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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천만이 볼모가 되어버린 비극 속에서 희극적일 수밖에 없어서 더욱 비극적이고 인간적인 모던청년 이야기
비극이다. 우리 근현대사르 쓴다는 것 자체가 거대한 비극에 맞대면하여 슬픔을 감내하는 일이다. 하지만 비장하고 엄숙한 방식만으론 그 비극 속에서도 징그럽도록 끈질기게 존재했던 삶을 온전히 그려낼 수 없다. 기실 소수의 큰사람을 제외한 평범한 인간들의 삶이란 너덜너덜한 일상을 가까스로 짜깁기한 남루한 누더기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서너 명만 모여도 감시의 눈총을 받을 만큼 철저히 통제되어 개별화한 사회, 그러나 삼천만 중 단 한 사람도 자유로울 수 없었던 식민지 상황을 비장하고 엄숙하지 않게 그릴 방법은 무엇일까? 그리하여 결국 나는 그 비극 속에서 가장 희극적으로 살아가는 인물을 주인공으로 내세우기로 했다. 희극적일 수밖에 없어서 더욱 비극적이고, 인간적인.
- 작가의 말 중에서
삼천만이 볼모가 되어버린 비극 속에서 희극적일 수밖에 없어서
더욱 비극적이고 인간적인 모던 청년 이야기
한일 강제병합 100년, 나라를 빼앗긴 후 권력을 좇을 것이냐 권력에 저항할 것이냐를 놓고 지식인이 고민하던 시절에 평범한 사람들의 삶은 실상 어떠했을까? 식민지 백성이 추구해야 할 목표란 나라를 되찾는 일이어야 한다는 것에 집중해, 다분히 좋거나 재미있는 것을 욕망하는 지극히 개인적인 삶을 애써 외면해 오고 있었던 게 아닐까.
장편소설 미실로 제1회 세계문학상을 수상하며 문학성과 대중성을 두루 인정받은 작가 김별아가 문학 인생 17년의 전기를 삼겠다는 포부로 세상에 내놓는 가미가제 독고다이는 ‘호락호락하지 않은 여자를 좋아하는 내력’을 가진 한 ‘모던뽀이’의 심상찮은 사랑 이야기로, 시대의 큰 흐름 속에서 표류하는 한 인간의 삶을 유머와 위트가 버무려진 문장으로 생생하게 되살려낸다.
올해 2월부터 인터넷 교보문고에 연재를 시작해 3개월 동안 독자들의 주목을 받아온 이 소설은, 작가가 백범 논개 열애에서 실존인물을 소재로 삼고 ‘역사’에 집중했던 것과 차별화하여 역사 속에 분명 존재했던 ‘조선인 가미가제’를 소재로 상상력을 극대화해 ‘시대’를 쓰기 위해 노력한 작품이다. “경박하고 천한 시대에, 돈과 협잡이 판치는 시대에, 망각과 배반이 횡행하는 시대에” 누가 역사를 읽는다고 과거를 이야기하는가 하는 자문에, 작가는 “아프면 아픈 대로, 슬프면 슬픈 대로, 패배와 절망의 기록을 외면하지 말아야 한다”고 하며 지나온 날들을 되새길 것을 제안한다.
이 작품은 1940년대를 전후한 혼란스러운 시기를 배경으로 삼고 있지만, 암울한 현실을 그리기보다는 그 안에서 여전히 계속되고 있는 삶의 구체적인 모습을 담고 있다. 백정의 자식임을 숨기고 신분을 세탁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아버지, 남편의 내력을 뻔히 알면서도 금전적 자유를 위해 결혼을 선택한 ‘신여성’ 어머니, 희멀건 얼굴에 훤칠한 키로 누구보다 센티해 보이는 형, 그리고 열일곱에 이미 유년을 마감한 채 “모든 것이 다 귀찮고 허무하고 재미없는” 청춘이 되어 허랑방탕한 생활을 일삼는 주인공…… 이들이 꾸리는 ‘울트라 모던’한 가정의 위선과 ‘촌스러운 희극’ 무대와도 같은 모순이 냉소와 아이러니로 흥미진진하게 펼쳐진다.
작가는 ‘콩가루 집안’으로 표현되는 한 집안과 인생의 가장 격정적인 스무 살을 지나온 청춘의 이야기를 통해, 누군가에게 민족이나 이데올로기가 목숨이었다면 누군가에
게는 돈이 목숨이었고 누군가에는 사랑이 목숨이기도 했다는 사실, 단순히 이분법의 논리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개별적인 삶, 때론 모멸감을 느끼게 하고 위선과 무개념으로 인해 비난을 초래하는 삶일지라도 그것 역시 우리 삶의 한 모습임을 일깨운다. 추구하는 방향이 제각각이었기에 대의명분에 충실하던 ‘주의자’가 출생의 비밀이라는 아킬레스건이 꺾여 사상을 등지고, 마냥 방황할 것만 같던 주인공이 평소에는 거들떠보지도 않았을 법한 고무신 한 짝에 인생을 송두리째 걸어도 개연성이 확보된다. 각자가 추구하는 목적이 요동치는 가운데, 살아남기 위해 아이러니하게도 삶을 등져야 하는 경우도 있는 것이다.
목숨을 걸고 바닥으로 곤두박칠 치는 주인공처럼 무모한 현실 속에 인생을 고스란히 꼬라박으며 희생을 감내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희극적일 수밖에 없어서 더욱 비극적이고, 인간적”이다. 역사적 사실을 환기시킬 뿐 아니라 생생한 사람들의 이야기, 나아가 아련한 청춘의 기억을 되살리는 이 작품은 ‘헛헛한 삶에서 우리를 살리는 고귀한 가치란 과연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또다른 대답이 될 것이다.
이 책의 내용
전쟁이 말기로 치달으며 식민지의 비극도 끝을 향해가던 1940년 전후, 백정의 피를 씻어보려는 열망에 사로잡혀 재산 축적을 최대가치로 둔 아버지는 족보를 구입하고 진짜 양반가 여자를 배필로 맞아 겉보기에는 완벽한 모던 가정을 꾸린다. 독립운동가의 자손이라는 이력을 가진 어머니는 쇼핑과 자녀교육에 몰두하며 겉보기에는 충분히 화목한 가정을 꾸리기 위해 동분서주한다.
무엇에도 흥미를 둘 수 없어 그저 인생을 소비하는 나 하윤식은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와는 달리 결벽하고 귀족적이고 우아한 형을 숭배했는데, 어쩐 일인지 형을 대하는 어머니의 태도는 냉정하다 못해 증오의 눈빛마저 느껴져 의아해 한다. 어느 날 바우라는 노인이 집으로 찾아와 이해할 수 없는 말들을 늘어놓고 이로 인해 아버지와 어머니는 심하게 다투고 그들의 사이는 냉랭해진다.
한편 철저하게 일본인들의 ‘개’로 부려지는 아버지는 나날이 번창하는 사업으로 기뻐 죽을 지경이다. 그와 대조적으로 어떤 일에도 심드렁해 하는 나는 허랑방탕한 생활로 시간을 죽이는 데 급급하다. 그러던 중 동경에 유학을 갔다던 형이 어느 날 ‘주의자’가 되어 잡혀오고, 나는 수감소로 면회를 갔다가 형을 숨겨줬다는 수수한 여자 현옥을 만나게 되는데...
김별아
1969년 강원도 강릉에서 태어나 연세대 국문과를 졸업했다. 1993년 《실천문학》에 「닫힌 문 밖의 바람소리」를 발표하며 등단했으며, 2005년 장편소설 『미실』로 제1회 세계문학상을 수상했다. 데뷔 초기 사회 변화와 함께 불어닥친 혼란을 개인적 감성으로 써내려간 "내 마음의 포르노그라피" "개인적 체험" 을 발표해 젊은 작가로서의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했고, 이후 소재의 다각화에 몰두한 "축구전쟁으로 호평을 받았다. 30대에 접어들어 우리 역사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면서 "영영이별 영이별" "논개" "백범" "열애" 등을 펴냄으로써 실존인물을 해석하는 새로운 시각을 제시했다. 이외에도 소설집 "꿈의 부족"을 펴냈다. 산문집 "죽도록 사랑해도 괜찮아" "모욕의 매뉴얼을 준비하다" "톨스토이처럼 죽고 싶다" "식구" 등을 통해 소설가이자 한 개인으로서 경험하는 소소한 일상과 그 안에서 배우는 깨달음을 써내려가 잔잔한 감동을 전한 바 있다.