출된 것과 더불어 빈 라덴의 죽음은 이슬람 집단들에 대한 알카에다 근본주의자들의 호소력을 약화시켰다(적어도 단기적으로는). 2010년 12월 이후 뿌리 깊은 독재 정권들이 무너진 것을 포함해 튀니지, 이집트, 리비아에서 벌어진 일련의 사건들은 블로그, 실시간 뉴스 방송, (온라인에서의) 단체 대화 같은 새로운 ‘사회적 매체(social media)’가 국가의 간섭으로부터 시민을 ‘해방시키고’ 자발적 군중 시위를 촉발하는 위력적인 모습을 잘 보여주었다.
정부가 보도를 통제하고 보도 내용을 결정할 수 있었던 과거와 달리 통제가 지극히 어려운 새로운 매체들이 등장한 21세기의 매체 환경 속에서 저자는 이런 의문을 던진다. “인터넷과 ‘사회적 매체’, 광고와 언론이 활성화된 사회에서 과연 선전을 어떻게 변할까? 새로운 매체들이 과연 강압적인 정부의 폭정으로부터 시민들을 해방시킨 것일까? 통신 수단이 다양해지고 원시정보가 왜곡되는 상황에서 선전이 제대로 전파될 수 있을까? 페이스북(Facebook)과 트위터(Twitter)의 시대에 모든 사람은 선전가일까? 21세기에 국가가 실시하는 선전의 역할은 무엇이고 앞으로 어떻게 달라질까? 민주주의가 가상공간으로 옮겨가서 인터넷이 민주주의에 기여하게 될까?”
저자는 선전이 윤리적으로 중립적이어서 선일 수도 있고 악일 수도 있다고 하면서 시민들이 더 많이 알아야 하고 정보화 시대의 본질과 흐름에 대한 깊은 이해로 무장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우리가 선전을 어떻게 정의하든, 우리가 선전을 어느 정도로 필요로 하든, 우리는 선전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정치와 선전과 여론 간의 관계는 복잡하고 논란의 소지가 많다. 그 관계는 새로운 기술과 전쟁의 다양한 유형에 따라 변해 왔다. 하지만 언제나 선전은 그 힘과 설득력으로 대중의 마음과 정신을 사로잡는 것이 목표다. 과거에 늘 그러했고, 오늘날에도 역시 그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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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비드 웰치(David Welch)
영국 런던경제대학(LSE)에서 공부하며 저명한 역사학자 제임스 졸(James Joll)의 가르침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후 런던경제대학, 웨스트민스터 대학교 등지에서 학술 활동을 하다가 1992년부터 켄트 대학교 현대사 교수로 일해 왔다. 1995년에는 켄트 대학교에 전쟁・선전・사회연구소를 직접 설립하고 줄곧 소장으로 활동해 왔다. 『독일: 1914~18년의 선전과 전면전(Germany: Propaganda and Total War 1914~18)』(2000), 『히틀러: 독재자의 프로파일(Hitler: Profile of a Dictator)』(2001), 『1933~45년의 프로파간다와 독일 영화(Propaganda and the German Cinema, 1933~1945)』(2001), 『제3제국: 정치와 선전(The Third Reich: Politics and Propaganda)』(2002), 『전쟁 정당화: 선전, 정치 그리고 현대(Justifying War: Propaganda, Politics and the Modern Age)』(2012, 공저)를 비롯해 프로파간다에 관한 많은 책을 펴냈다. 현재 영국 켄트 대학교 역사학 명예교수이며, 20세기 정치 선전에 정통한 역사학자이다. 최근에는 홀로코스트에 관한 원고를 집필해 왔으며, 대형 출판사 루틀리지(Routledge)에서 펴내는 역사물 Sources in History 시리즈의 편집주간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옮긴이 이종현
1958년에 태어났으며, 한양대학교 영문학과와 언론정보대학원을 졸업했다. 미국 듀크 대학교에서 객원연구원을 지냈고 MBC 교양국 부국장, MBC나눔 대표, 국제에미상(International Emmy Award) 최종심사위원 등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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